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12:10/ 의에 기갈한 자와 복 / 한경직 목사 2014-08-23 21:39:17 read : 1546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본문의 말씀은 산상보훈 중 넷째 되는 축복의 말씀이올시다. 첫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축복, 둘째는 애통하는 자의 축복, 셋째는 온유한 자의 축복이었습니다.
이상 세 가지 축복은 소극적 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고 오늘 아침 생각하고자 하는 이 넷째 되는 축복 즉,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의 축복은 적극적인 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의라고 하는 뜻은 무슨 신학적 의미보다도 실제적인 뜻으로 옳은 것, 올바른 것, 옳은 사람, 올바른 생활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도 옳은 생활, 사람에 대하여도 옳은 생활, 사회에도 의가 행하여지도록 생활하는 것이 의의 참 뜻인 줄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하는 뜻은 적극적인 성품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이 두 가지는 우리육신의 가장 큰 욕망 욕구, 혹은 갈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리는 것, 대단히 급한 일입니다. 목마른 것도 또한 대단히 급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겸하면 얼마나 갈급(渴急)하겠습니까? 이것은 인간 심령의 가장 강력한 욕망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다 욕망이 있습니다. 지식의 욕망, 물질의 욕망, 우정의 욕망, 사랑의 욕망, 권세의 욕망, 명예의 욕망, 영광의 욕망 등 여러 가지 욕망이 있습니다.
이 모든 욕망 외에 우리의 마음속에는 의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옳은 사람이 되면 좋겠다, 의로운 생활을 하면 좋겠다, 누구나 이런 욕망이 이따금씩 우리 마음속에 생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악하기로 유명한 네로도 사형 허락에 대한 첫 번 사인을 할 때에 차라리 글을 안 배웠더라면―하고 탄식했습니다. 독재자 히틀러도 때때로 나는 이 정치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한가히 그림이나 그리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홀로 앉아 있는 시간이면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런 악하고 인류를 공포로 몰아 넣는 사람들도 의에 대한 욕망은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의에 대한 옳은 생활에 대한 욕망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욕망이 얼마나 강렬한가, 얼마나 계속되느냐 하는 것이 악하고 선한 사람으로 갈라놓는 것입니다. 주린 사람이 음식물을 찾는 것처럼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처럼 우리의 심령이 위에 대해 얼마나 갈급 해 합니까?
돈에 대하여 혈안이 되어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에 대하여 갈급 한 이도 또한 많이 있습니다. 지식에 대하여 갈급 한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지위 권세에 대하여 갈급 한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가 과연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종로와 을지로에 나가 보면 지나다니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만 명에 달합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과연 몇 사람이나 의에 목말라 헤매면서 의를 찾습니까?
그리고 우리 자신들은 어떠합니까? 하나님 앞에서도 의,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오직 의, 사회에서도 오직 의만이 실현되기 위하여 주린 사람이 음식을 찾듯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이 갈급 해 하는 이가 우리 사회에 몇이나 됩니까?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둘째로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런 갈급한 이에 대한 욕망만 있어도 복이 된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짖지는 못했으나 지을 마음은 간절했습니다. 그 간절한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마음에 간절히 부르짖기를―나는 아직도 죄를 계속하여 짓습니다. 그러나 꼭 이 죄를 끊기를 원합니다. 오 주여, 이 죄를 꼭 끊게 하여 주세요. 오 주여, 나는 아직도 죄의 악한 습관을 한 가지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나쁜 버릇을 못 고칩니다. 그러나 꼭 고치고 싶습니다. 오 주여 생각에도 말에도 행동에도 꿈에도 죄 짖지 않게 해 주세요. 우리 가족이 다 감화되지 못하였습니다. 어떻든지 금년에는 감화되게 해 주세요. 우리 사회에 얼마나 불의가 많습니까?
좀더 옳은 사회 깨끗한 사회 좀더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게 해 주세요. 이상과 같은 간절한 소원이 있으면 그는 벌써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왜? 그런 사람의 심령 속에는 새 생명이 싹트고 또 움직이며 장성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의 새 생명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첫째 바른 판단, 바른 욕망입니다. 팥죽 한 그릇 보다도 장자의 명분이 귀한 줄을 아는 바른 욕망 돈 명예 권세보다도 의에 목말라 할 줄 아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른 선택입니다. 모세와 같이 애굽의 향락보다도 양심의 편한 편을 선택하는 바른 선택이 새 생명의 증거입니다. 모세는 의 아닌 물질, 의 아닌 지식, 의 아닌 명예, 의 아닌 사랑은 쓸데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셋째로 이처럼 의에 기갈(飢渴)한 이는 사실 다른 욕망이 그렇게 크게 시험하지 못합니다. 이 큰 욕망에 다른 것들은 점점 적어집니다. 아론의 지팡이처럼 다른 작은 뱀들을 잡아먹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는 벌써 성신의 역사가 있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의에 주리는 사람에게는 셋째로 배부름의 축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주리는 자에게 의의 양식이 있습니다. 요한 복음 六장 三十五절에『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복음 七장 三十七절부터 三十八절에는『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예수께 나아와 그를 믿음으로써 외롭다 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의의 배부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간절히 의를 사모하던 바울도 주께 나아와서 의를 얻은 것을 우리는 다 잘 압니다.
빌립보서 三장 九절에『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바울 사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성 어거스틴도 루터도 주께 나와서 그를 옷 입듯 함으로써 의에 배부름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서만 점점 의로운 데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에 갈급 한 이는 그리스도께 나옵니다. 온전히 그를 생명의 주로 삼습니다. 의의 욕망이 미지근하여 주께 나오는 발걸음이 더디지만, 그러나 나오는 자마다 의의 배부름을 얻는 것입니다.『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미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一장 十七절의 말씀입니다.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가 망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가정은 복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회,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나라는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