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30:11-20/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한경직 목사 2014-08-23 19:52:45 read : 1582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 三十․十九)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자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임종하기 얼마 전에 자기가 四十년 동안 인도하던 자기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최후로 전하여 준 말씀입니다.『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요사이 한간에서 들리는 말 가운데 제일 많이 들리는 말은 못 살겠다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쌀이 없어서 못 살겠다. 집이 없어서 못 살겠다. 직업이 없어서 못 살겠다. 한 마디로 말하면 돈이 없어서 못 살겠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너무 많아서 못살겠다 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도둑놈이 너무 많아서 못 살겠다. 깡패들이 너무 많아서 못 살겠다. 협잡꾼이 너무 많아서 못 살겠다. 탐관오리들이 너무 많아서 못 살겠다는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어떤 정당에서 선거 때에『못 살겠다 갈아보자』이런 표어를 내걸었습니다. 아마 오늘날은 갈아보아도 못 살겠다 그러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하는 말을 잠깐 잊고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읍시다.『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어떤 개인이나 어떤 민족의 앞에는 언제든지 두 길이 있습니다. 살 수 있는 생명의 길과 망하는 길, 두 길이 있습니다.『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소하십니다. 생명을 택하면 살 수 있습니다.
「살기 위하여」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는「생존을 위하여」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적자생존(適者生存), 생존경쟁(生存競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 죽지 않고 생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 우리 민족이 어떻게 죽지 않고 생존할 수 있을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어떤 이들은 생존할 수 없어서 자살하는 이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살기 위하여」라고 하는 말은 생존의 뜻만이 아닙니다. 좀 더 깊은 뜻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사는 것처럼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이런 뜻입니다. 전에 탕자가 이방에 가서 남의 돼지를 쳐주면서도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존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생불여사(生不如死)라는 말이 있지요. 사는 게 죽는 것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이렇던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와서 새 옷을 갈아입고 손에 금가락지를 끼고 여러 부모, 친척, 형제들과 같이 상에 앉아서 기쁘게 참여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사는 것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처럼 살기 위해서 생명을 택하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풍성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도덕적으로 고귀하고 옳게 살기 위해서, 문화적으로 빛나게 살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번영하고 화평하게 살기 위해서, 생명을 택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살기 위하여」라는 말은 아마 좀더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영원히 살기 위해서」란 뜻입니다. 사람이란 간단한 육체의 일생이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시편 一0三편에 보면『일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절만은 아닙니다. 그 다음에 계속해서『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가지 이르며』라고 읊었습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이것은 이 세상의 생만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르친 것입니다.
전에 YMCA의 위대한 지도자로 계시던 월남 이상재 선생의 남기신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연세가 상당히 놓으셨을 때 어떤 청년이 가서 묻기를『지금 신문에 보니까 일본의 아무 수상은 一00세를 능히 살 수 있고 장담을 하고, 영국의 어떤 사람은 一二0세를 능히 살 수 있다고 호언 장담을 하는데 선생님은 얼마나 사시려고 합니까?』
이때 그 선생님이 곧 대답하는 말이『그건 다 사람이 어떻게 사는 법을 몰라서 그래. 나는 영원히 살 테요』하는 것이 없습니다. 『영원히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고 하였는데 생명의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 제가 몇 구절을 다시 봅니다.『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여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宣言)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생명의 길이 어디 있습니까?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찾고 그의 명령을 순종하며 그를 사랑하고 그의 규례와 법도를 지켜서 그의 뜻대로 사는 그 길이 한 마디로 말하면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므로「생명을 택하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을 택해서 섬기라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전 인류와 우리 민족과 또 우리 개인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참 생명의 길이 되시는 참 신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반면에 거짓 신과 우상들이 있습니다. 무신론적 사상, 유물론적 사상, 인본주의적 사상, 참 하나님과 반대되는 우상들이 있습니다.
내가 참 하나님을 택해서 이 하나님을 섬기겠느냐? 거짓 신과 우상을 택해서 그것을 섬기며 그것을 따라 가겠느냐? 전 인류의 앞에 두 길이 있습니다. 우리 앞에 두 길이 놓여 잇습니다.
우리가 어느 길을 택하겠느냐? 성경 말씀은『살기 위해서 생명의 길이 되시는 하나님을 택하여 그의 백성이 되고 그를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이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택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영적 방면입니다.
둘째로 정치적 방면에 있어서 두 가지 길이 있는 줄 압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고,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습니다. 자유로 인도하는 길이 있고, 노예로 인도하는 길이 있습니다. 자유로 인도하는 길은 생명의 길이요, 노예로 인도하는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의 앞에도, 세계 인류의 앞에도, 이 정치적 견지에서 볼 때에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습니다. 참된 자유로 인도하는 민주주의냐? 그렇지 않고 이간을 노예로 삼으러 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독재주의냐? 하는 것입니다.
우익이나 좌익의 분별이 여기에는 없습니다. 독재주의는 언제든지 인류를 구속하는 것입니다. 신문에 보니까 얼마 전에 서울대학생들이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했다고 합니다. 그 민족적 민주주의의 뜻이 무엇인지 저는 사실을 모릅니다. 아마 그 말한 사람들은 알겠지마는 우리 사회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꼭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어쨌든 민주주의란 말 위에 그런 형용사를 붙일 필요가 무엇입니까? 거기에 사상적으로 석연치 않은 게 있습니다. 그런 불투명한 사상을 가지고 우리 민족이나 국가를 지도할 수 없습니다. 그 형식이 어떠하다는 것은 이렇게도 생각하고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마는, 근본적으로 그런 불투명한 사상계통을 장사 지내는 것은 잘할 일인 줄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자유를 택하고 앞으로 자유를 계속 수호하려고 하면, 항상 몇 가지 기억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우리는 법과 질서를 존중하고 지킬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무법 한 행동이 아닙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질서를 무시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법과 질서 아래에서만 참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국민이나 위정(爲政)당국(當局)을 막론하고 우리가 자유를 수호하려고 하면, 언제든지 법과 질서를 존중할 줄 알아야 됩니다.
우리 국민 가운데도 아직도 이 이상이 투철하지 못해서 실수를 많이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염려를 많이 하는 것은,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입니다.
군인 법원 침입사건이니, 학생 린치사건이니, 학원 침입사건이니, 이런 모든 것들은 권력을 배경으로 하는 사람들의 법과 질서를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크게 국가를 위해서 염려가 됩니다.
또 언제나 자유의 적은 부패와 부정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부패와 부정이 있는 곳이 자유의 꽃이 피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요새 우리 사회 각방면에서 요구하는 것과 같이 과감하고 뿌리를 뽑아내는 시책을 속히 쓰지 않으면 안 될 사태를 우리가 당하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우리가 자유의 백성이 되려면 이 법과 이성과 양심에 의지한 생활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태를 만나든지, 어떤 사건을 처리하든지, 이 법을 존중히 여기고 이성을 살려서 냉철히 모든 것을 헤아릴 줄 알고 양심에 비추어서 옳은 생활을 해야 합니다. 감정에 휩쓸리거나 군중심리에 요동해서 떠들게 되고 무질서하게 되면, 결국은 자유가 유지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우리는 자유를 택하고 자유를 수호해야 되겠습니다.
셋째로 도덕적 방면에 있어서도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물론 보편적 의미로 말하면 언제든지 선은 생의 길이요, 악은 사망의 길입니다. 의는 생명의 길이요, 불의는 사망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보편적인 진리를 우리 한국 실정에 비추어서, 범위를 조금 생각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는 진실과 근면의 길이 있고, 반면에 허위와 나태의 길이 있습니다. 진실과 근면은 생명의 길이요, 허위와 나태는 사망의 길입니다. 개인에게나 민족에게나 특별히 어떤 도덕적 약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이 허위와 나태의 약점이 있는 듯 싶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사실 가짜가 너무나 많습니다. 일전에 신물을 보니까 가짜 마이신을 만들어 팔은 사람도 있습니다.
약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생명에 관계되는 것인데 가짜 약을 만들어 팔아서 그 약을 환자가 쓰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데 이런 일을 감행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가짜 학생, 가짜 형사, 가짜 의사, 가짜 박사, 아마 가짜 목사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이 최근 어떤 잡지에 기고를 하였는데, 우리 한국은 지금 진실성이 다 없어졌고 우리 사회가 와해되어 간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였습니다.
사실입니다. 말의 진실이 없으니 누구의 말도 믿을 수 없고, 누구의 말도 믿을 수 없으니 무슨 일을 할 수 없고, 경영할 수 없고, 시행할 수 없습니다. 공사(工事)에 진실이 없으니 매일 도로 포장공사는 하지마는 一년이 못 돼서 구멍이 뚫어지고 맙니다.
건축공사에 진실이 없으니 집은 높이 지었는데 무너져서 十여명이 압사하는 참혹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제품에 진실이 없으니 국산을 애용하려는 사람들이 국산을 쓸 때마다 실망을 합니다. 허위와 나태는 사람의 길입니다. 살기 위해서 진실과 근면을 택해야 합니다.
지금도 유명하지마는 미국에 콜게이트(Colgate)회사가 있습니다. 비누를 만들고 치약을 만들고 하는 큰 회사인데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 회사를 처음 설립한 사람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래 전에 그이가 뉴욕 어떤 촌에서 살았는데 아마 十七, 八세쯤 나서 자기 촌을 떠나 뉴욕으로 나왔습니다. 그 앞에는 조그만 강이 하나 있는데 그 강을 건너 나룻배에서 어떤 노인을 만나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너 어디 가느냐?』물었습니다.『저 뉴욕에 가요.『뉴욕에 뭘 하려 가느냐?』『나도 뉴욕 가서 뭘 좀 해보려고 갑니다.』『그래 너 그것 참 좋은 생각이라. 그런데 뉴욕엘 가면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느냐?』
『지금은 모르겠어요, 그전에 우리 삼촌 네 집에서 비누 만드는 걸 좀 배웠는데 가서 비누나 좀 만들어 보면 어떨 가 합니다.』『대단히 놓은 생각이다. 내 생각은 앞으로 뉴욕이나 온 미국에 비누 잘 만드는 유명한 회사가 생길 줄 꼭 아는데 혹 네가 이 다음에 그런 사람이 될지 아느냐?
그저 내가 부탁하는 것 비누를 만들 때에 진실하게 만들어라. 한 근의 비누를 만들려면 한 근 되리 만큼 재료를 써라. 남 속이지 말고. 저울대 속이지 말아라. 그리고 돈을 얼마나 벌었든지 꼭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라.』
이렇게 말한 노인은 강가에 앉아서 그 아이를 위해서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 후에 이 아이가 뉴욕에서 어떤 비누 만드는 조그만 공장에 가서 일하기 시작했고 일을 하는데 이 노인의 부탁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꼭 그대로 했습니다. 노인의 말이 인연이 되어서 과연 그 방면에 이 청년이 성공을 했습니다. 제품에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근면이 있어야 합니다. 살기 위해서 우리는 이 진실과 근면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넷째로 우리가 경제생활을 말할 때, 물론 여러 가지 면으로 생각할 수 있지마는 여기에도 제가 보기에 꼭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면이 있지마는 저 보기에는 국산을 애용하는 길과 외래품을 애용하는 길, 그 두 길이 있습니다.
국산을 애용하는 길은 생명의 길이요, 외래품을 애용하는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 이미 말했지마는 국산품을 만드는 사람은 진실하게 만들기를 힘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으로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은 국산품이 가령 외래품보다 처음에는 좀 못하다고 해도 국산품을 쓸 각오를 가지고 그것을 써야 할 줄 압니다. 왜? 이렇게 하면 국산품이 점점 잘 만들어져 나올 줄 압니다. 좀더 잘 만들려고 힘쓸 줄 압니다. 우리 기술도 점점 발전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산업이 일반적으로 발전될 것입니다. 요새 보면 공장을 지었는데 굴뚝에 연기는 안 납니다. 그런 공장이 다 돌아갈 수 있는 줄 압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 우리 사회의 제일 큰 문제인 취직난이 해소될 것입니다.
일자리가 많아질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되면 우리 한국사회에 큰 암이 되는 밀수도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우리 돈이 외국에 나가지 않고 우리 한국사회에 피와 같이 항상 순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국민이 다 잘 살게 될 줄 압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 국민이 이런 각오가 없이 지금 좀 낫다고, 지금 좀 보기 좋다고 외래품만 그냥 계속해서 사고, 이것만 팔고 이것만 쓴다고 하면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외래품은 그 대가가 어떤 사람의 손을 통하든지 외국으로 다 나가고 맙니다. 돈이 다 외국으로 나가고 맙니다. 이 땅에는 점점 외화가 줄어듭니다. 마지막에는 물이 점점 줄어드는 웅덩이의 고기새끼처럼 다 말라죽고 맙니다.
이게 사망의 길입니다. 우리가 경제면으로 볼 때에 어떻든지 국산품을 애용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또 우리의 역사가 四천년이니 五천년이니 하면서, 민족적 긍지도 좀 생각해야 괴겠습니다.
요새 거리에서 보는 대로 무슨 독일 빵집이니, 뉴욕 제과점이니, 파리 양장점이니, 아스토리아 호텔이니 이렇게 자꾸 서양식만 따라 쓰다가는 아마 성도 이런 모양으로 창씨(創氏) 할는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내 것이 귀한 줄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우리 한국사람들은 적어도 앞으로 몇십 년 동안은 커피나 홍차를 안 마셔야 될 줄 압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한국에서 생산을 못합니다.
특별히 커피 같은 것은 열대지방 아니면 생산을 못합니다. 우리의 경제가 매우 좋아진 다음에는 모르지마는 당분간은 구수한 보리차가 제일인 줄 압니다. 또 좋은 인삼차도 있습니다. 생강차도 있고, 요새 들으니까 무슨 하부차도 있다고 합니다.
왜 외래품만 자꾸 모방합니까? 좀 잔소리 같지마는 우리가 꼭 여기 재해서 각오가 있어야 생존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섯째는 실제 소비 면에 있어서도 이 두 가지 길이 있는 줄 압니다. 하나는 검소(儉素)와 절제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사치와 낭비의 길입니다. 검소(儉素)와 절제의 길은 생명의 길이요, 사치와 낭비의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
우리는 살기 위하여 검소 와 절제를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아직도 알 수 없는 일은 이렇게 쌀이 없어서 외국의 양곡을 갖다가 빌어먹으면서도 왜 한국에서 나는 귀한 쌀을 여러 만석 썩혀서 술을 만들어서 마서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외지를 보니까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담배를 피우면 암에 관계가 있다고 하는 과학적인 발견을 한 후로부터 그 영향을 받아서 단연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어떤 담배회사는 큰 손해를 보게 되었고, 그렇게 되니까 그런 회사가 많은 주에서는 세금이 줄어져 이 예산 집행에 큰 곤란을 당한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담배를 상당히 많이 끊은 모양입니다. 꼭 같은 뉴스가 한국에도 다 전파가 되었건마는 담배 피우는 사람들 가운데 이 이야기를 듣고 단연 했다고 하는 사람을 아직 한 사람도 못 만나봤습니다. 참 한심하단 말입니다.
한국처럼 양극단의 대립이 심한 나라는 없는 것 같습니다. 누더기로도 몸뚱이를 채 가리우지 못하는 얻어먹는 형제들이 거리에 많이 있는가 하면, 파리나 뉴욕엘 가도 거기 귀부인들이 감히 비교도 못할 만큼 화려하게 차리고 걸어다니는 한국 부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들으니까 어떤 분이 파리에 아서 양장하는 범을 배워 가지고 와서 파리 식으로 양장을 한다고 하니까 그저 사업이 잘 된다고 합니다. 이게 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좀 미안하지만 사실이니까 여러분에게 대신 전해 주는 것뿐입니다.
내가 한 집에 심방을 했을 때 어떤 분이 저에게 솔직히 이야기하는데『영락교회를 가긴 갑니다. 한데 그 영락교회에 가보면 너무 사치한 분들이 많아서 이거 눈꼴이 사나와 다니기가 힘이 듭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다 깊이 들을 필요가 있는 말인 줄 생각합니다. 살기 위해서 검소 와 절제를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 생활에 있어서도 두 가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상부상조와 협동단결의 길이 있고, 파멸과 분쟁과 분열의 길이 있습니다. 상부상조와 협동단결의 길은 생명의 길이요, 파벌과 분쟁과 분열의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해방 이후에 우리 사회의 각계 각층에서 얼마나 분쟁을 하고 얼마나 분열을 했습니까? 그런데 우리 교회도 한몫 잘 끼었습니다. 그렇게 한 결과 오늘날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이 무엇입니까? 황폐한 강산뿐입니다. 살기 위해서, 생존하기 위해서, 우리가 앞으로 상부상조할 줄 알고 협동단결 할 방법을 꼭 배워야 하겠습니다.
살기 위하여 하나님을 택해야 하겠습니다. 살기 위하여 자유를 택해야 하겠습니다. 살기 위하여 진실을 택해야 하겠습니다. 살기 위하여 검소 와 절제를 택해야 하겠습니다. 살기 위하여 국산품을 애용해야 하겠습니다. 살기 위하여 상부상조하고 협동단결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먼저 이 방면에 솔선 수범해야 이 민족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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