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를 푸는 열쇠, 하나님과 사랑 <데니스 레인> 2002-09-04 11:17:10 창세기는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아주 기본적인 진리이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줄 것입니다. 창세기 전체를 살펴보면 1장부터 11장까지는 이 세상의 나라에 대해 말하고 그 이후는 믿음의 사람과 그의 자녀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모든 인류를 향해 말하지만 12장부터는 모든 나라를 제쳐두고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만 언급합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창세기 전체를 푸는 열쇠가 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서 두가지 내용을 볼 수 있는데 1장에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에 대한 말씀을 찾을 수 있읍니다. 사실 하나님과 사람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말씀의 주제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증명하는 책은 아닙니다. 성경은 그냥 하나님이 거기에 계셨다고 말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다고 말하던지 태초에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다른 대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믿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모든일들이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우연이라고 말한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분은 그곳에 계십니다. 우리 세대의 가장 위험스러운 요소는 인간중심의 세대라는 점입니다. 사회에서도 교회에서도 모든 일을 인간 중심으로 풀어 보려고 애씁니다. 심지어 신학의 출발을 사람에서 찾기도 하고 인간의 문제로부터 그 체계를 쌓으려 합니다. 이것은 인류학이지 신학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도 창세기를 공부할 때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해 봅시다.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1장에서 우리는 몇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창조주라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장에는 결코 하나님이 이세상을 어떻게 만들었느냐는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이 곳에서는 누가 이 세계를 만들었으며 왜 하나님 이 이 세상을 만드셨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창조한다는 말이 3번 나옵니다.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했읍니다. 21절에는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세번째 창조한다는 말은 27절에 나오는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했습니다. 그 나머지 장에서는 창조한다는 말 대신 그대로 될 지어다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과 정을 쓰셨는지 모르나 생명을 창조하셨고 사람을 창조하셨으며 그 외에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이 부분을 읽어 보면 창세기 1장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람이 만들어낸 세상의 다른 종교들은 2절에 나오는 혼돈과 흑암에서 시작합니다. 그곳에는 혼란과 문제와 괴로움이 있을 뿐입니다. 세상 종교들이 그러한 바탕에서 출발하여 점점 문제를 향해 접근하는데 반하여 성경은 질문하기도 전에 해답을 제시합니다. 성경은 태초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정말 겸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너무 작습니다. 우리는 너무 짧은 인생을 살며 수많은 사람중에 속해 있는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우린 이 조그만 우주 속에 살고 있는데 그 우주 밖은 또 엄청나게 큽니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해 보면 우린 정말 겸손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는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2절에 창조이전 이 세상에는 혼돈과 흑암이 있었지 만 그곳에는 하나님의 신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희망의 표시입니다. 새가 날개 치듯이 이 땅위에 움직이는 하나님의 영이 세상에 의미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모양을 갖기 시작했으며 분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질서의 세계에서 살게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이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은 조용하게 멈추어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은 창조적이고 활동적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이며 우리와 대화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고 죽음의 세상에 생명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는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서로 의논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나타나기도 전에 이미 의논하고 대화하셨습니다.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 속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이 서로 대화하면서 사랑으로 된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의 이렇게 서로 대화하는 아름다운 모습은 우리들의 삶에 놀라운 의미를 줍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인생에 의미가 없다고 말하면서 환각제를 먹거나 성적 유혹에 빠져 자신을 망쳐버리기도 하고 심지어 자살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풍요롭게 하십니다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환경을 만들어 주시고 풍요로움도 주셨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차이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똑같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것이 나무로 만들어 져서 유리도 없고 벽돌도 없다면 얼마나 단조롭겠읍니까. 세상에 온통 풀뿐이어서 곡식도 없고 나무도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르게 만드셨읍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이 분리해 놓으신 것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물과 뭍을 나누시고 대기와 땅의 물을 나누셨습니다.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피조물들을 만드셨지 만하나 하나를 모두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모두가 다르지만 또 모두가 풍성하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생명과 아울러 생명의 리듬을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14절에서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나뉘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만약 이러한 구분이 없었더라면 피곤할 때 편안히 잘 수도 없고 월요일만 계속되어 일을 멈출 수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불편할까요 그러나 실제로는 월요일은 화요일과 다르고 봄은 여름과 다릅니다. 우리는 매시간을 살면서 동시에 오는 시간을 바라보며 삽니다. 아직 최선의 것은 오지 않았다고 기대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똑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지만 동시에 다르게 되어 야 한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리듬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2장 2.3절에서 안식일을 축복하시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신 것도 이런 리듬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게서 일주일 중에 하루를 쉬라고 하셨기 때문에 목사님들이 일주일 내내 일하는 것이나 성도들이 그렇게 해주길 기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놀라운 우주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또 풍부한 식물을 주셔서 모든 사람이 먹도록 하셨습니다. 이 땅위에 사는 온 세상 사람들이 먹고 남을만큼 풍요로운 식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따라서 기근이 오는 것은 하나의 잘못이 아닙니다. 기근은 우리가 실수하여 땅을 잘못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숲을 모두 잘라 버려서 한발이 오고 토양이 유실되는 것입니다. 만약 단 한번 만이라도 추수를 못하게 되면 우리는 전부 죽게 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부하게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바로 그분이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이제 창세기 2장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에 대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어떤 이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내용이 서로 모순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건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모순된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인 관계입니다. 이것은 신문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령 한가지 사건을 두 신문이 동시에 다루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두 기사가 똑같겠습니까 이 신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저 신문에서 저렇게 말한다면 이 두 가지가 서로 모순 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서로 모순된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인 것입니다. 각 신문은 다른 시각으로 사건을 관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과 모든 창조물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고 창세기 2장은 인간을 중심으로 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상황안에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미미한 인간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누구입니까 먼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때 서로 의논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창조물에 대해 서로 생각해 보자. 우리 모양을 따라 한번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동물보다 좀 나은 머리를 가지고 있고 더 지혜롭기 때문에 사람이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만들어졌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중요한 사람입니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옆의 사람과 대화하고 사귈때 조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만드실 때 그렇게 조심스럽게 관심을 가지고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다룰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도 그분의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에 그 형상이 버려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떤 목표를 가지고 만드셨으며 우리와 사귀기 위하여 만드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말은 여러 번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대부분 예수님에 대하여 말할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이상적인 사람을 만나길 원한다면, 진정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 사람을 보길 원한다면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분이야말로 하나님과 동행하신 분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분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일을 했던 분도 그분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피조물의 관리자 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두가지 일을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땅을 충만하게 하라와 땅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땅을 충만케 하라는 명령은 잘 지켰지만 땅을 잘 다스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땅을 황폐화시키고 대기를 오염시키는가 하면 바다를 더럽혀서 이제는 바로잡을 길이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를 위하여 나의 말을 따르라고 말씀하시고 네가 다스리고 관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에게 일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타락하기 전에는 일은 수고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한다는 것은 인간의 한 부분이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얼마나 큰 부분인지요. 일한다는 것은 우리 삶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찬들은 해고당한 사람들을 위 해 싸워야 합니다. 일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일자리를 놓치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일이 없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성을 어떻게 즐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일가운데서 어떻게 즐기며 살 수 있을까요 창세기 2장 15절을 살펴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우리는 이 사실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맡아 가진 것을 모두 써버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여기 있어 하나님이 만든 이 세상을 보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책임을 받아들여야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하는 진실한 크리스찬이라면 이 환경을 보호해야만합니다. 다른 이의 어려운 짐을 가볍게 해주고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명령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뜻대로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도덕적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가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2장 16절과 17절을 살펴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 말씀이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은 너는 자유하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자유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지적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해도 되는 일도 있고 해서는 안되는 일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뭏든 이 말씀의 가장 중요한 강조점은 자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전적인 자유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요즈음 세상을 돌아보면 사람들은 전적인 자유를 원하고 있습니다. 음란한 짓이든 동성애든 마음대로 할 수 있기를 원하고 일체의 제한을 거부합니다. 이런 것은 분명 자유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자신의 노예로 사는 것이지 절대 자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셔서 우리가 인생을 완성할 수 있게 하셨고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도록 길 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으로 자기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기꺼이 그 말씀에 순종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선악을 알게 되면 사람 자신이 선택해야 하고 하나님은 아무 필요가 없어집니다. 하나님 없이 제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은 큰 유혹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것 하나를 선택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감내하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고난이 잔을 먹기를 원하셨고 예수님은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계셨지만 자신의 뜻을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구하셨습이다. 그분은 순종하는 법을 배우셨으며 참 자유를 택한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한 사람이라면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도덕적인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하든지 불순종하든지 선택하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기쁨을 찾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2장 18절을 봅시다. 여호와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남자 혼자서 사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외롭다는 것은 살아가는데 큰 괴로움이 됩니다. 서울이 사람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가운데에도 많은 외로운 사람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상한 사람도 많습니다. 겉으로는 서로 인사도 나누고 웃으면서 지내지만 마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도 나처럼 외롭지는 않을꺼야. 세 상에는 이렇게 많은 외로운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 대 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동물을 모두 만드신 후에 아담에게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하지만 그 동물가운데는 아담과 함께 살만한 좋은 존재는 없었습니다. 동물도 우리와 관계를 가질 수 있지만 그 관계는 만족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랑하도록 만들어 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남자는 사랑을 주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 두 부류로 만드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둘 다 사람이며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만들어 졌습니다. 이렇게 동등하지만 동시에 좀 다릅니다. 다르다는 것은 육체적인 차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은 창세기 2장 23절에서 이는 내 살중의 살이요, 뼈중의 뼈라는 고백을 합니다. 뼈와 살, 이것은 아담과 똑같은 존재라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와를 남자라고 부르지 않고 여자라고 했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먼저 남자를 만드시고 그에게 모든 것을 이끌어 나가는 주도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 에게 상응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는 남자는 그 부모를 떠나서 여자와 연합되어야 하며 그 둘 이 한몸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질서 입니다. 따라서 결혼전의 성적관계는 옳지 않습니다. 둘이 부모를 떠나서 하나가 되기 전에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둘이 하나가 되는 관계가 먼저 형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생동안 우리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향한 서로의 맡김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맡기는 관계속에 놀라운 기쁨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방법입니까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단지 결혼뿐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우리는 결혼을 통해서 풍요로움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가장 귀하게 존중되어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1, 2장을 통하여 여러가지 사실들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공급자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입니다. 그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그와 사귀며 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분의 일을하고 그분에게 순종하도록 만들어졌으며 서로 사귀며 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게되면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실직에 대한, 외로움에 대한, 깨어진 관계와 오염된 환경에 대한 해답도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졌습니다. --------------------------- 창세기 1장과 2장의 세계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사는 이세상에는 부정, 가난, 기근, 병, 부정직함, 깨어진 관계와 전쟁 투성이 입니다. 창세기 1, 2장의 세계에는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곳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 3장은 그 답을 제시합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죄입니다 우리는 먼저 죄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죄악된 본성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이 죄의 본성이란 개념은 기독교에서만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만 하더라도 원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인간은 선하다는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을 만나서 당신은 죄인입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깜짝 놀랄 것입니다. 나를 죄인이라고 말하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라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미 마음 속에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교만해서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뿐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있어서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었을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 고 말합니다. 따라서 악(惡)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 가운데서는 정상적인 현실이 아닙니다. 죄는 원래 하나님의 세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곳으로 침투해 들어온 것입니다. 죄의 본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없는 삶, 거룩하지 않은 삶 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우리 삶에서 내쫓는 일, 자기 뜻대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고 최선의 것을 준비해 놓으셨음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뢰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들이 취해야 할 가장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스스로 선택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네가 그렇게하는 순간 너는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름대로 선과 악을 가름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꾸려갈 수 있다 는 생각,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사람이 병에 걸리면 그에 따른 증상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증상은 병 자체가 아닙니다. 병을 치료하려면 병원 (病原)을 찾아서 약을 먹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인생의 병의 원인은 하나님 없이 사는 불 경건한 삶이라고 이 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다니 (롬1:18) 다른 소리를 듣는데서 시작합니다 이제 죄가 들어오는 입구가 어디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창세기 3장 1절에는 뱀이 여자에게 와서 속삭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그렇게 말씀하시더냐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너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사탄은 지금도 우리 인생을 찾아와서 우리에게 의심하도록 속삭이고 있습니다. 사탄의 말을 들은 사람은 하나님 의 정직함과 선하심을 의심하게 되고 그분의 심판과 의도를 의심하게 됩니다. 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다른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일단 사람이 사탄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이제 노골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거짓말합니다. 3장 5절에 뱀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오늘날 사탄은 같은 방법으로 우리 귀에 의심을 불어넣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널 사랑하지 않아. 평생 종으로 살기를 원할 뿐이지. 하나님의 길은 너무 좁아.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추호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았단 말이야. 하나님은 너무 제한적이거든. 죄의 속성은 불순종입니다 창세기 3장 6절을 통해서 하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봅시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엄음직도하고 보암직도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도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실과를 따먹고 이 구절을 보면 하와는 자기의 감정을 좇아서 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일이었지만 그녀의 감정은 너무나 강해서 저항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우리의 감정을 거스르며 산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하와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죄는결과에 대해 생각 하는 것을 거절합니다. 그래서 죄의 결과는 불순종 이 되는 것입니다. 한편 아담은 하와의 경우와는 좀 다릅니다. 하와는 속임을 당했지만 아담은 속임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공식적으로 많은 사람 앞에서 실패를 당한 것입니다. 하와가 열매를 가져왔을 때 아담은 안돼 라고 말해야 했다. 결국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뿐만 아니라 여자를 다루는 일에서도 실패한 것입니다. 의심을 통해서 이 세상에 들어온 죄, 사탄의 거짓말과 거짓 약속에 귀를 귀울여서 범하게된 죄, 그 죄의 속성은 바로 불순종입니다. 죄는 분리를 가져옵니다 성경은 죄의 결과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첫번째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입니다. 열매를 먹은 사람들은 눈이 밝아졌습니다. 벌거벗은 것을 깨닫게되고 치마를 만들어 입기 시작했습니다. 숨기고 도망가게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스스로 덮을 것을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죄의 결과입니다. 두번째 결과는 자기 자신과의 분리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 부끄러워하게 되었고 서로 이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떠넘기려고 했습니다. 그때 이래로 인간의 모습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죄의 영향인 것입니다. 결혼의 아름다운 관계는 끊어지고 여인은 남자를 사모하게 되고 남자는 그 여자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죄로 인해서 모든 환경과의 분리 가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기 시작 했습니다. 일은 이제 기쁨이 아니라 아주 지겨운 일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죄는 우리에게 생명과의 분리를 가져왔습니다. 죽음이 인간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22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인간이 범죄했을 때 아직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이 영원히 산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추방하게 됩니다. 이 사실은 매우 좋지 못한 소식입니다만 그 속에 놀라운 복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죄에 대한 답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결책은 그리스도뿐입니다 3장을 통해서 우리가 제일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은 회개하라고 초청하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 음성은 3가지 질문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질문은 네가 어디 있느냐 (9절)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자기 죄를 인정할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두렵다고 말할 뿐입니다. 두려움은 죄의 증상입니다. 이 증상을 인정할 때 근본적인 병의 치료는 시작됩니다. 두번째 질문은 무슨 일을 했느냐 (11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을 했느냐, 죄책감은 느끼느냐는 질문입니다. 아담은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죄를 고백하기 보다는 하와를 비난했을 뿐입니다. 13절에 세번째 질문이 나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고 하와에게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를 고백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입니다. 아쉽게도 하와는 자기 탓이 아니라고 변명합니다.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서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3장 15절에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방법을 보여 주십니다. 그 말씀의 내용은 사탄의 자손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가 될 것이며 그 여자의 후손이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하고 그 과정에서 발꿈치를 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 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여자는 마리아입니다. 그 아이는 예수님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서 사탄을 이기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문제의 해답은 바로 이 그리스도입니다. 회개하고 그분을 믿어야합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입혀 주신 점입니다. 우리의 죄를 덮어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의 죽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만들었던 나뭇잎 옷이 좋은 것이 못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자신을 위해 의를 행해도 우리 죄를 가리지 못합니다. 히브리어로 덮어 주는 물건은 구속 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섹스와 폭력, 부패의 상징입니다 이제 4장과 5장으로 넘어갑니다. 이 부분에는 첫가정에서 첫번째 살인 사건이 일어났음을 보여 줍니다. 가인의 삶 을 통해서 인생이 점점 악해져 감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가인의 후손들 가운데서 음악을 연주하고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비록 하나님의 형상이 더럽혀지긴 했지만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창조하고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은 오래 산 사람들을 나열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를 말하지만 결국 그들이 죽었음을 보여줍니다. 단 하나님과 통했던 에녹만이 죽음을 보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6장은 4가지 기본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죄의 결과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에 대하여 대처하는 방법은 심판과 은혜, 이 두가지 입니다. 6장 11절에는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을 때 부패와 폭력이 사회 속에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성적 문란 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 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를 말합니까 첫번째 가능성은 천사, 타락한 천사입니다.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하나님을 잘 믿는 신실한 자녀일 가능성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계보와 셋의 계보를 구별해서 서로 연결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크리스챤들이 결혼 상대를 찾을 때 감정, 사회적인 신분 상승, 아름다움 등에만 기준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부패한 사회의 두번째 특징은 4절에 나옵니다. 당시의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 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네피림이 누구입니까 히브리어에서 이 말은 남을 넘어뜨리는 일과 관련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 을 죄에 빠지게 영향을 주는 사람입니다. 네피림은 체구가 크고 교만하며 공격적이었습니다. 이들은 폭력을 대표합니다. 성적인 문란과 폭력은 어떤 사회든 파괴할 수 있는 요소가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는 표현일 뿐 본 질이 아닙니다. 본질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타락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죄를 해결해야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사회를 건전하게 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의 놀라운 신앙 고백을 유지함으로 가능합니다. 크리스챤들이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면 사회가 부패하는 것은 자명한일입니다. 이 세상의 타락을 한탄하기 전에 교회의 잘못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심판은 분명히 옵니다 노아와 홍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를 살펴보겠습니다. 13을 봅시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타락한 사회는 분명히 심판을 받는다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배경이 되는 부분입니다. 심판에 대한 몇가지 교훈을 노아의 경우에서 찾아봅시다. 첫째, 심판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세월은 얼마나 빠릅니까. 우리가 먼 훗날이라고 생각하는 그날은 오늘 저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둘째, 심판은 모든 피조물에 해당된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동물들이 사람보다 빨리 그 때를 감지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홍수 직전에도 노아가 호랑이며 코끼리를 잡으러 다닌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방주로 나아 왔습니다. 노아 시대에 물심판이 있었던 것처럼 분명히 불에 의한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심판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버튼만 누르면 전 세계가 불바다가 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한 손에 심판, 다른 손엔 은혜가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봅시다. 성경에서 처음 은혜라는 말을 쓰고 있는 곳이 바로 6장 8절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은 바로 노아였습니다. 수많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 여러분과 제가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혜택입니까 또 한가지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7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더라. 하나님께서 노아를 방주 속에 넣고 닫아 주셨습니다. 문을 봉인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구원받았음을 확신하십니까 변변치 못한 나, 모자라는 내가 어떻게 구원받을까 두려워하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십니다. 은혜로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이처럼 은혜는 우리의 구원을 안전하게 만 듭니다. 노아는 방주 속에 반년동안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채 하루 하루가 지나갑니다. 노아에게도 버림 받은 듯한 느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정을 조용히 변화시키셨습니다. 우리가 몹시 외로운 상황에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신 것같은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조용하게 그 상황을 변화시키고 계실 뿐입니다. 그분은 아무 말씀도 않으시지만 차츰 차츰 변화를 가져오십니다. 히브리어에서 바람이란 말이 영 이란 말 과 똑같은 것도 이런 개념에 근거합니다. 언제 하나님의 영이 움직이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을 믿어야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노아를 새로운 삶으로 초청하십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서 새로운 시작합니다. 노아를 초청해서 다시 번성하고 성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한 손에 무서운 심판이 모습이 있지만 한 손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모습이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에 들어가라고 하시자 그는 들어 갔습니다. 이것이 순종이고 믿음입니다. 세상이 심판받기 전에 노아는 이미 세상에 대해서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조롱했을 것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과 분리된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가지 노아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노아는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노아는 그 심판을 피해간 것이 아닙니다. 노아는 그 심판을 통과한 것입니다. 비는 노아 위로 쏟아졌고 홍수가 노아의 밑으로부터 올라왔습니다. 그를 구원한 것은 방주였습니다. 크리스챤들은 심판을 피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을 통해서 가는 것이 크리스챤입니다. 우리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우리는 그 심판을 참아야합니다. 우리는 그 심판을 이미 다 받았다는 점이 특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나의 모든 심판을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실 때 그 속에서 나도 죽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음에서 옮겼고 심판에 이르지 않겠다 고 말씀하십니다. 이 심판은 이미 지나간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심판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이 노아의 홍수를 우리가 세례받는 모습에 빗대어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물 속으로 들어갑니다. 물이 우리 위로 넘칩니다. 우리는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물 속에 오래 있지 않습니다. 물 속에서 나올 때 우리는 이제 다른 생명인 것입니다. 죽음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노아는 하나님 앞에 경배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8장 18절에 노아와 그 가족, 모든 짐승들이 밖으로 나왔고 20절 에 노아가 제단을 쌓는 모습이 나옵니다. 깨끗한 짐승을 취해 변제를 드렸습니다. 짐승을 완전히 태워서 번제로 드렸으니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는 거룩함을 뜻합니다. 로마서 12장에서 사도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바로 너희 자신을 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구원하셨다. 하나님께서 너를 모든 심판에서 구원하셨다. 죽음은 이제 지나갔다. 이제 너희 몸을 하나님께 드려라. 이것이 가장 신령한, 합당한 예배이다 라고 역설합니다. 여러분도 이런 삶을 마음속에 갖고 계십니까 우리의 응답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볼 세 장의 성경은 모두 심판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 어두운 그림들 뿐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죄에 대한 본성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막지 아니하면 섹스와 폭력으로 인해서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심판이 오고 있음을 경고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들어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안에 감추인 새 생명을 찾으라고 권고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너를 들여 보내고 문을 닫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너를 다스려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분은 노아를 잊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조용히 우리를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에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에 응답해야합니다. 우리는 감사하고 경배함으로 하 나님의 음성에 응답해야 합니다. 이 놀라운 복음을 우리는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약속하신 대로 그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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