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3:8/ 열린 문과 닫힌 문/ 한경직 목사 2014-08-23 19:30:19 read : 1551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계 三․八)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三․二十)
영적 세계에는 열린 문이 있고 닫힌 문도 있습니다. 열린 문은 전도와 일과 봉사의 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당시 빌라델비아 교회에 전도와 일과 봉사의 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성경은 문을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한 데가 많습니다.『광대하고 공허한 문이 열렸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후서 二장 十二절에『내가 드로아에 이르매 주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라는 말씀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역시 같은 전도의 문을 의미합니다.
또 골로새 四장 三절에『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첫 전도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에 돌아와서 보고할 때에『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전도와 일과 봉사의 열린 문이 있으며 이에 반해서 닫힌 문이 있습니다.
지난번 있었던 싱가폴에서의 아시아 남태평양지구 복음 화 대회에서 특별히 이 사실을 실감하였습니다. 전도와 봉사의 문이 열린 나라가 있고 닫힌 나라가 있습니다. 가령 우리 나라, 한국을 비롯하여 비율빈, 인도네시아, 대만, 홍콩, 싱가폴, 오스트랄리아, 뉴질랜드 등에는 전도와 봉사의 문이 크게 열렸습니다.
그러나 이 문이 닫힌 지역의 수도 상당히 많은 것을 실감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북한, 중국 본토, 버어마 등에는 공산주의에 의해 전도와 봉사의 문이 닫혔습니다. 네팔 국은 불교의 나라로 아프가니스탄은 회회교 국으로 전도의 문이 닫혔습니다. 네팔에서는 예수 믿고 세례 받으면, 二, 三년 징역을 각오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개종하면 사형 감이라고 합니다. 말레이시아는 四十퍼센트가 중국계요 六十퍼센트가 말레이인인데 중국인은 종교 선택의 자유가 있으되 말레이인은 회회교 외에 딴 종교를 택할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 나라의 교회는 다 중국인의 교회들입니다. 전도의 문이 닫혔습니다. 인도나 실론 등에는 헌법상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은 되어 있으나 아직도 사회적으로 인도 종교를 택하는 힌두교가 절대다수이고 실론은 불교가 절대다수이며 파키스탄은 회회교가 절대 다수이므로 많이 전도의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난번 대회에서는 특별히 이 문이 닫힌 나라들에게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주십사고 두 번 특별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도 항상 이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어제 신의주 학생의거사건을 기념하는 반공 탑을 자유센터에 세우고 제막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북에 이 문이 열리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최근에 북한 연구 단체에서 나온「북한총감」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북한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에 관해서 자세히 수록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일 먼저 종교적 상황을 찾아보았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이북에는 六․二五 동란 이후 공개적으로 예배하는 곳이란 한 곳도 없는 모양입니다. 이북에 기독교동맹이라는 것이 있으나 사실은 공산주의의 어용기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북에는 기독교 활동이 전혀 없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一九五七년 북한에서 인민의회 대의원을 선거할 때 용천에서 일어난 사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은 누구나 다 투표 장소에 나가야 하는데 약 二천 명이 투표에 불참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이유를 캐보았습니다.
또 주일에는 협동농장 역시 결석자가 많은 것을 알아내고 비밀경찰 三백 명을 동원하여 결석자의 집안을 뒤져보았으나 한 사람도 집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뒤를 밟아 찾아가 보니 걸음이 잦지 않는 외딴 집에 三명 혹은 五명씩 모여 예배하고 있는 것을 그들이 목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한 사건은 이 만화 목사라는 분이 다른 곳에서 용천에 이사해 와서 농사를 하면서 그곳 협동농장에서 노역을 하고 있었는데 그분의 지도 아래 셋 혹은 다섯 명씩을 단위로 세포조직을 하여 횡적으로만 관계를 맺게 하고는 주일이면 몰래 모여서 예배하는 조(組)가 오(五)백 조 이상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비밀경찰이 이 사실을 알아내어 간부들을 전부 처형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이북에서는 그런 실정에서 예배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 남한에서는 어떻습니까? 자유로이 찬송을 부를 수 있고 마음놓고 주일을 지킬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참석을 게을리 함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다음으로 박천에서는 소위 찬송가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곳에 인민학교 여 교원 한 분이 주일이면 자기 집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산수, 국어, 노래 등을 가르쳤는데 아이들에게 찬송도 지도했다는 것입니다.
찬송 곡도 김일성 노래에 맞게 편곡을 해서 가르쳤는데 그 소식이 공산주의 간부들의 귀에 전해지자 그 여교사를 비롯해서 그곳에서 비밀리에 예배하던 많은 수가 숙청을 당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그런 감시의 눈초리 속에서도 아동들을 신앙으로 지도하려고 하는데 우리 남한에서는 주일학교 교사들이 얼마나 열의와 성의를 가지고 아동들을 지도하고 있습니까?
다음으로, 선천에서는 김 신부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곳에 돌아다니는 웬 노인 한 분이 만나는 사람마다 향해서 미친 말만 하다가 문득 머리를 들고는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남쪽으로 손짓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 어떤 일로 인해서 비밀경찰이 수상히 여기고 조사를 해보니 그 노인은 일찍이 모 지방에서 신부의 신분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탄로 났습니다. 그이를 비롯한 그이와 가까운 친분이 있는 여러분이 총살형을 받게 되었는데 사형 직전 이 노인은 똑똑한 음성으로『주여, 이 사람들이 알지 못하여 이렇게 하니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하는 기도를 남기고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앞으로 남북이 통일되면 이름 없는 순교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원산에서는 소위 십자가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곳 농장에서 일을 마친 후 공동 목욕을 하게 되었는데 옷을 벗다가 어떤 이의 몸에서 십자가가 떨어졌습니다. 이분 역시 천주교인임이 드러났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하여 원산과 함경남도 일대에 많은 천주교인이 있는 것을 알아내어 핍박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북한에는 이처럼 문이 닫혔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그들이 숨어서 예배드리며 전도와 일과 봉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로 후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방송을 통해서 격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 깨달을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남한에 전도와 일과 봉사의 문을 크게 열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열어놓은 것은 온 국민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문이 열린 것은 일하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일하고 있습니다. 바로 다음 해가 본 교회 창립 二十五주년입니다. 二十五주년 사업을 위하여 우리는 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주위의 변하는 상황을 볼 때 앞날을 위하여 우리 교회로서 해야할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리고 전국 복음 화를 위하여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남한에 보내시고 예수를 믿게 한 것은 일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감당할 용의가 있습니까? 물론 이것은 재정적 부담을 의미합니다. 희생적이어야 합니다.
개인 생활에도 열린 문과 닫힌 문이 있습니다. 몇 달 전에 병중에 있는 한 형제를 방문하였습니다. 그 때에 그 젊은이가 말하기를 이제 앞으로는 전도와 교회 일만 하겠습니다 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나 섭섭한 것은 그 병은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제가 돌아온 후 한 달만에 그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기억하십시다. 건강할 때에는 문이 열린 때입니다. 병이 나면 문이 닫힙니다. 건강할 때 일해야 합니다. 청년과 장년의 때는 일할 만한 때로서 문이 열려 있습니다.
나이 많아지면 원기가 쇠약해져서 문이 닫힙니다. 사업도 순조로이 될 때에는 문이 열린 때입니다. 그러나 사업도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불의의 재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문이 닫히면 일은 못합니다. 성서는 말합니다.『낮에 일하라 밤이 오리니 일 할 수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계시록 三장 二十절의「문」은 우리의 마음의 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문 밖에 서서 두드린다고 하였습니다. 유명한 예술가 홀맨 헌터라고 하는 분이 성경 말씀을 기초로「세상의 빛」이라는 제목의 성화를 그렸습니다.
그 성화에 보면 예수 님께서 굳게 닫힌 문 밖에서 한편에는 등불을 들고 다른 한편 손으로는 계속 문을 두드리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심령의 문 밖에서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모습이올시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모습으로 표현되나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찾으심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十五장의 비유를 기억하시겠지요. 목자가 양을 찾습니다.
여인이 잃은 돈을 찾습니다. 그리스도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인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어떤 때는 양심을 통하여 어떤 때는 이성을 통하여서 때로는 경험을 통해서 슬픔, 기쁨 등, 때로는 친구의 권면을 통해서 혹은 책을 통해서 방송을 통해서 인간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 그림을 자세히 보면 문의 바깥에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 문 밖에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이간의 마음은 스스로 열어야 하며 다른 이가 열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마음 문의 주인은 우리 각자 자신입니다.
주님의 문 두드리시는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어서 주님께서 마음속에 들어오시어 우리와 같이 먹고 마시는 축복을 받는 것도 내게 그 열쇠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나 열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멸망의 책임도 우리들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계시록 三장 十절 이하의 말씀은 믿지 않는 이에게 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한 말씀이올시다. 당시 그 교인들은 차지도 덥지도 않고 미지근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 입에서 토해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스스로 부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경고합니다. 너희의 영적 상태는 실상은 가련하고 가난하고 헐벗고 벌거벗은 상태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영적 상태는 옛날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하지마는 실상은 문 밖에 세워놓고 마음에 영접 지 않고 믿는 체하는 이들이 옛날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어느 때나 있습니다. 오늘도 있습니다. 우리가 과연 중심의 문을 열어 놓고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여 그의 뜻을 알고 순복하십니까?
우리가 문을 열어 놓고 그를 영접하면 그는 우리와 같이 먹고 마시고 축복하여 주십니다. 내 마음의 문은 어떠합니까? 닫혔습니까? 열렸습니까?
그리스도가 아직까지도 문 밖에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는 말씀합니다.「회개하라.」지난 싱가폴 전도대회의 표어가『그리스도는 아시아를 찾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아시아만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한국을 찾으십니다. 그는 나를 찾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