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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3:18/ 고전4:5/ 세 개의 법정 / 한경직 목사
    2014-08-23 06:56:59   read : 1008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는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四․三-四)

    여기 판단이라고 하는 말씀이 세 번 나옵니다. 처음에는『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우리가 다 다른 사람들에게 판단을 받습니다. 그 다음에는』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느니라』내가 나를 판단할 때도 있고 판단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우리가 다 주님께 판단을 받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 종류의 판단을 여기에 말씀하였습니다. 사람에게 받는 판단, 내가 나는 판단하는 판단(그것은 양심의 판단),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시는 판단이올시다.

    우리 나라도 그렇고 세계 문명 각국이 거의 그렇지마는 재판하는 데 흔히 삼심(三審)제도가 있습니다. 지방 법원이 있고 그 위에 고등 법원이 있고 대법원이 있는 것처럼 조금 깊이 생각하면 우리를 판단하는 법정이 셋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법정이올시다. 또 하나는 양심의 법정이올시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법정이올시다. 이 세 가지 간단히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각 사람에게 깨달을 바를 말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이 인간의 법정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십시다. 누구나 이 인간의 법정에서 항상 판단 혹은 심판을 받습니다. 혹은 잘한다, 혹은 못한다. 칭찬 혹은 비난을 받습니다.

    또 누구나 이 법정의 판단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내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가? 내 하는 일이 비난을 받는가?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게 되면 기뻐하고, 비난을 받게 되면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그리해서 보통 우리는 이 인간의 법정에서 좋은 판단을 받기 위해서 힘을 씁니다. 말도 조심하고, 행동도 조심하고, 사람 보는데서 선행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자기 일을 자랑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외식하면서 아첨까지도 하고, 선전까지도 하는 것입니다.
    어느 때보다도 선거가 있을 때 잘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법정에서 받는 이 판단에 대해서 기억할 것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 법정의 판결은, 제가 이미 설명한 세 가지 법정의 판결 가운데서 제일 정확하지 못합니다. 흔히 인간은 외모만 보고 판단하는 까닭입니다. 열 길 물의 깊이는 알 수 있어도, 한 길 사람의 속은 알기 어렵습니다. 그리해서 이 인간의 법정이란 종종 속습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영색으로써 아첨을 하고 자랑하게 되면 좌우간 일시는 속는 수가 종종 있습니다.

    전에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심(叛心)을 속에 품고 인심을 도둑하기 위해서 모든 백성을 만날 때에 아주 겸손히 대하고, 친절하게 하고, 모든 송사를 그저 유익하게 판결해 주고 이렇게 거짓으로 자기를 나타낼 때에 많은 사람들이, 특별히 청년들이 압살롬을 따랐습니다.

    잘하는 줄 알고…. 그러다가 마지막에 반역이 일어났고, 마지막에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하나님의 판단이 내릴 때에 압살롬과 같이 멸망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또 이 인간의 법정은 그 법정 자체가 인간들의 구성이기 때문에 편견과 지방 심과 당파심과 여러 가지 죄악에 빠져서 판단을 그릇 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해서 옛날 헬라 법정에서는 소크라테스 같은 유명하고 귀한 철학자에게 독배를 내리 우는 판단을 한 것입니다. 빌라도의 법정은 살인 강도는 놓아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 자체의 결함이 그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 셋째는 이 인간의 법정은 그저 인간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변합니다. 인심은 조석 변으로, 사람에게 대해서 판단을 할 때에도 어떤 때에는 칭찬하고 어떤 때에는 비난하고 언제 그 마음이 변할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여기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인간의 법정의 판단에 대해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어떤 판단을 받든지 이것은 매우 작은 일입니다. 과히 큰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칭찬을 받아도 과히 기뻐하지 마십시다.

    좋은 판결을 받으려고 과히 신경을 쓸 필요도 없습니다. 나 자신이 오히려 그렇게 하다가는 여러 가지 외식과 위선과 아첨에 빠질 염려가 있습니다.

    또 반면에 이 법정에서 비난을 받는다고 해도 과히 섭섭히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위에 있는 법정에서 우리가 어떤 판결을 받는가 그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법정 판단에서 가급적 독립 생활을 하고 인간의 의견과 비평의 종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 주위에서 오는 여러 가지 좋은 의견은 배울 것이고 다른 사람이 나의 허물을 지적할 때에는 그것을 고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판단이란 작은 일인데 그보다 더 큰 일을 위의 법정에서 어떤 판단을 받는가 하는 것임을 우리가 기억하고 인간의 법정의 판단에 대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위에 있는 법정, 양심의 법정에 대해서 잠깐 생각하십시다. 우리는 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비판을 받습니다. 내가 나에게 판단을 받습니다. 곧 양심이 우리를 판단하여 줍니다. 보통으로 이 법정의 판단은 이미 말한 인간의 법정의 판단보다는 실수가 좀 적습니다.

    그것은 양심은 우리 속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속이지 못합니다. 요한 복음 八장에 나타나는 기록을 우리는 잘 기억합니다.

    예수 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가르치실 때에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자를 바리새인들이 끌고 와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이런 여자는 모세의 법에 의지하면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때에 주님께서는 얼른 대답지 아니하시고 조금 계시다가 조용히 그 사람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은 먼저 돌을 들어 이 여자에게 던지라.』그리고는 다시 머리를 숙이고 조용히 땅을 보면서 무슨 글씨를 쓰고 계셨습니다. 그 동안에 이렇게 아우성을 치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한 사람 두 사람 다 그곳을 떠나고 여자 혼자만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
    무엇일 사람들을 이 성전 뜰에서 쫓아내었습니까? 누가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이들은 단순히 자기 양심에게 판단을 받고 양심의 가책에 못 이겨 그 곳을 떠난 것뿐입니다. 양심의 판단이 있습니다.

    이 양심의 판단은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양심의 법정의 판단에 대해서도 기억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법정의 판단도 항상 정확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양심이 타락되고 왜곡되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남 침은 언제든지 남쪽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마는, 그 옆에 큰 쇠뭉치가 가까이 오게 되면 쇠뭉치 있는 데로 그 바늘이 기울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양심의 바늘도 본래 옳은 것을 지향하게 만들어졌건마는 강한 물질의 욕심이 가까이 오게 될 때에 그 영향을 받아서 양심이 왜곡되는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기에 옛날부터 우리 한국에 내려오는 말 가운데『황금은 흑사심』이란 말이 있습니다. 누런 그이 선비의 마음을 새까맣게 만든다고, 그 마음은 양심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강한 물욕뿐이 아닙니다.

    강한 권세욕, 강한 정욕, 간한 지위욕(地位慾), 강한 명예욕, 어떤 욕망이든지 강하게 부딪칠 때에 이 양심의 바늘이 잘못 가리키고, 심지어 왜곡이 되고, 전도(顚倒)가 될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상을 우리가 주목해 볼 때에 이 사실을 우리는 목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양심이 이렇게 귀하지마는 우리가 양심의 명령을 한 번 거역하고, 두 번 거역하고, 세 번 거역하고, 계속해서 양심의 명령을 여러 번 거역하면 그 다음에 양심이 둔해져서 판단을 내리지 않고, 무슨 말도 하지 아니하고, 잠잠하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화인 맞은 양심이라고 말했습니다. 단단해져서 찬 것이 와도 찬 줄을 모르고 더운 것이 닿아도 더울 줄을 모르게 되는 이런 양심이 되고 맙니다.

    그리해서 옛날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 아마 그들의 양심에는 거리낌이 없이 그 악한 일을 했을 것입니다. 여기 히틀러나 아이히만 같은 사람들이 유대사람 육六백만을 학살할 때에 자기 양심에 가책을 강하게 받았던들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혹은 전도가 되어서 양심의 가책이 없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독재자들이 악한 일을 할 때에, 모든 과격분자들이 악한 일을 할 때에 그들의 양심이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양심의 가책이 없이 불의 한 일을 자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양심의 판단에 대해서도 기억할 것이 한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양심이 언제든지 우리에게 부결의 판결을 내려 이것을 하지 말아라 할 때에는 언제든지 우리가 절대로 순복 해야 됩니다.

    양심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거슬러 하면 아니 됩니다. 언제나 부결의 판단에 있어서는 양심의 판단이 옳습니다. 그러나 양심이 이런 말도 안하고 저런 말도 안하고, 묵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우리가 조심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의 하는 말을 들어보면『내 양심은 괜찮으니 하겠다』고 말합니다. 심히 위험한 말입니다. 그 양심이 화인 맞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양심이 왜곡되고 전도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양심이 가만히 있거나 묵인하는 이와 같은 경우를 당하게 될 때에는 세밀히 살필뿐더러 양심의 판단을 기다리지 말고 한 걸음 올라가서 위의 판단, 주님의 판단을 기다려서 우리가 무슨 일을 작정할 때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주님의 공판정(公判廷)에 대해서 잠깐 생각하십시다. 하나님의 법정이 있습니다. 이 우주의 공의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공판정이 있습니다. 이것은 최고 법정이올시다. 이 법정의 판결은 정확무오(正確無誤)합니다.

    하나님은 겉만 보지 아니하시고 속까지 보시는 까닭입니다.『사람은 외모로 판단하나, 나는 중심을 보노라.』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행동만 보고 판단하나, 하나님께서는 그 동기까지 보시고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조용한 눈이 언제든지 우리를 감시하고 우리를 판단하신다고 하는 것을 우리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의 법정에서 하는 말만 듣고 살다가는 잘못 살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있습니다.

    여러분, 다윗의 이야기를 잘 아십니다. 다윗 왕이 밧세바와 간음을 했습니다. 그 죄를 가리기 위해서 자기에게는 충복이며 밧세바에게는 남편이 되는 우리야를 전장 최전선에 내보내서 억울하게 죽게 만들었습니다.

    살인죄까지 범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니 인간의 법정에서는 아무도 이렇다 저렇다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또 그 다음에도 태연자약하게 그냥 있었던 것을 보니 그 때에 다윗의 양심이 이 점에 있어서 화인을 맞아서 이렇다 저렇다 양심의 강한 가책을 받지 않은 것이 또 사실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어요? 하나님의 사람 나단을 다윗에게 보냈습니다.

    『내가 오늘 대왕에게 하나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 동네에 두 집이 있습니다. 한 집은 큰 부자요 다른 한 집은 대단히 가난한 집이올시다. 이 부자 집에는 소도 많고 약대도 많고 양도 많고 재산도 수없이 많습니다. 이 가난한 집에는 재산이라고는 도무지 없고 어린 양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가난한 사람이 어린 양 하나를 극진히 사랑합니다. 그저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삽니다. 그런데 이 부잣집에 한 번은 손님이 왔습니다. 이 부자가 자기네 많은 재산은 그냥 뒤두고 가난한 사람의 어린 양 하나 있던 것을 빼앗아다가 이 양을 잡아서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습니까?』

    다윗이 노해서『이런 사람이 우리 나라에 있을 수가 있겠는가? 당장 형벌을 해야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 나단이 손으로 다윗을 가리키면서『당신이 그 사람이올시다.』하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판단이요, 이것은 주님의 판단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야 다윗이『제가 과연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을 한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판단을 이 세상에도 내리시고 개인 개인에게도 내리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이 말씀을 통해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판단을 우리에게 내려 주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내 양심이 분명히 가르쳐 주지 않을 때에 성경을 보면,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고, 간음은 간음이라고 하고, 불의는 불의라고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우리가 옳게 살도록 힘을 써야 실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재에만 이렇게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다음에 큰 판단이 있다고 하는 것을, 최후 판단이 있다고 하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제가 이제 요한계시록 二十장 十一절 이하를 읽을 때에 들어만 보세요.『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無論大小)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져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으니 곧 생명 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 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이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누구든지 생명 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이 최후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 날에 가서는 우리가 무슨 굉장히 기록된 것, 무슨 사진 난 것,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비 세워준 것, 이 따위들은 다 쓸데가 없습니다. 마지막 불에 다 타버릴 것입니다.

    인간 법정의 판결은 쓸데가 없습니다. 양심의 법정의 판결 받은 것도 문제가 안 됩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서『착하고 진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큰 일로 맡기리라. 들어와 너를 위하여 준비한 상을 받아라.』 이 말씀을 우리가 듣게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우리의 전적 생활, 사, 언, 행, 생각과 말과 행동에 있어서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교인으로서 또는 국민으로서나, 모든 일을 주의 법정에서 옳은 판결을 받도록 행해야겠습니다.

    우리가 국가에 대하여 국민의 의무를 하는 것도 주의 법정 아래 옳은 판결을 받으리만큼, 우리의 의무를 다해야 되겠습니다. 이번에 선거를 할 때에 투표를 하는 것도 주의 눈앞에서 투표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소흘히 투표를 할 수 없습니다. 태만히 투표를 할 수 없습니다. 기권해서는 절대로 아니 됩니다.

    우리는 각 후보자들의 인격과 사상과 신용의 정도와 학식과 역량과 그들의 과거와 현재의 사상과 생활을 자세히 살펴서 신중히 하나님 앞에서 옳은 판단 아래서 투표를 해야 될 것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감시하시는 것을 깨닫고 온 우주의 공의, 인간의 역사의 공의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공판정에서 옳은 생활을 하도록 우리가 힘써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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