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3:3-14/ 광야의 소리 세례요한 /한경직 목사 2014-08-27 11:08:57 read : 1450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서울은 이미 대도시가 되었습니다. 대도시가 될수록 소음이 많아집니다. 자동차 소리, 기계 돌아가는 소리, 사람이 떠드는 소리로 소란합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 귀를 잠깐 기울여 멀리 고요한 유다 광야에서 들려오는 맑은 광야의 소리를 들어봅시다.
곧 세례 요한의 음성을 잠깐 듣기로 합시다. 그는 2,000년 전에 살았고, 또 잠깐 외치고 쓰러진 청년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그 광야의 소리는 세기를 통하여 지금까지 은은히 들려옵니다.
첫째, 그 모습을 잠깐 바라봅시다.
그는 본래 제사장 사가랴와 아론의 후손인 어머니 엘리사벳에게서 났습니다. 제사장 사가랴가 성전에 들어가 분향할 때에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장차 엘리사벳이 비록 늙었으나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는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말을 한 누가복음 1장의 이야기를 잘 기억합니다. 이렇게 그는 아마 예루살렘이나 다른 제사장들이 사는 동네에서 낳았지만, 보통 다른 아이들과 같이 교육은 받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장 80절에 “아이가 자라매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하였습니다. 그는 오래 광야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황막한 광야는 그의 교실과 운동장이었고,
사해 근처 소돔과 고모라의 폐허는 그의 교과서 역할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石淸)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광야에서 얻을 수 있는 식물뿐입니다. 그의 옷은 약대 털옷이며 허리에는 가죽띠를 띠었습니다. 옛날 선지자 엘리야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그는 홀로 고독한 가운데 오직 하나님과 대면하며 그의 육성을 분명히 들은 것입니다. 옛날 모세가 시내산 기슭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바와 같이 세례 요한은 황막한 유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유다 역사상 400년간의 침묵을 깨뜨리고 혜성과 같이 나타나 외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은 비로소 하나님의 사자의 음성을 다시 듣게 되었습니다. 그의 성품은 강직하며 솔직하고 그의 생활은 근엄, 성결, 극기, 희생적이었으며, 그의 음성은 정열과 능력으로 충만한 예언자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히 참 예언자의 이 광야의 소리를 듣기 위하여 유대 광야와 요단강 강변으로 구름같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 광야의 외치는 소리는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는 이렇게 새 시대가 가까워오는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곧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음을 알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권고하였습니다. 회개와 세례는 천국에 들어가는 데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당시 유대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므로 무조건 천국에 들어갈 줄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러한 오해와 망상을 씻어 버리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요단강 강변에 있는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구원은 무슨 유전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믿음으로 혹은 공적으로 얻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개인적입니다. 나 하나하나가 개인적으로 내 죄를 회개하여야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또 세례를 받으려면 꼭 회개하고 자복한 후에 받아야 한다고 분명히 요구하였습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죄는 회개하지 아니하고 나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꼭 맺으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구원을 얻으려면 참으로 죄를 회개하여야 합니다. 회개란 말은 죄에서 떠나 돌아선다는 뜻입니다. 죄에서 떠나 돌아서서 주님께 와야 구원을 얻습니다.
또한, 장차 올 심판에 대하여 분명히 경고하였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반드시 찍어 불에 던져질 때가 오는 것을 분명히 알렸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 맺을 수 있을 때에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또 이러한 말로도 장차 올 심판에 대하여 경고하였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아마 지금 청년들은 키를 보지 못한 이들도 많은 줄 생각합니다. 나는 농촌에서 자라 키질을 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곡식을 마당에서 떨면 자연히 알곡과 쭉정이가 같이 섞입니다. 이것을 키에 담아 까불면 쭉정이는 바람에 날리고 알곡만 남게 됩니다. 이렇게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어서 알곡은 모두 곳간에 들이고 그 쭉정이는 불에 태우는 것입니다. 우리 세계에도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어 알곡은 천국 창고에 넣고, 쭉정이는 꺼지지 아니하는 지옥 불에 던질 때가 오리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알곡인가, 혹은 쭉정인가? 내 믿음을 깊이 살펴야 합니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에게 대하여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에 길을 가다가 이러한 말을 마음 귀로 들었다고 합니다. “네가 죄를 버리고 천국에 가겠느냐, 혹은 네가 죄를 그냥 가지고 지옥에 가겠느냐?” 그는 이 음성을 들은 후에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정(擇定)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죄를 버리고 천국으로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결심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결단이 있는 이에게는 심판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 결단이 다 있습니까? 만일 한 분이라도 이에 대하여 불분명하면 이 시간 결단합시다.
세례 요한은 이 회개에 대한 요구와 심판에 대한 경고만 한 것이 아닙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 인간 사회에서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을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누가복음 3장 10절 이하에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이 간단한 말씀 가운데 세례 요한은 오늘 우리 사회가 당면하는 3대 문제에 대하여 간결한 교훈을 줍니다.
곧 첫째는 빈부의 격차문제 곧 경제문제, 둘째는 세리 공무원의 기강문제, 셋째는 군인의 기강문제입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은 옷 두 벌 가지고 있는 자들은 없는 자들에게 한 벌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옛날도 옷 두 벌을 가진 자들이 있는 반면에 한 벌도 없는 자들이 또한 많았습니다.
지금 한국의 경제가 좀 발전한다고 하나 빈부격차의 문제는 국가의 중대한 사회문제로 되어 있습니다. 대기업은 유지되나 중소기업은 몰락된다고 합니다. 같은 도시에서 살면서 10층, 12층 고층 건물 그늘 아래에는 단칸방도 없는 국민이 많습니다. 도시와 농촌의 격차, 이것은 큰 사회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좀더 평준화된 사회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정치가, 경제인, 사회학자들이 꼭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여기에 세례 요한은 다만 그 문제 해결의 핵심이 되는 원리를 지적합니다. 곧 그것은 있는 이들이 없는 이들에게 자기의 것을 자진하여 나누어 주고자 하는 정신생활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폭력으로 자본주의와 지주들의 재산을 강탈하여 농민과 노동자의 사회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회가 얼마나 암흑하다고 하는 것을 목도합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안이 무엇인가 생각하여 봅시다. 그것은 있는 자들이 없는 자들에게 자진하여 나누어주는 정신 아래서 모든 법률과 제도를 나누어 사회복지 국가를 이룩하는 데 있습니다.
다음 주일이 바로 봉사 주일인데, 옷 두 벌 있는 자는 그만두고 세 벌 이상 있는 이들은 한 벌씩만 가져오기를 바랍니다. 듣기만 하지 말고 우리도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여 봅시다.
세리에게 그는 정한 세금 외에는 늑징치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정한 것 외에는 더 받는 데서 부정부패가 생겨납니다. 일전 신문을 보니 어떤 세무서 직원은 아주 정직하여 표창을 받았다고 합니다. 모든 공무원들이 이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군인들에게도 특별히 강포하지 말라고, 또 받은 요를 족한 줄로 알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군인은 국가 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지닌 국민들입니다. 이 의무를 바로 감당하기 위하여 그들은 무장을 하였습니다. 이 무기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국민이 자유와 질서와 평화를 위하여만 사용해야 합니다. 다시 우리 사회에서 소위 군인 난동이니 난입이니 하는 말이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례 요한은 모든 말씀을 통하여 그의 최대의 사명을 수행하였는데, 곧 그것은 장차 나타날 메시아를 만나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그는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하여 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최후로 손을 높이 들어 외쳤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그의 손가락은 그리스도를 향하였습니다. 그의 증언을 자세히 들어보세요. 그는 그리스도가 가장 위대한 종교가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위대한 도덕가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위대한 사회봉사자요, 혁명가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가장 위대한 종교가요 도덕가요 사회봉사자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런 면을 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임을 지적하였습니다. 곧 그리스도는 만민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代贖)하신 구주임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는 한 종교가만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구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분명히 들어보세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세례 요한은 이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선구자의 역할을 마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세례 요한은 당시 헤롯왕의 음란한 죄를 책망하고 결국은 그의 독부(毒婦) 헤로디아의 악한 손에 최후를 마치었습니다. 성경에 그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 묻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시체는 성지 어느 곳에 한 줌의 흙으로 화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광야에서 외친 소리를 묻을 수는 없습니다. 그 소리는 영원히 살아남아 있습니다. 세기를 통하여 광야의 소리는 외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이 소리는 지금도 들립니다. 우리가 그 음성을 듣습니까? 아니, 분명히 들어야 합니다. 우리도 그 어린 양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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