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12:1-10/ 내 몸의 가시 / 한경직 목사 2014-08-23 07:10:18 read : 1651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후 十二․九)
바울은 모든 사도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한 사도입니다. 오늘 아침 읽은 이 말씀 가운데도 있었지마는 그는 많은 은혜를 받은 분입니다. 큰 계시를 보았습니다.
그는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가서 사람으로서는 감히 들을 수 없는 말을 듣는 신령한 체험도 얻은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스스로 고백하는 말씀을 보면, 이런 분이라도 그의 육체에 가시가 있어서 이것은 사탄의 사자처럼 항상 자기를 찌르고 괴롭힌다고 한 것입니다.
이 가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마는 하여간 끊임없이 큰 고통을 주는 어떠한 고질의 질병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많은 고통과 고난을 받으면서 주를 봉사한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종종 알지 못하는 동포들로부터 편지를 받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들을 보면 물론 가지각색이지마는 보통으로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당면해서 해결의 길을 찾기 위해서 의논해 오는 것들입니다.
어떤 분은『불치의 병이 있는데 암만해도 고칠 길이 없으니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합니까?』하고 물어옵니다. 어떤 분은 六․二五때에 부상해서 또는 다른 어떤 사고로 그만 불구자가 되었는데『일생동안 불구의 몸으로 내가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어떤 분은『사업에 실패하고 나아갈 길이 아득한데 어떻게 길을 열 수 없겠습니까?』하고 의논합니다. 또 재주는 많이 있지마는 학교에서 공부할 학비가 없어서 곤란하다는 사정을 편지해 오는 학생도 많이 있습니다.
혹은 어떤 분은 사랑하는 남편이나 사랑하는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서 심히 외롭고 슬픈 사정을 호소하는 편지도 종종 받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는 그 몸에 가시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각계 각층에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마 이 시간, 이 자리에 나온 여러분 가운데도 몸의 가시와 같은 남 모르는 고통을 당하고 계신 교우들이 더러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육체에 있는 이 가시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문제를 성경이 교훈 하는 대로 잠깐 생각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습니까? 여러분께서 읽어 본 대로 사도 바울은 우선 이 문제를 자기 혼자 해결하려고 힘쓰지는 않았습니다. 기록된 대로 이 문제를 주님께로 가지고 와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한 번만 드린 것이 아니고 세 번씩 드렸다고 하는 것을 보니 간절히 기도한 모양입니다.
『내 살을 찌르고, 나를 아프게 하는 가시가 내게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것을 없애 주시기를 바랍니다.』이와 같이 주님께 자기 가시에 대한 모든 문제를 솔직히 고백하고 이것을 없애 달라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 해결의 길인 줄 압니다.
우리도 이런 가시의 문제를 당할 때에 혼자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와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일을 당할 때에 오히려 기도하는 힘을 잃고 단지 혼자서 근심하고 염려하고 걱정만 합니다. 그러다가 점점 더 비관하게 되고, 몸도 더 약해지고, 일도 더 안 되고 해서, 나중에는 큰 고통을 받는 처지에 빠지는 수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근심하고 걱정하는 생활을 계속하면 오리려 이것 때문에 더 큰 병이 날 수도 있고 더 큰 실패가 올 수도 있습니다. 또 너무 심하면 정신에 이상이 생길 수고 있고, 극도의 염세주의에 빠지고 비관하게 되어 심지어는 자살하는 경우도 혹 있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이 가시의 문제는 혼자 해결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혼자 해결하려고 힘쓰는 것도 아니고, 주저앉아서 원망만 합니다. 반항을 합니다. 왜 다른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없는데 꼭 내게 이 고통이 왔나? 왜 하필 내게 이런 슬픔이 왔나? 왜 하필 나만 이렇게 외로운 생활을 해야 되나? 사람을 원망하고, 사회를 원망하고 심지어 하나님까지 원망합니다.
전에 제가 신의주에서 결로 원을 경영할 때에 어떤 불쌍한 할머니 한 분을 우리 경로 원에서 모셔다가 사시게 했는데 할머니는 중년에 그만 눈이 어두워진 분이었습니다. 한 번은 가서 위로의 말씀을 드리는데 이 할머니가 위로를 받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라면 왜 꼭 내 눈을 멀게 했겠습니까?』이런 태도입니다. 그저 원망만 합니다. 이렇게 원망하고 반항하는 태도가 계속되면 그 사람은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결국 이렇게 나아가다가는 자포자기(自暴自棄)하게 되고 모든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만 생기고 잘해 주는 사람에게 오히려 악하게 대하고 나중에는 흉악한 죄악에 빠지기까지 하는 사람도 종종 있습니다. 이 가시가 아프니까 공연히 남을 괴롭게 합니다.
속담에『병신 속 고운 데 없다』하는 말이 그 이유 같습니다. 자기 몸이 괴로우니까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합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에게 보복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가시의 문제를 해결하는 법이 아닙니다.
네게 어떠한 가시가 있어서 큰 고통이 오고 괴로움이 올 때에, 제일 먼저 할 것은 이 문제를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충분히 쏟아 놓는 것입니다.『내가 이런 사정을 당합니다. 내가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하고 주님 앞에 온전히 다 고해야 됩니다. 그것이 해결의 비결입니다.
야고보 장로도『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응답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환난 날에 특별히 주님을 부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혼자 해결하려고 애쓰지 말고 주님 앞에 나와서 기도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두 가지 길로써 주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첫째 길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그 가시를 없애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서로 합치되는 때에는 그 가시를 없애 주십니다.
마치 주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문둥이가 와서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호소할 때, 그 병을 고쳐주신 것처럼, 또 열 두 해나 혈루증(血漏症)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와서 옷자락을 만질 때에, 그 병을 고쳐주신 것처럼,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고 우리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우리의 원하는 대로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지금 읽었지마는 사도 바울의 경우가 이런 경우입니다. 가시를 없애 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하였는데 그 가시를 없애 주시지를 않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기도는 예수님이 드린 기도와 비슷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라고 하는 큰 고난의 잔을 앞에 놓고 인간 예수는『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여 주시옵소서』하고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한 번만 기도한 것이 아니고 세 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그 고난의 잔을 떠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기도는 하나님께서 아주 응답하시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응답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에게 큰 힘을 주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 큰 능력을 더하셔서 십자가의 고통이라도 능히 견딜 수 있는 새로운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가 역시 그러합니다.
가시는 없애 주시지 않으셨지마는 기록된 대로『내 은혜가 네게 족(足)하도다』하시며 그 가시를 능히 견딜 만한 족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 후서 六장 十절에 자기의 경험을 기록하기를『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가시가 있을지라도 그 고통을 이기고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하는 족한 은혜를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주신 것입니다.
찬송가 三四八장을 여러분이 다 기억하실 줄 압니다. 둘째 절에 보면 이런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극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 하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어려운 일 당한 때에도 족한 은혜를 주시고, 나는 심히 고단할지라도 내 앞의 반석에서 새로운 생명수를 주시는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가운데 유명한 사람들이 많지마는 제일 이름이 높은 이는「존 번연」일 것입니다. 이 분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핍박을 받아서 투옥되었습니다. 활동적인 이 분이 수감되어서 가만히 감방에 앉아 있으니까 답답하고 민망한 생각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이상한 음성이 들려 왔다고 합니다.『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하는 세 차례의 똑 같은 음성이었습니다.
그 때에야 그는『아 내가 감옥에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네게 족한 은혜를 주시는구나』하는 깨달음을 얻고 다시는 원망도 낙심도 않고 오히려 기쁨을 가지고 옥중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족한 은혜를 주십니다. 고통도 견딜 수 있고, 슬픔도 참을 수 있고, 고독도 견딜 수 있고, 실패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五장에는『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환난 가운데도 즐거워할 수 있는 족한 은혜를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만 주시는 것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내 능력은 약한 가운데서 온전하여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뜻은 가시가 있을지라도 이것을 잘 참을 수 있는 은혜를 주실 뿐 아니라,
오히려 가시로 말미암아 주님의 능력이 그 생활에서 온전히 이루어져서, 하나님이 그를 쓸 만한 그릇이 되게 하고, 자기뿐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축복이 되게 하는 은혜를 주신다고 하는 뜻입니다.
물론 주의 능력은 언제나 온전합니다. 그러나 특별히 우리 인간이 가시로 말미암아 약해질 때에 주님의 역사가, 온전히 그 능력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토기장이가 물론 잘 이겨진 진흙을 가지고는 얼마든지 좋은 토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술자라 할지라도 딴딴한 흙을 가지고는 토기를 만들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기술과 능력이 있는 철공장이라 해도 딴딴한 쇠를 가지고는 기계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 쇠가 불에 들어가서 물려진 다음에야 대장장이가 원하는 대로 그릇도 만들 수 있고, 기계도 만들 수 있으며, 그의 모든 기술과 능력이 그 쇠를 통해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때에는 우리 사람의 신령이 너무 굳고 너무 딴딴합니다. 아무리 주의 능력이 크지마는 이와 같은 심령을 가지고는 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심령 가운데 혹 가시가 박히게 됩니다.
고통이 있게 됩니다. 그러면 그 굳은 심령이 부드러워지고 겸손하여지고 온유하여지고 좀더 주님을 의지하게 되고, 좀더 기도를 하게 되고, 좀더 남의 사정을 알게 되고, 좀 더 주님을 사모하는 심령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때에만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서, 그 심령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들 수 있고 사랑과 믿음과 기쁨과 인내와 자비와 긍휼(矜恤)이 충만한 그릇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많은 사람에게 축복을 줄 수 있는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번연의 이야기를 하였지만, 그는 감옥에서 어려운 생활을 잘 이겨 나가는 은혜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서 오히려 주님의 은혜를 더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신앙생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천로역정」(天路歷程)이라는 유명한 책을 써서 자기가 말로 전도하는 것보다도 더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청교도였던 죤 밀튼 같은 분은 아주 유명한 분입니다. 그는 선천적으로 문필에 재주가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 중년에 실명이 되어 눈을 못 보게 되었습니다. 본래 신앙이 독실한 분이었으므로 실명이 될 때에도 이것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실명이 된 다음에도 혹 보게 될 수 있는 길이 없을까 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기도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밀튼은 실명한 가운데서도 평안한 마음으로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지낼 수 있는 은혜를 먼저 받았습니다.
그 은혜 가운데서 계속해서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더 큰 은혜를 받아서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만고 불후의 대작인「실락원(失樂園)」이라는 유명한 책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가시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가시 자체가 선한 것도 아닙니다. 가시는 사단의 사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것을 통해서 주님이 온전히 나타날 수 있고, 또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 큰 축복이 나타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검은 구름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검은 구름이 없으면 빛나는 무지개를 볼 수 없습니다. 어떤 때에는 무지개와 같은 주님의 빛을 반사시키기 위해서 우리 생활의 면에 검은 구름을 허락할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새 예루살렘은 모든 것을 아주 아름답게 꾸몄는데 그 문들은 전부 진주로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그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기억하십니까? 진주는 본래 바다 속에 사는 진주 패라고 하는 전복, 조개 가운데서 생깁니다.
그 가운데서 어떻게 되는지 압니까? 조개가 바다 밑으로 기어다니다가 어떻게 잘못 되어서 깔깔한 모래알이 그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연한 살에 모래알이 들어가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러나 진주 패는 이 고통 가운데서 말하자면 생명의 즙을 짜서 그 모래알을 둘러싸고 싸고 또 쌉니다.
한 달, 두 달, 一년, 二년 여러 해를 지나게 되면, 큰 진주가 되어서 제왕의 면류관을 장식하고, 천국의 문을 장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 하나로 하여금 많은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진주 문을 삼기 위해서 어떤 가시를 허락하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 학생시절에 어떤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전에 어떤 유력한 가정에 귀한 따님이 하나 있었습니다. 공부도 잘 마치고 성년이 되어서 역시 유력한 어떤 집의 좋은 남자와 약혼을 하고 결혼 날까지 다 작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결혼하기 약 一주일 전에 갑자기 이 여자가 병에 걸렸습니다. 아주 중한 열병입니다. 전신 모르고 않습니다. 않는 동안에 결혼 날짜가 다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한 달 이상 중하게 앓고 겨우 생명을 보존해서 살아났습니다.
살아나고 보니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일어나 앉아서 머리를 빗으려고 거울 앞에 가서 자기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얼굴이 전혀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이 여자가 앓았던 병은 소위 마마라고 하는 천연두였던 것입니다.
그 어여쁘던 얼굴이 북한에서 흔히 쓰는 말대로 졸박 졸박 얽었는데 도무지 자기자신조차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머리를 채 빗지도 못하고 그냥 자리에 쓰러져 눕고 말았습니다.
며칠 후입니다. 병이 좀 낫다는 말을 듣고 자기와 약혼한 남자가 찾아온다고 합니다. 이전 같으면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얼굴을 가지고 약혼한 남자를 어떻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참 기가 막힙니다. 하지만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찾아온 남자를 맞아들여서 마주 앉았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한 번 곁눈으로 힐끗 보더니 금방 얼굴빛이 달라집니다. 그리고는 잠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다가 훌쩍 달아나고 맙니다. 그리고 나서는 도무지 일불거래(一不去來)입니다. 얼마 후 본래 중매했던 노파가 다시 오더니 머뭇거리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마지막에 하는 말이『저 집에서 파혼하잡니다.』
이 한 마디를 남기고 훌쩍 가버렸습니다. 그 여자가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런데 설상가상(雪上加霜) 얼마쯤 있더니 바로 그 남자가 자기와 친하게 지내는 친구와 다시 약혼을 한다는 소문이 들여옵니다. 이윽고 아무 날로 결혼 날짜를 받았다는 이야기까지 들립니다.
이 소식을 들을 때 이 여자는 너무나 원통해서 이불을 쓰고 집안에 들어 누웠습니다. 밥도 못 먹고 고생을 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 저녁도 이불을 쓰고 가만히 누워서 바로 내일이 그 결혼식 날이라고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하고 분하기만 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그만『아무도 원치 않는 이까짓 몸이 살아서는 무엇 하 노?』하고 생각한 끝에 결국 자살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못 보는 사이에 자기 집을 빠져 나왔습니다. 어스름저녁인데 천천히 걸어서 멀지 않은 강가로 나갔습니다.
높은 벼랑 위에 앉아서 달빛 아래 흐르는 푸른 강물을 내려다보며 자기 신세를 생각하니 기가 막힙니다. 그만 서러움에 복받쳐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기진맥진해서 앉았는데 이상스럽게도 그 날 저녁 따라 멀리서 이상한 노래 소리가 들여왔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귀를 기울여서 듣기를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듣지 못하던 노래 소리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어떤 노래 소리인가 하고서, 노래 소리 나는 곳으로 점점 찾아가 보았습니다.
좁은 오솔길을 지나서 송림 사이를 한참 지나가 보니까, 조그마한 집이 한 채 있는데 그 집에 사람이 가득히 모여서 합창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게 아니고 조그만 농촌 예배당이었습니다. 때마침 부흥회를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밖에서 서성거리라니까 웬 사람이 나오더니 친절한 태도로 들어오라고 합니다.
자기는 그다지 들어갈 마음도 없는데 억지로 들어오라고 합니다. 무슨 설교를 하고 무슨 설교를 들었는지 무르지마는 하여튼 이 여자가 그 날 저녁에 처음으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고, 자기는 아무 소망이 없었는데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으면 새로운 소망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결국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후부터 이 여자의 생활은 달라졌습니다. 깨끗이 세수를 하고 옷을 단정히 차려 입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부모에게 고부를 더 하겠다고 청을 했습니다. 넉넉한 집안인지라 부모들은 딸의 소원대로 공부를 더 시켰습니다. 마침내 이 여자는 지금으로 말하면 여자신학교를 마치고 어떤 교회에 여전도사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주를 위해서 자기의 전심 전력을 다 했습니다. 이 분은 자기를 원하는 남자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는데 주님만이 자기의 신랑이 되어 주셨다고 생각하여 주님의 신부로서 정성껏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받들겠다는 결심 아래, 힘껏 전도하고 기도하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했던 것입니다.
받은 월급을 다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아버지에게서 받은 유산도 전부 다 써가면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고 특별히 불구자를 불쌍히 여기고 불행한 사람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이렇게 몇 해 동안 교회 일을 보았더니 그 교회에서『우리 전도사님 얼굴은 예수 님의 얼굴과 같다』하는 말이 돌게 되었습니다.
『우리 전도사님 얼굴은 어떻게나 은혜가 충만한지 모르겠어! 그 오목조목한 자리마다 주님의 사랑이 가득 담겨 있고 그 올통볼통한 데는 주님의 영광이 반사되는 것 같단 말이야.』이런 말이 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밉고 고운 것은 보기 탓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금강산에 있는 만물상을 가보신 분이 계십니까? 만물상은 미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우리 중에 가시를 가지고 있는 이가 많습니다. 이 가시를 혼자 가슴에 두지 말고 주님께 내어놓으세요.
기도하세요. 은혜 받으세요. 그러면 오히려 이 가시로 말미암아 더 축복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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