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40:26-31/ 향상하는 생활 / 한경직 목사 2014-08-23 21:37:53 read : 928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四十․ 三十일)
인간은 어디나 올라가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길러 본 이들은 잘 압니다. 아이들이 벌렁벌렁 기어다니게 되면, 벌써 책상에도 올라가려고 하고, 의자에도 올라가려고 하고, 문턱에까지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 아이들이 점점 커서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면 백운대에 올라가려고 하고, 조금 더 크면 설악산에 올라가려고 하고, 한라산까지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알프스산 꼭대기에도 올라가 보는 것이고 히말라야산 꼭대기에도 올라가는 것입니다.
기차 타고 여행하기보다는 비행기 타고 여행하기를 더욱 좋아합니다. 아마 그 까닭은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또 지금은 우주인들이 달을 향해서 올라가는 중에 있습니다. 한국 사람 중에도 벌써 달 여행을 신청한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을 봐도 인간은 누구나 올라가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올라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성품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인간은 모든 방면에 향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것은 영적 방면에서 향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이 본문 가운데서 향상하는 생활의 비결을 잠깐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보면『여호와를 앙망(仰望)하는 자는』이라는 글귀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여호와』라는 말씀은 물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혹은 주님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앙망』이라는 말은 앙모한다 혹은 대망 한다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모시고 기다린다는 뜻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평소에 무엇을 앙망 합니까? 물론 학생들은 지식을 앙망 한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정치가는 정권을, 관리는 보다 더 높은 지위를, 혹 어떤 이들은 좋은 집이나 옷 같은 것도 앙망 하는 이가 있겠지요.
그러나 이것들은 우리 영혼이 항상 앙망 할 대상은 되지 못합니다. 인간 영혼의 최고의 앙망 대상은, 또한 항상 앙망 할 만한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풀과 나무가 하늘을 향하는 것과 같이, 꽃이 언제나 태양을 향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영혼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여 위로 앙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의심 없이 의지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죄의 회개와 고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정직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기도와 묵상의 시간이 요구됩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앙망 하는 자는『새 힘을 얻으리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힘을 얻겠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 앞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困憊)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인간의 힘은 피곤해 지고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인간의 힘은 근본적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 영락교회 교역자 가운데 지 목사님이 전에 이북에 있을 때에 씨름을 해서 황소를 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힘이 아마 세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지금은 아마 황소 탈 것 같지 아니합니다. 사람의 힘은 나이 많아 갈수록 약해집니다.
인간의 체력은 이와 같이 제한이 되었지마는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자연계에 다른 힘들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그리해서 인간들은 다른 힘들을 이용해서 내 부족한 체력을 보충하면서 살아갑니다. 다시 말하면 옛부터 사람들은 바람의 힘을 빌어 썼습니다.
바람의 힘으로 배도 띄우고 펌프질도 하고, 수력이라는 물의 힘을 빌어서 물방아도 찧고, 화력이라는 불의 힘을 써서 밥도 짓고 수증기도 만들어 살았습니다. 현대 사람들은 전력을 발견하여 사용합니다. 원자력을 발견하여 사용합니다. 아마 아직도 우리 인간이 발견하지 못한 힘들이 자연계에 있는 줄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방면에 있어서도 인간의 힘, 정신력, 의지력은 미약합니다.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신령한 힘을 역시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과학을 통하여 자연계의 새 힘이 인간에게 오는 것처럼 참된 신앙을 통해서 신령한 하나님의 권능이 인간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을 말씀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일찍이 술의 종이요, 정욕의 종이요, 죄의 종이었지마는 믿은 후에 새로운 힘을 얻어서 새로운 생활을 하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계속하여 읽어보면 셋째로『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옛날에는 공중에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이 독수리밖에 없었습니다. 비행기가 없을 때이니까요. 아마 이사야가 금년쯤에 이런 말씀을 쓴다고 할 것이면 이렇게 썼을 것 같아요.
『여호와를 앙망 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아폴로 十一호가 불을 뿜으며 공중으로 올라감 같을 것이요.』다시 말하면 여호와를 앙하여 새 힘을 얻는 사람은 그의 심령에 위로 올라가는 힘이 생긴다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공중에 돌을 던져 보세요. 얼마 후에 돌은 다시 땅에 떨어지지요. 비행기도 가솔린이 다 없어지게 되면 땅으로 내려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게 되는지 압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지구라는 것은 인력이 있어서 아래로 잡아당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물체가 자꾸 땅에 와서 붙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생활은 이 세상에서는 육신을 근거로 하고 삽니다. 이 육신이 항상 우리의 영적 생활을 끌어 아래로 잡아당깁니다.
육을 근거로 한 정욕, 물욕, 권세욕, 명예욕 같은 것이 올라가려고 하는 우리 심령을 자꾸 아래로 끌어내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앙망 하는 참된 신앙이 있는 이에게는 독수리에게 날개가 있는 것처럼, 아폴로 十一호에 연료와 불을 준 것처럼 새 힘을 주어서 끌어내리는 힘을 극복하고 올라갈 수 있는 산 심령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정욕의 힘을 이기고 성결한 생활로 올라간다는 말입니다.
돈만을 사랑하려 하는 힘을 이기고 의의 생활로 올라갑니다. 임시적 권세보다는 양심의 생활로 올라갑니다. 내 명예를 생각하는 것보다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합니다. 이러한 고상한 생활, 고귀한 생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생활, 사랑과 화평의 높은 차원으로 우리의 심령이 올라 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받으려고 하는 것보다는 주려는 정신으로 얻는 것보다도, 봉사하려는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높은 십자가의 정신이 움직이는 그 차원으로 우리의 심령을 올라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여러분 다 등산해 보신 분은 아시지마는 우리가 높이 올라 갈수록 우리의 시야가 넓어집니다. 낮은 곳에 있을수록 시야가 좁아집니다.
정중지와(井中之蛙)란 말이 있지요. 우물 속의 개구리라는 말입니다. 우물 속의 개구리는 그 속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하늘이 동전 닢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며 사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기껏 보아야 자기 자신만 봅니다. 가족도 심지어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겨우 본 대야 자기 가족이나 봅니다. 아주 낮은 곳에 사는 까닭입니다.
공산당들은 자기 계급만 봅니다. 그래서 계급 투쟁을 하라고 고조합니다. 전에 히틀러는 자기 민족만 보았습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시야가 넓어집니다. 더욱 높이 올라가면 세계를 한번에 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주인들이 달에 가서 찍은 지구의 사진을 다 보셨지요? 그 우주인들은 지구를 한꺼번에 보았습니다. 한꺼번에 보니 우리가 사는 지구가 얼마나 커 보이겠습니까? 사실은 우리가 사는 이 지구는 한 작은 공입니다.
그 위에 三十五억이 넘는 사람들이 복잡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작은 공 위에서 사는 사람들이 계급이니 민족이니 국경이니 흑인이니 백인이니 하면서 싸우며 삽니다. 사실 우주인의 눈으로 세계를 보면 그렇게 살 세계가 아닙니다.
우주인들이 달에 남기고 오기 위해서 가지고 간 기념 판에 새긴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전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유성 지구에서 여기 왔노라.』시야가 좁아서 싸움을 합니다.
시야가 넓은 그리스도인들은 싸우면 아니 됩니다. 어디를 가나 평화의 생활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三장 二十八절에는『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말했습니다. 다 하나인데 무슨 싸움이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七장 二十六절에는『인류의 모든 종족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라고 하였으니 다 한 형제가 아닙니까?
주를 앙망 해서 새 힘을 얻고 올라가는 생활을 하는 참 그리스도인의 시야가 얼마나 넓은지 여러분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주인의 시야보다 더 넓습니다. 다시 말하면 온 우주를 손바닥처럼 보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만사와 만물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으로 편협하고 고집불통의 인간이 있다고 할 것이면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참 에큐메니칼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또 우리가 높이 올라갈수록 모든 것을 바로 봅니다. 그것은 높이 올라갈수록 바른 배경에서, 바른 관점에서, 바른 관계에서 모든 것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도 이 곳 저 곳에 二十 여 층 짜리 건물이 섭니다. 거리에서 그 건물을 쳐다보면 굉장히 높아 보이지요. 그러나 남산에 올라가서 한번 보세요. 과히 높지 않습니다. 비행기 타고 한번 내려다보세요. 형편없습니다.
모든 것을 바른 것과 비교해서 볼 때, 대소 고하의 관계를 비교해 볼 때, 무슨 일이나 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한국 사정도 우리가 바로 보려고 하면 외국에 나가서 세계 물정을 알고 한국을 다시 보아야 한국의 당면한 문제를 좀 더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四장 十七절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했습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이 우리가 세상에서 받는 환난과 하늘 나라에서 받을 그 영광과를 비교해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세상에서 받는 환난은 잠깐이요. 하늘에서 받을 영광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세상에서 받는 환난은 사실 경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얻을 영광은 아주 중합니다. 영원의 견지에서 현재에 당하는 나의 체험을 봅니다. 이것은 그와 반대로 다른 경험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시 죄악을 통하여 얻는 향락과 영원한 세계에서 받을 그 축복과 비교해 볼 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불멸의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은 영원히 계속되는 까닭입니다.
이런 시야에서 볼 때에만 우리가 모든 것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옳게 살려고 하면 영원한 견지에서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기도회에서 창세기를 읽는 중인데 그 마지막 부분에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이 형들의 시기를 받아서 억울하게 애굽에 팔려 갔습니다. 거기 가서도 옳게 살려고 애쓰다가 유혹까지 겪었지만 반대로 잡혀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애굽의 총리대신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그 후에 큰 기근이 오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형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애굽까지 내려왔습니다. 그 긴 얘기를 다 할 것은 없고 마지막에 요셉은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다 나타냅니다. 내가
『요셉이올시다』그러니까 형들이 부들부들 떱니다. 왜? 자기들의 한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에 요셉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여러 형님들, 형님들이 나를 팔았다고 과히 근심하지 마세요. 사실 내가 알기는 나를 애굽에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이 곳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큰 기근이 있을 것을 아시고 우리 가족을 기근에서 건지기 위해서 나를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요셉이 어떤 견지에서 자기의 경험을 보았습니까? 영원한 하나님의 견지에서 자기가 지나온 쓰고 단 경험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보니 원한도 잊어버릴 수 있고 형들의 죄도 쾌히 용서할 수 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을 가진 이들의 사고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경험, 고난이나 안락(安樂)이나 빈궁이나 풍부함이나, 성공이나 실패나 슬픔이나 기쁨이나 죽음까지도 영원한 견지에서 보아야 합니다. 이런 영혼은 언제나 높은 곳에서, 평화와 진리와 사랑의 차원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 역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올라가는 역사라고 볼 수 있지요. 우선 지적으로 많이 올라갑니다. 과학적 지식과 기술면에서도 굉장히 올라가는 역사입니다. 경제면에 있어서도 아직 요원한 바가 많지마는 그래도 점점 올라가는 형편에 있습니다. 생활의 수준도 점점 올라가는 형편에 있습니다.
그러나 윤리적인 면은 어떠합니까? 종종 지적한 바이지만 우리가 사는 二十세기는 과거의 어느 세기보다도 가장 피비린내 나는 세기였습니다. 우리는 도덕적 파탄의 세기에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과학의 지식과 기술이 올라가는 것처럼 인간의 윤리면 과 도덕 면을 올라가는 자리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인간이 당면한 제일 큰 문제입니다.
또 영적 방면에서 보면 어떠합니까? 역시 같은 문제에 당면하게 됩니다. 요사이 한국에는 근대화라는 말이 굉장히 많이 쓰여집니다. 그런데 요사이 한국에서 되는 실정을 보면 최신식 기계를 도입 해다 가 공장을 최신식으로 지어 놓고 낙성식 할 때는 돼지 대가리 놓고 고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굉장한 근대화지요? 그러나 영적 형편은 아직 이런 자리에 있습니다. 텔레비전 사다 놓고 최신식 양옥에서 사는 주부가 집에 오는 액운을 면하기 위해서 불공을 드리다가 중들에게 금품을 다 네다바이 당했다는 얘기도 우리가 종종 듣습니다.
서울 장안에도 고층건물은 여기 저기에 올라간다고 하지마는 아직도 골목 골목에 들어가 보면 굿하는 사람들, 경 읽는 사람들, 손금 보는 사람들, 당책(唐冊)보는 사람들, 점(占)장이 들이 우글우글 합니다. 귀신이 가득합니다.
물질 면으로 올라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도덕적인 면, 영적 방면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진리와 생명의 길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 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활 수준이 올라가는 것처럼 여러분의 영혼이 올라가는 중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의 방향은 어떻습니까? 올라갑니까? 내려갑니까? 한 사람이라도 아직까지 영혼의 방향이 위로 향하지 못했으면 이 시간에 방향을 바로 잡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 하는 자라야 새 힘을 얻고 향상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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