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49:14-21/ 시온을 잊지 않는 하나님/ 한경직 목사 2014-08-23 21:37:11 read : 1232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 四十九․十四-十六)
시온에 탄식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고 탄식합니다. 그것을 생각해 보면 이유가 있습니다. 시온 성이 파괴된 지 이미 오랬습니다. 포로생활은 그냥 계속됩니다.
바벨론 여러 호숫가에 늘어선 버드나무 사지에 거문고를 걸어놓고 눈물을 흘리기도 여러 해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구원은 오지 않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들은 이렇게 탄식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十五절에 있습니다.『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느냐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희를 잊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면서 十六절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느니라.』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중심해서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시온이라고 하는 말이 종종 나오는데 그 뜻을 분명히 파악해야 됩니다. 시온은 물론 옛날의 예루살렘 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점점 모든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켜서 시온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보면 그 뜻이 점점 넓어져서 택함을 받아 구원을 얻은 모든 믿는 사람이 합한 교회를 시온이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혹은 새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또 자연히 시온이란 말은 교회에 속한 구원받은 믿는 사람 하나 하나를 포함해서 쓰게된 것입니다. 여기에 보니『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이올시다. 너는 시온이올시다. 믿는 사람이올시다.
우리 한국에는 그런 풍속이 그렇게 많지 않지마는 외국에는 아직도 상당히 있는데 특별히 해병들이나 어부들 가운데 자청이라고 먹으로 살을 떠서 팔이든지 손잔 등에 그림도 그려 놓고 글자도 새기를 일이 더러 있습니다.
여기 새긴다는 말도 그 뜻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너 곧 시온을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했습니다. 쓴 것이 아니라 새겨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워지지 아니합니다. 그냥 늘 있습니다. 그러면 이게 무슨 뜻입니까? 몇 가지 뜻이 있는 줄 압니다.
손바닥에 새겼으니 언제나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하여 우리가 기념비를 세웁니다. 그러나 기념비는 보지 않는 때가 많습니다. 잊지 않고 어떤 사람을 기억하기 위하여 동판에다 그 사람 이름을 새겨서 넣는 풍속도 혹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항상 보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 사람들은 조그만 어느 꽃을 휘겟 미 낫(Forget me not)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은 나를 잊지 말아라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청년들이 자기 애인에게 편지할 때에 혹 그 꽃을 따서 같이 보내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꽃도 금방 시들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손바닥에 새긴 것은 언제나 볼 수밖에 없습니다. 잊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를 이렇게 잊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는 잊지 아니하십니다.
사실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죄를 지었으므로 징계의 채찍이 그들에게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가 되었고 멀리 가서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렸다, 잊었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그런 사랑의 채찍을 맞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잊지 아니한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을 징계하시지만 사랑하시므로 징계하고 잊지 않으시므로 이따금 징계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요한 복음 十五장을 볼 것이면 주님께서 포도나무와 가지가 열매맺는 얘기를 하시다가 열매맺는 가지는 더 많이 맺기 위해서 깨끗케 하시느니라 하는 말씀을 했습니다.
본래의 뜻은 전정(剪定)하느니라 하는 뜻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를 잘라 준다는 말입니다. 포도 맺는 가지는 더 많이 맺기 위해서 잘라주는 수가 있습니다.
아마 포도나무 가지가 사람처럼 감각이 있다고 할 것이면 전정을 할 때 대단히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주인이 그 포도나무 가지를 잊어 버려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가정에 아무 죄가 없으나 어떤 환난이 오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흔히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이런 환난을 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당하는 것도 잊지 않으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녀들을 언제나 잊지 않고 계십니다. 평안할 때나 괴로울 때나 건강할 때나 병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나 젊었을 때나 늙을 때나 살 때나 죽을 때나 언제나 그 자녀들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올시다.
내가 너를 손바닥에 새겼다는 뜻은 또 다른 뜻이 있는 줄 압니다. 잊지 아니할뿐더러 언제나 보호하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바닥 안에 있으니 언제나 안전합니다. 어린애들의 손에 있는 것도 빼앗기 어렵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손이 있는 것을 누가 빼앗겠습니까?
그리해서 주님도 요한 복음 十장 二十九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 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그래서 히브리 十三장 六절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기 어찌 하리요』라고 외친 것입니다. 골로새 三장 三절에는『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새겨 있으니 하나님의 안에 감추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전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사야 四十三장 一절 이하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모살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불꽃이 너는 사르지도 못하리라.』
분명히 들으세요. 물과 같은 환난, 불과 같은 환난이 없겠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가운데로 지나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런 가운데도 실상은 우리가 손해를 입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언제나 하나님께서 깨끗이 보존하여 주실 것입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손의 중심이올시다. 손은 활동의 근본이올시다. 하나님의 전능자신 손의 모든 활동은 그 중심이 시온, 곧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주와 인간을 다스립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은 자연계와 인간 역사 가운데 간단없이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는 옛날 헬라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무의미한 반복이 아닙니다.
오늘날 공산당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다만 물질적 조건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의 중심은 그 속의 시온, 곧 교회입니다.
택한 백성의 구원과 훈련과 천국의 완성이 역사의 최후 목표인 것입니다. 곧 시온의 완성이 역사의 최종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왜? 시온이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는 까닭입니다. 요한계시록 十一장 十五절에『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시리라』고 하신 말씀은 여기에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또 이 진리는 시온에 속한 모든 믿는 사람 개개인의 경우에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八장 二十八절에는『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 자연계와 역사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아래를 계속해서 읽어보면 심지어 환난이나 곤 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 이나 위험이나 칼일지라도 결국은 다 합해서 선을 이룬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우주를 한 큰 공장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공장 안에 기계가 많고 돌아가는 바퀴가 많지마는 그것들을 다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입니다. 그런데 그 손바닥에는 시온이 새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종에는 만사가 합동하여 선을 이루도로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분명히 파악하면 캄캄한 밤에도 큰 빛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큰 슬픔 가운데서도 소망의 별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은 사라질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오 주여, 주의 뜻을 이루소서』라고 겸손히 기도할 것입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라고 말씀한 후에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너희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느니라.』그 성벽은 싱온의 성벽이올시다. 예루살렘의 성벽이올시다. 너 예루살렘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다 라는 말입니다.
사실 그때는 시온의 성벽은 없던 때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에게 다 파괴당했습니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다 훼파(毁破)된 때입니다. 사람의 앞에는 그 성벽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예루살렘 성벽이 그냥 분명하게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 뜻을 압니까? 요한 계시록 二十一장에 보면 새 예루살렘 성 즉 각색 보석으로 꾸민 시온 성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시온의 성벽은 하나님 앞에 늘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장차 영광으로 이 성이 다시 나타날 때가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교회는 하나님 앞에는 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며 이 말씀의 뜻을 깊이 깨닫게 될 때에 너무 감격해서 사실 홀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일생에 교회 둘을 섬겨 봅니다. 해방 이후 一九四五년부터는 제가 영락교회를 섬기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전에 이북에 있을 때에 신의주 제二교회의 목사로 있으면서 힘썼습니다.
제가 一九三三년에 그 교회에 가서 전도사로 시작해서 그 교회를 받들기 시작했는데 一九三五년에 여러 가난한 교우들과 함께 힘과 정성을 모두 어서 새로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신의주에서 오신 분은 아마 다 보았을 것예요. 그러나 몇 해 후에 저는 부득이 그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일제 말기에 일본 경찰이 그 교회에서 저를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몇 해 후에 전쟁하는 동안 고아원 일을 보았습니다.
그 다음에 해방되었습니다. 제二교회에서 물론 저를 다시 오라고 말하던 때입니다. 그러나 다시 가기 전에 공산당의 음모로 저는 부득이 이북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남에 내려오게 되었고 그래서 영락교회가 이남에서 시작이 되었는데, 후에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六․二五가 일어났습니다.
아마 六․二五 다음 다음 해 같습니다. 제가 어떤 신문을 보니 신의주 제二교회의 사진이 났는데 다 불타고 없어지고 종각만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진을 볼 때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젊은 정열을 다 쏟아서 그 예배당을 지었는데 몇 해가 못 가서 예배당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 아픈 마음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루살렘의 성벽이 그때에 사람의 눈에는 없어졌지만 하나님 앞에는 그냥 있었습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눈에는 없어지지마는 하나님 앞에는 항상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는 일시로 사람 앞에 없어지지만 하나님 앞에는 항상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더 영광스러운 교회로 나타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의주 제二교회뿐이 아닙니다. 제일교회도 그렇습니다. 제일교회 뿐이 아닙니다.
선천의 남 교회, 북 교회, 평양의 장대현교회, 그 밖의 모든 교회가 그렇습니다. 지금은 사람의 눈앞에 없어졌어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냥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앞으로 영광스러운 교회로 다시 나타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손에 새겨 있습니다. 교회뿐만이 아닙니다. 개인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하는 이들을 이 세상에서 이별한 후에는 항상 그들을 위해서 슬퍼합니다. 우리 앞에는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생각하면서 항상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이 우리 앞에는 없지만 하나님 앞에는 항상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항상 살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앞으로 만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우리 사람의 눈에는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항상 있습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는 항상 살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온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 손바닥에 새겨진 까닭입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잊지 아니하시고 때가 찰 때에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크리스마스가 또한 생긴 것입니다.
로마서 八장 三十二절도 이 말씀과 같이 기억하면 좋습니다.『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축복입니다.
제가 염려하는 것은 우리 북한 동포 가운데 이렇게 오래도록 해방이 되지 아니하고 이런 환경가운데서 옛날 이스라엘 백성처럼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으셨다 라고 탄식하는 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내 손바닥에 새겨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혹 우리 가운데 외롭고 슬프고 혹은 괴로운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아니하셨나, 하나님께서 나를 잊으신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들으세요.
『여인이 어찌 젖먹이는 자식을 잊을 수 있겠느냐? 혹시 그들은 잊을 수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너를 잊니 아니하리라.』
마지막으로 한 마디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하시는 일을 우리에게도 권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항상 잊지 아니하시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 이름이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것처럼 사실 우리 손바닥에도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져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활동의 중심이 언제나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손바닥에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졌습니까?
우리의 모든 사업과 활동의 중심이 하나님입니까? 제가 먼저 번 싱가폴 대회에 가서 우리 한국의 목사님들 몇 분과 만나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는 중 어느 목사님이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난 다른 목사님의 말씀을 하다가
『그런데 그 영감이 돈을 너무 좋아했어』 라고 하니 다른 분들이 다『정말 그랬어, 그 영감은 다 좋은데 돈을 좋아했어』라고 공명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무리 목사라고 할지라도 그 손바닥에 하나님의 이름이 없고 돈이 새겨져 있으면 그게 무슨 쓸데 있는 목사입니까? 목사뿐만이 아닙니다. 장로도 그럴 것이고 집사도 그럴 것이고 교인도 그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