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21:1-8/ 영혼의 방향 / 한경직 목사 2014-08-26 15:51:47 read : 1862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편 121편 1절과 2절입니다.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시편 123편 첫절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시편 25편 1절입니다.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그 심령이 여호와를 바라봅니다.
유대 나라에는 한국과 같이 산이 많습니다. 산은 말하자면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입니다. 이 경건한 심령들은 산을 바라볼 때에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생각하였습니다. 이들의 심령의 방향, 혹은 각도를 주목하여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두 위를 향하여 있습니다. 사실 모든 시편 기자들의 그 영혼의 방향은 언제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앙망하였습니다. 평안할 때나 괴로울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경험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나, 그들의 영혼의 방향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습니다. 곧 어느 때나 위를 향한 것입니다.
영혼의 방향이 어디로 기울어지는가, 하는 것은 인간 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이 시간 이 영혼의 방향에 대한 문제를 잠깐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방향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 그 방향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길을 갈 때에도 방향을 바로잡아야 그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습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널 때에도 그 방향을 바로잡아야 원하는 항구에 무사히 갈 수 있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이들이 방향을 조그만 잘못 잡으면 충돌이나 혹은 추락사건 등 온갖 불행한 사고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비행기도 역시 그러합니다. 특별히 비행기가 오르고 내릴 때에 그 방향을 옳게 잡아야 무사히 이륙할 수도 있고, 또한 착륙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직접 가서 볼 수는 없지만, 한국에서 제일 높은 산인 백두산 위에는 천지라고 하는 큰 못이 있습니다. 이 못에서 두 큰 강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는 서편으로 흘러 서해에 들어가는 압록강이요, 다른 하나는 동편으로 흘러 동해에 들어가는 두만강입니다. 천지에 있던 물방울은 본래는 한 곳에 있었으나 며칠 후에는 수천 리 다른 거리에 있게 됩니다. 왜? 물의 흐르는 그 방향이 다른 까닭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베드로와 유다를 우리는 잘 기억합니다. 다 같이 주님의 부름을 받아 주님을 따르며 주님께 배우며 주님을 봉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을 보면 베드로는 하루에 3,000명을 회개시키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고, 가룟 유다는 슬프게도 예수를 마지막에는 팔고, 스스로 목매어 죽는 비참한 최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왜? 같이 주를 따랐으나, 같이 주를 배운다고는 하였으나, 그 영혼의 방향이 조금 달랐던 탓입니다.
처음에는 그 다른 방향의 각도가 심히 좁았으나 근본적으로 그 방향이 다르므로 그 사이가 점점 넓어져서 마지막에는 천양지간인 다른 최후로 마치게 만든 것입니다.
내 영혼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는가? 위를 향하는가, 혹은 아래를 향하는가? 하늘을 향하는가, 혹은 땅을 향하는가? 깊이 스스로 살펴야 할 문제입니다.
둘째는, 영혼의 방향은 언제나 위를 향하여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절과 2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지 말라” 이렇게 권면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곧 영적으로 부활하여 새 사람이 되었으면 위엣것을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영혼의 새로운 방향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내 구주로 믿어 성령으로 중생하여 새 사람이 되었으면, 그 영혼의 방향이 달라져야 합니다. 새 사람이 되었다고 아주 무슨 허물이나 작은 죄라도 짓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누구나 실수합니다. 그러나 그 영혼, 곧 그 삶의 방향은 마땅히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위엣것’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와 그 나라에 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엣것’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 나라에 반대 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그 영혼이 항상 그리스도와 그 나라에 속하는 것을 앙망합니다. 벌레가 한번 변하여 나비가 된 후에는 언제나 위로 날아올라가려고 합니다. 벌레일 때에는 항상 땅 속으로 기어들어갔으나, 나비로 변한 후에는 그 생의 방향이 온전히 달라집니다.
인간 생활에 있어서 범사에 위엣것이 있고, 아랫것이 있습니다. 밝은 것이 있고, 어두운 것이 있습니다. 깨끗한 것이 있고,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이 있고, 그와 그 나라에 반대되는 어두운 것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영적으로 부활한 사람은 그 영혼의 방향이 위에 있는 것, 곧 밝은 것, 깨끗한 것을 찾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음악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음악 가운데는 위에 속하는 음악이 있고, 땅에 속하는 음악이 있습니다. 한번 들으면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깨끗하게 하고, 평화롭게 하고, 곧 인간의 심령을 저 높은 곳으로 이끌어 올리는, 오늘 아침 성가대를 통하여 들은 비슷한 그러한 음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한번 들어서 사람의 마음을 해이하게 하고, 더럽게 하고, 타락시키는 추한 음악이 또한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음악을 찾는가? 우리 영혼의 방향이 어떠한 음악으로 기울어지는가?
음악뿐 아닙니다. 모든 예술방면이 다 그러합니다. 영화 가운데도 두 가지 종류의 영화가 있습니다. 위에 속하는 영화, 반면에 땅에 속하는 영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림 가운데도 두 가지 종류의 그림이 있습니다. 위에 속하는 그림, 또 반면에 땅에 속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문학이나 혹은 소설 가운데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위에 속하는 문학과 소설, 또 반면에 땅에 속하는 문학과 소설이 있습니다.
예술뿐이 아닙니다. 사교생활에 있어서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위에 속하는 친교가 있고, 또는 그 반면에 땅에 속하는 친교가 있습니다. 순결과 고귀와 신의와 참된 사랑의 친교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정욕과 탐심,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하는 악마적인 교제도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교제가 있고, 파멸에 이르는 교제가 있습니다. 우리 영혼의 방향이 어떤 친교로 기울어지는가?
친교뿐이 아닙니다. 어떤 직업, 어떤 일을 하든지 위에 속하는 것이 있고, 반면에 땅에 속하는 것이 있습니다. 똑같이 정치활동, 경제활동, 사회활동을 하나, 한 사람은 참된 애국심과 민족중흥의 위대한 사명감에서 할 수 있고,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오직 자기 중심, 자기 이익, 자기 권세, 자기 지위만을 중심하여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우리 영혼의 방향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떤 방면에서든지 오직 위에 있는 것을 찾는가? 혹은 땅에 있는 것을 찾는가?
셋째는, 이렇게 영혼의 방향이 위로 향하는 이는 그 영혼의 눈이 역시 밝아집니다.
멀리 볼 줄 압니다. 장래를 봅니다. 아니 내 죄까지 봅니다. 높이 봅니다. 하늘나라도 봅니다. 하나님의 보좌도 봅니다. 그 보좌 곁에 앉으신 그리스도도 봅니다. 그래서 무엇이나 이 밝은 눈으로 보고 그 가치를 옳게 판단합니다. 무슨 일이나 영원한 견지에서 또는 하나님 나라의 견지에서 보고 그 가치를 판단합니다.
이렇게 영혼의 방향이 위로 향하는 이는 새로운 표준으로 모든 일의 가치를 판단하며 생활합니다. 이렇게 위를 향한 눈으로 보게 되면, 현재에 그렇게 귀하게 보이던 것도 실상은 그리 귀한 것이 못 되고, 현재에 그렇게 부럽던 것도 실상은 그렇게 부러울 것이 못 되는 것도 많습니다. 소위 부귀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탐하나, 이 영원한 세계, 하늘나라의 견지에서 볼 때에는 그렇게 탐할 것도 못됩니다. 왜? 이런 것들은 다 잠깐이요, 풀과 같고 그 위에 피는 꽃과 같아서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질 때가 쉬이 오는 까닭입니다.
이러한 영원한 견지에서 볼 때에는 사실 무엇을 얻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귀하고, 대접을 받는 것보다 봉사를 하는 것이 더 귀하고, 원수를 갚는 것보다 용서하는 것이 더 귀하고, 불의한 재물보다 맑은 빈곤한 생활이 더 귀하고, 세상의 헛된 명예보다 하나님 앞에서 맑은 양심 생활이 더 귀합니다. 육신의 향락보다도 영혼의 영원한 구원이 더 귀합니다.
그리고 넷째는, 영혼의 방향이 위로 향하면 어떠한 생의 위기라도 돌파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0장 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영혼의 방향이 위로 향하여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위로부터 새 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앞에 태산준령이 가로막힐지라도 독수리와 같이 믿음으로 날아 넘어갈 수 있고, 달음박질할 수밖에 없는 생의 위기를 당하여도 믿음의 능력으로 돌파할 수 있고, 피곤한 매일매일의 의무도 위로부터 주시는 인내의 힘으로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비록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나 그 영혼의 문은 항상 위를 향하여 열려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러한 환경 가운데서도 외쳤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이 갇힌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사도 요한이 비록 밧모섬에 외롭게 유배가 되었으나, 위를 향한 그 영혼의 눈은 열려서 하늘나라의 영광과 권세를 그런 가운데서 보았고, 그의 신령한 귀는 또한 천군천사의 할렐루야 찬송을 들은 것입니다. 그 내용을 기록한 것이 오늘날 지금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요한계시록의 전부입니다.
집사 스데반은 돌에 맞아서 순교하는 그 순간에도, 문자 그대로 그 영혼의 눈은 위를 향하여 하나님의 보좌와 그 우편에 서신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났습니다. 하늘의 영광이 그 얼굴에 비친 까닭입니다.
여러분, 하늘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환경, 생의 막다른 골목을 당할지라도 우리 영혼의 방향이 위로 향하면, 우리는 언제나 위로부터 내리는 위로와 능력과 새로운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질병의 막다른 골목, 고독의 막다른 골목, 실패의 막다른 골목, 슬픔의 막다른 골목, 또 죽음의 막다른 골목 등 어떠한 생의 위기를 당할지라도, 우리 영혼의 방향이 위로만 향한다면, 그 위기에서 벗어날 적절한 은혜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주시는 것입니다.
내 영혼의 방향이 어떠한가? 내 영혼의 눈이 어디를 향하는가? 위를 향하는가, 아니면 땅을 향하는가? 분명히 살펴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우리 영혼의 방향이 위로 향하여야 할 것입니다. 위엣것을 찾아야 합니다. 땅엣것을 생각하지 말고, 영원한 위엣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꽃들이 해를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앙망하여야 합니다. 그리하면 생의 어떠한 위기를 당할지라도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절망하지 아니합니다. 인내와 용기로 최후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을 바라볼 수 없을 때에 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지혜가 부족할 때에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인간의 능력이 부족할 때에 하나님의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기도합시다.
천지의 대주재 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영혼의 눈이 위를 향할 수 있게 해 주시고 영혼의 방향이 언제나 천지의 대주재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우리 주님을 앙망하면서, 비록 우리의 발은 이 세상 위를 걸어가나 우리의 심령은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옳게 살 수 있는 이 은총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영혼의 방향의 각도가 잘못된 이가 있습니까? 이 시간 은혜를 베풀어서 영혼의 방향을 옳게 잡을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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