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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벧전2:18-25/ 예수의 발자취 / 한경직 목사
    2014-08-25 18:42:07   read : 1171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내용 이 시간 읽은 말씀 가운데서 베드로전서 2장 21절을 다시 한 번 읽고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사람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자취’란 말은 ‘발자취’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는 우리 믿는 이들에게 범사에 본을 보여주시며 그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발자취를 잠깐 묵상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따라오게 하기 위하여 발자취를 남기셨습니다. 여름에 바닷가 해수욕장에 가보면 모래 위에 많은 사람들의 발자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다 물결이 한 번 스쳐 지나가면 그 많은 자취들이 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역사의 해변에도 많은 발자취들이 보입니다. 그러나 큰 역사의 파도가 한 번 스쳐 지나가면 대부분 사라집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역사의 파도가 스쳐갈지라도 전혀 사라지지 아니하는 큰 발자취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발자취입니다. 역사를 읽는 이는 이러한 사실을 다 알 것입니다. 과거 2,000년간 큰 역사의 파도들이 몇 번이나 스쳐갔지만, 오직 예수님의 발자취는 더욱 뚜렷하게 인간 역사의 해변에 나타납니다.

    이 시간 이 예수의 발자취를 잠깐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오늘을 사는 우리 하나하나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이란 문자 그대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1장을 읽어 보면, 예수께서 하루는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어부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때 그들은 곧 주의 말씀대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동생 요한이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에게도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들은 곧 따라나섰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신앙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세리 마태는 세관에 앉아 일을 하다가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또한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문자 그대로 예수의 발자취를 따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를 따라 나사렛에도 가고, 가나에도 가고, 사마리아도 지나고, 여리고를 거쳐서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에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남자들만이 아닙니다. 경건한 여자들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도, 문자 그대로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 예루살렘까지 간 이들입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예수의 발자취를 더듬어 따르기를 힘썼습니다. 이러한 이들을 흔히 성지 순례자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나신 곳, 예수의 머무신 옛 발자취를 찾아 성지를 순례한 성도들의 수는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아마 하나님만 아실 것입니다. 지금은 한국에서 가는 성지 순례자들도 매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모든 순례자들 가운데서도 아마 가장 유명한 이는 옛날 로마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성 헬레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성지에 가서 예수님 탄생한 곳을 찾고 그 위에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하는 골고다 위에도 역시 지금까지 볼 수 있는 성전을 지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발자취를 문자 그대로 따르려고 힘쓴 분들입니다.

    그러나 성지 순례로만은 부족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좀더 깊이 들어가 우리의 마음으로, 심령으로, 생활로, 일로, 봉사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 발자취를 남기신 후에 세상의 많은 성도들이 그를 따르기 위하여 애를 썼습니다. 이 방면에서도 특별한 성도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령 주후 4세기 아프리카 북방에 살던 한 청년은 마태복음 19장을 읽다가 예수님을 찾아온 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자기 말대로 모든 계명을 지킨 좋은 사람인데, 예수님의 마지막 권고인 자기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를 도와주고 또 그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는 그만 부끄럽게도 그냥 돌아갔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던 그 청년이 그 이야기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도 역시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이 부자 청년은 그만 실패하였으나 나는 그대로 따르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황막한 사막으로 들어가 가난한 생활을 하며,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며, 기도하며, 묵상하며, 은혜를 받은 대로 이따금 도시에 내려와 복음을 전파하며, 이렇게 일생을 은둔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마치었습니다. 그분이 성 안토니입니다.

    이렇게 중고(중세)시대에는 많은 청년 남녀들이 이런 생활을 하게 되어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아마 그 대표적인 인물은 성 프란시스와 그의 친구였던 성 클라라, 이런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세월이 지나고 생활 양식이 다 달라졌지만 그들의 그 중심의 신앙은 우리가 언제나 본받을 만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하여 특별히 복음의 씨가 아직 뿌려지지 않은 세계를 향하여 담대히 나가서 개척선교를 한 이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도 리빙스턴 같은 이는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 밀림을 찾아가서 그곳을 헤매며 처음으로 흑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미국의 저드슨 같은 이는 처음으로 버마에 갔습니다. 영국의 모리슨, 그리고 테일러는 중국에 들어가서 중국 내지에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토마스 목사나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마펫 박사 같은 이들은 우리 한국에 개척 선교사로 와서 복음 전파했습니다. 그리해서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이루어진 겁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서 특별한 봉사 사업에 헌신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리해서 독일의 신학자요, 또 의사인 슈바이처 같은 이는 독일에서 모든 일을 내려놓고, 아프리카 밀림지대에 들어가서 병원을 설립하고 일생토록 흑인들의 헌데를 싸매어 주고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일본의 가가와 목사 같은 이는 특별히 빈민굴에 들어가서 구호사업과 복음전파로 일생을 바쳤습니다.

    우리가 그 수를 다 말할 수 없지만, 한국의 손양원 목사 같은 이는 나환자들에게 일생토록 복음을 전파하다가 마지막에 공산당으로 말미암아 순교를 함으로 문자 그대로 십자가에까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랐고, 또 그런 분이 많습니다.

    이렇게 특별한 환경, 특수한 사업을 통하여 일생을 바치며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간 성도의 수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교회는 이런 이를 통해서 온 세계에 전파되고 확포(擴布)됩니다. 우리 한국에도 이런 성도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상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특별한 봉사를 통하여 예수의 발자취를 따른 이들이 많은 것을 생각만 해도 우리는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오늘에 있어서 내 생활 가운데서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모두의 현실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면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자연히 예수의 발자취는 어떠한가? 그런 면을 생각하게 됩니다. 또 성경은 분명히 우리의 이런 점에 대해서 가르쳐 줍니다.

    첫째로, 예수의 발자취는 거룩하십니다. 성결하십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당시 예수를 비난한 이들이 적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격과 사생활에 대하여는 비난한 것이 한 번도 없습니다. 틈을 찾지 못했습니다.

    가령 예수님은 진실하지 않다, 혹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다, 그는 돈을 좋아한다, 이런 등등의 이야기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인격과 성품과 생활은 문자 그대로 성결했습니다. 깨끗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기를 원한다고 하면, 오늘의 그리스도인의 사생활도 이렇게 남이 흠을 잡을 수 없으리만큼 성결해야 할 거예요.

    둘째는, 주님의 발자취는 진리의 발자취입니다. 신앙세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진리 문제입니다. 진리가 어디 있는가? 우주와 인간의 진리가 무엇인가? 이 세상에는 소위 종교라는 것이 많습니다. 무신론적 종교도 있습니다. 한국에도 유교, 불교 외에 소위 신흥종교라는 것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습니다. 단군교니, 태을교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렇게 혼미한 세계 가운데서 오직 새벽별같이 빛나게, 분명하게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가르쳐 줄 뿐 아니라, 보여주는 이는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이 우주를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이 참 하나님을 바로 가르칠 뿐만 아니라, 친히 보여주는 이는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은 곧 그 뜻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인간이 무엇인가 가르쳐줄 뿐 아니라, 친히 그 인격과 성품과 삶을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발자취는 진리의 발자취입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는 사랑과 봉사의 발자취입니다. 복음서를 읽어 보세요. 그는 마구간에서 나셨고, 그가 누운 첫 보금자리는 구유였습니다. 가난한 농촌 나사렛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첫 제자들은 가난한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는 일생토록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나 그는 머리 둘 곳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는 가난하게 살고, 돈을 탐하지 않았고, 큰 집을 짓지 않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죄에 빠진 이들을 용서하며, 구원하였고, 세리의 벗이 되었으며, 주린 자들을 먹이고, 헐벗은 자들은 입히고, 소경과 병든 자들은 고쳐주고, 모든 약한 자들을 도와주었으며, 불쌍하고 눌린 자들에게 자유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의 발자취는 사랑과 봉사의 발자취였습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넷째로, 그의 발자취는 고통과 고난의 발자취였습니다. 그의 고통을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십자가의 고난을 먼저 생각합니다. 물론 가시 면류관을 쓰고 손과 발에 못 박히며 창으로 가슴을 찔리는 고통은 실로 생각만 해도 어려운 큰 육신의 고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 주님은 이러한 육신의 고통 위에 아마 이보다 더 큰 심리적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정신적 고통을 그는 또한 많이 받았습니다. 그는 사랑의 배신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내려와 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자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를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그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내 자녀를 모으려고 한 일이 몇 번이냐” 탄식하면서 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백성을 그렇게 사랑하셨지만 당시에 그 백성은 이것을 몰라주었고, 몰라주었을 뿐만 아니라, 원수로 갚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정신적 고통은 사실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모든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 고통을 어떻게 받으셨습니까? 이사야가 일찍이 예언한 대로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대로입니다. 입을 열지 아니하고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불평을 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다만 잠잠히 입을 다물고 견디셨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고통을 받습니다. 때로는 오해도 받고 누명도 씁니다. 또 때로는 육신의 고통도 받습니다. 병에도 걸립니다. 교통 사고나 화재를 당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고통 가운데서 우리가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습니까? 주님과 같이 이럴 때에도 입을 열지 아니하고 견딜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간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험난한 골고다의 언덕길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은 마지막에 큰 축복으로 바꾸어집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주님은 나를 따라오라고 우리에게 이 시간 말씀하십니다. 어느 때 우리가 예수를 따르지 아니하리오만, 이 사순절에 골고다의 언덕길을 올라가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그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을까요? 내 직장에서, 내 사회에서, 내 가정에서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특별히 고통을 당할 때에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습니까? 잠잠히 모든 것을 참고 이기며 따라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발자취는 최종에는 부활과 영광과 승리와 하늘나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는 물론 복음 전파의 발자취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사순절 기간에 우리 주님의 걸어가신 구속의 발자취, 복음전파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이 춘기 대전도운동의 대열에 모두 나서서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십시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지난 주일부터 앞으로 두 주간 동안 특별히 전도주간으로 정해서 우리의 친구 우리의 이웃을 주님께로 인도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습니까? 이 시간 이 말씀을 들은 여기 청년들은 특별히 내가 어떻게 하면 내 일생을 온전히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을까 생각하며 결단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이 사순절을 당해서 주님의 모습, 골고다의 언덕길을 걸어가시는 주님의 발자취를 저희들이 다시 한 번 생각하였습니다. 주님의 발자취는 거룩하고 깨끗합니다. 오 주님이시여! 저희들도 깨끗한 삶을 주시기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주님의 발자취는 진리의 발자취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미신과 모든 어리석은 일에 빠지지 말고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만 섬길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발자취는 사랑과 봉사의 발자취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내 생활의 범위 안에서 이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발자취는 십자가의 고통의 발자취입니다. 이런 발자취를 따라가면서도 예수님과 같이 오직 잠잠히 참고 견디며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이런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 주님의 발자취는 어디 가나 복음을 전파해서 심령을 구원하는 일이 아닙니까? 이 사순절을 기하여 특별히 우리 하나하나가 이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젊은이들은 이러한 때에 내 일생을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 새로운 결단의 날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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