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4:6-15/ 질그릇에 보배 / 한경직 목사 2014-08-27 11:34:21 read : 1797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4장 7절을 다시 봉독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라고 하는 말은 당시에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을 의미합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믿는 사람들을 역시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보배’라는 말은 그 전 절에 기록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의미합니다. 곧 ‘복음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질그릇’이란 말은 물론 ‘우리 육체’와 ‘인간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은 질그릇 같은 그 속에 귀한 보배를 가진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인들의 모습이올시다.
이 시간, ‘질그릇에 담긴 보배’ 혹은 ‘보배가 담긴 질그릇’ 이런 제목 아래에서 잠깐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질그릇을 잠깐 생각하여 보십시다. 질그릇은 천한 흙으로 되었고, 따라서 약하고 불완전하고 상하기 쉽고, 깨어지기 쉬운 것입니다. 인간은 그 육체도 질그릇이요, 그 마음도 말하자면 질그릇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본래 흙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약하고 천하고 병나기 쉽고 상하기 쉽고 결국은 노쇠하며 후패해져서 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 곧 그 정신력도 질그릇과 비슷합니다. 약하고 불완전합니다. 인간의 지력, 의지력, 인내력도 다 약합니다. 그러므로 상하기 쉽고 깨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상심’이라고, 마음이 상한다는 말도 있고, ‘낙심’이라고 마음이 떨어진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그 육체면으로 보나 또는 정신면으로 보나 하나의 약한 질그릇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다 이 약한 인간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대로 우리 신자들에게는 그 속에 보배가 담겨 있습니다. 질그릇 같은 속에 보배가 담겨 있습니다. 그 보배가 무엇인가? 곧 복음의 진리입니다. 마음에 담아 오는, 복음의 진리로 말미암아 오는 하나님의 능력을 역시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비유 가운데서 천국은 마치 밭에 묻힌 보화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혹은 값진 진주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복음의 진리를 보배, 보화, 혹은 보물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큰 가치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왜 금강석을, 혹은 진주를 보배라고 하는가? 그것들은 큰 가치가 그 속에 있는 까닭입니다. 이렇게 복음은 큰 가치가 그 속에 있습니다. 금강석이나 진주는 또한 변치 아니합니다. 어디 가나, 언제나 그 가치가 변치 아니합니다. 누구에게나 가치가 있습니다. 복음이 역시 이러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보배는 큰 행복을 누구에게나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은 모든 인간에게 큰 행복을 금생과 내생에 가져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질그릇에 담긴 보배입니다. 한편에는 약하나 다른 편에는 매우 강합니다. 한편에는 천하나 다른 편에는 매우 고귀한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실생활의 모습을 사도 바울은 8절과 9절에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지금 이 말씀을 잠깐 묵상하여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는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광야로 나갈 때에 뒤에는 애굽 군대가 따르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혔습니다. 문자 그대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그들은 아주 싸이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간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의 영적 체험이올시다. 우리 믿는 사람도 때로는 사방으로 길이 막히는 듯하는 환경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 믿음이란 보배가 있어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 포위망을 뚫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는 6?25 당시에 문자 그대로 이런 체험한 이들도 있는 줄 생각합니다.
들으니 인도에 가서 일하던 어떤 선교사가 조용히 한 곳에 가서 앉아 기도를 하던 가운데, 무엇이 자기 몸을 둘러싸는 듯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눈을 떠 보니 큰 뱀이 그 몸을 둘러 감았더라는 거예요. 물론 그는 크게 놀랐습니다. 그 뱀이 힘껏 둘러 감으면 자기는 죽을 것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냥 하나님께 기도만 계속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 다시 눈을 떠보니 그 뱀이 스스로 풀고 어디로 가더라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때로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질그릇 같은 인간이 할 수 없는 때를 당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보배로운 믿음이 있는 이는 이런 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주 싸이지는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도 때때로 답답한 일을 당합니다. 질그릇 같은 인간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민하며 번민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아주 낙심하지는 아니합니다. 어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낙심해서 크게 범죄하는 이들도 있고, 심지어 자살하는 이들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이는 아주 낙심하지는 아니합니다. 아무리 사방이 캄캄하나 그 가운데서도 소망의 별을 보고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속에 있는 보배로운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까닭입니다.
전에 엘리야 같은 선지자도 악한 왕후 이세벨의 핍박을 받아 멀리 광야길로 가다가 몸이 심히 피곤하여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길가에 있는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이렇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주여 이제는 넉넉합니다. 내 생명을 속히 취하여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는 쓰러져 곤하게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쯤 자다가 보니 어떤 분이 깨웁니다. 일어나서 먹으라고 합니다.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떡과 그 물을 마시고 새 힘을 얻어서 일어나서 40일 40야를 걸어서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 도달하였다고 하는 이 얘기를 성경에서 우리는 읽어 봅니다.
이것이 질그릇 같은 우리 인간이, 마음 속에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참된 신도들의 공통한 체험일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도 이 광야 같은 인생행로에서 때로는 너무 피곤해서 쓰러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때에도 새로운 생명수와 새로운 생명의 양식을 위로부터 받아서 새 힘을 얻고 새 용기를 얻어서 다시 일어나 인생길을 계속하여 걸어가는 것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는 아니합니다.
전에 사도 바울도 지중해에서 큰 풍랑을 만나 배가 열나흘 동안이나 정처 없이 표류할 때에 다른 이들은 정신을 잃었습니다. 낙심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서 힘을 얻어서 오히려 그들을 격려한 것입니다. 결국은 그의 믿음대로 인명은 다 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한 시인 휫티어라고 하는 분의 ‘영원한 선’이라는, ‘이터널굳니스(eternal goodness)’ 라는 시가 있는데, 그 한 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어디 그 섬이 있으며 그 넓은 종려나무 가지가 보일는지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나는 확실히 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보호의 밖에까지 내가 표류하지 않을 것을.”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 밖까지 우리 믿는 사람들은 표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 고해와 같은 세상을 지나갈 때에 풍파와 큰 환난과 큰 슬픔을 만나 내 작은 배가 어디로 몰려가는지 알 수 없는 답답한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보배로운 믿음이 있는 이는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의심하지 아니합니다.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셋째는,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핍박을 받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또 어느 나라에서도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심지어 기독교국이라는 나라에서도 참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고립될 때도 있고, 또는 곤란을 당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북한 같은 곳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역사를 통하여 많은 성도들이 혹은 수감을 당하였고, 혹은 순교까지 한 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절대로 버림을 받지 아니합니다. 이상한 것은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을 받는 그 순간에 참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큰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여러분 잠깐 회상하여 보세요. 그가 돌에 맞아서 죽는 그 순간에 그의 눈은 밝아져서 하나님의 보좌와 그리스도께서 그 옆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얼굴은 천사와 같이 빛나게 변한 것입니다. 신명기 31장 6절에,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그 약속을 지킵니다. 그러므로 시편 27편 10절에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외친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 부르는 찬송가에도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하는 가사처럼, 주 예수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합니다. 핍박을 받아도 절대로 버림을 받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넷째는,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 하였습니다.
어떤 권투선수는 거꾸러집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서 최후의 승리를 하는 선수도 있습니다. 전에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매를 맞아 거꾸러지고 죽은 줄로 알고 원수들은 흩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다시 일어났습니다. 거꾸러졌으나 망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시편 37편 24절에,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하나님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이러합니다. 거꾸러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거꾸러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이는 다시 일어납니다. 실패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실패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다시 일어납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나 망하지는 아니합니다. 싸움에서 혹 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싸움에는 결코 지지 아니합니다. 최후에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7전 8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곱 번 넘어졌으나 여덟 번째 일어난다.’ 이것이 성도들의 생활의 특색입니다. 언제나 재기하고 최후 승리를 거둡니다. 어떻게? 질그릇 같은 인간이나, 그 속에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강한 능력이 같이 하시는 까닭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다 약하고, 대부분 가난하고, 공부도 많이 하지 못한, 질그릇 같은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자의 속에는 보배가 있습니다. 금보다 더 귀한 보배, 금강석보다 더 귀한 복음의 진리의 빛이 우리 속에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때로는 혹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다시 일어날 수 있고, 최후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이 빛을 비추일 때에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큰 봉사와 역사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300명이 질그릇 항아리 속에 감추었던 횃불을 밝히며 담대히 싸울 때에 미디안의 100만 대군이 무너지고 큰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질그릇에 담긴 진리의 횃불을 일제히 비추어 나아갈 때에 이 어두운 세상을 능히 밝히고, 우리 사회에서 악한 사상과 풍속과 유행과 온갖 부정을 일소하도록 큰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버지시여, 저희들이 다 질그릇같이 천하고 약하나 우리 속에 보배로운 진리의 빛을 켜 주신 것을 생각할 때에 무엇으로 다 감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이 깊은 진리를 깨달아서 이 피곤하고 죄악 많은 인생길을 걸어갈 때에 거꾸러뜨림을 당하나 망하지 아니하고 다시 일어나고 내 스스로 구원을 얻을 뿐더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밝힐 수 있는 아버지의 귀한 자녀들로 삼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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