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를 칭할 때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바람에 날린다는 것입니다.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은 사람이라는 말을 우리가 종종 사용합니다. 지조가 없이 갈팡질팡, 좌충우돌하는 변화무쌍한 사람을 살대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반석은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와 사람이 변해도 변치 않고 움직이지 아니하는 믿음직한 존재를 반석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갈대가 반석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절대로 가능치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안드레의 형제인 시몬 베드로는 갈릴리 어촌에서 사는 갈대와 같은 촌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훗날에 그는 주님의 은혜로 기독교의 반석, 베드로 역사의 반석으로 변한 것입니다.
<본론>
1. 갈대를 택하신 주님
첫째로, 우리가 오늘 알아보고 싶은 것은 갈대를 택하신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반석같이 튼튼한 사람을 택한 것이 아니라 바람에 날리고 정처 없는 갈대와 같은 사람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별 삶의 목표나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 그물에 의지해서 사는 고기잡이였습니다. 그는 삶의 목적도 방향도 가치도 없는 그냥 그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16~17에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삶의 우리가 가만히 성경을 통해서 추측해 볼 때 그는 희로애락의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잘 웃고, 성도 잘 내고 또 눈물도 잘 흘리고 희희낙락 하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풍부한 사람으로 우리 마음속에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성격의 기복이 심했습니다. 금세 즐거워하다가 순식간에 슬퍼하고 금세 사랑하다가 즉시로 돌이켜서 미워하고 금세 지지한다고 했다가 당장 돌아서서 반대하고 하는 감정적인 기복이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옷이 없는 사람을 보면 자기 옷을 벗어서 주고 하루 종일 잡은 고기도 가난한 사람 보면 그대로 그 값을 도와주고 하는 소탈한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부인을 사랑하는 애처가였습니다. 처가집 식구를 집에 다 데리고 그는 생활하는 애처가였습니다. 교육은 별로 받은 것이 없고 생활이 가난해서 하루하루 고기를 잡아 살아나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레슬릭 크릭은 베드로에 대하여 “갈릴리 호수 같은 사람”이라 평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사람들이 ‘갈릴리 바다’라고 부를 정도로 변덕이 심합니다.
조용하다가도 폭풍이 불면 엄청난 파도가 몰아칩니다. 레슬릭 크릭은 베드로가 이같이 갈릴리 호수처럼 종잡을 수 없다고 해서 그렇게 비유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조용하라면 깨어 있었고, 참으라면 분을 내고, 그리스도를 인정해야 할 때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고기잡이 베드로는 희노애락의 감성이 풍부하고 성격의 기복이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갈대를 주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할 때 주님이 사람을 잘못 보신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입니다.
모든 갈릴리 사람들은 이 시몬이야말로 갈대와 같은 사람인 것을 알고 있는데 적어도 하늘나라를 세우려면 좀 반석 같은 사람을 택해야지 저렇게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변화무쌍한 사람을 택하느냐 그렇게 질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시몬 베드로 갈대를 택한 것입니다. 그 형제 안드레의 소개로 예수님을 뵙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1:40~42에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즉 반석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가 갈대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차는 반석이 되리라고 주께서 예언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는 계산하지 않고 마음에 주님을 모시고 평생 직업도 버리고 따른 변화무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이 오라한다 해서 자기의 천직인 어부의 직분을 버리고 고기도 그물에 담아둔 채 배도 버리고 처자를 생각지도 아니하고 그냥 고기 냄새가 풀풀 나는 의복 입은 그대로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마음에 결단내리면 좌우를 살펴보지 않고 결단 내린 데로 따라가는 그러한 형태의 시몬이었습니다.
그가 하루 종일 고기를 잡아도 잡지 못하고 밤새도록 고기를 잡아도 잡지 못하고 아침에 그물을 씻을 때 예수님이 배를 잠시 빌려서 그곳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난 다음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고 할 때 시몬 베드로는 말하기를
“주여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져도 잡은 것이 없다.”고 항변을 하니 주님이 강하게 시몬을 쳐다보니까 그 위협에 눌려서 “주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많이 잡히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 “나는 죄인입니다. 죄 덩어리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그때 주님이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하시니 그 가득히 잡은 물고기를 그대로 배에 담아 둔 채 배 그대로 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누가복음 5:10~11에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참 생각이 어렵습니다. 실컷 잡아서 고기가 가득한 그 배를 고기 채 그대로 두고 그물도 그대로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12세기에 선교를 고취시켰던 오스트리아의 폰 웰츠(Von Welz)남작은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삶을 헌신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 안에서 다시 태어난 지금, 가문 좋다는 것이 나에게 무엇이냐?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자 할 때 귀족의 작위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냐?
내가 하나님의 은총을 필요로 할 때 ‘각하’라고 불리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 나는 이 모든 허영을 버리고 나의 경애하는 예수님 발 아래 모든 것을 바치겠다.”
웰츠는 자신의 작위와 부동산, 소득의 총액 모두를 포기하고 기아나(Guiana)로 가서 여러 가지 악조건과 싸우며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 삶을 바치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자신을 드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웰츠 남작의 헌신은 선교를 등한히 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선교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고, 복음전파에 큰 전환점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이 부르실 때 계산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을 통해 큰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르시는데 부모, 형제, 처자 다 생각하고 직장과 직업을 다 생각하고 모든 것을 계산하면 주님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겠나이까?” 예수님께 물었을 때에 예수님이 “율법을 지켜라.” “내가 다 지켰나이다.” “그러면 너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할 때
이 부자 청년은 자기의 재산을 계산해 보고 도저히 그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를 수 없으므로 근심하고 떠나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왜요? 계산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것저것 다 계산해 보니까 주님을 따르는데 너무나 대가가 비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님 따르는 것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별로 계산할 것이 없는 사람들은 주님이 부르실 때 쉽게 따릅니다.
그러나 오늘 말한 이 웰츠 같은 남작은 재산도 있고 명예도 있고 지위도 있었지만 주님이 부르실 때 재산과 명예와 지위를 순식간에 다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던 것입니다.
서울 한강변 양화진에는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왔다가 순교한 외국인들의 묘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윌리엄 홀 박사 일가의 무덤도 있는데, 무덤 앞 묘비에 이런 비문이 적혀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롬14:8) 홀 박사 부부는 기도하는 중에 미국에서 “조선으로 가라. 조선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라.”
이 명령을 듣고 모든 직업을 버리고 부모, 형제를 떠나서 배를 타고 조선까지 왔습니다. 그들이 왔을 때는 청일전쟁 후에 평양일대에 콜레라가 발생하여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홀 박사는 주야로 콜레라에 들린 조선 사람을 치료하다가 과로해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습니다.
아내 로제타 홀은 남편의 죽음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조선을 섬겼습니다. 그녀는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 에스더를 길러냈고, 한국 최초의 여자의학교육기관인 경성여자 의학전문학교(오늘날 고려대 의과대학 전신)를 설립했고 또한 시각 장애인들을 위해 점자교육도 보급시켰습니다. 그녀의 아들 셔우드 홀 역시 부모의 뒤를 이어 의학을 공부하고 한국에 와서 많은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해주에 결핵 요양소를 운영하면서 지금 우리가 크리스마스 때마다 사는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결핵퇴치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들 일가족은 생명을 다해 헌신했습니다.
미국에서 편안하게 살수가 있고 가족들과 친지들과 같이 지낼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때 미계하고 지도에 잘 나타나지도 않던 조선이라는 나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자 온 가족이 헌신해서 일생을 바치고 무덤도 양화진이 묻혀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뒤로 두고 주님을 따른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부르심에 계산하지 않고 자기를 버리고 즉시로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하늘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시고 비로소 삶의 목표와 희망을 느꼈습니다. 그는 갈대와 같이 바람 부는 데로 물결치는 데로 살았습니다. 인생의 희망도 목적도 없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그는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모든 것을 버렸지만 그 마음속에 희망이 생기고 삶의 목적이 생겨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때 시험에 들어 예수님을 버릴 때 예수님이 제자들 보시고 더구나 베드로를 보시고 “너도 나를 떠나겠느냐?”고 물을 때 베드로가 한 말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요한복음 6:68~69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 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 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메시아인줄 알았었고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으므로 우리는 안 떠난다. 다른 사람은 다 떠나도 우리는 안 떠난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삶의 목표와 희망을 그는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2. 반석 같기도 하고 갈대 같기도 한 시몬 베드로
둘째로, 우리는 베드로의 생애를 보면 반석 같기도 하고 갈대 같기도 해서 분별을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반석 같다가 내일은 갈대고 또 모레는 갈대 같다가 그 다음날 보면 또 반석 같고 종잡을 수 없는 삶을 가진 것이 시몬 베드로였었습니다.
그는 한번 가이사의 빌립보에서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보고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하니까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또한 위대한 기적을 행한 엘리야라고 합니다.
혹은 엘리사라고 합니다. 구약의 선지중의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냐?”고 할 때 베드로가 아예 숨도 돌이키지 않고 그는 일어나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말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다.”
놀라운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때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천대했습니다. 그는 갈릴리에서 태어나 일했고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써 사람들이 인정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6~18)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해 주지 않았으면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도저히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는 나사렛에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써 그 생애를 보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목수의 아들로 인정했고 교육 없는 사람으로 인정했고
비천한 사람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계시를 받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놀라운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오늘날도 누구든지 예수님을 바라보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은 다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의 옥조인 것입니다. 그 신앙고백을 듣고 예수님을 감동을 해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말했습니까?
마태복음 16:18에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바로 그 신앙고백이 반석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반석, 변하지 않는 반석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외 우리의 반석은 없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그 신앙 이외에 다른 반석은 절대로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허물어지는 모래사장이요, 다른 모든 신앙고백은 갈대인 것입니다. 여러분 시몬 베드로는 이 위대한 신앙고백을 해서 반석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이 반석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주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예수님께서는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대제사장, 장로들,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에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하자 또 시몬 베드로가 화닥닥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16:22~23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금세 반석 되었다가 금세 사탄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예 기가 막힙니다. 조금 전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고 난 다음 예수님이 내가 장차 예루살렘에 가서 대제사장 바리새교인 서기관들에게 팔려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나 사흘 만에 부활하시리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할 때 정면으로 나서서 거부했습니다.
“주여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주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등극해야 되고 우리는 열두지파를 다스리는 장관자리 하나 해야 되겠는데 감히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당장 육신으로 말하고 성령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육신으로 말할 때 사탄이 그 육신을 사용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베드로를 통해서 말하는 사탄의 정체를 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어찌 하나님의 일을 거역하고 사람의 생각을 말하느냐?”
조금 전에 주님께 칭찬받고 기가 등등했다가 이제는 완전히 기가 죽어 가지고서 형편없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약간 다 시몬 베드로를 부러워하다가 이제는 전부 시몬 베드로를 보고 손가락질하고 비웃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변화무쌍합니다. 조금 전에 반석이었더니 이제는 또 변화무쌍한 갈대가 되고 만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주님이 발 씻기는 것을 보시고 난 다음 그는 말하기를 “주님 내 발은 못 씻깁니다.
절대 못 씻겨요. 다른 사람 발은 씻겨도 내 발은 못 씻깁니다.” 그때 주님이 “내가 너의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너와 나는 상관이 없느니라”
“예? 그러면 손도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굉장히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 않습니까? 조금 전에 발 못 씻는다고 버티던 그가 발 못 씻기면 너와 상관이 없다고 하니까 이제는 머리를 내밀고 손을 내밀고 손도 대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요한복음 13: 8~10에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그다음 주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배반하고 떠나리라고 말씀하자 베드로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자기는 다 주님을 배반해도 감옥에도 죽음에도 예수님과 함께 가겠다고 큰소리 한 후에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 잡힐 때 걸음아 나살리라고 줄행랑을 친 것입니다. 말할 때는 반석같이 말하다가 행동할 때는 갈대같이 행동했습니다.
마가복음 14:29~31에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 찌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이 보낸 종과 군인들이 예수님을 잡을 때 그는 칼을 빼서 대제사장 말고를 후려쳐서 귀를 베어서 떨어뜨렸습니다. 용감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그 칼을 칼집에 넣으라. 칼을 쓰는 자는 칼로써 망한다.”
하시고 그 떨어진 귀를 잡아서 말고의 도로 붙여 치료해 주는 것을 보고 난 다음 베드로는 “사태가 틀렸다. 달아나자.” 그냥 달아났습니다. 죽는 데까지 같이 가고 감옥에도 같이 가겠다는 그가 순식간에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달아나다가 생각하니까 “적어도 내가 수제자인데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날 수 있느냐. 내가 감옥에도 같이 가고 죽는데도 같이 가겠다 했으니 내가 돌이켜야지.” 그래서 또 용감하게 사람들을 따라서 대제사장의 안뜰까지 들어갔습니다.
담대하게 대제사장의 뜰에 주님의 뒤를 쫓아갔으나 그가 부를 쬐고 있는데 그 여종이 나와서 하는 말이 “너는 예수와 한패 아니냐? 내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네가 칼을 뽑아서 말고의 귀를 자르는 것을 보았는데”
마태복음 26:70에 보면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예수님을 따라 왔으면 감옥에도 갇히고 죽는데도 같이 가겠다고 반석 같은 말을 했으면 그대로 해야 될 것인데 계집종의 말에 벌벌 떨고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앞문까지 나갔을 때 다른 여종이 “분명히 너는 예수와 한패다.
내가 너를 보았다.”하니까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맹세까지 했습니다. 조금 후에 곁에서 어떤 사람들이
“아니야. 너는 갈릴리에서 온 사람이야.” 말을 보니까 갈릴리 사투리를 말하는데 갈릴리 사람이라 하니까 그때는 완전히 돌아버렸습니다.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보통 거부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여 가로되 나는 그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세상에 반석이 어디 있습니까? 갈대도 완전히 꺾어진 갈대입니다.
자 그러니 이런 인격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조금 전에 반석이었다가 조금 후에는 갈대가 되고 상태 좋으면 또 반석 같은 말을 했다가 상태 나쁘면 완전히 갈대같이 말을 하는 정처 없고 의지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목숨을 구하려고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여 모른다고 한 사람 보십시오. 그리고 난 다음에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예수님은 얻어맞아서 얼굴이 퉁퉁 붓고 눈과 코와 귀를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온 머리는 산발이 되고 옷은 찢어지고 피가 흘렀었습니다.
예수님과 눈을 마주치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오늘밤 닭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을 기억하고 바깥으로 뛰어 나가서 땅에 몸을 던지고 또 몸부림을 치고 울었습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내가 이럴 수 있습니까? 나는 왜 이렇습니까? 나는 조금 전에 반석이었다가 조금 후에 또 갈대가 되고 조금 전에 그렇게 담대했다가 조금 후에 이렇게 나약하고 나는 왜 이렇습니까?” 자기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몸부림치며 울었습니다.
3. 반석은 주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런데 오늘 세 번째 알아보고 싶은 것은 결국에는 시몬이 진짜로 반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석은 주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좌절한 시몬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곧장 끌려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장사 지내고 말았습니다.
시몬은 완전히 좌절했습니다. “나는 이제는 제자 될 자격이 없다. 나는 버림받은 놈이다. 나는 못난 놈이다. 형편없는 놈이다.” 그래서 그는 두문불출하고 방안에 들어앉았습니다. 이제는 그의 앞날이 캄캄했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사흘 만에 무덤에 갔다가 무덤에 주님의 시체를 보지 못했다고 말한 말을 듣자 또 두문불출하던 집에서 뛰어 일어나서 있는 힘을 다해서 무덤으로 뛰어 갔습니다.
무덤에 뛰어 들어가서 보니 과연 무덤을 비었고 예수님이 찾던 수의가 남은 것을 보고 그는 머리를 떨어뜨리고 집에 돌아와서 좌절하고 절망했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 가장 먼저 제자들 중에 베드로를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배신은 가까운 사람일수록 고통스럽고 참기 어렵습니다. 먼 사람이 나를 배신한 거야 괜찮지요.
가장 나와 가까운 사람, 같이 상에 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자고 같이 생활하던 동지가 배신을 할 때 그 배신은 심장에 칼을 꽂는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수제자가 베드로 아닙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냥 배신한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여 가로되 나는 저를 도무지 모른다고 한 그러한 베드로 그는 나중에 좌절하고 낙심해서 두문불출하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일 제자들 중에 먼저 찾아간 것이 베드로인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사랑을 보십시오. 죄를 짓고 불의 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자식, 좌절하고 절망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꾸짖지 아니하시고 할퀴지 아니하시고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상처 입은 그에게 부활해서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베드로를 사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24:34에 말하기를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여러분 오늘 제가 시몬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이 시몬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나의 이야기고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바로 시몬 베드로와 같은 사람입니다. 기분 좋을 때는 반석이었다가 기분 나쁘면 갈대가 되고 갈대정도가 아니지요. 나중에는 잡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주님께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신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그 한없는 사랑을 보십시오. 십자가에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우리를 대속하신 주님,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하고 내 자신을 스스로 미워하고 내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에 있을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찾아오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시몬 베드로는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만나자 더 마음에 고통이 심했습니다. 차라리 안 찾아왔으면 좋겠는데 자기같이 버림받은 놈을 찾아와 주시니까 더 자기의 죄책으로 몸부림을 쳐서 그는 말하기를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죄책에 견딜 수 없어 갈릴리로 내려가 다시 옛 고기잡이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제 나는 사도가 될 수 없다. 주의 종이 될 수 없다.
옛 직업으로 돌아가서 고기나 잡고 그저 배나 불리고 하루하루 촌놈으로써 살다가 가야지 내가 무슨 감히 자격이 있다고 사도가 되겠다고 건방지게 3년 반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느냐? 나는 별 볼일 없는 시몬이다. 나는 갈대다.
나 같은 인생은 희망이 없다.” 아주 좌절하고 그는 갈릴리로 내려가서 배를 저어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옛 그물을 다시 깁고 먼지가 있는 배를 털어서 고기 잡으러 가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는데 고기가 왜 잡히느냐. 마음은 고기에 있지 않습니다. 마음은 죄책으로 괴로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이 못 난놈아! 이 죽일 놈아! 네가 어떻게 살아 있느냐! 죽어라! 죽어!’ 그러면서 그물을 던지니까 고기가 용용 죽겠지 하고 한 놈도 안 들어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도 잡은 것이 없습니다. 아침에 뿌옇게 안개가 끼어 날이 밝아질 때 안개 가운데서 한분이 “얘들아! 거기 무엇이 있느냐?” “아무것도 없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니까 고기가 너무 많아서 그물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요한의 말이 “예수님이시다.” 베드로는 즉시로 겉옷을 들쳐 입고 물속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왜, 걸어서 배타고 나올 면목이 없습니다. 물에서 헤엄치고 물에 빠진 생쥐처럼 물을 줄줄 흘리고라도 예수님 앞에 설 수 있지 도저히 면목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배를 저어 해변으로 나오는데 그는 물에 뛰어 들어가서 그 찬 아침 바다에 헤엄을 치고 나왔습니다.
주님 앞에 나오니까 주님께서 숯불을 피워 놓고 빵을 구워놓고, 고기를 구워 놓고 기다립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아주 깨끗한 모습인데 베드로는 물을 줄줄 흘리며 벌벌 떨고 머리가 물에 젖어서 다 늘어지고 그런 상황에서 몰골이 고약하게 주님 앞에 서서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더구나 숯불이 활활 타는데 제자들이 숯불 주위에 다 손을 내밀고 불을 쬐니까 무엇이 생각납니까? 대제사장의 정원에서 숯불을 쬐다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이 생각이 나서 불이 원수요 원수. 불을 보고 옛날이 기억이 나서 견딜 수가 없어 몸부림을 치니까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에게 숨 쉴 기회를 주려고 “시몬아, 가서 방금 잡은 물고기를 좀 가져 오너라.” “예!” 얼마나 좋습니까? 숨 쉴 기회를 주니까. 뛰어 가서 그물을 거두어서 생선을 새어 보니까 153마리라. 그중에 생선 몇 마리를 가져 오니까 주님이
“불 위에 얹어 구워라.” 그리고 떡을 나누어 주시고 고기를 구운 것을 주시면서 “먹으라. 고기를 먹으라.” 아무 말도 안하시고 먼저 먹으라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예배드릴 때 언제나 예배드리고 난 다음 밥을 먹는데 주님은 밥을 먹여 놓고 난 다음에 예배를 드리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우리 모임에 밥부터 먼저 먹습니다. 주님께서는 배고픈 사람 배부터 채워 놓고 만족하게 한 다음에 말씀을 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 순서가 올바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 떡을 먹이고 생선을 먹게 하고 난 다음에 주님께서 이제 시몬 베드로에게 적극적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시몬아! 이 모든 사람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 사랑이란 말은 아가페란 말을 썼습니다. 아가파오. 그것은 목숨을 바쳐서 사랑할 때 아가파오인 것입니다. 그때 시몬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주님, 나는 주님을 휠레오합니다.”
휠레오는 아가파오가 아닙니다. 목숨을 바쳐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친구로서 사랑합니다. 왜, 옛날에 아가파오 한다했다가 다 배반했거든. 자신이 없으니까 주님이 “나를 아가파오 하느냐?” “아니요. 휠레오 합니다. 친구로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좋다. 이 양 무리를 쳐라!” 그다음 또 잠시 있다가 주님이 “시몬 베드로야, 네가 이 모든 사람보다 네가 나를 아가파오 하느냐? 희생적으로 사랑하느냐?”
그는 또 고개를 떨어뜨리고 먹은 것을 넘기니까 목에 걸려서 넘어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기침을 하고 난 다음 “주여, 나는 주님을 휠레오 합니다. 주님 희생적으로 사랑을 못하고 이제 친구로서 사랑합니다.”
“내 양을 쳐라.”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이제는 목숨을 바쳐 사랑도 못하고 친구로 사랑한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중책을 주님이 왜 맡기시냐. 양을 먹이라. 양을 쳐라.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셨구나.’ 그러자 세 번째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야, 이 모든 사람보다 나를 휠레오 하느냐? 이 모든 사람보다 나를 친구로서 사랑하느냐?” 아이쿠 큰일 났구나. 친구로서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또 친구로서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또 배반할는지 모르니까 “나는 나를 믿을 수가 없다.” 그는 그만 울상을 하고 주님을 잡았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 주님이 알지 나는 몰라요. 언제 내가 주님을 아가파오 희생적으로 사랑한다고 했다가 주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는데 이제 주님을 내가 두 번 휠레오 친구로 사랑했는데 주님이 네가 정말 나를 친구로 사랑하느냐 하니까 또 내가 친구로서 배반할지 어떻게 압니까?
주여 나는 몰라요.” 그는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주님 나는 몰라요. 이제 나는 내가 누군지 몰라요. 내 결심과 명세도 소용이 없어요. 주님만이 나를 아십니다. 주께서만 나를 아십니다.” 주님이 “그래 알았다. 내 양을 쳐라.”
주님께서 세 번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기 때문에 세 번 다시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하시고 주님은 그 끝없는 사랑 가운데서 시몬 베드로를 끌어안으시고 그에게 양 무리를 치고 먹이고 돌보는 책임을 지우시고 주님 말씀하시기를
“이제 너는 나를 따르라. 너는 나를 따라야 산다. 너의 지혜도 총명도 모략도 재능도 지식도 너를 이끌 수 없다. 네 결심과 각오도 너를 실패 시켰지 않느냐?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에게 은혜를 베풀터 이니 나만 쳐다보고 따르라.”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과거라는 유령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제 모든 것은 끝났어라고 패배의식 속에 죄책과 근심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제일복음주의교회’(First Evangelical Church)의 담임목사이자 유명한 방송설교가인 챨스 스윈들 (Charles R. Swindol) 목사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과거는 일초 전에 끝났다. 이 순간부터 앞으로는 깨끗할 수 있으며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으며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죄책에 견딜 수가 없어서 갈릴리로 내려가 다시 옛 고기잡이로 돌아갔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시몬 베드로를 찾아와서 다시 그에게 사랑을 베풀고 은혜를 주시고 그를 따라오라 하시므로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주님을 바라봄으로 갈대는 반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나를 의지하고 나를 바라보고 내 자신이 당당하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살아있을 때는 결코 반석이 되지 못합니다.
반석 같다가 갈대가 되고 갈대 갔다가 반석이 되고 종잡을 수 없으나 나를 이제 신뢰할 수 없을 때 나를 포기해 버리고 전적으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의지하고 주님을 따를 때 주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반석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4. 반석으로 변화되는 과정
넷째로, 반석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우리가 살펴보았는데 세 번 부인했으나 세 번 사랑을 시인하고 주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백골난망입니다. 사랑과 은혜가 사람을 변화 시킵니다. 판단과 심판, 주목과 채찍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감옥에 가는 사람 보십시오. 제일범, 제이범, 제삼범, 제사범, 제오범, 제육범 계속해서 범죄 합니다. 감옥에 들어가서 법적인 심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법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흉악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면 은혜와 사랑이 갈대를 반석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인 존 내쉬(John Nash)는 천재 수학자로 얼마나 뛰어났던지 21세에 쓴 논문이 40년 후에 노벨상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워낙 성격이 오만하고 괴팍해서 주변에 변변한 친구 하나 없었습니다.
또한 젊은 시절에 국가를 위해 소련의 암호를 해독하는 비밀업무를 했던 적이 있는데 압박감이 얼마나 심했던지 일이 끝난 이후에도 항상 누군가가 자신을 쫓고 있다는 강박증에 시달렸습니다.
그의 비사교적인 성격과 강박증은 점차 심해져서 나중에는 정신분열증으로 미쳐버렸습니다. 그래서 정신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일정기간 치료를 받고 집에 돌아왔지만 환상과 환청이 여전했습니다.
무려 30년 동안이나 환상과 환청에 시달려 그는 삶이 사막처럼 황폐해지고 폐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 엘리사는 전혀 변할 것 같지 않은 남편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극진하게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앉으나 서나 그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남편을 위해 봉사하고 돌봐줬는데 남편은 가혹하게 그 아내를 대했습니다. 욕을 하고 물건을 집어 던지고 발길로 차고 해도 그 아내 엘리사는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고 극진한 사랑으로 남편을 대해준 것입니다.
한 결 같이 그를 믿어주고 사랑한 결과 내쉬는 질병이 낫기 시작하고 강의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이 그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또한 젊은 시절 연구했던 ‘내쉬 균형 이론’이 현대 경제학에 미친 공로를 인정받아 1994년에는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수상식장에서 존 내쉬는 아내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어떤 논리나 이성으로 풀 수 없는 사랑의 신비한 방정식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당신 때문에 여기에 서 있습니다. 당신은 내 모든 존재의 이유입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노벨경제학상을 받으면서 그는 그 아내 엘리사를 향해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당신이 나의 모든 것이다.
어떤 논리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의 그 놀라운 법을 나는 발견했다. 그 사랑이 황폐된 이 수학천재를 변화시켜 노벨상을 타게 한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든 영화가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상영 되었는데 ‘뷰티풀 마인드’라는 제목으로 상영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위급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예수님은 다시 세 번 긍정적으로 시인하고 그 마음이 죄책에서 해방되도록 주님이 도와주시고 주님이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부어 주시고 나를 따르라고 이끌어 주시므로 그는 기어코 갈대에서 반석으로 변화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기를 버리고 주님만을 따를 때 반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중심으로 서면 절대로 반석이 되지 않습니다. 이 우주 가운데 반석은 한분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라서 반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나중에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베드로를 잡아서 처형할 때 십자가에 매달려고 하니까 “나는 예수님을 부인한 죄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없으니 나를 거꾸로 매달아 달라.” 그래서 그는 X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서 세상을 떴습니다.
미국의 복음주의자인 윌버 채프먼이 런던에 있을 때 윌리엄 부스 장군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구세군 창설자인 부스 장군은 80이 넘은 고령으로 구세군을 훌륭하게 이끌어온 영적인 거장이었습니다. 채프먼 박사는 그에게 성공의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부스 장군이 입을 다문 채 한참을 있더니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성공의 비결은 하나님입니다. 물론 나보다 두뇌가 우수한 사람도 많았고 기회가 좋았던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가슴에 런던의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오던 그날부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들을 어찌 구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던 날부터 나는 결심했습니다.
하나님 윌리엄 부스를 모두 가지고 가십시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윌리엄 부스를 하나님이 전적으로 점령하시고 이 런던에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접대하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윌리엄 부스를 모두 가시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구세군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모든 사랑, 의지력, 그리고 내 삶의 모든 영향력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시골 출신의 한 청년이 자신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따르자 하나님께서 그를 허약하고 무력한 갈대에서 구세군을 일으키는 반석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따를 때 갈대는 반석으로 변화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자기를 따르는데서 돌이켜 주님을 따르면 여러분도 갈대에서 반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만큼 충분히 연약한 자를 사용하신다.” 나는 너무나 연약합니다. 내가 반석이 될 수 없습니다. 아닙니다. 연약한 갈대이기 때문에 그를 잡아서 반석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연약하다고 탄식하거나 자포자기하지 마십시오. 사무엘 루터포드는 “주님께서 선택하시도록 자신을 주님께 드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모두 갈대 시몬과 반석 베드로 사이에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아도 우리는 너무나 갈대와 같습니다. 우왕좌왕하고 어떤 때는 반석 같다가 어떤 때는 갈대 같은 이런 생활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내 육신을 따라 내 중심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언제나 나는 갈대입니다. 그러나 많은 고통과 시련을 통하여 나라는 육신이 얼마나 허약한 것을 깨닫고 전폭적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만을 따를 때 반석으로 변화되고 마는 것입니다.
필립 얀시는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심지어 우리 자신도 믿을 수 없을 때, 그때도 하나님은 그곳에 계시고 그 하나님을 의지할 때 반석이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5만 번의 기도응답을 받았던 조지 뮬러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없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 모두 갈대 시몬과 반석 베드로 사이에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나약한 지를 깨닫고 전폭적으로 주님을 의지하면 주님은 그 끝없는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게 해주셔서 우리를 반석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 우리는 주님의 채찍이 우리를 반석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꾸짖고 호통하는 것이 반석을 만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고통을 갖다 주는 것이 우리를 반석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고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부인하기도 하고 타락하기도 합니다만 끝없이 따라와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내 가슴에 깨닫고 이제부터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한 그 시간부터 반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 주님의 사랑을 가슴속에 받아들이면 여러분은 주님을 따르게 되고 여러분은 이 이상더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하지 아니하고 굳건한 반석이 되어서 하나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도 다 한때 갈대였습니다. 아니 지금도 갈대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끊임없이 바람에 날려 이리불고 저리불고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는 갈대가 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 오셔서 갈대 된 우리들을 주님 반석으로 만드시기를 원하시는 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의 그 크신 은혜와 한없는 사랑을 가슴속에 받아들이고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다르므로 모두다 갈대에서 반석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