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6:1-10/ 창조적 생활의 비결 / 한경직 목사 2014-08-23 07:06:31 read : 1348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 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六․九-十)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구역; 병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갈 四․十三)
이 말씀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편지한 가운데 한 구절이올시다. 아마 사도 바울이 몸이 약해서 혹은 병이 나서 여행을 할 수 없는 까닭으로 처음에는 갈라디아 지방을 그저 지나가려고 생각했지마는 아마 그 곳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래서 잠깐 머무는 동안에 복음을 전파해서 갈라디아 교회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몸이 연약해서 부득이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그런 때에라도 이와 같은 큰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생활을 보면 어떠한 처지와 환경에서든지 이와 같이 그 처지와 환경 가운데서 적당한 열매를 맺은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 아침에 고린도 후서에서 읽은 바와 같이 그의 생활은 남 보기에는 근심하는 자 같지마는 항상 기뻐하는 생활이요, 남 보기에는 가난한 자 같지마는 많은 사람을 부요 하게 하는 생활이요, 남 보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의 생활을 한 것입니다. 이런 생활을 보통 쉽게 말하면 사도 바울은 어떤 곳에서든지 창조적 생활을 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창조」라고 하는 말은 창세기 一장에서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듯이 없는 가운데서 있는 것으로 창조한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자료를 가지고 새 가치를 창조한다고 하는 뜻입니다.
바위가 산에 있을 때는 그 가치가 별로 없지마는 석공이 그 바위를 깨어서 이렇게 좋은 성전을 지으면 그 돌에 새로운 가치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쇠뭉치가 그냥 땅 속에 묻혀 있을 때에는 가치가 없지마는 그것을 캐어 내어다가 연단을 시켜서 만일 시계의 태엽을 만든다고 하면, 그 쇠에는 새로운 가치가 발생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에게도 제한된 범위 안에서 창조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올시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창작이나 창조라고 하는 말을 종종 씁니다. 가령 예술제라면 언제든지 새로운 창작품이라고 이런 말을 씁니다. 여러 가지로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새로운 조작을 구성을 하고 새로운 건축을 하게 될 대에, 우리는 그것을 창작적 작품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없는 데서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있는 자료를 가지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고 하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래서 음악계에서도 새로운 음악을 창작합니다. 새로운 곡을 창작하는 것입니다 문학 방면에서도 새로운 문학의 작품 혹은 시나 혹은 소설이나 혹은 희곡이나, 여러 가지 작품을 내는 것이 사실이올시다. 사상 면에서는 더욱 이런 것을 우리가 항상 보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새로운 것이 나타나게 됩니다. 새로운 작품과 새로운 발명품이 우리 시장에 범람하는 것을 봅니다. 나일론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플라스틱 제품에 이르기까지 혹은 텔레비전에서 시작해서 원자탄이나 수소탄이나 유도탄에 이르기까지 매일 새 것이 과학자의 머리를 통해서 공장을 통해서 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자료를 가지고 역시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지력과 통찰력과 상상력을 통해서 매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술이나 과학 방면뿐만이 아니고 모든 방면이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이 짐승과 다르다는 것은 짐승은 새 것을 만들 수 없지만 인간은 언제든지 새 것을 구상하고 만들어 낼 수 있는 지력이 있는 까닭입니다.
또한 이것은 인간 생활에 있어서 우리의 영적 방면에도 또한 그런 것입니다. 위대한 예술가일수록 변변치 못한 자료를 가지고 더욱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을 고요히 묵상해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인간의 영적 방면에 있어서 위대한 작품을 낸 예술가라는 것을 우리는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항상「십자가, 십자가」하고 찬송가를 부르지마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십자가로 말하면 본래 가장 추악한 죄인을 사형에 처하는 아주 추악한 그런 형기에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에 한 번 못 박히셔서 만민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이후에는 그 흉악한 십자가는 인류의 모든 죄는 대속하는 대속의 표가 되었고 인류의 소망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부끄러운 십자가를 변해서 영광의 십자가로 만드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가만히 생각할 때에 얼마나 큰 새로운 가치의 창조인지 말로 다할 수 없는 줄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가장 추하게 생각하는 십자가로 하여금 인간의 모든 소망을 빛나게 하여 주는 아름다운 영광의 십자가로 만드신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그분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시는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옛날이나 오늘이나 각 방면에서 이와 같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십니다.
완고하고 편협하고 독선적이요, 무자비한 바리새인 사울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불러서 사람을 변화시켜 사랑과 화평의 사도가 되게 하였고 이런 사람을 통해서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게 하였으니 이 얼마나 큰 가치의 새로운 창조이십니까? 과연 예수 그리스도만 이와 같은 영예의 창작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뿐이 아닙니다. 돈만 알던, 이기주의자요, 자기의 민족도 모르던 민족반역자인 삭개오 같은 사람을 불러내어서 자기 재산의 절반을 팔아서 모든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데 쓰게 하였고 자기가 토색(討索)한 것은 四배나 갚아주는 사람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또한 얼마나 큰 가치의 창조인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님의 생활을 보면 이 영적 방면에서 언제든지 새로운 작품을 만드신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같은 여자, 일곱 귀신이 들려서 정신없고 미치고 부끄러운 줄 모르던 이런 여자를 변하게 해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딸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봉사할 수 있게 만든 그 기적을 생각할 때에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가치의 창조인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만 그와 같이 한 것이 아닙니다. 세기를 통해서 복음이 가는 곳마다. 이와 같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가 있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후서 五장 十七절에 사도 바울이 스스로 간증하는 말이『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새로운 작품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온전히 새로운 작품,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옛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어서 전에는 아무리 더러워졌었으나 이제는 깨끗하게 되었고 전에는 아무리 이기주의적이었으나 이제는 오직 사랑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을 만든 것입니다.
이 새 사람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가치 창조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복음 전파야말로 최고의 가치를 창조하는 활동이라고 또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우리도 주안에서 새로운 이와 같은 피조물이 되었다고 하면 우리도 주안에서 역시 이와 같은 창조적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말씀을 기록하는 사도 바울의 생활에서 여실히 우리에게 그 증거를 나타내어 보인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잘 기억하는 사실이지마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에 어떠한 사귀(邪鬼) 들린 여자, 정신없는 여자를 불쌍히 여겨서 고쳐주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그 여자를 고쳐준 까닭으로 그 여자아이가 점을 친다고 해서 오래 수입이 있던 그 주인의 증오를 받아서 여러 사람을 충동해서 오리려 사도 바울과 실라를 잡아끌고 관원에게 가서 무고하게 많은 매를 맞히고 수고를 시키고 마지막에는 빌립보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고 만 것이 아닙니까?
아마 보통 사람 같으면 그날 저녁에 바울과 실라가 마음속에는 그저 분한 마음만 가득했겠고 온 몸이 결리고 아픈 생각밖에는 다른 생각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읽는 대로 바울과 실라는 그날 밤이 깊을 때에 오히려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때마침 큰 지진이 있었고 그 후에 그 감옥의 간수가 회개를 하게 되었고 빌립보 교회는 처음에는 여자들만 있었지마는 아주 유력한 한 분 교인이 생기게 되었고 이래서 점점 기초가 튼튼해졌고 사도 바울의 모든 전도여행 때에도 항상 물질로도 도와주는 귀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또한 이 교회에 사도 바울이 귀한 빌립보서라고 하는 편지를 써서 오늘날까지 우리가 그 편지를 읽고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해 보세요.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매맞고 감옥에 갇히고 이런 환경 가운데서 산수를 회개하게 만들었고 빌립보 교회의 기초를 튼튼히 닦게 되었고 빌립보서를 써서 세기를 통해서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기칠 수 있는 그야말로 창조적 생활을 하였다 하는 그 말이올시다. 이것은 이 한 가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전 생애를 통해서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물론 자유로운 몸을 가지고 밖에 나와서 활동할 마음이 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년에 여러 해 동안 감옥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감옥의 생활을 한 까닭으로 그의 생활은 무의미한 것이었습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감옥의 생활을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는 귀중한 신약의 옥중 서신이 되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니, 에베소서니, 골로새서니, 혹 디모데 전후서, 빌레몬서, 이와 같은 것은 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 가운데 갇혀서 이 불멸의 저서를 남기게 되었고 이것이 그 당시의 사람뿐만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창조적 생활을 감옥 가운데서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도 바울의 생활만이 아닙니다. 과연 누구든지 신앙을 가지고 창조의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주안에서 산다고 하면 가능한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어떠한 입장에서든지 이와 같이 열매 맺는 생활을 한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존 번연의 생활을 회고하면, 영국에서 청교도들을 핍박하게 될 때에 오히려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고 이 존 번연을 감옥에 집어넣고 억울하게 十二년 동안이나 썩는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존 번연은 거기서 썩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은혜를 받고 우리가 아는 서로역정이라고 하는 성경 다음에 많은 사람이 읽는다고 하는 불멸의 저서를 써서 감옥 가운데서도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서 위대한 창조적 생활을 한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우리 교회에서도 잠깐 와서 이야기했지마는, 지금 일본에 와서 선교사로 있는 사람 가운데 디 세이저(De Shazer)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二차 대전 때에 미국에서 제일 먼저 동경에 와서 폭격하고는 이 두리를 소장이 지휘한 그 폭격기대로 와서 싸운 한 대원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동경에서 폭격하고는 저 중경으로 가다가 중경까지 채 가지 못하고 남경 부근에서 부득이 낙하산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일본 사람한테 잡혔습니다. 근 四년 동안 중국 여러 감옥, 마지막에는 일본 감옥에 와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감옥 생활은 헛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감옥에 사는 동안 성경을 읽게 되었고 성경을 읽는 가운데 온전히 회개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간증하는 대로 전에 유년 주일학교에는 좀 다녔지만 장성해서는 전혀 교회에 나가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죄를 많이 짓던 사람입니다.
그 감옥에서 죄를 회개하고 그리고는 제二차 대전에 끝나자 포로 교환에서 나와 결심한 것은 내가 본국에 돌아가서 신학을 마치도 다시 일본에 와서 일본 사람에게 그가 처음에는 폭탄을 내려 던졌지마는 이번에는 복음을 전파해서 구제를 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로 꼭 실행했습니다. 해방된 다음 미국에 돌아가서 공부했습니다. 그 다음에 일본의 선교사로 나왔습니다. 선교사로 나와 전도하는 동안 제일 먼저 믿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일본 폭격기대를 영도해서 진주만을 一九四二년에 먼저 폭격한 그 폭격기의 대장으로 있던 후지다(藤田) 대위입니다. 그 사람 역시 예수를 믿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있게 될 때에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우리가 창조적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실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에는 역경이나 실패가 문제가 아니요, 질병도 문제가 아니요, 시험을 받는 것도 문제가 아니요.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요컨대 이와 같은 자료를 가지고 어떻게 위대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요셉의 생활을 잘 기억합니다. 그의 생활을 잠깐 회고해 보세요. 까닭 없이 형제들에게서 시기를 받았습니다. 까닭 없이 저 깊은 우물 속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까닭 없이 종으로 팔려서 멀리 고독하게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애굽에 갓서 오랫동안 종으로 수고하게 되었습니다. 그 또한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시험을 이겼습니다. 그 결과는 오히려 억울하게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형제의 시기, 미움, 우물에 던짐을 받는 사실, 먼 나라에 종으로 팔려 가는 설움과 고독, 오랫동안 남의 집에서 종노릇하는 그 억울한 고통, 그런 가운데서도 시험을 받으니까 오히려 더 억울하게 감옥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 모든 서러운 사정, 이것이 요셉이 받은「자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준 한 자료입니다.『너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해보아라.』
요셉은 그런 모든 것을 다 가지고서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을 애굽의 총리 대신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가족들을 기근 가운데서 구원해 내고 모든 애굽 국민들을 七년 동안 가무는 동안에 기근 가운데서 구원해 낸, 말하자면 애국의 구주가 된 것입니다.
얼마 전에 대광(大光) 학교에서 미술 전람회를 하는데 가서 한 번 구경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좋은 작품들이 있어요. 그 가운데 특별히 제 흥미를 끈 것은 어떤 학생들이 만든 공예품이었는데 목수들이 쓰다 내버린 나무 조각으로 공예품 하나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어떤 학생은 철공소에서 공인들이 쓰다 내버린 쇠 조각으로 공예품 하나를 그럴 듯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이와 같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사람 보기에는 변변치 않은 것, 사람 보기에는 쓸모가 없다고 하는 것, 사람 보기에는 그렇게 자랑할 것이 없는 것, 그런 것들을 가지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오직 우리가 주안에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과일 나무, 혹은 사과나 복숭아나무를 기르는 사람은 누구나 겨울에는 전부 가지를 전정 해주지 않습니까? 다 잘라 줍니다 만일 이 나무들이 우리처럼 감각이 있다고 하면 그 전정을 받을 때 대단히 아플 것입니다.
이 나무가 전정을 받을 때 아프게 그렇게 많은 가지를 잘라내지마는 그 대신 나무가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불평하지 아니해요. 그 대신 쓸데없는 가지로 정력을 보내지 아니하고 모든 정력을 다 열매에 보냅니다. 그래서 사과 알이 커집니다. 그래서 복숭아 알이 커집니다.
사실 전정 하는 목적은 열매를 크고 아름답게 잘 맺기 위해서 해줍니다. 아마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전정을 더러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환난도 보내시고 질병도 보내시고 시험도 보내시고 이와 같이 전정을 해주십니다. 이렇게 하는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하시는 줄 압니다.
언제든지 창조적 생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이지마는 진주가 어떻게 되는지 아시지요? 진주도 별것이 아닙니다. 진주 속에는 모래알이 있다고 합니다. 겉만 그렇게 아름답지 속에는 모래가 있다고 합니다.
진주 패라고 하는 조개 속에 어떻게 모래알이 들어갑니다. 지금은 인공적으로 넣어준다고 합니다. 그 보드라운 조갯살에 깔깔한 모래알이 들어갔으니까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러니까 이 조개가 그 깔깔한 것을 이기기 위해서 생명의 즙을 내서 그 모래알을 싸주고 또 싸주고 또 싸주고……. 여러 해 싸주면 점점 큽니다. 그것이 진주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 모래알과 같이 사도 바울이 말한 육체의 가시와 같이 깔깔하고 아픈 것을 던져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싸고 또 싸서 우리의 영혼이 진주와 같이 아름다운 영혼을 만들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하시는 줄 생각합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다. 주안에서 모든 것이 창조의 자료입니다. 주안에서는 모든 것이 창조의 기회입니다. 서양 속담에「필요는 혹은 곤 고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는 속담이 있습니다. 요새 직업이 없어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직업이 없다고 불평하지 말고 직업을 만들도록 힘을 쓸 때가 된 것입니다.
제가 어떤 책을 보니까 지금 폐 염도 잘 고치는 페니실린도 본래 곰팡이 가운데서 처음에 발견하고 적출 해 냈다고 합니다. 아무리 곰팡이 같은 죄악 세상에 사는 사람도 주님께 나오면 귀한 약품이 되어서 다른 사람의 병까지 고쳐줄 수 있는 새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상한 갈대를 고쳐서 아름다운 초적(草笛)피리를 만들어서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을 내게 하는 권능이 우리 주님께는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처 입은 몸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우리 주님 앞에 나와서 내 생명을 맡긴다고 하면 주님께서는 그 상한 생명, 그 상한 생황을 변화해서 하늘의 음악을 나타낼 수 있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를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던지 낙심하지 말 것입니다. 주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우리도 창조의 생활을 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작년은 어떠했던지 이 새해야말로 창조의 해를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도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 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의 생활을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