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국 속담에 목마른 자가 우물판다는 말이 있습니다. 배가 고픈 사람이 간절히 밥을 찾습니다. 추운 사람은 따뜻한 옷이나 따뜻한 처소를 찾아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추운 지역에 있는 나라들이 선진국이 되고 따뜻하고 온화한 환경에 있는 나라와 민족들이 대게 후진국이 된 이유는 추운 나라에서는 그 환경을 극복하기 위하여 엄청나게 노력하며 애를 쓰지만 자연환경이 복을 받아 온화한 나라에서는 그렇게 애쓰고 힘쓰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자연히 사람들이 게을러지기 마련인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이 심할수록 그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금식하고 철야하고 부르짖어 외치기 때문에 신앙이 깊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평안하면 자기를 의지하고 주님을 찾는 마음이 약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망의 세력인 고통이 결국에는 거꾸로 오히려 생명을 가져오는 역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해산할 때에 굉장히 괴로워하는 고통을 당하지만 그 고통의 결과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본론>
1.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첫째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우리가 생각해 보면 이 원리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과 처절한 싸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죽을 수 없으신 분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일하게 죽는 이유는 우리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을 대신 짊어졌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 스스로는 죽을 이유가 전혀 없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악의 잔을 마시라고 했습니다. 그 잔을 들여다보니 음란, 방탕, 시기, 분노, 질투, 살인, 강간, 간음 온갖 더러운 죄가 혼탁하게 가득하게 차여 있는데 이것을 마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독을 전부 책임지라. 죄의 독은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몸서리쳤습니다. 몸을 움츠렸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합니다. 죄를 지은적도 없습니다. 순식간에 모든 인류의 죄악의 잔을 주님이 다 짊어지고 마시고 책임져야 되니까 주님이 고뇌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몸부림쳤습니다.
하나님께 그는 잔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지엄하신 뜻이 계시므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그 가운데서 갈등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42~44에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 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 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의사들은 말하기를 사람이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으면 코피가 터지잖아요. 그와 똑같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 피하에 있는 모세혈관이 터져서 땀구멍을 통해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무시무시한 죄악의 잔을 마셔야 된다는 그 상황에 처해서 그는 몸부림쳤고 안 마시자니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게 되고 마시자니 너무나 어마어마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 갈등에 주님이 기도하는데 땀이 피로 변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우리 주님은 심한 마음에 고통을 겪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원수들이 조수했습니다. 주님이 기도만 하면 열두 영 되는 천사를 보내어서 능히 십자가에서 내려 오실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원수들을 한마디로 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처절한 모욕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주님이 두말하지 않고 참으신 것은 주님이 죽으셔야 우리가 살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이 살면 우리가 죽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악의 빚을 갚으려고 십자가에 매달렸는데 주님이 그 빛 갚지 아니하면 우리가 갚아야지요. 죄의 값은 사망이지요. 우리는 죄를 짊어지고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요, 사람이시기 때문에 우리 죄를 갚고도 살아날 수 있지만 우리는 못살아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우리는 다 멸망 받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면 우리가 삽니다. 정말 역설적인 것입니다. 죽으면 살리고 살면 죽입니다. 죽음이 생명을 가져오는 원천이 된다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6:53~54에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주님은 내려올 수 없는 분이 아니라 능히 내려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택하고 매달리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 선택이 우리 주님께 더 큰 괴로움이었습니다.
내려올 수 있는데도 안 내려 오시고 못 내려오시니까 그 고통이 얼마나 괴롭습니까? 주님의 택하신 길은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임으로 인류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놓는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사망을 통하여 주님께서 생명을 낳으신 것입니다. 나죽고 너 살고. 너 살리기 위해서 내가 대신 죽겠다는 주님의 결의를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5:31~32에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 찌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희롱합니다. “야! 너 남은 살리고 왜 너는 못 살리냐? 남 살린다고 큰 소리하고 난 다음 너는 왜 못 살리냐?” 그 원수들이 한 말이 맞았습니다. 남은 살렸으되 자기는 살릴 수 없습니다. 왜, 자기가 빚을 갚지 아니하면 다른 사람의 빚을 청산해줄 수 없지 않습니까? 자기가 죽지 아니하면 사람들을 살릴 수가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 억센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너무나 우리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주님이 그때 살기로 결정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왔더라면 우리의 형편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희망이 없이 절망이요, 앞길이 캄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죽음과 모욕과 고통을 택하시고 삶을 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죽음과 고통에서 해방되고 오늘날 영원한 소망과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1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했습니다.
히브리서 2:10에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 하도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주님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가고 우리는 들어가면 영원히 무덤에 있을 수밖에 없는데 예수님은 사흘 만에 다 청산하셨습니다.
그만큼 능력이 계신 하나님 아들이 우리 인생들은 한번 무덤에 들어가고 음부에 빠지면 영새토록 못나오는데 예수님 우리 대신 무덤에 들어가고 음부에 내려갔으나 사흘 만에 사망과 음부를 다 극복하시고 승리하시고 일어나시므로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영원한 생명의 원천입니다.
성경말씀 요한복음 12:24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주님은 이제 수없는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모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사망과 음부는 다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의 쇠사슬은 그리스도 안에서 철컥철컥 다 꺾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사망과 음부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넉넉히 이기게 된 것을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어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예수님 죽음이 우리의 생명을 낳아 주셨습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이 되고 소망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사망이 생명을 낳았습니다. 사망이 이김과 승리를 낳아 주신 것입니다.
2. 왜 바울인가?
둘째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성경은 사도 바울 선생은 위대한 사도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사도 중에 들지 않았지만 예수님 죽었다가 부활하신 이후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선택한 사도 바울이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되고 성경의 3분의 2를 기록한 신약성경의 저술자가 된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 선생이 이렇게 위대했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바울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오늘날 기독교가 온 세계를 정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을 통하여 구라파와 소아시아에 복음이 증거 되고 이것이 소아시아와 구라파와 세계를 복음화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 바울입니까? 그것은 바울이 생명을 낳기 위하여 고난과 죽음을 짊어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느 사도 보다 바울은 더 고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죽음의 멍에를 짊어지고 고통을 당했습니다. 사망은 그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신비한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어느 교회 가든지 목사님의 설교가 굉장히 은혜로우면 그 배후를 알아보면 그 목사님이 고생을 많이 한 분인 것입니다.
목사님이 교육을 많이 받아 석학 박사학위를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아무리 유식하게 설교를 한다 해도 아무런 은혜가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편안하게 인생을 산분인 것입니다. 많은 눈물과 고통과 괴로움을 겪은 사람은 그 속에서 생명의 역사가 우리에게 넘쳐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포도송이를 입에 넣고 굴리면 아무 맛이 없습니다. 터뜨려야 단맛이 나옵니다. 호두를 손에 넣고 아무리 돌려도 안에 있는 살을 먹을 수 없습니다.
망치로 때리면 아주 보드랍고 달콤한 속살이 나오지 않습니까? 여러분 향 기름을 얻으려면 감람열매를 찧어야 되는 것입니다. 찧어야 향 기름이 나옵니다. 주의 종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얻어터지고 깨어지고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한 사망을 체험한 사람이 생명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사망은 주의 종에게 역사하고 생명은 성도들 가운데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과 생명의 역사는 서로 손을 잡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사망이 역사하는 곳에 생명이 나타나고 생명이 나타나는 근원을 보면 사망의 원줄기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그렇게 위대한 생명의 역사를 나타냈습니다. 바울을 통하여 복음이 마케도니아를 통하여 온 유럽에 전파되고 소아시아를 통하여 아시아 전체에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일을 하게 된 이유는 바울선생이 무지무지한 사망의 고통을 체험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 7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선생은 자만할 만해요. 아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로마시민이었습니다. 산헤드린회원이었고 그는 하나님의 엄청난 묵시와 계시를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고난의 이유와 그 원리를 설명하신 어른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이 그는 교만해 질 수 있는 모든 환경이 있습니다. 교만의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만하기 않기 위해서 하나님이 극심한 고통을 통해서 바울을 쳤기 때문에 그는 그 고통 가운데 교만할 여과가 없었습니다.
너무 괴로우니까 주야로 하나님의 도움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러므로 교만과 오만이 그를 사로잡을 수 없었고 그는 언제나 하나님 품안에서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용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한국 교회 통계를 보면 1996년 국민소득 1만 불이 넘었으면서 교회 출석률이 40%로 떨어졌습니다. 반수이상이 주일날 들로, 산으로, 사업장으로 가는 것입니다. 기도원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국민소득 만 불이 되고 난 다음 기도원 출석률이 30%로 떨어져서 많은 시설이 열악한 기도원은 문을 닫아야만 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우리나라 교인 출석률이 가장 좋았던 때는 6.25사변이 일어났을 때입니다. 온 국민이 어마어마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을 때 교회 출석률은 95%였습니다. 고난이 닥치자 그 영혼에 구원의 불길이 타올랐던 것입니다. 사람은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편안해지면 하나님의 나라와 신앙은 악세서리로 변화되고 본업이 안 됩니다. 부업이 됩니다. 믿어도 좋고, 안 믿어도 좋고 서서히 부업이 되는 것입니다. 억센 고난이 다가와서 고통스럽고 괴로우면 부업이 되던 신앙이 본업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새벽에 주님께 나와서 부르짖게 되고 고통스러우니까 금식하고 철야하고 기도원에 가서 외치고 몸부림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란 사망의 세력이 오히려 변화되어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편안하면 하나님을 떠나서 마귀를 따라가고 세상을 따라가고 탐욕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오면 세상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을 쳐다보고 생명의 원천 되시고 구원의 능력되시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의지하게 되어서 오히려 신앙이 깊어지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게 되는 역설적인 역사가 있습니다. 교만의 가시넝쿨 속에서 복음의 불을 밝히기 위해서는 사도바울 선생은 억센 고통을 당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자만심이 깨어져서 하나님만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 나는 산헤드린 회원이다.” 유대인의 국회의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교육도 최고로 받았고 헬라철학과 로마법에 정통한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께 계시를 엄청나게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리를 깨달은 사람이다. 이만하면 나는 자격이 있고 이만하면 나는 당당하다.” 자만심이 생길만합니다. 그러나 바울 선생에게 다가온 사망의 고통이 얼마나 컸기 때문에 자만심이 다 연기와 먼지가 되어서 사라졌습니다. 자만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 앞에 납작하게 깨어지고 엎드려서 주야로 주의 도우심을 간절히 간구하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고통은 이렇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육신이 너무 아파 목숨 걸고 하나님을 찾았고 그 때문에 신령하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 8~10에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바울선생 같은 분이 세 번 주께 부르짖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우리 평범한 신자들이 세 번 기도했다 해도 굉장한 기도인데 바울선생이 한번 목숨을 다하여 기도하고 또 두 번째 또 몸부림쳐 기도하고 세 번째 또 몸부림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 이 고통에서 해방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하나님께서 대답하기를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 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네가 강하면 하나님 의지하지 않지 않느냐. 네가 약해져야 나를 의지하므로 내가 너를 도와줄 수 있지 않느냐.” 강하면 의지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식을 키워 보십시오. 아주 지혜 있고 총명하고 좋은 학교 나오고 출세해서 나가면 부모 의지하지 않습니다. 부모에게 전화도 안 걸어와요. 편안하면 아주 부모 잃어 버려요. 누가 부모 의지합니까?
병들고 병약하고 혹은 불구가 되고 공부도 못하고 세상에 나가면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자식은 아버지, 어머니 부여잡고 “아버지, 어머니 없으면 나는 못살아요. 나는 어떻게 하지요? 아버지, 어머니!” 이러면 아버지, 어머니가 목숨을 바쳐 못난 병신자식 위해서 온갖 힘을 다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병신자식 때문에 일생을 바치는 아버지, 어머니가 얼마나 많아요? 왜, 아버지, 어머니에게 목숨을 바쳐 의지하기 때문에. 건강하고 잘난 자식은 의지하지 않지만 병신자식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의지하기 때문에 그 자식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잘났다 하고 내 자만심 가지고 오만하게 자기의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의지하고 나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붙들어 줄 수 없으나 힘들고 고통당하고 괴로움을 당하여 의지할 곳 없어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고 주님께 매달리는 사람은 주님이 끌어안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울선생보고 말했습니다. “네가 고통스럽고 괴로우므로 나를 찾지 않느냐. 네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진다. 그래야 네가 나를 의지하지 않느냐?”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 이니라”
우리 신앙생활이란 세상에 약할 때 신앙은 강해집니다. 세상에서 부귀, 영화, 공명을 누리고 잘난 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부업으로 생각하고 세상을 본업으로 삼는 사람은 신앙이 약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고난당하고 괴로움을 당해서 세상 등지고 주님 바라보고 주님 의지하고 주님 믿는 것을 본업으로 삼는 사람은 신앙이 강합니다. 신앙이 깊고요. 그런 사람을 주님께서 품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더 많은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더 많은 고난을 하나님은 허락한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적게 일어나는 사람은 적은 고난을 가합니다. 생명의 역사가 제법 많이 흘러나려면 제법 많이 깨뜨리기 위해서 제법 많은 고난이 오지요.
크게 주님이 사용하는 사람은 큰 고난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사망이 몸에 들어와서 그를 깨뜨리고 짓밟으므로 터지고 깨어져서 그는 온 전신을 다하여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주의 도우심을 바라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들어 크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중국에 유명한 신학자요, 복음전도자였던 리토 숭 목사님은 너무 몸이 약해서 의사들이 30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했습니다. 온 몸 전체가 병 백화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루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30을 넘기지 못한다고 하는데 하나님 이 고통과 괴로움에서 나를 놓아 주십시오. 치료하는 하나님 나를 치료해 주십시오.” 그러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그가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앞에 큰 바위가 생겨서 배가 못 지나가게 하는데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예야, 내가 이 바위를 옮겨주랴? 물을 높여 주어서 바위 위로 물이 흐르게 해서 바위 위를 지나가게 하랴? 네가 택해라!” 그래서 리토 숭 목사님은 꿈에 “주님, 바위를 옮기는 것보다 양자강물이 부풀러 올라와서 바위 위로 흐르게 해서 배가 지나가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자 물이 높아지면서 배를 타고 바위 위를 지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네 일생도 이와 같다. 병은 바위와 같다. 병은 옮겨주면 은혜는 그 정도밖에 안되지만 병은 그대로 두고 은혜를 넘치게 해서 병을 이기게 만들어 주면 네가 더 큰 역사를 할 수 있다.” 그는 크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내게 병이 있고 연약함이 있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은혜를 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시기 위해서 그런 줄 압니다.” 더욱 주님께 매달렸는데 그가 중국 부흥에 큰 역사를 베풀었고 30대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로 말미암아 병을 극복하고 80이 넘도록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고통과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주님을 찾으면 주님은 고통과 괴로움보다 더 큰 은혜를 주셔서 고통과 괴로움이 오히려 우리에게 복이 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더 많은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더 많은 고난을 하나님이 허락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0~12에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 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정말 역설적인 것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죽은 그 고통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예수 부활처럼 우리 속에도 생명이 넘쳐나서 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23~27에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선생이 하나님 사업을 버렸나요? 그 모든 고생을 극복하도록 자꾸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바위가 생기면 그보다 더 높은 은혜의 물결을 주셨습니다.
수많은 고통이 다가오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수많은 은혜를 주어서 그 은혜를 통하여 생명의 역사가 넘쳐나서 구라파와 아시아를 복음화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생명의 역사를 나타내는 종은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사망이 있어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고난이 있어야 우리가 기도하게 되고 신령한 은혜 속에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역사는 고난이 있고 난 다음에 축복을 주어서 형통하게 하시고 형통해서 자만하고 교만해서 하나님을 떠날만하면 또 고난을 주셔서 회개하고 깨어지게 하시고 이러므로 형통과 고난을 형제간처럼 손을 잡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고난이 왔느냐. 부르짖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축복을 주셔서 형통하게 되시고 형통해서 하나님을 잊어 버렸느냐. 고난이 와서 깨뜨려서 다시 주님 속에 서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햇빛이 좋잖아요. 햇빛이 쨍쨍 비취는 것 얼마나 좋아요? 비가 오는 것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잖아요. 그러나 햇빛만 비취면 어떤 나라도 사막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고 모래만 휘날리는 사막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햇빛이 비췬 후에 비가 와야 땅이 축축해서 수목이 살아나고 열매를 맺고 사막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햇빛이 쨍쨍 뜨는 형통만 있을 뿐 아니라 고난과 괴로움의 장맛비도 오고 폭풍우도 다가와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밸런스가 잡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 8~10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큰 역사를 아시아에 나타내기 위해서 큰 죽음이 다가 왔습니다. 아예 사형선고를 받은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고통이 왔기 때문에 엄청난 간구와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렸고 매달렸기 때문에 하늘 문을 여시고 은혜를 폭포와 같이 부어 주셔서 아시아 전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고난이 반드시 우리에게 손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이 우리를 하나님의 은총 속에 몰아넣는 몽학선생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아프리카계 미국시민인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자서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에 보면 한때 목사님이 백인들의 위협으로 두려움에 떨었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몽고메리 버스 스트라이크’를 주도하고 있을 때 많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테러와 폭파 협박을 해왔습니다.
그들이 협박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던지 킹 목사님이 두려운 마음에서 이제 이 일에서 손을 떼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번 주님께 기도해 보고 손을 떼겠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의 음성이 마음속에 들려왔습니다.
“마틴 루터 킹, 루터야 정의를 위해 일어서라. 평등을 위해 일어서라. 진리를 위해 일어서라. 보라 세상 끝 날까지 이제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결코 너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 싸움을 계속하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흑인 평등 권리를 위해서 주장하기 전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시민인 흑인들은 굉장히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백인과 함께 버스를 타지 못하고 식당에서도 백인과 함께 섞여서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별을 당하고 슬픔을 겪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 자녀 세대에서는 결코 차별대우를 받지 않고 살게 하겠다.” 그래서 그가 일어난 것입니다. 킹 목사님 마음 가운데 두려움이 사라지고 어떤 어려움에도 의연히 대처하겠다는 용기가 넘쳤습니다. 결국 그는 백인들의 위협과 협박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흑인 해방운동과 비폭력 저항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암살되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많은 위협과 고통을 감례하면서 흑인해방운동을 부르짖었고 결국에는 총에 맞아 죽었지만 오늘날 흑인은 그로 말미암아 인권,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된 것입니다.
미국에 이제는 차별이 없습니다. 차별대우를 법적으로 못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날은 미국 대통령까지 축하하고 미국에서는 경축일로 그날을 공휴일이 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자유와 해방을 가져온 이 역사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뤄진 것입니다.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해방과 자유는 죽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 있어 많은 자유와 해방의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사망을 통해서 인류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자녀들이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가면 그 고난을 통해서 위대한 생명의 역사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도 어떤 장로님이 은혜롭습니까? 고난을 많이 통한 분인 것입니다.
어떤 권사님이, 어떤 안수집사님이, 어떤 지역장, 구역장이 가장 은혜롭습니까? 많은 슬픔과 고난과 눈물을 흘린 사람이 은혜로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3. 가시떨기에 붙은 불
셋째로, 가시떨기에 붙은 불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모세가 광야에서 양을 치는데 메마른 광야에 가시떨기에 불이 붙어서 타는데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놀래서 구경하러 가니까 가시떨기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가시 떨기라는 것은 재목으로도 쓸 수 없고 뗄 감으로도 쓸 수 없는 보잘 것 없는 가시넝쿨입니다.
가시넝쿨에 불이 붙으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우리는 누굽니까? 우리는 전부 가시넝쿨 같은 사람입니다. 재목이 되지 못합니다.
뗄 감도 되지 못한 죄 덩어리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 속에 하나님의 성령의 불꽃이 와서 활활 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가 만들어져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깨어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자손들은 다 탐심과 욕심의 가시떨기 속에서 태어나서 살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마귀를 바라보고 세상을 따라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시떨기입니다. 우리가 돌아와서 하나님 성령의 불이 붙기 위해서 돌이키기 위해서는 고통이 다가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회개하지요.
우리들은 항상 자기의 쾌락과 행복을 생각하고 인생성공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용의 가치로 생각합니다. 오늘날 왜, 구라파가 저렇게 황무지가 되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이용가치로 생각하는 공리주의로 떨어졌기 때문에 오늘날 구라파는 가시넝쿨만 있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습니다. 깨어져야만 하나님이 들어올 수 있는데 하나님을 이용만 하면은 하나님이 들어와서 역사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가시떨기 속에 구원의 불이 붙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고난 사망의 세력이 압박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그러면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서 우리에게 생명이 나타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 나는 광야의 가시떨기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알아줍니까? 나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다가와서 “우향우!” 세상에서 돌아서고 마귀에 돌아서서 주님을 향하게 되면 성령의 불이 가시떨기 속에 붙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시편 9:13에 “야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 사망의 문에서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13: 3에 “야훼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사망의 잠을 자는 사람이 다 세상사람 아닙니까? 사망의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고통의 채찍이 와서 때리면 사망의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눈을 비비고 주님을 찾고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38:17에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큰 고통 온 것은 내게 평안을 주기 위해서 고통을 주신 것이다.
나를 죽이려고 고통을 주신 것은 아닌 것입니다. 고통의 결과로 내가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 주고 하나님을 찾으면 평안을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자로 칭송받는 성 프란시스는 본래 부잣집 아들로 부족한 것을 모르고 자라났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또래의 청년들과 함께 허랑방탕하고 술 취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큰 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세상 가는 길을 돌이키고 하나님께 나와서 회개하고 주님께 간절히 찾고 부르짖는 결과에 중생하고 변화되고 나중에 그는 온 일생을 바쳐 하나님을 섬기는 성자가 된 것입니다.
유명한 문학가 존 밀턴도 실명 후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고 은혜를 받아 유명한 「실락원」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썼습니다. 미국 흑인노예해방에 큰 영향을 미쳤던「Uncle Tom's Cabin」이라는 책을 지은 스토우 부인의 고난을 통해 이 위대한 일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 흑인해방운동을 문학적으로 격려한 분이 스토우 부인입니다. 스토우 부인이 지은 책은 미국에 널리 읽혀졌고 명작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도 이 책을 읽고 노예해방에 전진적으로 앞에 나갈 수 있는 결단을 내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딸을 하나 낳았는데 금지옥엽 귀한 딸이 갑자기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스토우 부인은 딸을 잃은 슬픔에 빠져 절망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흑인들이 생각났습니다.
자신은 딸이 죽어서 이별하여 이렇게 슬픈데 흑인들은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노예로 끌려와서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딸은 딸대로 뿔뿔이 노예로써 팔려나가 이별을 당하고 생이별의 슬픔을 가슴에 쓰리게 안고 사는데 이 얼마나 가혹한 일이냐.
자기 딸이 죽고 난 다음 딸의 죽음을 통해서 흑인은 해방되어야 되고 노예제도는 철폐 되어야 된다는 깊은 신념으로 그가 책을 지은 것이 바로 「Uncle Tom's Cabin」인 것입니다.
이때부터 스토우 부인은 흑인들이 더 이상 비참하게 이별하지 않도록 해야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출간되므로 백인들이 흑인의 처지를 공감하고, 노예 해방 운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고통을 통해 생명을 낳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속에 육신에 사망이 다가와야 생명의 불꽃이 피지 않습니까? 우리가 세속에 꽉 잠겨서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누가 세속과 탐욕에 찌들어진 인생을 돌이켜서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것입니까?
고통의 채찍이 그렇게 해주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 더 돈 많이 벌고 더 부귀하고 더 영화를 가지면 영영 하나님께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말씀하기를 부자가 천당에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말한 것입니다.
왜, 세상 부귀, 영화, 공명이 다 있어 세상에 찌들어져 있으니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없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부귀, 영화, 공명을 다 잃어버리게 되면 누구를 찾습니까? 하나님을 찾게 되고 오히려 하늘의 부요한 자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통당할 때 생명의 주님을 간절히 찾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호세아 5:15에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죄를 지으니까 하나님이 회개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얼굴을 감추어 버리겠다. 그래서 고난을 보내면 고난당하고 괴로우면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나올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편 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말했으며 시편 119:71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67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여러분! 저는 정근모 박사의 자서전「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챤이고 싶다」를 읽어 보았습니다. 정근모 박사는 세계적인 원자학자입니다.
그는 장로이고, 과학처 장관도 했고, 현재는 명지대 총장으로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국제 해비타트운동 한국지부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국 최고의 석학들이면 한림원 원장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정근모 박사는 어릴 때부터 얼마나 머리가 좋았던지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고등학교 2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 20대에 미국에 건너가서 유명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25세에 이미 미국 명문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인들은 정근모 박사에게 ‘꼬마 교수’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고난이 있었습니다. 아들 하나가 어려서부터 병으로 고생해서 중대한 수술을 6번이나 했습니다. 나중에는 정근모 박사가 자신의 신장 하나를 떼어서 아들에게 주었지만 결국 아들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 인간의 한계를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의술이 발달하고 자신이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았지만, 자식의 병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절감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 깨어져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정근모 박사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인생의 고통스런 경험이 때로는 귀한 자산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인생의 시련이 없었더라면 나도 기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아들의 고통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상의 모든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교훈으로 “시련을 만나거든 기도 하십시오”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가시떨기 같은 탐욕에 사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찾고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시련이 다가와야 되는 것입니다. 정근모 박사와 저는 친한 친구입니다. 만날 때 마다 나는 그가 얼마나 신앙심이 깊고 하나님께 겸손하고 모든 것을 맡겨서 주님을 섬기는 훌륭한 분인 것을 느낄 때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얼마든지 교만하고 오만하고 자만할 수 있는 사람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고통과 시련이 그로 하여금 가시넝쿨 속에서 성령의 불길이 타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의 가시떨기 속에서 구원의 불이 붙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에 크고 작은 고난 즉 사망의 세력이 압박해야 합니다. 고통 속에서 구원의 불꽃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페스탈로치는 ‘고난은 풍족을 가져온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져온다. 만일 행복하였더라면 나는 결코 성숙되지 않았을 것을 고난이 나를 성숙하게 만들었다’고 말했으며 독일의 격언은 ‘고난은 기도의 선생’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난당하면 안 가르쳐 줘도 기도해요. 왜, 고난이 기도의 선생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스위스의 법학자요, 철학자인 힐티는 말하기를 “대게 행복한때보다도 고난의 때에 하나님은 더 가까이 계시는 것이다. 그리고 행복한때보다 고난에 처한 때가 신앙에 더 좋은 때라”고 말했습니다.
<결론>
탐욕의 가시넝쿨 속에 사는 우리가 순수한 신앙의 불길을 가슴에 품기 위해서는 강력한 육신의 고통이 다가와야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비록 탐욕과 욕심의 가시넝쿨 속에서도 회개하게 되고 반성하게 되고 기도하게 되고 주님을 의지하게 되고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망과 고통의 위협이 가해질수록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생명의 주님을 간절히 찾게 되고 그 생명의 은혜로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많이 제게 묻습니다. 어떻게 해서 예수 믿게 되었냐구요. 저는 17살에 폐병 3기에 걸려서 죽음으로 내동이치지 않았으면 결코 예수 믿을 사람이 아닙니다.
대대로 불교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대대로 불신앙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가문에 있을 수가 없는 수치로 생각하고 결코 예수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폐병에 걸려서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습니다.
좌절과 절망에 있을 때 살고 싶었습니다. 의학도 세상도 가문도 나를 고쳐주지 못할 때 나는 살고 싶었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롭습니다. 그때 내가 당한 정신적인 고통, 육체적인 고통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을 부르짖고 찾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받고 난 다음 사망의 압박에 의해서 회개하고 깨어지고 예수 믿은 결과로 주의 종이 되고 생명의 역사를 온 천하에 나눌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돌이켜 볼 때 사망은 오히려 큰일을 해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예수 안에서는 사망은 오히려 생명을 산출하는 도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병실에 걸린 시를 보고 굉장히 마음에 감동을 입었습니다. 그 시를 이곳에 가지고 나왔습니다.
주님!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 주심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 되게 틀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의 교만이 반성 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들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부모와 친구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인간 된 보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데 힘겹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눈물로써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하고 가난한 사람을 동정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세상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놀라운 시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고난이 생명을 산출하는 어머니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광야의 가시떨기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불탈 땔감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을 통해서 깨어져서 세상으로 가는 발걸음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오고 예수님을 모시면 가시떨기 속에 구원이 들어오고 성령의 불길이 타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고난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도 고난을 통해서 넘쳐나게 됨을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 받는 것을 유익으로 생각하고 감사하고 그 기회에 회개하고 깨어지고 더욱 주님께 돌아오는 기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