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앞의 죄인들 2002-10-23 11:15:39 요 8 : 1 - 11 // 2002.10.20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다.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 당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 했던 사건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건은 그리 흔하게 일어났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날도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믿으시겠습니까? 소식에 의하면, 지난 8월 20일 경 나이지리아 북부의 한 회교권 지역 법정은 샤리아(Sharia) 법에 의해 아미나 라왈(Amina Lawal)이라는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선고하였습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이혼 당한 상태에서 사생아를 낳았던 그 여인은 자기에게 청혼했고 11개월 동안 살았던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반면, 그 남자는 자기의 아이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법정은 남자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여자에게 돌에 맞아 죽을 것을 명령했습니다. 물론 여권단체와 많은 시민단체가 이에 대하여 항의했고 그러한 법을 폐지하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만약 한국에서 이러한 법이 실행된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오늘 읽은 성경말씀을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한 편이 되어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 예수님께 왔다고 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마치 종교경찰이 된 것처럼 행동하고 한 여인은 마치 피의자처럼 예수님 앞에 끌고 왔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로운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며 행동하였습니다. 반면에 한 여인은 억울하게 끌려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여인이 끌려오는 장면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마도 그 여인은 끌려오지 않으려 발버둥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도살장 앞에서 더 이상 끌려가지 않으려는 동물과도 같이 소리지르고 버티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겠습니까? 더욱이 그들이 그 여인을 끌고 오는 장소는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은 거룩한 장소로 죄인이 들어올 수 없는 장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여인을 성전 안으로 끌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부터 그들이 그 여인을 끌고 온다는 것 자체가 벌써 문제가 됩니다. 이에 더하여, 성전은 범죄한 사람을 징계하기 위한 장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죄인 된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한 여인을 심판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끌고 들어왔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정말 비정상적이었습니다. 비정상적인 모습은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께 끌고 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궁극적인 목적도 비정상적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라 했습니다. 그 여인은 단지 중간도구로 사용될 뿐입니다. 성전은 시험을 위한 곳이 아닙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는 존재는 마귀가 있었는데,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마귀의 모습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전은 죄도 없는 예수님을 시험하여 죄인으로 만드는 장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죄인이라 할찌라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때 용서를 베풀어야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모습을 오늘날 하나님의 집, 성전, 즉 교회를 찾는 우리들에게도 나타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부정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정하게 만들려는 모습이 없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성전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행동을 그냥 두시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합당한 방법으로 풀어야 할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 그 분으로서 자신의 집 즉 성전에 서 계셨던 예수님은 성전이 성전답게 하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는 요한복음 2장에서 보여주었듯이 하나님의 집을 정결하게 하기 위한 작업이셨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완강하게 혹은 완곡하게 부인하는 자들 모두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인정하게 만드셨습니다. 자신의 죄를 완곡하게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자들에게도 그들의 죄를 깨닫게 만드셨습니다. 바로 그러한 모습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보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정당하지 않았습니다. 울법에 의하면, 레위기 17:20과 신명기 22:22에 의하면 통간한 남녀 모두를 죽이도록 되어 있는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여자 하나만 붙잡아 왔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향하여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부터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어느 누구도 앞장 설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나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적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씩 돌을 땅에 내려 놓고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이는 바로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해 보면, 죄인임을 깨닫게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음을 볼 때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여인만 잡아 옴으로써 자신들 역시 죄를 짓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을 가지고 전체로 보고 죄가 없다고 보는 것은 바로 마귀의 작전입니다. 뱀이 최초의 사람을 유혹할 때도 그러했고 최초 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마다 하나님은 나름대로 정한 징벌을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완강하게 부인한 경우라 한다면, 바로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이 그러합니다. 그 여인은 잡혀 올 때만 해도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왜 나만 잡혀와야 하냐면서 항의도 했을 것입니다. 남자는 놓아 준 것 자체가 처음부터 공평하지 않다고 하면서 억울한 피해자라고 항의했을 것입니다. 정말 타의적으로 죄인이 되어 끌려온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또한 자신의 죄를 부인하던 여인에게도 죄인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향하여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여자여!”라고 부를 때부터 느낌이 다릅니다. 이는 예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 가운데 또한 골고다 십자가에 달려 계신 가운데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를 때 사용하던 호칭이었습니다. 우리 말로 적당하게 번역하기 힘들어 이렇게 번역을 했지, 여자여 라고 번역된 gunai 는 상대방 여성을 존경하는 의미로 부를 때 사용되던 칭호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인격을 존중하며 대해주시고 있습니다. 이 단어 속에 이미 여인에 대한 용서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그녀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용서하시고 격려하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된 자를 용서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중요한 가르침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처벌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데 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이를 깨달을 때 예수님도 그들을 처벌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오히려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이를 받아들이는 자만이 진정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도 예외 없이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됨을 고백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둘째, 오늘 말씀은 사실 간음한 여인보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더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을 잘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성경은 사람들의 죄된 모습을 지적하면서 시작합니다. 그 모습이 에덴동산에서의 타락으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바로 ‘죄와 회개의 문화’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남의 죄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은 바로 ‘수치의 문화’라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연구 가운데 가장 좋은 예를 든다면, 문화유형론자 Ruth Benedict의 「국화와 칼」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일본 사람들의 모순된 민족성을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국화가 상징하듯 평화를 사랑하는 듯하면서도 순식간에 칼을 들이대는 일본인들의 극단적인 이중성을 보여 줍니다. 수치의 문화는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라는 가치판단이 아니라 ‘승리냐 패배냐, 남보기에 창피하냐 아니냐?“하는 가치판단 위에서만 가능한 행동양식입니다. 남보기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남부끄러운 짓을 서슴치 않는 것이 수치의 문화 속에 내재해 있는 모순입니다.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이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여인을 데리고 와서 판단해 줄 것을 요청하는 출발이 진정 죄인이냐 아니냐를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올무에 얽어 넣기 위한 시험이요 수작이었다는 것이지요. 자신들의 종교적 승리냐 아니면 패배냐 하는데 최종적인 관심이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들도 이러한 문화에 젖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기보다는 승리냐 패배냐 아니면 남보기에 창피하냐 창피하지 않느냐는 주관적인 입장에서 살아가곤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라는 식의 전제 속에서 판단을 하고 살아간다면, 이는 예수님에 의해 부끄러움을 당하고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게 될 대상입니다. 셋째,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시험에 있어 홀로 당하셨기에 매우 연약해 보였지만, 실로 힘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혼자의 힘으로 많은 사람들을 이겨내셨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다수의 힘으로써 목적한 바를 이루려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으며 원천적으로 봉쇄키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밀고 나오면 이를 아주 점잖게 그리고 완전하게 물리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한 여인을 두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고소하고 있다 했는데, 이는 벌써 결말이 지어진 듯한 고소였습니다. 한 여성을 많은 남성들이 고소했다는 점은 당시 관습과 풍습 면에서 볼 때 이미 승산이 결정된 싸움이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시도는 단지 한 여인에게 향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에게로 향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단지 중간 매체로 이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이긴다는 것은 중과부적처럼 우리의 눈에 비췹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시험하며 다가오는 많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말씀 한마디로 굴복시키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한마디로 다수를 무리로 보지 않고 한 사람씩 자신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한 무리로 단결되어 한 여인을 고소하고 정죄하며 예수님을 시험하던 그들이 자신 한 사람 한 사람을 되돌아보고 깊이 살펴보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게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한 개인 개인을 따로 따로 보시며 문제를 접근하시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기려 해도 주님은 각 개인을 설복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아니 그러한 주님이 나와 함께 하기에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교회 안에 어떤 사람들이 인간적인 의도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그러한 세력을 파하실 것이기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고린도후서 10:4-6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우리는 성전에서 예수님 앞에 서있는 죄인임을 알고 서로 물러서야 합니다. 우리가 성전의 주인되시는 예수님 앞에 오늘 나와 있습니까? 스스로 죄인임을 깨달을 때 우리에게도 주님은 정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역설적인 은혜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 사이에서 의인과 죄인을 구별하고자 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길이 바로 은혜받는 길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되는 길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죄인들을 통해 의인을 만드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라 했고 우리 가운데 있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주인되시는 분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살아가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 길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영생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모두 그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죄인이 될 때 진정 승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설적인 역사 방법이십니다. 이는 바로 상승의 원칙입니다. 오직 예수님 앞에서의 패배를 인정할 때 예수님을 우리로 하여금 모두 승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을 받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자 합니다. 1970-80년대만 하더라도 상대방을 죽이고 내가 올라서려 하는 냉전의 모습 속에서 살았습니다. 흑백논리적 사고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냉전의 벽을 1989년에 무너뜨리시고 서로 함께 살아가게 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피터 드라카 혹은 스티븐 호비 같은 사람들을 통해 서로 돕고 서로 생존하며 모두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정신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win-win stratagy 즉 상승전략이 모든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 성전에 나온다는 것은 이미 예수님 앞에 순종할 마음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어떤 의도를 가지고 주님 앞에 선다 하더라도 주님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쥐고 있는 돌을 스스로 놓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는 예수님이시오 하나님입니다. 그 분 앞에 겸손히 설 때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귀하게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나도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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