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50:15-21/ 하나님의 승리적 사랑/ 한경직 목사 2014-08-23 19:37:38 read : 1115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날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五十․二十)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 二十절의 말씀은 요셉이 그 형들에게 한 말입니다. 인간의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이 사랑을 이 시간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요셉의 생활은 참 소설 같습니다. 그는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또 그 꿈 때문에 비싼 대가를 지불할 수박에 없었습니다. 멀리 외국에 팔려가게 되었고, 거기서 오래 종노릇도 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곳에서 무서운 유혹을 이겼건마는 오리려 더 화를 입어서 감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이런 어려운 일을 말할 수 없이 많이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애굽의 총리 대신으로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사실 요셉은 사도 바울이 기록한 대로 비천한 데 처할 줄도 알고 풍부한 데 처할 줄도 아는 사람이올시다. 구약의 모든 인물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과 가장 비슷한 이가 요셉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예수 님께서 은 三十 냥쭝에 팔리신 것과 같이 요셉은 은 二十 냥쭝에 팔리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신 것과 같이 요셉은 광야 같은 애굽에서 어려운 시험을 이겼습니다. 그것보다도 예수님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모든 원수들의 죄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요셉도 자기를 죽이기로 모함했던 자기 형들의 죄를 용서한 것이올시다.
오늘 읽는 이 본문의 배경은 설명 안 할지라도 여러분은 대략 짐작하실 줄 압니다. 요셉이 이렇게 형들의 죄를 다 용서해주고 자기 아버지를 멀리 가나안에서 모셔 오고 형들과 모든 가족들을 애굽 땅으로 다 모셔다가 아주 기름진 고센 땅에 거주해서 편안히 살게 말들었습니다. 그 후 야곱도 여러 해를 평안히 살다가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야곱의 유언에 의지해서 그의 유해를 멀리 헤브론으로 옮겨서 거기 자기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이 묻힌 막벨라 굴에 장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요셉과 그 모든 형제들이 올라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애굽의 고관들과 애굽의 기병대가 보호를 해서 먼길에 평안히 안장을 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안장을 하고 돌아온 형제들은 다시 요셉에 대해서 의심이 났습니다.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준 것은 우리 아버지께서 계시니까 우리 아버지의 얼굴을 보아서 용서해 주었지마는 이제는 아버지도 세상 떠나서 장사했는데 이제 혹 우리 원수를 갚지 않을 까고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요셉에게 보내서 전하는 말이,『당신의 아버지 야곱이 살았을 때에 특별히 단신에게 이런 말을 부탁합니다. 다른 말이 아니고「너의 형들이 여러 가지 허물과 죄가 있지마는 나를 보아서 내가 간 다음에도 죄를 다 용서해 주라」고, 이런 말을 특별히 부탁했는데 이 형들의 죄를 꼭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이런 말을 사람을 보내 청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니 죄라고 하는 것은 항상 의심나게 하고 항상 두려운 마음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죄지은 사람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달아난다고 합니다. 또 이것을 보니 남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마는 죄 사함을 받은 다음에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믿기 는 아마 더 어려운 모양입니다.
요셉이 자기에게 사람을 보내서 자기 형들이 이런 말을 부탁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요셉은 아마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여기 성경을 보니 그저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는 벌써 용서해 준지 오래인데 지금도 자기를 의심하는 그 심경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민망했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후에 자기 형들을 통해서 요셉이 이와 같이 간곡히 말합니다.『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소서!』간곡히 위로한 것입니다.
자 여러분, 요셉이 자기 형들에게 말씀한 가운데 특별히 두 가지 말씀을 잠깐 기억하고 지나가면 좋겠습니다.
처음에 한 말씀이『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아마 그 뜻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원수를 갚겠습니까? 그 말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요셉은『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 그대로 믿는 사람이올시다. 요셉이 마음 가운데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계셔서 하나님은 공의의 심판자시요, 하나님의 맷돌이 천천히 돌아가지마는 다 공의대로 갚을 때가 있는 것을 요셉은 꼭 믿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할 것이요, 내가 할 일은 아니요. 이것은 다 하나님께 맡길 것이요, 나는 내 형들의 죄를 용서하겠다.』다시 말하면 요셉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자기 원수를 갚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먼저 이것을 배워야 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남을 벌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보복 행위는 매우 위험합니다. 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꼭 바로 보복할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잘못 보복할 수도 있고 항상 도에 지나쳐서 보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보복 행위라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역시 다시 보복 행위를 가져옵니다. 내게도 가져옵니다.
세상은 항상 변태 무쌍 합니다. 내가 오늘날 세력을 잡았다고 하지마는 내일 그 세력이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물며 자기도 하나님의 신판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양 보복을 한다고 하는 것은 심히 위험한 일입니다. 늘 삼가야 됩니다. 개인적 보복, 정치적 보복, 국가적 보복도 꼭 마찬가지로 우리가 항상 삼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이 관대한 마음과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의지하는 이 신앙을 배워야 될 것이올시다.
둘째로 하신 말씀이 오늘 이 시간에 중심이 됩니다.『당신들은 나를 해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사……』
그 형들은 요셉을 해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멀리 애굽에 팔았지요. 그러나 그 후에 모든 된 일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다 선으로 바꾸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요셉이 이와 같이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용서하게 된 둘째 동기는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가 당한 모든 억울한 일을 통하여 자기를 축복하신 사실을 기억하였습니다. 자기가 당한 모든 불행을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이것들을 마치 쇠사슬처럼 연락을 해서 마지막에는 자기에게 큰 축복을 해서 애굽의 총리 대신의 높은 자리로 올리게 하셨고,
자기만 축복한 것이 아니고 자기를 통해서 자기 아버지 야곱과 모든 형들과 자기 일족을 다 기근 가운데서 구원하게 만드셨고, 그것만 아니고 큰 기근 가운데서 수 없는 애굽 사람을 건질 수 있는 큰 축복을 하나님께서는 이룩하신 것을 기억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모략과 죄악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길 수 없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도 초월해서 이 모든 것을 말하자면 다스려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승리적 사랑이올시다. 인간의 죄악이라도 능히 승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올시다.
전에 바사 궁전에 에스더가 왕후로 있을 때에 된 일을 여러분은 다 기억하실 줄 압니다. 그때에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하만이라고 하는 재상이 저 문간지기인 모르드개라고 하는 유대 사람을 미워해서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하는 생각을 먼저 했고,
그 다음에는 모르드개가 유대 종족이라고 하는 것을 알자 유대 사람 일족을 전부 바사 제국 아래에서 전멸시킬 모함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함으로 왕의 인가까지 얻어서 왕의 조서에 어인 까지 찍고 그 조서를 모든 지방에까지 내어보냈던 것까지 사실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런 모든 인간의 무서운 모략과 이것을 다 쇠사슬과 같이 엮어서 마지막에는 오히려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모르드게는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되었고 오히려 이런 모함을 하던 하만이 자기가 세운 五十척이나 높은 기둥 위에 달려서 죽게 된 사실을 우리는 지금까지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능(罪能)을 초월 통치해서 자기의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이것은 어느 사람의 경우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미워했습니다. 사두개인들 역시 합작을 했습니다.
모든 제사장들이 예수를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모략을 하고 모함을 했습니다. 가룟 유다를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체포하고 거짓 재판을 하고 빌라도의 공판 정에 넘겨주었고 빌라도 역시 무책임한 책벌(責罰)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억울하게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든 것입니다.
얼른 보면 인간의 죄능이 이겼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를 통해서 만민을 구속하셨고 십자가는 승리의 표가 되었고 십자가는 만민의 소망의 표가 되었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제사장들과 그 때 유대 사람은 영원히 역사적으로 심판을 받게 되고야 만 것입니다.
그후 사실 주후 七十년에 이들과 그 일족이 멸망을 당한 사실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인간의 죄능이 때때로 대단히 크고 인간의 모함이 무섭고 어려운 것 같지마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기지는 못합니다.
전에 사도 바울이 억울하게 로마 감옥에서 오래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로 하여금 이 기회를 이용해서 불멸의 옥중 서신을 기록하게 해서 지금까지도 수 없는 성도들을 축복하여 주시는 것이 사실이올시다. 인간의 죄악이 아무리 크지마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악만이 아닙니다.
인간의 여러 가지 고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고도 역시 그렇습니다. 혹은 천재, 혹은 지변, 혹은 질병, 혹은 빈궁, 온갖 불행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도 초월 통치해서 축복으로 전환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올시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어디 가서 예배당을 짓든지 성 패트릭 기념 예배당을 짓습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성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성자입니다. 전 아일랜드 사람들이 성자로 모시는 그 패트릭이올시다.
여러분, 젊은 시대의 그의 역사를 읽어보면, 그이가 불행히 아마 요셉과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열 대여섯에 나서 아일랜드 해적들에게(그는 본래 영국 사람입니다)붙잡혀 갔습니다.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는 여러 해 동안 그 아일랜드에 가서 종노릇을 했습니다. 그 종노릇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에 패트릭이 거기서 우연히 석방을 받게 되었고 다시 와서는 공부를 계속했고 공부를 한 다음에는 다시 아일랜드에 돌아가서 전역을 미신에 얽매었던 그 무지한 백성들을 온전히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서 지금까지 아일랜드의 성자가 된 것입니다.
지금 일본에 나와서 활동하는 여러 선교사 가운데 특별히 드 세이저(Jacob De Shazer)라고 하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이 선교사는 본래 미 공군 폭격 부대의 일원으로 미국 비행기가 일본 동경을 제일 먼저 폭격한 그 두리틀(Doolittle)비행기에 같이 타고 동경을 폭격한 사람입니다.
그 비행기가 저 중경(重慶)으로 달아나다가 그만 채 가지 못하고 이 사람이 탄 비행기는 고장이 나서 저 상해(上海)방면에 떨어졌습니다. 다행히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서 죽지는 아니하고 일본 관헌들에게 잡혔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근 三, 四년 동안 상해, 대련(大連) 혹은 북경(北京) 그 다음에 일본에까지 여러 감옥으로 전전하면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당하고 일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그는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은혜를 받았습니다.『일본 사람들이 왜 이렇게 포악할까? 이 사람들이 성경을 모르는 까닭이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까닭이다. 내가 이 사람들에게 성경을 주고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밖에 없다.』그런 결심을 하였습니다. 포로에서 석방되자 곧 미국에 돌아가서 공부를 해 가지고 일본에 나와서 다시 전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난도 그 사랑으로 통치를 해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이와 같은 말을 하려고 하면 한량이 없습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파스칼(Pascal, Blaise)이라고 하는 분은 본래 유명한 자연 과학자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한 번은 말을 타고 가다가 다리에서 떨어져서 죽을 뻔하고 중상을 입고 치료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읽는 그야말로 불멸의 저서「파스칼의 명상록」을 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재난을 변해서 축복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맙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죄를 지어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까지도 이용해서 축복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죄를 지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가 죄 지으면 그 되의 형벌을 우리가 받습니다. 또 그렇다고 하나님이 죄를 짓게 하시는 것도 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아, 유다 가 예수를 팔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고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만민의 구주가 되었는데 그 유가가 죄 지은 것이 무엇이냐?』이런 소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유다 가 죄짓지 않은 것 아닙니다. 유다 는 하나님 명령으로 죄 지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죄를 지었습니다. 자기가 죄 지었으므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하나는 이렇다고 해서 인간고 자체가 축복이란 말도 아닙니다. 인간고라고 하는 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화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하는 말도 아닙니다. 사랑은 이와 같은 화라도 전환시켜서 축복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는 그 말입니다.
인간의 죄악과 재난은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일시로 파괴합니다. 그러나 아주 파괴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파괴한 조각을 모아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올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는 아주 파선이란 없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어떤 때 파탄이 되어서 조각 조각으로 날 때가 있지마는 하나님께서는 조각을 다시 모아서 더 좋은 배를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승리 적 사랑이올시다.
그런데 여기에 있어서 한 가지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꼭 이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이 사랑의 역사에 우리가 협력을 해야 됩니다. 자, 요셉의 경우를 보세요. 요셉이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에 얼마나 협력을 하였습니까?
요셉은 그와 같이 불행한 일을 당할지라도 그러한 억울한 일을 당하여서도 절대로 낙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원수 갚을 생각을 가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어떠한 처지를 당하든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자리에서 옳은 생활을 했고 그 자리에서 최선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만일 요셉이 그렇지 아니하고 종으로 잡혀가서 불만과 불평이 가득하고 낙심하고 자포자기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생활을 하였던들 요셉은 아주 영원히 종으로 살다가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써 우리의 깨어진 생활도 다시 축복하기 위해서 많은 은혜를 베풀지마는 우리가 거기 협력할 줄 모르면 하나님의 사랑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서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든지 이 어지러운 세상가운데서 살 때에 어떠한 불행이나 어떠한 곤란이나 어떠한 재난을 당하든지 낙심해서는 아니 됩니다. 불평을 가져서는 아니 됩니다.
자포자기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 처지에서 하나님의 승리적 사랑을 믿고 의지하면, 어떤 처지에서든지 양심적 생활을 하고 옳은 생활을 하고 보복할 생각을 하지 말고 그 처지에서 최선의 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현재는 모든 불행일지라도 큰 축복으로 전환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이 하나님의 승리적 사랑이 개인의 관계에 있어서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한나라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도 그러하고 또는 온 세계의 역사의 움직임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한 줄로 생각합니다.
가령 우리가 민족적으로 三八선이 오래 열리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으로 우리가 불평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것으로 불만을 토하고 이것으로 낙심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우리 민족을 축복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또는 이 견지에서 볼 때에 우리가 세계의 장래에 대해서는 과히 낙심할 것은 없는 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