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16:1-14/ 은혜와 보답 / 한경직 목사 2014-08-25 19:36:43 read : 1589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시편 116편 12절을 다시 봉독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여기에 ‘은혜’라는 말이 있고 또 ‘보답’이란 말이 있습니다. 모두 귀한 말입니다. 은혜는 값없이 받는 봉사나 혹은 선물을 의미합니다. 보답은 받은 바 그 은혜를 다소라도 갚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은혜와 보답이 같이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얼마나 명랑하여지고 아름다워질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이 두 말씀을 잠깐 묵상하고자 합니다.
먼저, ‘은혜’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은혜는 값없이 받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인간의 일생은 실로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끝맺습니다. 인간이 처음에 이 세상에 와서 받는 봉사는 모두 은혜입니다. 아기로서 빠는 젖도 은혜로 받고, 입는 옷도 은혜로 받고, 누운 자리도 은혜로 준비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세상을 떠날 때에 받는 모든 봉사는 그저 은혜입니다. 남이 지은 수의를 입고, 남이 만든 관에 눕고, 남이 메어다 남이 판 무덤에 남이 묻어 줍니다. 자기를 스스로 묻는 사람을 보았소?
이렇게 인간의 마지막도 은혜로 마칩니다. 그동안에, 곧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는 그 어간의 삶도 실로 거의 은혜 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어릴 때의 부모님의 모든 은혜는 말할 것도 없고, 학교에 가서 받는 모든 교육도 등록금으로 선생님들의 은혜를 다 갚는 줄로 생각하면 착각일 것입니다. 내가 지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남이 지어 준 학교에서 공부합니다.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사회의 은혜요, 나라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책을 읽고 많은 지식을 얻으며 어디를 가려면 자동차나 비행기를 탑니다. 많은 연구와 노력으로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개발한 과거의 일꾼들, 학자, 과학자들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생각하여 본 일이 있습니까? 단 우리가 이 대한민국에서 이 만큼이라도 마음놓고 자유롭게 기억합니까?
이 모든 인간의 은혜가 이렇게 막대하거니와 인간의 삶의 배후에 있는 천지와 자연을 지으신 하나님의 은혜는 어떠합니까?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인간이 하루라도 살 수 있습니까? 햇볕도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공기도, 물도, 오곡백과도, 아니 모든 이른 바 천연자원은 모두 거저 주십니다. 금도 거저 주시고, 은도 거저 주시고, 철도 거저 주시고, 석탄과 현대 생활에 필수적인 석유도 모두 거의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모두 은혜의 관계입니다.
육신적인 생활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생각할 때에 더욱 그러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구주를 거저 주셨습니다. 독생자를 거저 보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은혜로 거저 누구나 받았습니다.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지 못합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고 하되 그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 누구나 구원은 은혜로 거저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사람도 없고, 뽐낼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누구나 이 크신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육신 생활이나 영적 생활이나 모두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둘째로 ‘보답’에 대해서 생각하십시다.
이 은혜에 대한 보답을 생각하기 전에 이렇게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물의 은혜를 모르는 것처럼, 공중에 나는 새들이 공기의 은혜를 모르는 것처럼, 우리 인간들이 대체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그 은혜를 모르는 것이 또한 사실이 아닌가 합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다고 해도, 아무리 지위가 높다고 해도, 지혜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실로 놀랄 만한 사실입니다. 그저 자기가 잘나서, 그저 자기의 지혜로, 그저 자기의 능력으로 모든 것이 되는 줄 알고, 스스로 속는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실로 미련하고 몽매한 인간들입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아니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잠깐 깨닫는다고 하지만 대체로는 곧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도 또는 사람의 은혜에 대하여도 곧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원수는 돌에 새기나 은혜는 물에 새긴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물에 새기니 얼마나 오래 갈 것입니까?
예수님 당시에 고침을 받은 문둥병자 10명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 은혜를 잊지 않고 돌아와 감사를 드렸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10사람 중에 오직 한 사람만 은혜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은 실로 비정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또한 타락한 현세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니 두렵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도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우리가 잘 압니다. 어떤 농촌에 한 부자가 있었는데, 어떤 해에 농사가 잘 되어 큰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 곡식을 다 쌓아둘 곳이 없으니 결국은 작은 옛 곳간을 헐어버리고 큰 새 곳간을 지은 후에 그곳에 곡식과 모든 물건을 가득히 쌓아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날 저녁에 자기 방 안에서 평안히 누워 스스로 자문자답합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렇게 말하면서도, 이렇게 큰 풍년이 든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옛 부자만 이러할까요? 듣자 하니 금년은 우리 한국에 대풍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흥겨운 풍년제도 굉장히 벌어진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그런데 우리 국민, 혹은 농민들 가운데 이렇게 풍년이 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아 감사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는지요? 물론 하나님만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가 과히 많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렇게 은혜는 잊기 쉬우므로 옛날 다윗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이렇게 시편 103편 2절에 고백했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깨우쳤습니다. 시편 136편 1절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옛날 성도들은 서로 격려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의 저자는 누군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스스로 외치면서 보답의 길을 찾았습니다. 실로 보통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잊지 않을 뿐더러, 보답의 길을 찾는 이는 사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사는 남한산성에는 ‘효자우물’이라고 하는 샘물이 바로 우리 영락여자신학교 정문 앞에 있습니다. 갔다면 보았을 거예요. 전설에 의하면, 아직 나이 어린 한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어떤 생선을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그 생선을 구하기 위하여 여러 물가로 다녀도 얻지 못하고, 이 우물 앞에 와서는 너무 피곤하여 쓰러져 잠이 들었다가 깨어 보니 그 얕은 우물에 자기가 구하던 생선이 있어서 그것을 가져다가 아버지를 대접하여 그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우물을 ‘효자우물’이라고 부릅니다.
효도를 숭상한 우리나라의 이곳 저곳에 ‘효자문’ 혹은 ‘효녀문’을 지금도 더러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들은 우리 한국에 효자가 많았다는 것보다도, 적었다는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집집이 다 효자 효녀라면, 효자문이나 효녀문을 왜 세워요? 사실 부모의 은혜를 깨닫고 보답하려고 애쓰는 자녀들이 그리 많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지금 여러 곳에 장학회가 있어서 많은 머리 좋은 고학생들이 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크게 성공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줄 생각합니다. 이들 가운데 얼마나 그 장학회의 은혜를 기억하고, 나도 장학회를 세워서 이것을 좀 보답하겠다고 애쓰는 이들이 있을까 하는 것은 아마 하나님만 아실 것입니다. 사실 은혜에 보답한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제시대에 어떤 고학생이 당시 서울에 계시던 어떤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서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갔다고 합니다. 여러 해 후에 그 학생이 한국에 돌아와 일을 하다가 오래 전에 도움을 받은 그 은혜를 생각해서 그분을 도로 찾아보니 그분은 이미 고인이 되었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아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옛날부터 ‘아들은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리지 아니한다.’고 하는 글도 있습니다. 부모의 은혜에 대한 보답뿐 아니라 모든 면이 그러한 경우가 많은 줄 압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은혜의 보답은 다른 사람에게, 또는 후대에, 혹은 사회에 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은혜를 후대에 갚는 정신은 실로 귀한 일입니다. 부모에게 갚지 못한 은혜를 자손들에게 갚고, 다른 부모들에게 갚고, 고아들과 무의무탁한 노인들에게 갚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나라에 충성하고 내가 맡은 일을 잘해서 나라를 바로 세우는 것은, 과거 이 나라를 위하여 순국한 많은 애국지사들의 은혜를 갚는 하나의 길입니다. 문화, 경제,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는 다 빚진 자입니다. 은혜의 빚을 졌습니다. 그 은혜를 갚을 책임이 있습니다. 그 길도 역시 내 자신이 옳게 살려고 노력하고, 내가 어떤 방면에서든지 참된 공헌을 하는 것은 모두 과거 역사적 은인들에 대한 보답이 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과거 100년간에 많은 외국 교회와 또 그들이 파송한 여러 선교사들의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 은혜의 보답에 대한 한 가지 길은, 우리도 더욱 열심으로 복음을 전파해서 우리 민족복음화를 완성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외국에까지 많은 선교사를 파송해서 세계복음화에 공헌하는 길입니다.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또는 후대에 보답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미국 나성(로스앤젤레스) 근처에 웨스트민스터 가든(Westminster Garden)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미국 북장로교회에서 파송을 받아서 외국에서 선교하다가 은퇴한 선교사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가보면 모두 노인들입니다. 약 250명이 있어요. 그 중에는 한국에 나왔던 선교사들도 20여 명이 계십니다. 외국에서 몸 바친 주의 종들이 노년에 이곳에 와서 아무 염려 없이 평안히 살다가 여생을 마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관은 본래 중국에서 예수를 믿은 어떤 청년이, 그러니까 중국 청년이 오래 전에 미국에 가서 사업을 잘해서 성공한 후에 중국에 나와서 복음을 전파하여 준 선교사들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 벌써 50여 년 전에 그 당시의 돈 200만 불을 북장로교회에 바쳐서 세워졌다고 합니다. 복음의 은혜에 대한 좋은 보답이 아닙니까? 우리 한국에도 이런 청년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선교 100주년을 맞는 한국기독교회가 몇 가지 일을 하려고 하는 것도 이 보답의 뜻이 좀 있습니다.
가령 선교사들이 처음 들어온 인천항 월미도 상봉에 대형 십자가를 세워서 선교사들이 우리 한국에 온 것을 기념하고자 합니다. 또는 서울에 외국인들만 모이는 교회가 있는데 교회는 있으나 예배당은 없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힘을 모아서 이 외국 사람들을 위해서 예배당을 하나 지으려고 힘쓰는 중입니다. 경기도 용인에는 초대 선교사들, 그리고 많은 순교자들 위해서 기념관을 세우고, 또 후대를 위해서 청소년 훈련원을 짓고자 기도하고 힘쓰는 중입니다.
모두 어떻게 하면 우리 한국교회가 과거의 이 교회를 위해서 수고한 이들에 대한 보답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런 사업들을 구상하는 중입니다. 개인이나 교회나 은혜와 보답의 길을 배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신 일인 줄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잊지 않으며 작으나 크나 보답할 줄 아는 우리 한국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우리는 개인으로나 가정으로나 나라로나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많이 받은 저희들이올시다. 아버지시여, 우리들에게 한 가지 은혜를 더하여 주셔서 이 은혜를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시고, 이 은혜를 잊지 말게 해 주시고, 또 할 수 있는 대로 이 은혜를 만분지 일이라도 보답할 줄 아는 우리가 되고 한국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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