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4:1-6/ 그리스도의 얼굴 / 한경직 목사 2014-08-23 07:09:40 read : 1296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어두운 데서 빛이 비치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四․六)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여러분께서 많이 기도해 주심으로 평안히 다녀오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 동부 아시아 기독교대회는 파키스탄에서부터 뉴질랜드에 이르는 동부 아시아에 있는 모든 교회 대표가 四년에 한번씩 대회로 모여서 아시아 교회들이 당면한 교회의 일치문제라든가, 선교문제라든가, 신교 자유문제라든가, 사회문제라든가, 여러 가지 공통한 문제들을 토의하고 의논하는 그런 모임입니다.
이번에 우리 한국에서도 十여명 대표가 같이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태국 방콕 교외에 있는 아름다운 곳에서 모였는데 약 二00명의 대표들이 모였었습니다.
방콕에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교회에서 보낸 최 선교사가 있는 곳인데, 물론 여러 번 만났고 그도 같이 그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성서공회 일과, 여러 집회를 인도하는 일과 또 주일에는 여러 교회에서 설교하는 일로써 매우 바쁘게 선교하는 것을 보고 왔습니다. 여러분께 문안을 전해 드립니다.
방콕은 너무 더워서 참 곤란했는데 한국에 돌아오니까 아직도 좀 추운 것 같습니다. 아마 그 모인 나라 가운데 우리 한국이 제일 추운 나라 같아요. 이 다음에 공산진영에서도 다 참석하게 되면 몽고 같은 나라가 아마 좀더 추울 것 같지만 지금까지는 우리 한국이 제일 추운 나라 같습니다.
앞서 읽은 말씀 가운데 한 구절을 제가 다시 봉독(奉讀) 합니다. 四장 六절입니다.『어두운 데서 빛이 비치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두 주일 전에 제가「예수를 바라보자」하는 말씀을 여러분과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아침 조금 더 가까이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묵상하는 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十九장에 보면 삭개오 라고 하는 세리(稅吏)장(長)이 예수의 얼굴을 보고싶어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를 기다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예수의 얼굴을 보고싶어 하는 분이 많이 계신 줄 압니다.
우리 가운데도 많이 계신 줄 압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의 얼굴이 어떠하셨는지 확실히 알 길이 없습니다. 이태리의 큐링 이라고 하는 곳에 옛날부터 예배당이 있는데 그 곳에 가면 보물로서 보존되어 오는 홀리 슈타우드(Holly Shroud)즉 거룩한 세마 포라고 하는 홑이불이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 세마 포는 예수 님을 무덤에 장사할 때에 그 유해를 쌌던 세마 포라고 합니다.
그 유해를 싸고 있던 동안에 어떠한 화학작용이 일어났는지는 모르나 그 홑이불 위에 예수님의 모습이 사진처럼 박혀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예수 님의 귀가 얼마나 크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러나 그 전설이 얼마나 확실한지는 믿기가 대단히 어려운 줄 압니다. 제一세기에는 사진 만드는 법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누가 초상화로 그렸다고 하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조각으로 만들어 보았다고 하는 이도 없습니다.
더욱이 一세기나 二세기에는 기독교 예술가들이 감히 예수의 얼굴을 그려볼 생각도 못했습니다. 첫째는 너무 황공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그렇게 하면 혹 둘째 계명에 저촉이 안 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 역사를 보면 三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기독교 예술가들이 예수 님의 얼굴을 그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五․六세기에 내려오게 되면 예수 님의 얼굴을 그린 사람들이 많아져서 성화를 예배당 안에 가득히 붙여 놓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교회 안에 이렇게 성화가 너무 많은 것이 좋으냐 좋지 않으냐 이런 굉장한 논쟁이 벌어진 때도 있습니다.
지금도 특별히 동방교회 즉 헬라 정통교회에 가보면 그저 천장으로부터 온 벽에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으로 장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 상상화입니다. 그러나 물론 이 성화 가운데 제일 유명한 성화들은 종교개혁 이후에 그려졌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하프만의 유명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얼굴이든지, 혹은 다빈치의 유명한 성만찬 식에 나타나신 주님의 얼굴, 혹은 홀맨 헌트 같은 이의 세계의 빛이라고 하는 그 그림에 나타난 예수 님의 얼굴이 아마 대표적일 것이고 제일 유명한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부가 상상화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그다지 섭섭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줄 압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너는 나를 보고 믿으나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더 복이 있느니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외모를 보는 것보다도 우리의 마음 눈으로 그 얼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가령 요한 복음 一장에 보면 사도 요한이 주님을 보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윌 가운데 거하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혹은 이렇게도 기록했습니다.『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자가 나타내셨느니라.』이것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증언하는 사도 요한의 말씀입니다.
오늘 아침에 읽었지마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세 제자가 변화산상에 올라갔다가 변화하신 주님의 얼굴을 보고 전하여 준 말 가운데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고 기록한 것을 우리는 읽어보았습니다.
혹은 사도 요한이 환상 가운데서 계시를 받을 때 주님의 얼굴을 대하고 그 인상을 기록했는데 역시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신 것입니다.
빌립이 한 번은 주께 나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주님이시여, 아버지는 우리에게 보여 주시옵소서. 그저 그렇게 해 주시면 우리의 마음이 만족하겠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빌립아, 네가 이렇게 오래 나와 함께 있으되 네가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는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었습니다. 빛나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 얼굴을 먼저 바라보아야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신약성서는 주님의 다른 면을 보여주는데 즉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있었습니다.
베다니의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마리아가 울고, 마르다가 울고, 같이 있던 여러 여자들과 여러 친구들이 울 때, 예수님께서도 같이 우셨다는 기록을 우리가 읽어봅시다. 주님의 얼굴에는 눈물이 어린것이었습니다.
혹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오실 때 감람산을 넘어서 먼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고는 우시면서, 다시 말하면 눈물을 흘리시면서『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너는 모으기를 암탉이 병아리를 모으는 것같이 모으려고 한 적이 몇 번이었더냐!』고 탄식하셨다고 했습니다.
눈물어린 그리스도의 얼굴을 또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피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실 때 통곡하시며 만민의 죄를 위해서 안타까워하시던 고민과 눈물의 얼굴도 또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 하는 무리들을 민망히 여기시는 그 얼굴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가난한 이들, 배고픈 이들, 헐벗은 이들, 외로운 이들, 죄의 짐을 진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눈물어린 얼굴을 또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주님의 얼굴은 좀더 자세히 보면 가시 면류관 쓰신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경주에 가면 옛날 신라의 왕들이 쓰던 왕관이라 하여 금관들을 진열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국에 가면 영국 역대의 제왕들이 쓰던 금 면류관들을 우리가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님은 만 왕의 왕이 시요, 만주의 주로서 보석과 진주의 금 면류관도 오히려 부조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오셨을 때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친히 쓰신 것입니다.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얼굴을 우리가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이광혁 장로님께서도 마태복음을 제일 먼저 그림으로 표하여 쓰실 때, 가시 면류관을 쓰신 예수 님의 얼굴을 나타내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날카로운 가시가 그 얼굴을 찌릅니다. 그 얼굴에는 피가 흐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피를 흘리시는 주님의 얼굴을 우리가 신령한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면 우리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주의 얼굴을 바라보는 중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죄인을 위하여 말할 수 없는 그 연민, 그 긍휼(矜恤), 그 자비를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물론『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궁창(穹蒼)이 그 손으로 만드신 것을 나타내어』보입니다.
그러나 이 굉장한 대 우주도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지를 못합니다. 오직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에만 하나님의 참되고 지극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찬송가의 일 절과 같이『머리와 수족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나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우리가 이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에 다시 말하여 가시 면류관을 쓰신 그 얼굴을 앙망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돌이켜서 나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내 죄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요, 내 죄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그리해서 우리는 겸손히 주님께 나와 죄를 회개해야 하며 그 때에 거기에 죄 사함과 구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가운데 구원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계속해서 바라보게 되면 우리의 얼굴도 점점 빛나게 됩니다. 모세가 오랫동안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내려올 때에 그 얼굴이 빛났다고 하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핍박을 받아 돌로 맞아서 마지막에 순교할 때,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빛났다고 하였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 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그의 얼굴까지 빛나게 된 것입니다.
달빛이 어떻게 비취는지 아시지요? 태양 관선에 반사되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항상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영광을 항상 앙망 하게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또한 우리 얼굴에도 어느 정도까지 반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얼굴은 우리 사람의 마음의 거울인데 우리의 마음 눈이 항상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서 우리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화평(和平)과 주님의 기쁨이 충만하면, 아마 어느 정도까지 그 빛이 우리 얼굴에도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린도 후서 三장 十八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가 눈데 맨 수건을 벗어 놓고, 또한 여러 가지 색안경을 벗어놓고 적나라한 마음의 눈으로 주님의 얼굴을 거울처럼 바라볼 때에『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해서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어떠한 언약까지 하셨는지 아십니까? 요한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요한 一서 三장 二절에『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님께서 장차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되면 우리가 주님과 같이 되겠다고 하는 이 약속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의 책임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요한 복음 十二장에 보면 헬라 사람들이 빌립에게 와서『예수를 좀 보여주시요』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예수를 보여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참된 주님의 얼굴을 보고싶어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사람들에게 주님의 얼굴을 보여줄 수 있습니까?
앞서도 말했지마는 스데반은 그 빛나는 얼굴로써 어느 정도까지 예수님의 얼굴을 보여준 줄 압니다. 그런 기록은 없지마는 바울이 회개하기 전 예수를 핍박할 때에, 스데반의 그 순교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무의식중에 많은 감화를 받아 회개한 원인이 된 줄로 많은 사람들이 추측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우리의 얼굴을 통해서라도 다른 사람에게 주님의 얼굴을 보여줄 책임이 있습니다. 내 얼굴이 과연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를 보여줄 수 있을까? 그 거룩하시고 경건하시고, 화평하시고, 온유하신 주님의 얼굴을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라도 보여줄 수 있을까?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초대 교인들의 생활 모습을 세 가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화평의 모습이 특별히 나타납니다.
둘째는 환난과 핍박가운데서도 항상 기뻐했습니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즐겁게 받았습니다.
셋째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떠한 어려운 가운데서도 담대한 소신을 말했습니다. 진리를 전파했습니다.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사랑, 기쁨, 용기 어린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된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언제든지 신령한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서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마음으로 화하고, 그 마음이 우리의 생활과 얼굴에까지도 나타날 수 있는 그런 높은 자리에 올라와야 되겠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다 각각 재능을 주셨는데, 우리가 우리의 재능을 통해서 주의 얼굴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여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술가는 그 예술로써, 음악가는 그 음악으로써, 문필가는 그 문필로써, 사업가는 그 사업으로써, 주의 얼굴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되겠습니다.
마태는 마태복음을 기록함으로, 글을 통해서 주의 얼굴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헨델 같은 사람은 그 유명한 메시야를 작곡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얼굴을 보여주었습니다. 혹은 하프만은 그 유명한 성화를 통해서 주님의 얼굴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번 동부 아시아 기독교대회에 가보니까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그 교인 자신들이 작사를 하고 작곡한 그런 찬송가를 모아서 만든 조그마한 책이 하나 있었습니다. 거기 보니까 중국에서 만든 찬송가가 아마 제일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에서 만든 찬송가도 몇 곡이 있었지만 별로 많지 못했습니다. 모두 셋인가 넷밖엔 없었습니다.
앞으로 우리 한국의 믿는 사람들이 예술가는 예술을 통해서, 음악가는 음악을 통해서, 문필가는 문학을 통해서, 각 방면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쥐신 재능을 통해서 주의 얼굴을 우리 민족뿐만 아니고 온 세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좀더 힘을 써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개인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교회 자체가 우리 교회생활을 통해서, 예수 님의 얼굴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전도를 간단하게 말해서 세 가지 방법으로 했습니다.
첫째는 초대교인들의 생활과 활동을 통해서 진도를 했습니다. 그 성결한 생활, 깨끗한 생활, 화평한 생활, 다른 사람을 봉사하는 생활, 이런 생활로써 전도를 했습니다.
둘째는 입술을 통해서 전도를 했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 스데반이 공판 정에서 그리스도가 메시야라는 것을 증거 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개인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서 개인적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
셋째 방법은 교회 자체의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 한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항상 기쁜 마음으로 모이고, 모여서 같이 찬송가를 부르고 떡을 나누어 먹고, 유무상통해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화평하고, 사랑했습니다.
이런 교회 자체의 생활로 그 때의 모든 사람들에게『과연 예수를 믿는 이들은 저러하다. 예수를 믿는 사람의 모인 것은 저러하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교회생활을 통해서 예수의 얼굴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본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우리 교회 자체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만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견지에서 과거 十여 년 동안의 한국 교회의 모습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얼마나 부끄러운지 알 수 없습니다.
교회 안의 불화, 분쟁, 분열 등은 세상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변형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우리 영락교회는 항상 초대교회의 모습 그대로 사랑과 화평과, 용서와, 유무상통과 피차간의 봉사와, 주안에서 하나 되는 것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로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언제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지 아니하리오마는 이런 사순절 때에, 특별히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빛나신 그 얼굴, 거룩하신 그 얼굴,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얼굴까지도 그 영광에 화할 수 있으리 만큼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해서 세상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고 예수 님을 생각하리 만큼, 될 때까지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 전체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반영시킬 수 있으리 만큼 우리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지막에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고린도 전서 十三장 十二절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우리가 세상에 육신을 갖고 사는 동안에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면 항상 희미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얼굴과 얼굴을 친히 대하여 볼 때가 있겠습니다.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러기에 요한 계시록 二十二장 四절에 보면『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큰 축복의 하나는 그의 얼굴을 친히 볼 것입니다. 그 때에는 우리의 얼굴도 주님의 얼굴과 같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높은 자리에까지 이 사순절 동안에 올라갈 수 있는 은혜를 우리가 받으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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