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6:1-8/ 5천만 복음화를 위한 / 한경직 목사 2014-08-26 21:02:57 read : 1667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미 이 목사님께서 말씀드린 대로, 5천만복음화를 위해서는 먼저 여기에 대한 비전을 우리가 보아야 될 것입니다. 또는 여기에 대한 전략이 분명히 서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전략에 의지해서 모든 자력을 동원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서 온 교회가 일치해야 될 것을 이미 우리가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은, 특별히 이 운동을 완수하려면 현재 한국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온전한 헌신이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5천만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헌신’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잠깐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이사야 6장 8절을 다시 봉독합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오늘 저녁에 읽은 성경의 본문은 선지자 이사야의 소명과 헌신에 대한 기록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자기가 젊었을 때에 가졌던 영적 체험을 여기에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저녁,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헌신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시간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이렇게 이사야는 자기가 젊었을 때에 얻은 체험을 회고합니다. 그때에 본 것이 있었습니다. 물론 육신의 눈으로 본 것을 의미함이 아닌 줄 압니다. 신령한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을 현대 우리는 흔히 외국에서 온 말이지만, 비전(vision)이라고 하는 말을 사용합니다. 한 비전을 젊었을 때에 보았습니다.
웃시야 왕은 유다의 역대 제왕 중에 매우 유능한 왕으로서 50여 년간 오래 다스린 왕입니다. 그는 불행하게도 말년에 한 가지 실수로 말미암아, 범죄로 말미암아 최후에는 문둥이가 되어 죽었습니다. 온 국민에게는 참 그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고, 국가적으로 또한 큰 손실이었습니다. 바로 그 해 곧 주전 740년에, 청년 이사야는 성전에 올라가서 조용히 기도하는 중에 한 큰 비전을 보았습니다. 보통 비전이 아닙니다. 여기 기록한 대로,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것을 보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요한복음 12장 41절에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그리스도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사야는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그리스도 곧 세상에 강림하시기 전, 그 영광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인간이 하나님의 본체를 물론 볼 수 없습니다. 볼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내신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온전히 육신을 입으시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도 주님께서 나타나셨다고 요한이 설명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곧 주님은 하늘과 땅, 그 위의 모든 것보다도 더 높으시고, 시간과 공간과 모든 변천을 초월하신 하나님, 그리고 보좌에 앉으셔서 온 우주와 인간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옷자락을 보니 성전에 가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마 그 뜻은 그의 옷자락 곧 그의 영광과 능력은 온 성전, 곧 온 우주에 미친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스랍들이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서 그 둘로는 얼굴을 가리우고, 그 둘로는 발을 가리우고, 그 둘로는 날았다고 하였습니다. ‘스랍’이라는 말의 근본 뜻은 ‘불탄다’는 뜻입니다. 곧 ‘빛나는 이들’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빛나는 천사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우고, 두 날개로 발을 가리운 것은, 비록 천사들이라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감히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는, 곧 경외의 뜻을 의미하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 스랍들이 소리를 높여서 찬송을 부릅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여기에 세 번 ‘거룩하다’라는 말이 반복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가장 거룩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또한 삼위일체를 각각 찬양하는 의미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하다고 하는 뜻은 본래 ‘베인다’는, 곧 ‘온전히 갈라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속된 것과 온전히 성별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다고 하는 뜻은 가장 순결하고, 가장 완전하고, 가장 깨끗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는 한 점의 흠이 없습니다. 어두운 점이 없습니다. 오직 거룩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만군의 여호와’라고 찬양하였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은 천군천사, 우주 만물, 모든 권세를 통할(統轄 모두 거느려 다스림) 지휘하시는 여호와이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 하도다”라고 찬송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현재에도 사실이거니와 장차 올 새 하늘과 새 땅도 의미하는 줄 생각합니다. 현재의 땅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곳이 있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장차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할 때는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믿는 사람들의 소망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스랍들의 이러한 웅장한 찬송으로 말미암아 성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곧 이 우주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충만하며, 하나님은 또한 어디나 사실은 임재한다는 진리를 가르치는 줄 생각합니다.
이렇게 여러분, 청년 이사야는 신령한 눈으로 지극히 높고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시고 전능하신 주 하나님을 뵙게 된 것입니다. 실로 위대한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세요. 얼른 생각하면 이러한 하나님을 뵙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할 것인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러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큰 공포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바라다 볼 때에 자기의 죄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외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큰 두려움이 곧 사망의 두려운 생각이 그의 마음에 사무쳤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올시다.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자기의 입술이 부정함을 고백하였습니다.
물론 마음도 부정하고 행실도 부정한 것을 깨달았지만, 아마 육체의 어느 부분보다도 입술로써 먼저 죄를 짓기 쉬운 까닭으로 이런 표현을 하지 않았는가 생각이 됩니다. 사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신령한 눈으로 보는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자기의 죄를 먼저 깨달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죄를 먼저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비유 가운데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비유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대략 이러했습니다. “나는 안식일을 잘 지킵니다. 십일조도 늘 드렸습니다. 금식도 때때로 하였습니다. 저기에 서 있는 세리와 같은 생활을 나는 하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바리새인은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오긴 왔지만, 사실 그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랑만 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성전에 감히 가까이 들어오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멀리 서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얼굴을 감히 들지 못하고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왜? 그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신령한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들어왔다고 다 하나님의 임재를 직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이렇게 이사야도 하나님을 뵐 때,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그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감사한 것은 그가 죄를 고백하자마자, 그 스랍 가운데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으로 가지고 와서 그것을 그 입에 대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보라 죄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다시 말하면, 죄를 고백하자마자, 회개를 하자마자, 사죄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축복은 하나님의 제단으로부터 온 축복입니다. 사죄입니다.
이 하늘의 제단은 어떤 제단입니까? 성경을 읽어 보니, 세상 사람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그의 죽음으로 드린 하늘의 제단임이 틀림없습니다. 곧 속죄는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이렇게 이사야는 지극히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그 신령한 눈으로 보았고, 또한 그의 죄의 고백과 같이 사죄의 축복을 받아서 그때부터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누구나 오직 이런 경험을 통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에 대한 비전을 먼저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보고, 하나님 앞에 인간이 사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 앞에서 서게 될 때에, 내 자신을 살피면서 나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죄의 어린 양이 되시는 예수를 믿으므로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오직 이 길만이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렇게 새롭게 된 청년 이사야는 그 신령한 귀로 그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명심하여 들으세요. 이렇게 새 사람이 된 후에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곧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번엔 들었습니다. 처음엔 보고, 그다음엔 체험했고, 이번엔 들었습니다. “들은즉 이르시기를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높이 들린 보좌로부터 거룩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은은히 들려왔습니다. 일터를 놓고 일꾼을 부르시는 음성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여기 ‘우리’란 말은 여러 천사들과 같이 의논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고, 또는 삼위일체 간에, 곧 성부 성자 성신을 의미한다고 해석도 합니다. 하여간 여기에 일꾼을 부르는 하나님의 간절한 음성이 있습니다. 분명한 부름의 소리가 있습니다. 긴급한 부름의 소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실 신령한 눈으로 하나님을 뵈었고, 또 그 앞에서 죄 사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그다음에는 신령한 귀가 열립니다. 전에 듣지 못하던 하나님의 음성 곧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일찍이 모세도 시내산 기슭에서 불타는 가시덤불만 본 것이 아닙니다. 불타는 가시덤불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직감할 때에 하나님의 음성 또한 들었습니다. 그 음성은 간단히 말해서 애굽에 돌아가 내 백성을 구원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부름의 음성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얼굴만 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방의 사도가 되어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다 신령한 눈으로 하나님을 뵈었습니까? 주님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 새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러면 우리도 신령한 귀가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의 일이 있습니다. 이 일터를 놓고 일꾼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 이 삼천리 강산을 내려다보시면서 일꾼을 부르십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일이 많습니다. 할 일이 많습니다. 치산치수(治山治水), 산도 다스려야 하겠고 물도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산에는 나무를 심어야 하겠고, 하천을 개수하여야 하겠습니다. 길도 닦고 다리도 놓으며, 황무지라도 개척하여 식량도 증산하여야 하겠습니다. 공장도 세워 각종 물자도 생산하여야 하겠습니다. 더욱이 38선도 하루 속히 철폐하여야 하겠고, 통일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이 땅에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다 할 일인데, 그 가운데도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위해서 꼭 하시기를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이 땅 위에서 죄를 없이하고, 이 백성을 깨끗게 하며, 그 영혼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먼저 이루어지면 남북통일도 쉽게 될 것입니다. 또 이 통일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곧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첫째 사명은 복음 전파입니다.
주님이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고, 온 유대에 미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는 5천만복음화의 기치를 높이 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목적으로 특별히 우리 한국에는 전도의 문을 크게 열어놓으시고, 일꾼을 부르십니다.
지금 우리 한국에서는 어디서나 복음을 전파할 수가 있습니다. 예배당 안에서만이 아닙니다. 학교, 공장, 군대, 감옥, 거리, 어디서나 크게 복음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큰 일터를 마련하여 놓고, 지금 하나님은 일꾼을 부르십니다.
주님은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느니라” 무르익은 곡식밭을 보여주면서 우리 주님은 일꾼을 지금 부르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여러분, 이사야가 이런 부름을 듣고 어떻게 응답하였습니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만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곧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대답만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말하면서 몸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부름에 따라 그 몸을, 그 일생을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하였습니다.
주목하여 보세요. 이사야는 “내 옆에 있는 제사장이 갈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혹은 “서기관이 갈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주님의 부르시는 이 음성을 듣습니까? 우리의 대답은 어떠합니까? 혹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목사님들이 갈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는 분은 없습니까? 혹은 “권사님들이 잘 갑니다.” 하는 분은 없습니까? “여기 장로들이 있습니다.” 하는 분은 없습니까?
이사야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시옵소서” 혹 우리 가운데 갈 마음은 있으되 “지금은 못가겠습니다. 며칠 후에 가겠습니다.” 혹은 “몇 달 후에 가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이는 혹은 없습니까? 이사야는 그렇게 대답하지 아니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곧 그 뜻은 “내가 지금 여기 있습니다. 나를 곧 보내소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청년시대에 이 대답을 하고 헌신하였습니다. 예레미야도 젊은 시절, 소년시대에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이 대답을 하였습니다. 요한도 청년시대에 이 부름을 듣고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야고보도 젊은 시대에 이 부름을 듣고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사실 기독교운동은 청년운동이었습니다. 모두 30세 내외의 청년들이 자신의 몸을 바쳐서 세계 인류를 구원하는 이 큰 구원의 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물론 청년들도 많이 있습니다. 청년시대에 주님의 부르심을 분명히 듣고,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대답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런 청년들과 같이 하십니다.
또한 우리 신교의 믿는 진리 가운데 아주 중요하고 특별히 강조하는 진리 가운데 하나는 평신도와 교직자의 구별이 없다고 하는 진리입니다. 그것은 마틴 루터가 강하게 주장한 대로, 누구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이라고 하는 그 원리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누구나 다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교역자만 하나님의 일꾼인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우리는 어떤 직업을 가졌든지 그 직장에서 헌신하고, 복음의 전파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직업에 이미 착수하였든지 그 자리에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대답하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또 헌신이란 온몸과 그 몸에 속하는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받은 재능이 있습니까? 재능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시간이 있습니까?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물질이 있습니까?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보셨어요? 전도는 어떻게 생각해 보면 현대의 전쟁과 비슷합니다. 사실은 신령한 의미에서 전도는 마귀의 나라와 싸우는 것입니다. 현대 전쟁이 일어나면, 우선 공군이 동원이 되어서 적진에 가서 넓게 모조리 폭격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적의 진지를 파괴하고, 적진을 혼란시킵니다. 그다음에 또 어떻게 하는지 압니까? 해군이 동원됩니다. 적의 해안에 있는 요새를 집중해서 함포 사격합니다. 그래서 그 요새를 깨뜨려 버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만 하였다고 전쟁에서 온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한 후에 온전한 승리는 공군과 해군의 공격이 있은 후에, 곧 육군이 상륙을 해서 일보일보 적의 진지를 점령하여야 온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의 전선이 이와 비슷합니다. 전도에도 공군과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혹 공군의 폭격과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가령 요샛말로 매스컴 전도입니다. 라디오 방송은 어디나 가서 떨어집니다. TV방송이나 많은 전도지와 전도 책자를 발간해서 뿌리면 어디나 떨어집니다. 마치 이것은 복음의 폭탄을 공군을 통해서 던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해군과 비슷한 것도 있습니다. 그건 뭔지 생각해 보았습니까? 여러분, 작년 여름에 빌리 그래함 대전도대회에 가보셨지요? 여의도 광장에 100여 만을 모아 놨습니다. 그리고 빌리 그래함 한 분이 그들에게 일시에 복음의 폭탄을 던집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함포 사격이오. 이거 필요합니다. 이러한 전도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만 해서 온전히 승리를 거둡니까? 그건 아니란 말이오. 이렇게 한 후에 육군이 필요합니다. 보병이 필요합니다. 곧 십자군의 보병이 들어가서 생명 하나하나를 붙잡아서 개인적으로 상담을 하고, 교회로 인도를 하고, 계속해서 도와주어야 그 영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공군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해군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육군, 십자군의 보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다 빌리 그래함과 같은 전도자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20세기에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가 다 그런 전도자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하나가 십자군의 보병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영적 전쟁에도 온전한 승리는 이 보병이 거두는 것입니다. 찬송가의 한 가사와 같이 “천사같이 말 못하고 바울같이 못하나 내 집 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 많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십자군의 보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이사야와 같이 오늘 저녁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대답하면서 헌신을 해야 하겠습니다. 5천만복음화 전선에서 우리 하나하나는 십자군의 보병으로서 헌신을 해야 되겠습니다.
제가 들으니, 지금은 우리 남한의 기독교인의 수가 거의 400만에 가깝다고 합니다. 금년에 우리 이 400만이 다 십자군의 보병이 되어서 한 사람씩만 맡아서 전도를 하면, 명년에는 그리스도인의 수가 이 땅 위에 800만이 됩니다. 명년에 이 800만이 또 다 십자군의 보병 노릇을 해서 한 사람씩만 구원한다고 할 것이면, 내명년 후에는 얼마가 되죠? 1,600만입니다. 내명년 후에 1,600만이 다 보병이 되어서 한 사람씩만 인도하면 3년 후에는 얼마나 되겠어요? 이 땅에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되겠어요? 3,200만이 거의 다 되겠어요.
여러분, 이것을 복음의 연쇄반응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원자탄의 위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아시지요? 어떻게 원자탄이 이런 위력을 발휘하는가? 원자탄에 한번 불꽃을 쳐넣으면 그것이 연쇄반응이 되어서 한꺼번에 힘을 나타낼 때에 무서울 만한 파괴의 힘을 나타내고야 마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복음의 연쇄반응이 일어나려고 할 것이면, 제일 먼저 불을 붙이는 데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언제부터 5천만 우리 동포를 복음화하기 위해서 복음의 불길이 타오를 불을 붙여 놓아서 연쇄반응이 일어나게 할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오늘 저녁부터 불을 붙여야 되겠습니다. 그렇잖아요? 오늘 저녁부터 불을 붙여야 되겠습니다.
여기 앉아 있는 우리 하나하나가 오늘 저녁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내가 비록 빌리 그래함은 못 되어서 한 번에 몇만 명 구원할 수는 없지만, 내 이웃, 내 친척, 내가 아는 한 사람은 구원하겠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우리가 다 이런 대답을 하고 헌신하면, 이 복음의 연쇄반응이 오늘 저녁부터 시작될 겁니다.
여러분이 다 이런 은혜 받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우리 지금 다 기도합시다. 이 시간, 신령한 눈을 열어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다.
여러분, 다 그렇게 할 마음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우리 다 기도하십시다. 다 같이 일어나서 한번 기도하십시다. 다 같이 일어나서 주님의 부르는 음성을 우리가 들으십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간절한 마음으로 한 3~4분 동안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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