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27:1-6/ 환난의 날과 신앙 / 한경직 목사 2014-08-23 20:20:59 read : 1286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는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시 二十七․五)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환난 날에 가지는 신앙의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어떠한 환난의 날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시고 바위 곧 반석 위에 두실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개인생활에는 말할 것도 없으며 민족적 생활에 있어서도 환난의 날은 있는 것입니다. 사업이 갑자기 실패를 당한다든지, 실직을 한다든지, 중한 병으로 눕게 된다든지, 혹은 사랑하는 가족이 세상을 떠나든지 하는 환난의 날을 우리는 종종 당하게 됩니다.
이 날을 바로 맞이하지를 못하기 때문에 사회에 더욱 많은 불상사가 계속 일어나는 것을 또한 목도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환난의 날은 올 수 있습니다.
속담에『병은 눈썹에서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환난은 예고 없이 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환난에 날에 있어서 가장 귀한 신앙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말씀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환난의 날에 경계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불 신앙의 태도를 경계할 것입니다.
(1) 도피적 태도입니다. 큰 슬픔, 실패, 상심, 이러한 일을 당할 때, 신앙이 부족한 사람들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제일 먼저 가는 곳이 술집입니다. 밤새도록 술을 마십니다. 좀 잊어보려고 그런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술 마신다고 큰 슬픔이 잊어버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 같은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흥분됩니다. 혈압이 높거나 심장이 약한 이는 그만 큰 비극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극장으로 달려가고, 어떤 분은 여행을 해 보고, 어떤 분은 심지어 마약을 써 봅니다. 어떤 이는 큼 마음의 짐을 지기 어려워서 심리 자체에 이상을 가져옵니다.
정신이상이 됩니다. 정신분열증을 가져옵니다. 이런 정신이상은 심리적 현실도피 작용입니다. 이것을 경계해야 됩니다.
(2) 스토익 태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아덴에 가서 전도할 때에 거기『에비구레오 스도이고 철학자들이 와서 토론하는 글귀를』볼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헬라 철학자들 가운데 소위 스토익파에 속하는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큰 환난과 어려운 일을 당할 때면『모든 것은 운명인데 우리 인간이 별 수가 잇느냐? 그저 인간의 이지로써 견디어야 한다. 아무리 아파도 견디고 슬퍼도 견디어야 된다.』이렇게 주장하고 실행한 것입니다.
그 때 종으로서 유명한 스토익 철학자가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에픽테투스 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이런 철학으로 일생을 사는데 한 번은 악한 사람들이『이 사람이 얼마나 아픈 것을 견디나 보자』하고 이 사람의 다리를 비틀기 시작했습니다. 대단히 아프도록 비틀었지마는 아프다는 소리를 안 했습니다. 계속 힘껏 비트니까『당신들이 그렇게 비틀면 내 다리가 부러질 것 같소』 이 한마디밖에 안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꽤 견딘다 하고는 바짝 더 비트니까 그만 다리가 뚝 불어졌습니다. 그래도 아프다는 말은 안 하고『내가 그렇게 되겠다고 말하지 않았소?』하는 말 한 마디만 했다는 것입니다. 장한 일은 장한 일인데 그렇게 견딜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十九세기 말엽에 영국에 윌리암 E 헬리 라고 하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렸을 적부터 폐병에 걸려서 많은 고생을 했고 뿐만 아니라 다리 하나는 절단수술을 했습니다.
그는 그 후에도 일생토록 몸이 약해서 수술을 많이 받았지만 아주 천재적 시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생활철학이 바로 스토익 철학이었습니다. 인간의 의지로써 온갖 역경을 극복 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그런 시도 썼습니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요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라고 하는 유명한 시도 지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힘을 쓰고 시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격려했지마는 결국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지 압니까? 자살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우리 한국에 유명한 김소월이 이와 비슷합니다. 이 김소월 군은 참으로 천재적 시인이었습니다. 저와 오산학교 동창인데 학생 때부터 아주 시를 잘 썼습니다. 많은 아름다운 시를 썼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이 분이 하나님을 찾지 못했습니다. 신앙을 얻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결국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간의 의지라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3) 반항적인 태도입니다. 흔히 슬픈 일과 큰 실패와 어려운 생의 비극을 당할 때에 반항합니다.『왜 이런 일이 내게 생길까? 하나님이 과연 계신가? 하나님의 계시다고 하면 왜 이런 일을 막지 못하는가? 이런 하나님은 내게 무슨 쓸데가 있는가?』하며 반항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회를 저주하고 친구를 원망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그런 태도는 우리가 성경에서도 더러 봅니다. 욥이 큰 환난을 당해서 재산이 없어지고 자손들이 다 없어지고 몸에는 악창(惡瘡)이 났습니다. 자리에 눕지도 못합니다.
기왓장으로 몸을 긁으면서 앉은 그 남편의 참혹한 모습을 보고 욥의 처가 뭐라고 말했습니까?『이제도 그냥 하나님 앞에서 옳은 생활하기를 힘쓸 것입니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시요.』반항의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는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결국은 파멸의 길입니다. 우리는 생의 큰 위기와 비극을 당할 때에 이런 그릇된 불 신앙의 태도를 조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런 때에 우리가 마땅히 가질 태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앙의 태도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 믿는 사람도 환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여기 세상을 이기었다고 하는 말의「세상」은 환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지금 렌트기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렌트기간이 어떤 기간입니까? 주님의 환난의 날을 기념하는 기간입니다.
주님께서도 환난을 당하셨는데 우리라고 환난을 당하지 말라고 하시겠습니까? 으레 당할 줄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신앙적 태도입니까? 욥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욥은 그런 큰 생의 위기를 당할 때에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여호와 주시고 여호와 찾으시니 오직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시리로다.』이런 태도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뜻은 알 수 없으므로『오! 하나님이시여』하고 하나님 앞에 가까이 와서 눈물로써 부르짖은 것입니다. 캄캄한 환난의 밤에 위를 바라보면서 소망의 별을 찾으려고 힘쓴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의 밤을 당할 때에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와서 이 사정을 고하며 이 환난의 밤을 바로 맞을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 하시리라』고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그런즉『나에게도 이 시험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을 것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라』고 말씀 하셨사온즉 약속하신 그 대로 나에게 이루어 주시기를 바랍니다.『너희가 강을 건널 때에도 내가 침몰치 못하게 하고「너희가 불을 건널 때에도 타지 못하게 보호하여」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대로 이 환난의 날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도록 나는 도와주시기를 구합니다』하고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할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仰望)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오, 달음박질하여도 곤비(困憊)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나에게 새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내가 고아와 같이 너희들을 그냥 두지 아니하고 장차 보혜사(保惠師)를 보내서 너희와 함께 있게 하며 너희에게 능력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대로 보혜사 성신을 나에게 충만히 주시기를 기도합니다』라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할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옛날 이스라엘의 성도들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세 사람이 멀리 바벨론에 잡혀갔다가 우상숭배를 거절한 까닭으로 풀무 불에 던짐을 받게 되었습니다. 실상은 세 사람을 던졌는데 네 사람이 풀무 불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한 분은 여호와를 가리킨 것일 것입니다.『이와 같이 옛날에도 수난 중에 있는 성도들과 같이 계셔서 힘을 주시고 그들을 보호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날 풀무 같은 환난의 구덩이에 있는 나를 어찌 버릴 수 있습니까? 같이 계셔서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하고 간절히 부르짖을 것입니다.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환난의 날은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요, 환난의 날은 여호와께서 가까이 계시는 때입니다.
우리는 지금이 욥과 같이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들을 때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오는 비결을 꼭 배워야 될 것입니다.
둘째로 환난을 통하여 주시려는 하나님의 교훈을 우리가 받아야 합니다.
어찌해서 큰 환난이 내게 미치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다 깨달아 알 수는 없습니다. 생의 이편에서는 우리가 그 모든 이유를 다 깨닫지 못합니다. 이 다음에는 깨달아 알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아무리 환난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욥의 경우를 보세요. 욥으로 하여금 그렇게 큰 슬픔을 당하게 한 모든 일은 물론 악마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마귀에게 허락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하면 아무리 슬프고 어려운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뜻을 들을 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욥기에 보니 하나님께서 폭풍우를 통해서 말씀하였다고 했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큰 환난 즉 폭풍우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전에 요나가 다시스를 향해서 배를 타고 갈 때에 큰 풍랑이 일었습니다. 하나님께선 큰 풍랑을 통해서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네가 가는 길을 돌려라. 네가 가는 길의 방향이 틀렸다.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탕자가 자기 아버지를 떠나서 멀리 외국에 가서 허랑 방탕하며 죄악의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가 몇 해 후에 그 곳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큰 궁핍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궁핍을 통해서 탕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네 아버지께로 돌아가라. 왜 여기서 이런 궁핍의 생활을 하느냐? 네 아버지께로 돌아가라』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어떤 선한 목적 때문에 이 환난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전에 어떤 친구는 탁상시계를 하나 갔다가 그것을 엎어놓았습니다. 누가 몇 시냐고 물어보면 제쳐보고 다시 엎어놓곤 했습니다. 그래서 누가『왜 그 시계를 엎어놓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의 대답이『그거 이상합니다. 이 놈의 시계는 엎어놓아야 바로 갑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혹 우리가 바로 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엎어놓는 때가 더러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우리로 하여금 하늘을 쳐다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우리를 반듯이 눕게 한다.』
우리가 사업도 하고 이것저것 하느라고 분주해서 실상 위를 쳐다볼 사이가 없습니다. 병원에 입원해서 반듯이 눕게 되면 자연히 위를 쳐다봅니다 질병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할 때가 있습니다.
이태리에 가보면 중세시대부터 내려오는 월렌시안 쳐치 라고 하는 유명한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를 맨 처음에 설립한 분은 피터 월터 라고 하는 분인데 이 사람도 젊었을 때는 보통 이태리 청년들과 같이 허랑 방탕 하는 젊은 이었습니다.
어떤 날 저녁, 한 친구의 집에 모여서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자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친구 하나가 쓰러져 생명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함께 즐기던 이 청년은 그 친구의 비참한 최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다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가고 정욕도 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 세세 에 있으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셋째는 환난을 통해서 오는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미 말한 대로 이 환난이 아무리 아프고 어려운 것이더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요셉의 생활을 생각해 보세요. 요셉이 형들의 시기로 종으로 팔려 가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환난에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 축복이 따랐습니다.
요셉에게 만일 그 환난이 없었던들 그 후의 축복은 물론 없었을 것입니다. 축복이 따른 환난이었습니다.
그 환난 후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큰 부자로서 큰 공장을 가지고 잘 사는 분이 있는데, 한 번은 홍수가 나서 재산이 전부 물에 쓸려 떠내려갔습니다. 집과 공장이 모두 휩쓸려 내려갔습니다. 며칠 추에 비가 그치고 바람이 잔잔해지고 다시 해가 나서 물이 준 다음에, 이 사람이 자기 집 자리에 가보았더니 아무 것도 없고 돌작밭과 모래밭뿐이었습니다.
너무 기가 막혀서 이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서 통곡을 하고 울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눈물을 씻고 앉았는데 사방을 가만히 돌아보니까, 이상스럽게 모래와 돌작밭 사이에 광채가 나는 모래알들의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조그만 금싸라기들입니다. 그 곳은 사금 밭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금을 많이 캐어서 오히려 전보다 더 큰 부자가 되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지어낸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욥기 二十三장 十절에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나의 가는 길을 나는 모릅니다. 이런 일이 왜 생기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아시는 하나님이 이런 경험을 통해서 나를 연단 시킨 후에는 내가 정금같은 인격이 되어서 나올 것입니다. 욥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五장에 이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환난은 모든 덕이 잘 자라날 수 있는 옥토다.』온유, 겸손, 성결, 인내, 자비, 관대, 용기와 같은 덕은 환난의 밭 눈물의 밭에서 잘 자라나는 풀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말라야 라고 하는 나라에 가 보면 전부 고무 농사를 합니다. 고무과원이 전 반도를 덮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도 성한 고무나무는 없습니다. 다 칼로 째어놓았습니다. 칼로 짼 그 자리에서 흐르는 고무풀을 그릇으로 받아서 여러 가지 물품을 만듭니다.
상한 심령으로부터 참된 사랑과 참된 동정과 희생의 정신이 흘러서 하나님을 봉사하고 이간을 봉사한 위대한 인물들이 얼마나 역사상에 많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환난에 따르는 축복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받는 길은 오직 신앙의 태도로 환난을 당하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만 그런 게 아니고 민족도 역시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얼마나 큰 환난을 당했습니까? 벽돌 굽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마는 아이를 낳으면 남자는 나일강에 던지는 참혹한 일가지 있었습니다. 큰 환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환난은 매우 귀한 환난이었습니다. 그 때에 그런 핍박을 안 받았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그런 핍박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민족의식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애국심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모세와 같은 인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애굽을 박차고 광야로 나오고 마지막에는 가나안 복지로 들어갔습니다. 만일 그런 환난이 없고 평안했던들 이스라엘 백성은 그냥 애굽에 있었을 것입니다. 옥토 고샌 땅에 그냥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많은 애굽사람 속에 섞여 사니까 다 동화되고 아주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것이 땅에서 찾아보기 어려웠을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보면 그 환난이 있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선민의 사명을 행할 수 있었고 큰 축복이 따른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도 민족적 환난의 밤이 깊습니다. 일게 三十六년의 환난을 우리가 당했습니다. 해방이 된 후에도 三八선으로 말미암아 그 밤은 계속이 됩니다. 六․二五가 지나갔습니다. 아직까지도 환난의 밤은 깊고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받는 이 환난이 결국은 화가 되겠느냐, 축복이 되겠느냐 하는 것은 우리 민족이 어떠한 태도로 이 환난을 받느냐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불 신앙의 태도로 이 환난을 받을 것입니까? 원망으로 저주하고 반항하고 죄를 더 짓고 그러면 분명히 이 환난은 멸망의 환난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큰 환난을 당할 때에『이 때야말로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을 찾을 때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이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자,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우리가 서로 단결하자, 하나님을 의지하자』하는 신앙의 태도로 이 환난을 당하면 이 환난이 큰 축복을 가져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전국 복음화 운동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三천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자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환난 뒤에 따르는 축복을 우리는 꼭 받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다 개인으로나 민족적으로나 환난의 잠을 지나가고 있는데 불신앙의 태도를 조심합시다 신앙의 태도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축복을 꼭 받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도 환난의 날 즉 십자가를 통해서 만민을 구속하는 위대한 일을 이루었습니다. 환난의 날을 신앙으로 받아야 되겠습니다.
이 날이 변해서 큰 축복을 가져오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인 것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