배반의 계절 2002-06-07 18:58:43 ■ 설교자:박 종 화 목사 ■ 설교일:2001년 3월 11일 010311.ram(LOAD:73) 구약의 말씀 - 예레미야 3 : 55∼66 주님, 그 깊디 깊은 구덩이 밑바닥에서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못들은 체 하지 마시고, 건져 주십시오." 하고 울부짖을 때에, 주께서 내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주님, 주께서 내 원한을 풀어 주시고, 내 목숨을 건져 주셨습니다. 주님, 주께서 내가 당한 억울한 일을 보셨으니, 내게 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주께서는 나를 치려는 그들의 적개심과 음모를 아십니다. 주님, 주께서는, 그들이 나를 두고 하는 모든 야유와 음모를 들으셨습니다. 내 원수들이 온종이 나를 헐뜯고 모함합니다. 그들은 앉으나 서나, 늘 나를 비난합니다. 주님, 그들이 저지른 일을 그대로 갚아 주십시오. 그들의 마음을 돌같이 하시고, 저주를 내려 주십시오. 진노로 그들을 뒤쫓아, 주의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서신서의 말씀 - 로마서 7 : 22∼25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 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니므이 법에 복종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아멘. 복음서의 말씀 - 요한복음 : 16 : 20∼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으나, 세상을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근심에 싸여도, 그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여인이 해산할 때에는 근심한다.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 때문에,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와같이, 지금 너희는 슬픔에 싸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를 볼 때에는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요, 그 기쁨을 너희에게서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날에는 너희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 구하여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이것은 너희에게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아멘. --------------------------------------------------------------- 성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잘 믿고 의지할 때는 복된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을 저버렸을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벌을 받았습니다. 바빌론이라는 거대강국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법궤도 탈취당했습니다. 성전이 무너지면, 예루살렘 시가 무너지면, 민족이 무너지고 개인도 무너집니다. 민족의 기반도 인생의 기반도 무너집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서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성은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런 광경을 눈앞에 보면서 탄식의 시를 읊었습니다. 그 절절한 탄식의 시가 [예레미야 애가]입니다. 오늘 읽은 구약의 본문도 그런 애가의 한 구절입니다. "야웨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건져 주십시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혼자 탄식을 합니다. "아 슬프다, 어찌하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하고 성전의 돌들이 나뒹굴고 있는고." 민족의 기반, 개인의 기반, 신앙의 기반이 산산조각 나는 상황입니다. 예레미야가 보는 이 몰락의 이유는 단 하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배반의 결과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난입니다. 배반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의 수난의 역사는 엄청나게 길었습니다. 오늘은 교회 절기 상 예수께서 수난을 받으신 계절입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면서부터 유혹을 받았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 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돌로 떡이 되게 하라,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다치지 않을 것이다, 온 세상을 줄테니 나에게 절만 하라는 이 세 가지 유혹을 예수께서 이겼다고 했습니다. 이 유혹을 뒷면을 보면, 나한테 절하라 그 뜻이 아닙니다. "그대가 믿는 하나님을 등져라."는 것입니다. "나한테 와서 경배하라."는 것은 하나님을 배신한 뒤에나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여러분이 다 아시는 대로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만을 섬겨라. 나는 배반하지 않는다. 십자가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나는 하나님을 배반할 수 없다. 나는 하나님만을 섬기러 이곳에 왔다." 예수가 유혹을 이겼다는 말은 배반하라는 유혹을 물리쳤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배반의 유혹을 물리친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 배반을 당하시지만, 두 가지의 참담한 배반을 당하십니다. 그분은 그 배신의 고통 가운데에서 고난의 길로 가셨습니다. 첫 번째 배반은 내부로부터 왔습니다. 그 배반자는 우리가 잘 아는 가룟 유다라는 제자입니다. 열 둘을 제자로 뽑을 때 예수께서는 배반할 줄 알고 유다를 뽑았을까? 그건 우리가 던지는 상상 속의 질문일 뿐입니다. 엄연한 현실은 열 둘을 뽑았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3년 동안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았습니다. 추호라도 그를 의심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너무나 신뢰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재정의 책임을 맡겼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예수께서 얼마나 엄청난 분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눈앞에서 보았습니다. 배고파서 허덕이는 수많은 민중들을 기적을 통해서 먹이시는 것을 보고, 이분이야말로 내가 평생을 따라도 부족할 것이 없다고 믿고 따랐습니다. 병자를 고치시는 기적을 보고 예수야말로 하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위를 걷는 기적을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물위를 걷고 병자를 고치고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이는 것을 보면서 백성의 주목을 끌 수 있는 위대한 집중력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정치적 영향력도 충분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이런 유다의 기대가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다 모아놓고 마지막 만찬을 베풉니다. 최후의 만찬입니다. 가롯 유다가 빵에 손을 대는 순간 하시는 예수의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나를 배반할 자가 있다." 빵에 손을 대는 순간, 배반할 자가 있다니! 기도하는 그 순간에 배반한 것이 아닙니다! 오천 명을 먹이시던 기적을 회상하면서 빵을 든 가룟 유다에게 "배반할 사람이 있다."고 하십니다. 빵은 경제적인 힘, 물리적인 힘, 대중을 동원하는 힘, 정치적 힘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빵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능력의 상징입니다. 그 빵에 손을 댈 때, 그 빵 때문에 나를 배반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배반자는, 왜 인생을 살다보면 먼데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다 알지 않습니까? 배반자는 항상 가까운 데 있습니다. 아니, 나와 관계가 먼 사람이 나와 등진다고 해서 그것을 배신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배반, 배신은 문자 그대로 믿음과 의리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믿음과 의리는 가까운 사람에게 주고 또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었던 제자가 배반을 합니다. 그것도 갑자기 합니다. 예수는 잡히실 운명에 처했습니다. 가롯 유다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스승이 힘이 있는 줄 알았는데,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가니, 스승이 힘없이 잡히고 나면 우리 열두 제자는 당연히 붙잡힐 것이다. 우리 열 두 제자뿐 아니라 내 가족 친지들도 연루되어 잡혀갈 것이다. 우리 집은 쑥대밭이 될 것이다. 내 인생은 어떻게 되나. 그는 자신이 당하게 될 앞일을 생각해 보면서 배신하기로 결심했을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선수를 치자! 공적을 세우자! 예수를 팔자! 그래서 은 삼십에 예수를 팔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배반당할 것을 아셨다지만, 제자에게 배반당하는 그 심정, 그 가슴을 우리가 무어라고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배반당한 스승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합니다. 배반한 유다는 어떤 사본에 보면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도 하고, 또 다른 것을 보면 바위에 떨어져서 창자가 터져 나와서 죽었다고도 합니다. 배반한 제자의 종말, 배반당한 스승 예수의 십자가 형벌, 어쩌면 이것은 수난의 양면입니다. 예수께서 가장 뼈아프게 느끼셨을 배반은 제자들의 배반만이 아니었습니다. 틀림없이 더 뼈아프게 느끼셨을 또 다른 배반이 있습니다. 그렇게도 사랑하고 아껴주고 함께 눈물도 흘리고 빵도 나누어주고 병도 고쳐주고 기적도 행하면서 그렇게 감싸안았던 그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런 힘도 없다고 생각했던 군상들, 요즘 말로 민중, 그렇게도 따랐던 그 민중들이 마지막 순간에 예수를 배반합니다. 그들은 배고프던 자들에게 떡을 주던 그 기적을 압니다. 죄인으로 낙인찍혀 한 상에 같이 앉지도 못했던 사람들,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해서 완전히 소외상태에서 살았던 사람들, 세리와 죄인들, 이 사람들을 예수께서는 법과 질서를 어기기까지 하면서 불러모아서 함께하고, 더불어 먹는 식탁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그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품어 주었더니, 마지막 순간, 고난의 길을 가는 골고다 언덕길, 아니 거기에 채 가기도 전 빌라도 법정에서 민중은 여지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소리지릅니다. 선거를 치러보면 안다고들 합니다. 믿었던 사람들이 표 안 찍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배반의 사회, 배반하고 배반당하는 사람들의 심정! 예수께서도 충분히 이 세상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배반이 바로 예수 수난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가 고난을 받고 찔림을 당하고 조롱을 당했다는 것도 수난이지만, 그보다 더 큰 수난은 안으로부터, 밖으로부터, 위로부터 배신당하고 버림받았다는 것입니다. 끝내 십자가에서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것이 수난의 절정입니다. 이런 수난에 예수는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역사학자 중에 아놀드 토인비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의 유명한 논지 중에 "도전과 응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역사는 밖으로부터의 도전과 그 도전에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응전으로 이루어집니다. 도전에 잘 응전하여 이긴 문명은 살고, 도전에 지는 문명은 역사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배반의 충격과 도전에 예수는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십자가도 대응의 한 면, 부활도 대응의 한 면입니다. 제가 이야기 하나 드리겠습니다. 어디서 읽은 이야기입니다만, 일본은 본래 지진이 심해서 지진에 대한 대비가 잘되어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지진은 일본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만, 아마 관동 대지진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일인 것 같습니다. 일본 도쿄에 현재까지도 서있는 제국호텔이라는 호텔이 하나 있는데, 이 호텔을 지은 사람이 미국의 유명한 건축가인 프랭크 라이트(Frank Wright)라고 합니다. 이 사람이 일본의 도쿄 제국 호텔의 설계를 구상할 때, 지반도 약한 곳인데 어떻게 지어야 지진을 견딜 수 있나 고심하였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아침에 거리에 나갔다가, 한 손으로는 자전거를 타고 다른 한 손에는 메밀국수 판 여러 개를 올려놓고 거리를 누비는 메밀국수 배달원을 보고 무릎을 쳤다는 겁니다. "저거다. 견고하게 한 덩어리로 지어놓으면 강한 지진이 날 때 다 부러지고 다 무너지겠지만, 건물을 메밀국수 판을 쌓은 것처럼 짓는다면 지반이 흔들려도 이게 완전히 연결된 게 아니기 때문에 왔다갔다하면서 균형을 이룰 것이 아니냐! 바다에 풍랑이 일 때 그 위에 배를 띄우면 배가 흔들리기는 해도 물에 빠지지는 않지 않느냐! 바로 저거다."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건축의 전문적인 내용은 모릅니다. 어쨌든 이 사람의 경우를 보면 지진이라 하는 거대한 자연의 도전이 올 때, 그것에 직선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전을 온 몸으로 흡수함으로써, 지진에 따라 흔들리면서도 기본 틀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응전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것을 건축에 어떻게 반영했는지 자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제국호텔을 그런 식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관동 대지진이 생겼을 때, 모든 건물이 다 무너졌지만 이 도쿄제국호텔은 유리창 다섯 개 깨진 것으로 끝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건축에서 배우는 지혜입니다. 배반이라 이름하는 기습적인 엄청난 공격을 우리는 어떻게 견뎌야 합니까? 강고하게 저항하여 그냥 그 앞에서 부러지는 방법도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모든 저항을 흡수 소화하여 일부 흔들림이 있다 하더라도 끝내는 비전을 향해서 꿋꿋이 가는 방법, 흔들리지만 그래도 가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 하나를 향한 안팎과 아래위의 격심한 도전을 그리스도의 마음, 구세주의 마음으로 흡수하여 십자가로 갔습니다. 민중의 도전을, 민중의 배반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분쇄하기보다 오히려 쓰라린 가슴에 안고 십자가로 갔습니다. 저항이냐가 흡수냐가 그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걸 통해서 십자가에는 달려야 했고, 십자가에 달려서 구원의 길을 열어야 했습니다. 부활은 그 다음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부활, 그 미래의 희망을 향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서 모든 배신과 도전을 품었습니다. 품어 안는 지도력, 끌어안는 수난을 통하여 자기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저는 도쿄제국호텔의 건축 이야기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잘 설명해주는 한 예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남북문제가 지금 엄청난 시련에 봉착한 것 같습니다. 러시아와 정상회담을 통해ABM을 보전하고 강화하자고 합의한 것 때문에 아마 미국에서는 한반도에 대한 배신감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니까, 차라리 ABM 관련 협상을 정상회담 문구에 넣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는 대통령의 발언이 나오고, 그러자 곧바로 러시아에서는 정상회담의 공동성명까지 발표해 놓고 이제 와서 다른 소리냐며 배신감을 드러냅니다. 외교 한 번 잘못해서 양쪽에 모두 배신감을 준 꼴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우리 겨레는 다시 일어서야 되겠는데, 주변 상황이 여의치 않습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한반도 문제를 둘러싸고 열강들이 세력을 겨룰 때, 우리 겨레는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결국 그 도전들을 이기지 못해서 이 땅은 식민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 식민지 직전의 시대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주변 열강들의 각축이 간단치 않습니다. 한반도 문제를 남과 북이 합의해서 자주적으로 해결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미국도, 러시아도, 중국도, 일본도 자기 문제가 아닌 우리 한반도 문제를 이해관계를 떠나서, 우리와 똑같은 심정으로 해결해 줄 리는 만무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가 되어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됩니다.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주변 열강의 충격과 도전에 응전해야 합니까? 부러지더라도 그냥 맞서야 합니까? 아니면 그 충격을 흡수하는 가운데 우리의 길을 가야 합니까? 쉽게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저는 현재의 여건에서는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충격을 흡수하면서도 제 길을 가는 지혜를 발휘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흡수한다는 말은 굴복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흡수하면서 자주적 재생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구적, 감성적 분노는 길이 아닙니다. 허구적 반대의 길도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남과 북의 공생 번영을 위해, 화합 가운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지혜와 의지를 모아서 우리가 갈 길을 정할 결단의 시점에 온 것 같습니다. 단, 우린 하나님의 정의에 배반하는 길은 가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남과 북의 위정자들이 남과 북의 국민들을 배반하는 길로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분단과 수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한테 평화와 통일이라는 새로운 부활의 길을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수난을 이길 수 있는 민족의 지혜, 이 지혜를 오늘 우리는 건축의 지혜를 통해서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의 배반만이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실존 속에서도 배반의 역사가 있습니다. 오늘의 서신서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심정을 보십시오! "그는 예수를 만나고서 사울에서 바울로 변했습니다. "내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만, 내 겉사람은 자꾸 하나님의 법을 반역하려고 합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성서 말씀에 보면 바울의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오죽하면 이런 하소연을 합니까? 개역 성서는 훨씬 더 강렬한 맛이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사도 바울은 깊이 깨달았습니다. 배반자는 가룟 유다가 아니었습니다. 배반자는 민중이 아니었습니다. 배반자는 자기 이익만 챙기는 열강이 아니었습니다. 배반자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내 속에 있는 또다른 내가 하나님의 법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려고 합니다. 나는 지금 나 자신과의 엄청난 투쟁을 겪고 있습니다. "나"라 이름하신 배신자를 언제까지 참으렵니까? 내 속에 고요히 침잠하면, 내 속에 있는 속사람이 들려주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 소리는 소리가 아닌 소리, 들리지 않는 소리, 그러나 느낄 수 있는 소리입니다. 볼 수 없으나 알 수 있는 것, 시력이 없는 시력입니다. 힘이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 힘없는 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힘입니다. 약함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시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역설입니다. 소리 없는 소리, 힘이 없는 힘, 시력이 없는 시력을 체득하십시오. 그리고 그 힘과 시력과 소리를 가지고 새롭게 인생을 설계하십시다. 이 수난절에 물어야 합니다. 나라든 개인이든 우리가 이 수난절에 어떻게 수난을 이기고 부활의 길로 갈 수 있습니까? 오늘의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한 가지 약속을 주십니다. "여인이 해산할 때는 근심을 합니다. 극심한 고통의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생명이 태어났다는 기쁨 때문에 그 고통을 잊어버립니다." 그 말씀에 이어 복된 말씀을 주십니다. "진정으로, 진정으로 내가 말합니다. 여러분이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습니다. 구하십시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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