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14/ 창조주 하나님 / 한경직 목사 2014-08-23 20:26:30 read : 1285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 十九ㆍ一-四)
이 시간은 七十년대에 사는 크리스천으로서 마땅히 알아야 하고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七十년대에 처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생각합니다. 어제 아침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과학 시대요 과학을 통해서 많은 방면에 큰 변혁이 왔으므로 우리 믿는 사람으로서 여기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과학의 발전은 매우 필요하고 과학의 발전으로 많은 인간 생활에 혁명이 일어난 것이 사실입니다. 어제 아침 우리가 생각한 것과 같이 과학 혁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과학도 그 영역에 제한이 있는 것입니다.
과학은 우리의 외부 생활에는 큰 변천을 가져올 수 있지마는 인간의 속, 인간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二十세기의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과학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들에게 전에 없었던 지식과 엄청난 힘, 그 가운데는 파괴력을 가진 무기까지 손에 잡히게 되었는데, 이 엄청난 힘을 바로 쓸 줄 아는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밖에는 없는 것을 우리가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학 혁명만으로는 부족하고 정신적 혁명이 꼭 인간에게 있어야 하겠고 또 이러한 혁명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아침 이 시간에는 아주 중요한 문제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 우주관이올시다. 오늘 아침 읽은 시편 十九편 一절 이하는 우리 성경에서도 유명한 성귀(聖句)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穹蒼)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 우주관을 우리는 봅니다.
이 시를 기록한 다윗이 하늘을 보고 궁창을 볼 때에 이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이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이 지혜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유감 된 것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사람들 가운데는 이것을 분명히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제 시편 四十편 一절을 읽을 때에 들으시기 바랍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중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무신론자는 二十세기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편을 기록한 옛날에도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옛날 시대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옛날에도 어리석은 자들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를 더러 부인한 자들이 있었지마는 그 수는 매우 적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二十세기에 와서는 이와 같은 자들의 수가 많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의 수가 많아질뿐더러 이런 무신론적 철학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사상이 일어나서 세계 인구의 약 三분지一을 관할하면서 이런 무신론을 적극적으로 전파할뿐더러 소위철의 장막 배후에서는 믿는 사람들을 핍박합니다.
북한의 사회 사정이 어떻게 된 것, 교회 사정이 어떻게 된 것을 여러분이 자세히 아십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이렇게 내어놓고 하나님께 찬송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은 한 곳도 없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중공에서도 몇 해전 소위 문화 혁명이 있은 후에는 내어놓고 공중으로 예배하는 곳은 한 곳도 없어졌다고 합니다. 지금 이와 같은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왜 믿으며 어찌하여 기독교 우주관이 진리인지 이것을 우리가 확실히 내 자신이 깨달을 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을 만큼의 준비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七十년대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공산주의 사회에만 있는 줄로 알지 맙시다. 소위 우리 민주주의 사회에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성한 나라라는 미국에서도「아메리카 무신론자 연맹」이라는 것까지 있습니다.
또 우리 남한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저 사람은 하나님을 믿겠지 그렇지마는 사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머리로서는 하나님이 계시겠거니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계신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을 보고 압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사실로 계시는 것을 알면 부정과 부패한 행동을 계속할 수 있을 것입니까? 사실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제가 지금 말하는 것처럼 여러분이 분명히 알면 이런 하나님 앞에서 계속 죄악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도적질하는 사람들, 음란한 사람들, 뇌물을 주고받는 사람들, 모든 부정 부패를 행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모릅니다. 믿지 않습니다.
혹 예배당에 출입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소위 프랙티칼 에이티이즘(practical atheism)이라고 합니다. 실제적 무신론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사실 하나님께서 계신 줄 알면 자연히 마음이 변해집니다. 정신 혁명이 저절로 됩니다. 옛날 우리 동양의 성현도 신목여전(神目如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이 번갯불처럼 밝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번갯불처럼 밝아서 우리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을 알면 그냥 죄를 지을 것 같습니까? 죄 못 짓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정신 혁명이 제대로 되려면 누구나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이 우주를 만드시고, 이 우주를 지배하시고 내 일생을 다스리시고 나를 천당에 보낼 수도 있고 지옥에 보낼 수도 있는 하나님을 분명히 알아야 정신 혁명이 됩니다. 그래야 마음이 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남한과 같은 민주사회에서도 아주 중요한 것은 우리 아이들에게까지 라도 하나님께서 계셔서 우리를 내려다보시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므로,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은 하나님이 계신 줄을 다 아는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는지 그 이유를 내가 먼저 우리 마음에 한번 정돈하기 위해서, 또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우리의 신앙을 전파할 수 있고 변호할 수 있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믿는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어떻게 무엇을 아느냐? 우리가 하나님뿐 아니고 무엇이던지 어떻게 아느냐? 우리가 지식에 이르는 경로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아는 길은 간단히 말해서 네 가지가 있다고 보겠습니다.
첫째는 이성의 길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생각하고 이치를 미루어서 아는 길, 이성의 길이올시다. 유명한 이야기를 여러분 다 들었지요, 전에 뉴우톤이란 사람이 사과나무 아래 앉아 있는데 바람이 한번 지나가니 사과가 우수수하고 땅에 떨어집니다.
보통 사람은 흔히 보통으로 보아 넘기지요. 하지만 이 사람은 과학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저놈의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옆으로도 안가고 위로도 안가고 왜 아래로 떨어질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생각하는 힘 그것을 이성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의 결론은 뭐였습니까? 그것은 필경 땅이 잡아당기는 힘이 있는 모양이로군. 지금은 상식으로 모두 아는 이야기지만 그 때 그가 처음으로 인력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소위 지구의 인력, 소위 만유인력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머리로 생각하고 알았습니다.
둘째 길이 또 있습니다. 생각 안하고 직접 아는 길이 또 있습니다. 곧 느끼고 깨닫는 길이 있습니다. 이 것은 직감 혹은 직각이라고 합니다. 가령 여기 꽃이 있습니다. 꽃이 아름답지요. 아름다운 줄 어떻게 압니까? 머리로 한참 생각해서 압니까? 아니요, 보면 얼른 압니다. 그렇게 오는 지식이 있습니다. 척 보면 압니다.
아름다운 경치를 한참 생각해 보고야 압니까? 아니오, 척 보면 알아요. 이렇게 직감으로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척 보아도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척 보아도 멀리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직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는 것이 많습니다.
예술적 지식은, (가령 음악 같은 것) 예술적인 모든 지식은, 직감을 통해서 우리가 압니다. 그게 둘째 길입니다. 셋째 길은 실험을 해 보아서 압니다. 사람을 제일 잘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합니까? 사람은 지내봐야 알지 라고 말합니다.
지내본다는 것이 뭡니까? 오래 두고 교제해 보고, 실험해 봤다는 말입니다. 현대 학생들의 말을 빌리면 실험실이 있어요. 어떤 이론이 옳으냐 그르냐를 알려면 실험해 보는 것입니다. 실험해서 많은 지식을 얻습니다.
실험, 혹은 체험의 두 길이 있습니다. 한 가지 길이 더 있습니다. 믿음의 길입니다. 믿어서 압니다. 가령, 여러분이 지금쯤은 지구가 둥근 줄 다 알지요. 지구를 한번 돌아보았습니까? 혹 도신 분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지구가 둥근지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믿을 만한 사람의 말을 믿어서 압니다. 믿을 만한 과학자의 말을 믿어서 압니다. 여기, 교과서가 있지요. 아이들이 교과서를 통해서 많은 지식을 얻는데 그 지식이 모두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각 방면의 전문가, 권위자들이 실험해 보고, 생각해 보고, 느껴본 후에 이것을 옳다고, 그것을 써 놓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다 깨닫지 못하지 마는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니 옳겠지 하고 믿어서 압니다. 사실은 이 믿어서 아는 지식이 제일 많습니다.
자, 먼저 그걸 생각합시다. 우리가 무엇을 아는 데는 이 네 가지를 통해서 압니다. 이성, 직감, 실험, 믿음, 이 네 가지 길을 통해서 압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압니까? 이 하나님을 아는 데도 이 네 가지 길을 다 통해서 압니다.
먼저, 이성의 견지에서 이 우주를 살펴봅시다. 이제 뉴우톤이 우주의 여러 현상을 보고 깊이 생각한 것처럼, 우리도 이 하늘과 달과 별과 이 모든 것을 보고 자연히 우리도 머리로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자, 이 모든 것 하늘과 달과 별과 산천초목이 어떻게 되었겠나? 이 것들의 원인이 어떻게 됐겠나? 자연히 우리는 머리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분명히, 과학을 공부하여 알게 되는 것은 모든 것이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는데 이 우주라고 하는 것은 결과가 분명한데 그 원인은 어떻게 되었겠나? 자연히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원인을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창세기 一장 一절에『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하나님께서 이 모든 우주를 지으셔서 이 우주가 있게 되었다고 분명히 설명해 줍니다. 이것이 기독교 우주관입니다.
이 우주를 보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계시기에 이 우주를 지었습니다. 자, 여러분, 이것이 그렇지 않다고 반대하려고 하면 반대할 수 있는 이론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어떻게 반대할 수 있는고 하니 이 우주라고 하는 것은 거저 우연히 됐다. 지은 것이 아니고 우연히 됐다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불가지론이요 불가사이론 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우주란 것은 옛날부터 이렇게 내려왔다,
무시무정(無時無定)하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대로 돼 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 기독교 우주관에 반대되는 이론은 이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 이론을 우리가 한 가지씩 잠깐씩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가령 거저 됐다, 우연히 됐다고 말하는 이론은 우리가 머리가 있는 인간으로서는 받아들이기가 힘든 이론입니다. 아, 이렇게 조직과 질서가 있는 우주가 거저 저절로 됐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연히 됐다는 것은 믿기가 어렵단 말입니다.
따라갈 사람이 매우 적을 것입니다. 또 알 수 없다는 것도 말 할 것 없어요. 모르겠다는 사람보고 무슨 얘길 하겠어요. 그건 말할 것도 없고. 그러나 이 우주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냥 그대로 내려왔다, 무시 무정하다고 하는 이론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아봐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것을 범신론적 우주관이라고 하는데, 불교에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힌두교에도 얘기하는 것이요 흔히 인도를 중심 하는 사상가들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실 이 우주가 옛날부터 무시 무정해 왔겠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이 이론에 대해서는 현대과학이 부정합니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이 지구를 잘 연구해보고 우주를 연구해 보면 이 우주가 무시 무정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가령 이 지구가 영원 전부터 이런 지구로 내려오지 않았단 말입니다. 학문 가운데 지질학이란 학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대학에서 다 공부를 했는데, 그건 우리 인간이 나타나기 전의 지구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그 건 아주 취미가 많습니다. 그걸 어떻게 연구하는고 하니 지층 속에 나타나는 화석과 같은 것을 자세히 조사해서 어떤 지층이 몇 천만년 전에 생긴 것을 압니다.
가령 조개 같은 것이 땅에 나타난 것을 알 수 있고 언제부터 물고기가 나타난 것을 알 수 있고 언제부터 새가 지구에 나타난 것을 알 수 있고, 언제부터 말이나 소 같은 것이 나타난 것을 알 수 있고 맨 마지막 시대에 와서야 사람이 지구에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 一장에 말한 것과 거의 같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지구가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처럼 영원부터 오늘까지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지구가 생긴 때가 있습니다. 풀과 나무가 생긴 때가 있고 어패류(魚貝類)가 생긴 때가 있습니다. 척추동물이 나타난 때가 있고 맨 마지막 때에 인간이 지구 위에 나타났습니다.
사실, 우라늄이란 이상한 물체가 있는데 그것은 방사(放射)를 합니다. 그래서 그 방사하는 속도를 측량을 해서 어떤 지층에 우라늄이 있으면 그들이 얼마나 방사됐나, 그것을 보아서 지층의 연대가 얼마나 됐나 알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렇게 연구해 본 결과 사실, 천문학자들은 지구의 연령을 대체로 계산해 대략 三三억 五천만년이라고 계산합니다. 우주의 연령을 약 一백억 년으로 추산합니다. 그러니 말이요, 우주는 무시 무정하다는 범신론적 우주론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입니다.
성경 말대로 지구를 지은이가 반드시 있는 것처럼, 이 우주를 지으신 이가 계신데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결과가 있고 원인이 있으니까 아무래도 원인은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주장을 하면 어떤 천박한 사람들 중에는 반대하는 이가 있습니다.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계시면 하나님의 원인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원인으로 됐다고 하겠습니까? 그건 채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무한 절대의 하나님이올시다. 무한 절대의 배후에 무슨 원인이 있다면 역시 무한절대의 하나님 그분이 원인일 것뿐입니다.
여기에 수학, 고등수학을 공부하신 이가 계실 줄 압니다만 수학을 공부해 보면 무궁대(무한대)라는 관념이 있습니다. 그건 무엇인고 하니 가령 둘에서 하나를 제하면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를 영으로 제하면 그게 얼마나 되는지 압니까? 그걸 무궁대라고 합니다. 너무 커서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이 무궁대에 가서는 하나를 영으로 제하나 열을 영으로 제하나 백을 영으로 제하나 천을 영으로 제하나 마찬가지입니다. 다 무궁대입니다.
무한 절대의 하나님 배후의 어떤 분을 묻는 이는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한 가운데 묻는 것뿐입니다. 자, 그래서 여러분, 이 우주를 이성적으로 가만히 생각할 때에 이 우주를 지으신 이가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치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뭐 이런 얘기를 하려면 한정이 없지마는 그 밖에 이런 면을 말하지 않습니까?
이 우주를 가만히 보면 이 우주에는 꼭 조직과 질서가 있는 것을 지적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밤하늘을 쳐다보면 별들이 너무 너무 많아서 되는대로 흩어져 있는 것 같지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망원경을 통해서 천문학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별 하나 하나가 조직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 지구 하면 일정한 속도로 자전을 하고 일정한 속도로 태양을 싸고돌면서 공전을 합니다. 그 궤도가 일정합니다.
또 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지구를 싸고도는데 일정한 거리에서 일정한 속도로 우리 지구를 싸고도는데 뺑뺑 돕니다. 그 다음 태양계라고 하는 것은 태양에 붙은 수성, 금성, 목성, 여러 별들과 함께 역시 다른 해를 두고 돕니다.
다른 성좌를 두고 돕니다. 이런 북극계니 태양계들이 모여서 소위 성좌를 이룹니다. 이런 성좌들이 다 모여서 대 우주를 형성합니다. 얼른 보면 복잡하고 되는대로 된 것 같지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꼭 조직과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우주가 별이 많고 복잡하지마는 우주의 교통 사고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령 이 지구를 생각해 보세요. 二十四 시간의 하루는 언제나 二十四 시간의 하루지 어떤 날은 三十 시간쯤 되고 어떤 날은 다섯 시간 되는 때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꼭 일정한 법칙에 의지해서 일정한 속도로 일정한 궤도를 선회합니다. 조직과 질서가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지금은 대우주를 한꺼번에 볼뿐더러 이 우주를 구성한 조그만 물질을 분석해 봅니다. 먼저 분자로 구분해 봅니다. 분자를 원자로 분석해 봅니다. 그 다음에 원자 속까지 들여다봅니다.
원자 속을 보면 그 속에서 핵이라는 핵, 양자라고 하지요, 핵에는 전자라고 하는 것이 그 속에서 뱅뱅 돕니다. 다시 말하면 원자 하나 하나가 조그만 우주입니다. 그 속에도 조직과 질서가 있습니다.
여러분 시계가 다 있지마는 시계의 뒤쪽을 열어 보면 큰 바퀴도 있고 작은 바퀴가 있어 자기네끼리 뱅뱅 돌아가는 것처럼 이 우주가 뱅뱅 돌면서 그 조직과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우주가 거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시계를 보고 시계를 얻은 다음에 이 시계는 저절로 되었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내 전에도 그런 얘기를 한번 했지요. 제네바에 가보면 제네바 호숫가에 큰 시계 하나를 만들어 놨어요. 둥글게 꽃으로 심어서, 푸른 잔디에다 꽃으로 글자를 一, 二, 三, 四로 써 놓았습니다.
그 위로 긴바늘과 작은 바늘이 천천히 돌아갑니다. 어떤 사람이 이 시계를 구경하고 와서『서서라고 하는 나라는 참 좋아, 알프스산도 좋고 제네바 호수도 좋은데 시계가 저절로 돼서 돌아가더라.』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할 것입니까. 요새 아이들이 말하는 대로 머리가 조금 돌았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사실 이런 우주를 보면서 조금 있다가도 말하겠지마는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사람은 조금 돈 사람이지요.
뭐, 이런 얘기를 하자면 한이 없지요. 이 자연계의 모든 것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일정한 목적에 의지한 고안이 있습니다. 여기 꽃 한 송이도 고안이 있어요. 새란 놈을 가만히 보아도 꼭 고안이 있어요. 나비란 놈을 가만히 보아도 고안이 있어요.
사람들이 고안한다는 것 다 빌어다 합니다. 거저 다 하나님이 해 놓은 것을 빌어다 합니다. 꽃이 있으면 흔히 벌과 나비가 오지요. 왜 벌과 나비가 있습니까? 보기 좋으라고, 아니요. 꽃 속에는 꿀이 있으니까 꿀 파먹으러 옵니다.
그러나 꽃은 거저 꿀을 주는 줄 압니까? 아닙니다. 그 놈들이 와서 날개를 펼치고 돌아가는 바람에 웅(雄)과 자(雌)의 그 꽃 수염 가운데 꽃가루를 묻혀서 왔다 갔다 해서 열매를 맺게 하지요. 세상에 벌과 나비가 서로 협동해서 살게끔 만들었어요. 그것이 다 거저 됐다고 저절로 됐다고 할 수 있어요.
아주 이상합니다. 이 자연계의 금수 동물과 식물들이 어떻게 협동하며 살게 만들었는지. 동물들은 풀과 열매를 따서 먹고살지요. 사람까지도. 그러나 거저 먹고 받기만 하는 줄 압니까? 아니요. 도로 주는 것도 있습니다.
동물의 배설물은 초목의 비료가 됩니다. 여기 조금 더 깊이 말하자고 하면 사람이 숨쉴 때 무엇이 필요합니까? 동물도 다 그러하지요. 산소가 필요합니다. 나무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탄소가 필요하지요. 사람이 내쉬는 숨, 그 숨결 가운데 탄산가스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무는 그 탄소를 섭취하고 산소를 대신 내 줍니다. 나무는 동물이 필요한 산소를 주고 동물은 나무가 필요한 탄소를 내어 주면서 서로 협동하고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런 것이 다 거저 됐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뭐 이런 말을 하려고 하면 시간이 한정 없으니까 더 길게 말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다시 말하면 많은 지식이 우리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오는데 우리가 이 우주를 보고 우주의 모든 것을 가만히 살펴봐서 생각하면 반드시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이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자, 우리 둘째 길을 잠깐 생각하십시다. 직감의 길을 생각하지요. 제가 이미 말씀 드렸어요. 어떤 지식은 직각적으로 압니다. 모든 예술에 관한 지식은 직각 적으로 알게 됩니다. 우리가 머리로 생각해서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직각 적으로 알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 서반아에 우나무너라고 하는 유명한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 분은 철학자이지만 그이가 스스로 간증하기를『나는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머리로 생각하기보다도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직각적으로 깨닫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영국에 유명한 테니슨 같은 이의 유명한 시에『내게는 하나님의 숨결보다도 더 가깝다.
내 손과 발보다도 더 가깝다.』거저 느껴져서 아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의 체험이란 것이 그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머리로 생각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아는 분도 계시지마는 참 성령을 충만히 받음으로 직감적으로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 요한 웨슬리라고 감리교를 세운 유명한 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올렌스 벤치란 곳에서 몇 사람이 모여 예배를 보는 가운데 갑자기 자기 마음이 뜨거웠다고 합니다. 루터의 갈라디아 주석을 설교하는 사람이 대표로 읽는데 그것을 듣는 가운데 갑자기 자기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때부터 요한 웨슬리는 새 사람이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우리가 직각 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얘기를 늘 하지만 나폴레옹 같은 사람은 군인이라도 이런 느낌을 가진 분입니다.
그가 한 번은 군대를 거느리고 지중해를 건너서 애굽으로 정복하러 가든 때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침 달이 밝은 밤이었습니다. 물결이 잔잔해서 배의 군인들이 모두 갑판에 나와서 노래도 부르고 이야기도 하고, 눕기도 하고 앉았기도 하고, 이렇게 달밤을 잘 즐깁니다.
나폴레옹은 언제나 군중을 잘 살피는 인물이요, 보통 군인의 옷을 입고 군인들 사이를 다니면서『이놈들이 무슨 얘기를 하나 보자』하고 그들의 얘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어떤 곳에 가니까 어떤 군인들이 앉아서 열심히 토론을 합니다. 가만히 들어보니까 한 군인은 하나님이 있다느니 한 군인은 하나님이 없다느니 서로 변론을 한단 말입니다.
하나는 유신론자요. 하나는 무신론자입니다. 아 그래서 나폴레옹이 이 사람들 아주 큰 토론을 한다고 뒤에 가서 가만히 듣습니다.
한참 이 사람들끼리 열이 나서 토론을 합니다. 참 듣다가 나폴레옹이 갑자기『당신 네 들 토론할 것 없이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시오. 아 그 나폴레옹이 우렁찬 목소리로 이런 얘기를 하게 되니 정신없이 다 하늘을 쳐다봅니다.
마침 달이 밝고 별이 총총하고 그 아름다운 지중해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 때에 나폴레옹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향하여 가리키면서『하나님께서 안 계시면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됐겠소. 이 걸 보고도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알지 못하겠소』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군인들이 토론을 그만두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직감적 요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머리로 생각해서 하나님께 계시리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내가 기도하고 내가 묵상을 하는 가운데 성령을 내가 직접 받게 되면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직접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그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어떤 사람이 어떤 이론으로 반대를 하던지 문제가 아닙니다. 왜, 그가 의뢰한 자를 그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셋째로 지식을 얻는 길은 실험의 길이라고 그랬습니다. 여기 과학이 실험을 통해서 많이 발전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대학을 가나 자연과학 계통의 실험이 굉장히 큽니다. 실험을 해 보고 압니다.
나토리움이라고 하는 것은 희고 반들반들한 것입니다. 염소는 노랗고 독한 기체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나토리움과 염소가 우리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이것을 합해서 우리 인간에게 아주 필요한 것이 된다고 말한다면 아주 납득하기 힘들 겁니다.
그러나 나토리움이 있는 곳에다 염소를 통과시켜서 나토리움과 염소를 한데 합해 놓으면 무엇이 되는지 압니까? 소금이 됩니다. 소금 맛보면 나토리움맛도 아니고 염소 맛도 아닙니다. 다릅니다. 짭니다.
우리 사람에게 꼭 필요한 물질이 됩니다. 어떻게 알아요. 실험해 보면 꼭 그렇게 되거든요.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했지요. 나무가 좋은지 나쁜지 알려면 나무의 열매를 보고 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수박이 단지 안 단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압니까? 먹어 보면 압니다. 그게 실험의 방법이올시다.
먹어 보면 제일 잘 압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분명히 모르겠다고 하는데 사실 그런 사람은 아직도 실지로 하나님을 믿어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믿어 보면 압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기도 전에 기도하면 응답이 될는지 안 될는지 모르겠다고 하는데 사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는 것을 압니다. 기도해 보란 말이요.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기도 전에 의심부터 합니다.
성경을 읽고 그대로 해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전에 우리가 프린스톤 신학교에 다닐 때 구약성서 과 교수 가운데 딕 윌슨 박사라는 유명한 구약의 권위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성질이 좀 별납니다.
밤 十시부터 새벽 三시까지 공부하는 습관이 있어요.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평생, 조용할 때 공부하느라고 그랬겠지요. 열 시부터 새벽 三시까지 四十여 년을 공부합니다. 그래서 이 선생은 새벽 기도회에는 못 나옵니다.
사실 일찍이 가르치는 시간이 없어요. 늘 늦게 일어나니까요. 세 시까지 공부하고 자니까 일찍은 못 일어나지요. 제가 갔을 때, 나이가 많아서 학교에도 별로 나오지 않고 자기 서재의 안락 의자에 앉아서 늘 흔들흔들하면서 앉아 계시면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이 서재에 따라가서 공부했습니다.
그런 선생인데, 한번은 프린스톤 대학의 젊은 사람들이 이 선생을 찾아갔습니다. 『윌슨 박사님 우리가 박사님에게 성경에 대해서 의심나는 것이 몇 가지 있어서 좀 물으려 왔습니다.』『아, 그래 무슨 의심이 있는가?』그러면서 넌지시 이걸 물어 봤습니다.
『그런데 자네들 성경에 의심이 난다고 하는데 성경을 한 두 번쯤 읽어보았나?』하고 물어 봤습니다.『성경을 볼 시간이 있나요. 성경을 보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보았나?』 『한 번도 못 봤어요.』자 그러니까 윌슨 박사가 눈을 부릅뜨면서
『이 사람들아 내가 머리는 남자들 보다 못할는지는 모르지마는 내가 四十년 동안 밤 열 시부터 세 시까지 四十년 동안을 공부했는데 내가 공부한 결과는 믿을 만한데 자네가 한번도 안 보고 와서는 의심난다고 질문한다고 하니 가서 두어 번 읽고 그 다음에 와서 물으라고. 그 다음엔 토론이 될 거야』고 했습니다.
여기 가만히 보면, 성경이 의심난다는 사람들 흔히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선 성경을 읽어보시고 그대로 해보세요. 그러면 성경이 옳은 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전에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전에 미국의 어떤 할머니가 성경을 늘 잘 읽는데 그 할머니의 성경을 보니까 성경에 새빨갛게 줄을 쳐 놓고는 영어 자로 T자하고 P자, 많이 써넣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할머니 이 T와 P는 무슨 표시지요』하고 물으니『아, 그건 내 암호인데 그건 다 뜻이 있어요. T라고 하는 건 트라이(try)인데, 읽고 그대로 해 보았단 말이요. P라는 건 프르우프 (proof)읽고 해보니 그대로 되더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을 그대로 실행해 보시란 말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진리인 줄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어떻게 아느냐? 내가 믿어 보니, 제가 이제 七十이 가까워 오니 이런 말해도 거만하다고 하지는 않겠지요. 이 부족한 사람도 근 七十년 동안 믿어 보니 과연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과연 기독교적 신앙 생활이 가장 기쁘고 가장 행복스럽고 이 세상에 다시없는 축복인 것을 체험으로 압니다. 여러분도 믿어 보세요. 특별히 젊은 사람들, 내 말이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 체험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무슨 말이 있는고 하니 시편 三十四편 八절에 『와서 주를 맛보아 알지어다』했습니다. 주를 맛보아 알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도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를 사실 영접해서 내 입에 맛을 보는 것처럼 내 것을 만들어요. 예수님을 사실, 내 마음에 영접하고 꼭 신앙 생활을 해요. 그러면 과연 주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것을 알게 됩니다.
자 그러면 넷째로 넘어갑시다. 많은 지식이 신앙을 통해서 옵니다. 믿을 만한 권위자, 전문가의 말을 믿음으로 많은 지식이 옵니다. 내가 이미 말한 대로 우리가 안다는 것이 사실 내가 연구해서 아는 지식은 많지 못합니다.
내가 직감적으로 안다는 지식도 많지 못합니다. 내가 체험해 보고 안다는 지식도 그렇게 많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지식은 어떻게 오는지 압니까? 대부분의 지식은 믿을 만한 분의 말을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학교에는 교과서를 읽으면서 그 교과서를 쓴 사람을 믿어서 새로운 지식을 많이 얻습니다. 우리 신앙에도 교과서가 있습니다. 그 교과서가 무엇인지 압니까? 이 성경책입니다.
이 성경책은 종교의 믿을 만한 사람들이, 다시 말하면 선지자들 사도들 예언자들이 자기가 생각하고 안 지식 자기네가 직감적으로 안 지식, 자기네가 체험적으로 안 지식을 여기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고 그들의 말을 믿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 모든 종교적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믿음으로 얻는 지식 가운데 한 가지 조심할 것이 있어요. 그것은 믿을 만한 사람의 말을 믿어야지요. 함부로 믿어선 안 됩니다. 그런데 이 권위라고 하는 것은 방면이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의학계의 권위요, 어떤 사람은 법학 계의 권위요, 각각 권위가 다릅니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일어나면 그 방면의 권위에게 가서 문의해야 됩니다. 가령 어떤 아이가 앓습니다. 그 아이는 누구한테 가서 봐 달라고 해야 되겠습니까?
의사한테 가야지요. 그런데 어떤 어머니가 뒷집에 유명한 법학 박사가 있다고 박사님이니까 뭐든지 알겠지 하고 고쳐 달라고 하면 바로 되는 일입니까? 그런데 대학생들이나 청년들 가운데 이런 식의 일을 하는 이들이 더러 있어요.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종교계의 권위에게 가서 물어봐야지 종교계의 권위에게는 가서 물어보지 아니하고 다른 방면의 박사에게 가서 의논하고 그 사람들의 말을, 혹 종교 문제에 관해서 말하면 아무개 박사의 말을 들으니까 하고 권위를 잘못 따라 다니는 젊은 사람들이 더러 있단 말입니다.
그런 실수를 안 해야 됩니다. 사도들은 종교계의 권위입니다. 선지자들은 종교계의 권위입니다. 오늘날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도 이 방면에 제일 많이 공부도 하고 생각도 하고 체험도 하고 경험이 있는 여러분 교회의 목사님들한테 찾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옛날이나 오늘이나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들이 많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사실 생각해 보면 어리석습니다.
무엇이 있다고 논증하기에는 증거가 하나만 있어도 되지마는 없다고 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우리 한국에 갈매기가 있나 없나 토론한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은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없다고 하거든요.
있다고 하는 사람은 인천에 내려가서 바닷가에 갈매기 발자국 하나만 보고 있다고 하면 증명이 돼요. 하지만 한국에 갈매기가 없다고 하려고 해 보세요. 인천에 가서 다 살펴보고 없다고 해도 진 남포에 있는지, 용암 포에 있는지, 마산에 있는지 알아요? 다시 말하면 한국 전도를 다니기 전에는 한국에 갈매기 없다는 말은 성립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런 우주에 하나님이 없다고 한단 말이요. 우주에 하나님이 없다고 증명하려면 지구는 말할 것도 없고 저 별도 다 다니고 우주를 다 다녀보기 전에는 없다는 증명을 못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는 걸 보니 한 마디로 말해서 뭡니까?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또 이 무신론이라고 하는 관념은 부정적 관념이올시다. 관념 가운데는 두 가지 관념이 있는데 긍정적 관념과 부정적 관념이 있습니다.
가령, 빛은 긍정적 관념이올시다. 어두운 것은 부정적 관념이올시다. 참은 긍정적 관념이올시다. 거짓된 것은 부정적 관념입니다. 여러분, 왜 어둡다는 관념이 생겼는지 압니까? 빛이 있기 때문에 생깁니다.
왜 거짓되다는 관념이 생기는지 압니까? 참이 있으니까 생겼습니다. 왜 무신론적 관념이 생긴 줄 압니까? 하나님이 계시니까 그런 관념이 생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신론이란 관념이 있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분명히 증명해 줍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신론자들은 환자라고 했습니다. 병자들이란 말입니다. 아무리 태양 빛이 혁혁하지마는 도무지 앞 못보는 소경들에게야 태양 빛이 보입니까?
결국은 이렇게 이지로 생각하든지 직감으로 생각하든지 실험을 해 보든지, 권위의 말을 들어보던지 분명한데 왜 하나님이 계시면 두렵단 말입니다. 병이 나서 이런 입장을 결국 가지는 것입니다.
이야기 하나만 하고 그만 두렵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사하라 사막을 지나갑니다. 약대를 타고 지나갑니다. 날이 저물어서 오아시스라고 샘이 있는데 천막을 치고 하룻밤을 자게 됐습니다.
약대를 바깥에 매어 놓고 여행하는 사람과 약대를 몰고 온 사람과 함께 자게 됐습니다. 자려고 천막에 들어갔습니다. 약대를 몰고 온 사람이 자기 전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기도를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다한 다음에『자네, 이제 뭘 했나?』『나 기도했네『아 누구한테 했는가?』,『아 하나님한테 했지.』『자네 하나님 보았나?』무엇이라고 대답했겠습니까?
『보지 못했어』고『하나님 음성 들어보았나?』『못 들어보았네』『하나님 만wu 보았나?』『못 만져 보았네』『아 그럼 자네, 하나님 있는 줄 어떻게 아나? 그거 미련한 일 아닌가?』아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단 말입니다.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냥 그 날 밤을 잤어요. 그 다음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둘이 천막을 헤치고 나왔습니다. 나오자마자 그 여행하던 사람이『아하 간밤에 약대란 놈이 끈이 풀어져 우리 천막을 몇 번 돌았구만』그런 단 말이요.
그 말을 듣고는 약대 주인이『당신이 약대가 밤에 도는 것을 보았소?』『아니 나는 그걸 보지는 못했오.』『아 그럼 발자국 소리는 들었오?』『아, 난 그것도 못 들었오.』『그럼 만져 보았소?』『아니 못 만져 보았오.』
그러니까 『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어떻게 몇 바퀴 돌았다는 것을 아오?』하니까『하하, 이런 사람 모래밭에 발자국을 봐. 이 모래 밭에 발자국이 빙 돈 것을 보니 분명하지 않나』
그러니까 이 사람이 하늘을 가리키면서 그 때 마침 동방으로 아침 햇빛이 떠올라서 사방으로 아름답게 된 경치를 가리키면서『여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발자취가 아닙니까.』그 말에는 대답을 못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 대자연의 모든 현상이 하나님의 발자국입니다. 내가 처음에 말을 시작할 때에 이런 말을 했지마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가 많지마는 실상은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삽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계셔서 우리 모든 것을 내려다보시는 줄 분명히 알면 죄를 짓지 아니할 것입니다. 죄 가운데 여러 가지 죄가 많지마는 믿지 않는 죄입니다. 왜 어떤 죄를 지었던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으면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면 작은 죄라도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속지 말라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지 아니합니다. 사람의 심은 것은 그대로 거둡니다.
우리 동양의 어른들도 많은 경험에 의해서 순천 자는 흥하고 역천(逆天)자는 망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분명히 계신데 본체만체하고 이런 아들이 있다면 이게 무슨 아들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계신 줄 안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사실 이 하나님께 영광도 안 돌리고, 이 하나님께 예배도 안하고 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도 안하고 살면 무슨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제일 큰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데도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가 큰 죄입니다. 그러기에 믿지 아니하는 자는 이미 정죄(定罪)가운데 있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스스로 속지 맙시다. 가멜산에서 엘리야가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두 사이에서 머뭇하느냐?
만일 바알이 참 하나님이면 바알을 섬길 것이요,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여호와를 섬길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 압시다.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의심하는 분이 있으면 결단을 내리세요. 엄위(嚴威)하신 하나님 앞에 불신의 죄를 자백하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며 죄 사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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