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2002-10-15 14:36:06

요한복음 6:14-21절 // 02/10/06

지난 월드컵때 우리 선수들이 이룩한 월드컵 4강은 말 그대로 '신화'에 속하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누가 봐도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처음에 세운 목표는 월드컵 본선에서 1승을 거두는 것과 16강 진출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5차례나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지만 단 1승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온 국민이 16강 진출을 염원하며 거리응원에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우승후보인 포르투칼을 꺾으면서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하더니 16강전에서는 또 다른 우승후보인 이탈리아를 물리치고, 8강에서는 스페인을 물리치더니 4강까지 진출을 했습니다.

4강진출이 확정되던 날, 모든 국민은 내친김에 결승까지 가자고 외쳤지만 아무래도 우리팀이 결승까지 간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욕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뭏튼 4강까지 오른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아무도 우리나라가 4강에 진출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도박사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아무리 한국이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한국의 16강 진출은 낙관하기 어렵다"라고 잘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6강도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을 뒤집고 4강까지 진출을 했으니 기적과 같은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3-4위전을 치루던 그날, 관중석에서는 'K-리그에서 다시 만나자'는 글귀로 가득 메워져 있었습니다. 왜 K-리그에서 만나자고 했습니까? 물론 월드컵을 계기로 침체된 국내 프로축구를 활성화하려는 생각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기적과 같은 월드컵 4강 신화의 감동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때문일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월드컵이 끝난 직후, 수 많은 사람들이 K-리그로 몰렸습니다. 연일 최대 관중수를 경신하며 K-리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월드컵에서 느꼈던 감동을 K-리그로 이어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K-리그를 찾는 사람들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어 다시 과거처럼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심판들의 오심과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 잦은 반칙과 낮은 수준의 경기력 등이 월드컵에서의 감동을 K-리그에서 지속적으로 이어가지 못한 요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들판에서 행하여진 오병이어의 기적을 잊지 못합니다. 그날 있었던 감동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감동을 계속 이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직후 그들은 그 감동을 이어가기 위해 오병이어의 주인공인 예수님께 자신들의 왕이 되어 그 감동을 계속해서 전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본문의 말씀은 오병이어의 기적 그 이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있었던 일은 오병이어의 사건만큼이나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일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본문 14절을 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인 사건은 그 자리에 참석한 자들에게 실로 엄청난 기적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고픈 배를 안고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 이렇게 배불리 먹게 될 줄 꿈에라도 생각을 했겠습니까? 더구나 자신이 그 기적의 현장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흥분되는 일입니까?

예를 들어 지난 목요일에 체육대회를 했는데 이번엔 이미 광고를 한 대로 경품이 정말 푸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품을 받아간 분들은 오신 분들에 비해 지극히 작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때 경품을 받으신 분들은 굉장히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물론 기대감은 있었겠지만 내가 그 경품에 당첨되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어떤 분은 아직 한번도 그런 경품을 받아본 일이 없었는데 자신이 그 경품의 주인공이 될 줄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 계신 분 대부분이 그럴 것입니다. 남들은 복권에 당첨이 되어 상금을 탔다는 얘기도 하고, 심지어 백화점에 가서 경품권 추첨에 당첨이 되어 김치 냉장고도 탔다고 하는데 아마 여러분들 중에 그런 분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아직까지 한번도 그런 일에 당첨되어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않은 장소에서 경품추첨을 해 당첨이 된다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상품을 받아서도 좋지만 그 행사에 내가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은 더더욱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오병이어의 현장에 참여한 사람들은 굉장히 흥분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먹은 떡과 고기는 기적의 떡과 고기입니다. 그런데 흥분이 되지 않겠습니다. 지난주에 갈치낚시에 대해 잠시 말씀을 드렸는데 그 날 아침 돌아오는 길에 도로변에서 타는 무화과 열매를 보았습니다. 사실 이곳에서는 무화과 열매를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데 무화과가 영암의 특산물 중에 하나인지라 도로변에 무화과 열매 파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차를 세우고 집사님 한분이 무화과열매를 샀습니다.

그 열매는 아직 설익어서 단 맛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도 꾸역 꾸역 그 무화과 열매를 먹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무화과니까 의미를 부여하고 먹은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무화과를 먹어봤다고 말하고 싶어서 아직 익지도 않은 무화과를 잘 익으면 굉장히 맛있다라고 서로 위로하면서 무화과열매를 먹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적의 현장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흥분이 될텐데 그들은 기적의 떡과 생선을 먹었습니다. 그 얼마나 흥분되는 일입니까? 그런데 그 흥분은 마침내 자신들에게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끓어오르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자신들이 겪는 모든 고통과 어려움은 궁극적으로 왕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당시 왕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헤롯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중에 어느 누구도 헤롯을 그들의 진정한 왕으로 생각한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헤롯은 유대인의 대변자가 아니라 로마 가이사의 시녀노릇을 하는 앞잡이와 같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한 분은 그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기대해 왔던 그들의 진정한 왕이 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분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이 기대하고 있던 세상에 오실 선지자는 어떤 선지자입니까? 지금 자신들이 겪고 있는 이 고통과 서러움을 일시에 해소해 줄 수 있는 분입니다.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분을 기다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의 배고픔을 해소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면 자신들의 정치적인 목마름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흥분과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이 그랬습니다.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유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줄 진정한 유대의 왕이었습니다.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강점 당했던 시절, 백범 김구선생이 외쳤던 내용이 무엇입니까? "내 소원은 첫 번째도 대한독립이요, 두 번째도 대한독립이요, 세 번째도 대한독립"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처럼 유대인들도 오직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해줄 수 있는 왕이 필요했습니다.

물론 그럴만한 인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한때 마카비 형제가 나타나서 로마와 맞서 싸운 적도 있습니다. 승승장구하면서 로마와 대적할 때 그들은 마카비 형제들이 자신들을 이 압제로부터 건져내어줄 자로 믿고 그들을 따르며 자신들의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을 호령하고 있는 로마와 맞서서 끝까지 싸운다는 것은 역시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 그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줄만한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실망과 좌절속에서 세월을 보내던 중에, 38년동안 꼼짝도 하지 못하고 베데스다 못가에 머물러 있던 병자를 고친 사람이 있다하여 소문을 듣고 그분이 계신 곳을 가보았는데 그곳에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 아니 아이들과 부녀자들까지 합쳐서 만명도 넘는 사람을 일시에 먹이는 기적을 베푼 이 분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분을 자신들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왔던 자신들의 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왕이 되어줄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요구에 대해 주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15절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는 그 제의를 거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신 것일까요? 백성들이 추앙을 해서 한 나라의 왕으로 삼으면 그 일생이 순식간에 바뀌게 될 터인데 왜 주님은 거절을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이 보시는 관점은 유대인들의 관점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 자신들에게 왕이 없는 현실이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왕이 있으면 지금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현실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을 지켜줄 왕만 있으면 정치적으로 로마의 압제를 받을 이유도 없고 부당하게 세금을 착복 당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는 관점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지금 해결해야 할 문제는 정치적인 독립이 아니라 악한 영들에 대한 독립이었습니다. 즉 죄로 인해 받게될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심판이 그들이 먼저 해결해야 될 과제였습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느낌이나 생각도 없고 오직 지금 자신들이 당면하고 있는 과제에 대해서 해답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배고픈 문제를 해결해 준 분이라면 내친김에 로마의 압제로 인해 부당하게 당하고 있는 모든 억울한 문제에 대해서도 모두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사람들의 욕심이 한도 끝도 없는 것 같습니다. 도무지 한가지 일로 인해 만족하는 법이 별로 없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배고픈 문제만 해결되면 '만사 오케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배고픈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더 큰 문제를 해결 받고 싶었습니다. 물론 한가지 문제를 해결 받았으니 또 다른 문제를 해결 받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가지 더 중요한 문제를 놓아두고 자신들의 관점에 사로잡혀서 해결책을 찾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가장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만 해결되면 춤이라도 덩실덩실 출 수 있을 만큼 기쁜 일이 무엇입니까? 혹시 배고픈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닙니까? 물론 요즘 정말 배가 고픈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배고파하는 것은 상대적인 빈곤에 관한 것이 아닙니까? 예를 들어서 남들처럼 좀 넓은 집에서 살고 싶다든지 아니면 좀더 좋은 환경에서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싶다든지 그런 문제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좀 넓은 집에서 살고 싶은 것이 나쁜 것이냐고 말입니다. 아이들에게 교육적인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고 싶은 것이 잘못되었느냐? 고 말입니다. 물론 아닙니다. 그런 것이 잘못되었다거나 나쁘다는 얘기는 절대로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문제에 착념하여 더 중요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를 놓쳐버린다는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앞에서 언급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채워져도 사람들은 만족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를 해결하고 나면 또 다른 하나를 해결하고 싶은 충동이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세우려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주님은 왜 그 요구를 거절하신 것입니까? 두가지 이유 때문임에 분명합니다. 하나는 그들의 요구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원래 주님이 그들이 요구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거절하시고 혼자 산으로 떠나셨습니다.

참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분명 그들의 육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에 얽매여 있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무엇을 감당해야 할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진로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고 계시지 육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그들이 깨닫지 못하기에 답답한 가슴을 안고 주님은 홀로 산으로 떠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히 말씀드리거니와 주님은 우리들이 만나는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지금 당장 배고파하는데 말씀만 먹으면 살 것이다라고 허무맹랑한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배가 고플 때는 먹어야 합니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왕이 되어서 그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문제는 다릅니다. 그들은 당장 정치적인 해방을 원했지만 주님은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악한 영들에게서 해방되는 것이 급선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에 그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사람에 의해 임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분은 이미 만왕의 왕이시며, 만유의 주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이 왕으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얼마나 사람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습니까? 감히 사람이 어떻게 만왕의 왕 대신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을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 말고하는 권한이 사람들에게 있지 않은데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으려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착각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실 권한이 그분께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분의 자기 마음대로 혹은 자기가 원하는대로 그분을 왕으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때는 그분의 말에 순종하지만 어떤 때는 그분의 말씀을 거절하고 불순종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분을 내 마음대로 왕으로 삼을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이 내 생각 저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그 모든 것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래서 혼자가 되시기 위해 산으로 떠나셨습니다. 그 일로 인해 무리들은 흩어졌고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노를 저어가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진지한 질문을 내 스스로에게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나의 신앙은 어디에 관심을 두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 진리를 붙들고 사는 삶에 있는지 아니면 세상에 속해 있는 것들에 대한 만족에 있는지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아직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불행한 삶을 자초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한 강해집에 여기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있습니다. 집안에서 두 사람이 빚 문제로 인해 싸우고 있습니다. 돈을 빌려준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돈을 받아야겠는데 갚아야 할 사람은 도무지 요지부동입니다. 아니 돈을 떼 먹을 심상입니다. 그래서 '돈을 달라 못 준다' 서로 다투고 있는데 그만 불이 나 버렸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더 급합니까? 돈 받는 것이 급합니까? 아니면 불 난 집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급합니까? 당연히 불난 집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다행히 어떤 사람이 119에 신고를 해서 소방수들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소방수에게 빚을 갚지 않는 사람에게 빚을 갚도록 압력을 가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지금 받지 않으면 못 받을지도 모르니 제발 돈을 받을 수 있게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불 난 집에서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소방수가 해야할 일도 불 속에 있는 두 사람을 구해내는 일입니다. 만약 빚을 갚아라고 요구하면서 그 빚을 못 받을 때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면 결국 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불에 타 죽고 말 것입니다. 빚을 돌려 받는 것은 나중 일입니다.

지금은 불 속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아 빚을 돌려 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로마에게 빼앗긴 모든 것을 보상받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는 관점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이 엄청난 능력을 행하는 사람을 붙잡아서 자신들의 왕으로 삼아 고통받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보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불 속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그 속에서 빚을 독촉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그런 그들의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그렇게 요구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과 체험들이 자신들의 실체를 보며 하나님을 경외하려는 마음으로 모아지지 않고 자신들의 관심과 욕심을 채우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 우리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은혜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 체험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쪽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쪽으로 잘못 구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의 특징은 자기 욕심을 채우지 않는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백하기를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2:7-9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를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의 그 유명한 일화가 있지 않습니까? 전쟁에서 공을 세운 부하에게 알렉산더 대왕이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땅을 달라면 땅을 줄 것이고, 좋은 집을 달라면 좋은 집을 줄 것이고, 많은 노예를 달라면 노예를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부하가 말했습니다. 저는 땅도 필요없고 좋은 집도 필요치 않습니다. 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대왕님이십니다. 대왕께서 언제나 저의 편이 되어주신다면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이 부하가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 지혜를 칭찬하여 그가 원하지 않았던 많은 재물을 주었을 뿐아니라 언제나 그를 아끼고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은혜를 체험한 사람,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예수님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 그런 마음을 상실하고 그저 세상에 속한 것들로 인해 만족하는 삶을 살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요청을 멀리하고 그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배를 띄우게 하셨으면 그 배를 함께 타고 가셔야 할터인데 그 배에 지금 예수님은 없습니다. 본문 16절에서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라고 했습니다.

분명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게 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배에 예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지금 그들은 예수님없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기 시작했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특징은 전혀 예기치 않게 엄청난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친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갈릴리 바다를 건너라고 말씀하셨을 때, 하지만 그들은 별로 고민하지 않고 바다에 배를 띄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는 갈릴리 바다를 잘 알고 있는 어부출신의 제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런 바람은 자신들이 고기를 낚을 때 여러차례 겪었던 바람이기 때문에 아주 능숙능란한 솜씨로 처음엔 노를 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경험과 멋진 솜씨로 노를 저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의도하는 쪽으로 배가 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노를 젓는데 자신들이 의도하는 쪽으로 가지 않습니다. 그때서야 그들이 당황을 합니다. 이러다가는 파도에 휩쓸려 망망대해로 나가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열심히 노를 저어 보았지만 자신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 배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젓고 또 저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지금 그들은 더 이상 노를 저을 수 없을 만큼 기진맥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산 위에 계십니다. 산 위에서 파도치는 바다와 싸우고 있는 제자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기의 힘으로 그 위기를 극복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모든 것이 허사였습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갈릴리 바다에서의 경험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거대한 파도가 자신들을 삼키려 하고 그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없는 곳에서 자신들의 힘과 노력에 의해 인생을 살아가 보려고 얼마나 많은 애를 쓰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늦게 누우며 인생을 설계해 봅니다. 그렇게 노력하면 장밋빛 인생이 보장될 것을 기대하면서 지금까지 쌓아온 인생의 경험을 충분히 살려 열심히 노력해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없이 행하는 행동은 오히려 우리를 더 깊은 수렁으로 몰고 갈 뿐입니다.

열심히 인생의 노를 저어보아도 그 인생의 배가 나아가는 곳은 망망대해입니다. 거친 바람과 파도가 사정없이 때리는 바다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그렇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깨닫지 전까지는 그래도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얼마나 헛된 것입니까?

물론 우리도 인생을 사는 동안 이처럼 거센 파도와 맞서 싸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없이 싸우는 노력은 정말 헛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는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예수 없이 살아도 나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노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평가는 자기 자신의 평가일 뿐입니다. 예수없이 사는 인생은 향방없이 달음질하는 선수와 같습니다. 언젠가 한 마라톤대회에서 일등으로 달린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유인즉 그가 다른 선수들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열심히 달리기는 했는데 정해진 코스로 달리지 않고 엉뚱한 코스로 달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없이 인생의 거센파도를 헤쳐 나가려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예수님없는 싸움은 하나님 없이 칼과 창만 들고 골리앗앞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골리앗은 우리의 창과 칼에 쓰러질 장수가 아닙니다. 그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여호와의 이름뿐입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다윗의 고백은 이것이었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라"(삼상17:45-47절)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 앞에 불어닥친 거대한 파도도 우리의 힘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들이 이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제자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열심히 노를 저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은 허사였습니다. 아마 육신은 지칠대로 지쳤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지금까지 주님은 산 위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셨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들을 어려움에 내 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들 곁에 다가가셨습니다. 19절에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 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들이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두려워한 것일까요? 아마 유령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유령인줄 알았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들을 안심시키십니다. 20절과 21절에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분명 갈릴리 바다로 나가도록 명령하신 분은 예수님이신데 그렇다면 큰바람이 불고 파도가 칠 것을 예수님께서는 전혀 예상을 하지 못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상을 못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바다로 내 몰았다가 지칠대로 지쳐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에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사실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그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후에 오히려 더 큰 곤욕을 치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오병이어의 감동을 이어가고 싶은 것은 유대인 뿐 아니라 제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자신들은 의미없이 기적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제자로서 그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기적에 대한 굉장한 자부심과 아울러 '나는 그 기적을 베푼 주인공의 제자다'라는 교만이 그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함께 하실 때 두려움이 사라지고 인생 앞에 불어오는 거센 파도가 물러가게 됩니다. 신앙은 나 혼자 살아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님이 시키시는대로 행하여도 때로는 성난 인생의 파도가 나를 집어삼킬 듯 다가올 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우리를 찾아와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들을 위로하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을 지탱하는 것은 기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기적을 체험했어도 우리들에게는 더 큰 어려움이 닥칠 수 있습니다. 그때 중요한 것은 주의 말씀을 붙들고 거센 파도와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체험했다고 말하면서도 교회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문제나 신앙생활하면서 부딪치는 문제로 인해 낙심하고 심지어 교회를 떠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주님을 붙들지 않고 기적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붙들지 않고 자신이 신앙안에서 경험한 것들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월드컵에서 느낀 감동을 K-리그에서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 감동 그대로 K-리그에서 얼마든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 그 말씀이 우리를 인생의 거친 파도로부터 두려워 떨고 있는 나의 삶을 견고하게 세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인생의 거친 파도가 몰아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그 말씀으로 승리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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