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조용기 목사 2014-09-22 09:36:36 read : 1065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내게 배우라’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밭을 갈 때 어미 소 옆에 새끼소를 바짝 세워서 밭을 갈았습니다. 멍에는 어미 소 목에 걸려있고 새끼는 어미의 멍에 밑에 들어가서 함께 밭을 가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어미 소가 힘을 내어서 멍에를 끌면 새끼소는 쉽고 가볍게 그 어미의 멍에 밑에서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거느리시고 이 농부가 밭가는 모습을 보시고 난 다음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 아래 들어가기 위해서는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에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배우지 않고 무조건 자기 맘대로 천방지축으로 걸어간다고 해서 마음에 쉼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멍에는 주님 목에 걸렸으니 주님이 옆에 바짝 서서 주님과 보조를 같이 해서 걸어가야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 놓을 수 있고 주님을 따라 쉼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과 함께 멍에 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까?
<본론>
1. 겸손을 배우라
첫째로, 주님의 겸손을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모든 영광으로 다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당사자가 인간의 형상을 쓰고 오신다는 것은 굉장히 낮아진 것입니다.
사람이 낮아진 곳에서 높아지는 것은 쉽지만 높은 자리에 있다가 낮아지는 것은 굉장히 힘이 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다는 굉장한 겸손함을 채득하신 분인 것입니다. 영이 죽고 저주받고 병든 인간과 하나 되기 위해서 인간의 형상을 쓰고 오신 주님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요한복음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인간으로서의 삶도 굉장히 낮은 삶을 살았습니다. 태어난 그곳에 바로 베들레헴의 마구간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 가니까 여관이 없어서 그 부모가 마구간을 빌려서 마구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신 것입니다. 누울 곳이 없어서 말구유에 강보를 깔고서 누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비천하게 태어나도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서 짐승의 구유에 눕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의 가장 비천한 처지에 태어나셨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실 때 왕궁에서 태어나지 아니하시고 귀인의 집에 태어나지 않으시고 가장 가난한 부부의 사이에서 베들레헴의 말구유간에 태어났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가슴이 저리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라날 때 나사렛에 가서 그 양아버지 요셉의 목수 일을 도우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목수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 당시에 목수는 별로 존귀한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천시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 목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그는 자라난 것입니다.
손에 못이 박히도록 여러 가지 연장을 만들고 가재도구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30살에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요단강에서 세례 받고 성령이 임하시고 난 다,음에 40일 금식하고 나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했을 때도 굉장히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풍찬노숙의 생활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8:20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고 해서 정처 없는 나그네 생활을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비천한 처지에서 태어났고 비천한 삶을 살았으며 비천한 생활 가운데서 공생애를 하신 것입니다. 인간으로써 낮아질 데로 낮아진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중에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아무런 반항도 없이 털 깎는 자 앞에 조용히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묵묵하게 주님은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이사야 53: 3에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고 말씀했습니다.
4절에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다고 말씀하시고
7절에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높은 보좌에서 천하고 천한 인간의 몸, 종의 형태를 입고서 오신 것입니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워서 그 멍에 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코드가 맞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코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청와대에도 코드가 맞는 사람이 들어가야 된다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종종 읽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에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 함께 걸어가야 박자가 맞을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코드가 맞으려면 그리스도와 같이 겸손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 F. B. 마이어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여러 층으로 된 선반에 있는 줄로 알고 우리의 키가 높아질수록 그 여러 층의 것을 가질 수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후에 깨닫기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여러 층 되는 낮은 선반에 있는 줄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 선물들을 받으려면 내가 높아지려고 할 것이 아니라 더욱 나를 굽히고 내려가며 또 내려가기를 힘써야 된다”고 그는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높은데 있지 않습니다. 낮은데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교부 성 어거스틴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패트릭 화이트는 “인간은 진정으로 겸손해질 때 하나님과 가장 가깝게 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높아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도 심히 높은 자리를 원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떠한 교회는 성가대에 서로 들어가서 높은 자리, 사람들의 눈에 띠는 자리에 앉으려고 성가대원들끼리 싸우고, 다투고, 박살이 나는 것을 본적도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 서면 뭐하며 뒤에 서면 뭐합니까?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면 되었지. 사람들에게 자기를 나타내고 스스로를 높이려고 하기 때문에 분쟁이 생기는 것입니다.
왜 우리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과 분노와 질투가 있는 것입니까? 서로 높아지려고 하기 때문에 앞선 사람을 시기하고 분노하고 모략하고 모함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낮아지면 그런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높이고 낮추는 것이 동에나 서나 남에서 오지 않고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이시면 낮출 자가 없고 하나님이 낮추면 높일 자도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높이려고 하는 자는 낮아지고 스스로 겸손하게 낮아지는 자는 하나님이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원리와 하나님의 원리는 틀립니다.
인간은 스스로 높이려고 해야 되는 줄 알고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스스로 낮아지는 자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들 가운데 높은 자는 남을 섬기는 자가 되고 섬김을 받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주님 멍에 아래 들어가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려면 스스로 낮아질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인간으로 오실 정도로 겸손하고 낮아졌습니다. 우리가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직분이란 높은 직분일수록 낮아지는 직분인 것입니다.
높은 직분일수록 섬기는 자리에 들어가는 직분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사람은 아직 신앙에 한참 멀어도 멀리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숙하지 못한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 신자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 밑에 십자가에 들어가서 멍에를 메기 위해서는 낮아지고 또 낮아지고 또 겸비해지고 낮아져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물은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르지 낮은데서 높은 데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도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지 낮은 곳에서 높은 데로 올라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2. 탐욕을 버리신 것을 배우라
둘째로, 예수님의 멍에를 배우기 위해서 예수님께 배우기 위해서는 탐욕을 버리는 것을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탐욕을 버리셨습니다.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시고 성령으로 충만하시고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광야에 들어가서 사십 주, 사십 야 금식하시고 주리실 때에 마귀가 와서 그를 시험했습니다. “하나님 아들이면 아들의 권능을 이용해서 돌을 변하여 떡을 만들어 먹어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4: 3 ~ 4에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권능을 사용하여 구복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입니다. 오늘날 권능이 있고 지위가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그 지위나 권능을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들을 우리는 비일비재로 봅니다. 우리 한국에 일어난 모든 부정부패가 낮은 사람들이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지위를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채우기 때문에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가 언제나 그 길을 종용하는 것입니다. “너희 지위가 높으냐? 권력 있느냐?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서 구복을 먼저 채워라.” 이것을 바로 예수님께 적응해서 마귀는 예수님을 육신의 정욕을 통해서 타락 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마귀의 유혹을 물리친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말씀 중심으로 살지 육신의 정욕을 중심으로 살지 않겠다고 주님께서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마귀는 안목의 정욕으로 시험한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으로 명예를 얻으라. 어떠한 기사와 이적을 베풀어도 좋으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명예를 얻는 것이 좋다.” 사람들은 다 명예를 얻기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마태복음 4: 6 ~ 7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데리고 올라가서 내려다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보기 위해서 인산인해로 모였습니다. “이 위에서 뛰어 내리라. 네가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고 사뿐히 내리면 모든 사람들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줄 알고 박수를 치고 너를 존경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권능을 사용해서 명예를 얻으라.” 오늘날 사람들은 명예를 얻기 위해서 자기의 일신을 파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거철이 되면 소위 우리가 아는 예수 믿는 장로나 안수집사나 집사라는 사람들도 우상에 가서 절을 넙죽넙죽 합니다. 명예를 얻기 위해서 자기의 신앙도 팔아먹습니다. 이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유혹인 것입니다. 자기의 명예나 지위를 잃을지라도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단호한 결심을 갖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바벨론도의 도지사들이었지만 느브갓네살이 우상에 절하라고 할 때 그들은 명예와 지위와 생명을 다 잃을지라도 우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결과에 그들이 풀무불이 7배나 뜨거운 곳에 던져짐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건져 주신 것입니다. 자기의 권능을 사용해서 명예를 얻기 위하여 혈안이 될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난 21일 전국 주요 신문들의 톱뉴스로 오른 것은 황우석 박사의 파면조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날 대부분의 주요 일간지와 방송 매체들은 논문조작 사건에 관련된 황우석 수의대 교수가 파면되고 나머지 교수 6명에게는 정직 감봉의 조치가 내려졌다고 전했습니다. 황 교수는 공무원 징계로는 최고 수위인 파면 조치를 당하고 과학기술부로부터 받았던 '제1호 국가 최고 과학자'라는 지위도 취소되었습니다.
황우석 교수는 생명공학 분야에서 한국 최초로 체세포 복제 송아지 '영롱이'와 복제 한우 '진이'를 탄생시키고 지난 2004년 세계 최초로 인간 배아줄기세포를 만드는 등의 업적으로 대한민국 최고 과학기술인상과 과학기술훈장 창조상, 제4회 자랑스런 한국인대상, 세계기술네트워크 생명공학상 등을 타고 우리나라의 제1호 최고 과학자라는 명예를 얻으신 분이신 것입니다.
또한 황우석 교수의 논문은 세계적인 과학 잡지인 사이언스 지(誌)에 실리고 미국의 양대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지와 타임지에서도 내용을 비중 있게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21일 서울대에서는 "황 교수가 허위자료를 근거로 논문을 조작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점이 인정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결국 이 시대 난치병 치료의 길을 열었다고 했던 승리의 쾌거는 명예에 눈먼 한 과학자가 만들어낸 허상이었습니다.
그는 '세계 최고의 과학자'라는 안목의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국가와 국민을 기만하고 논문을 조작하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것은 비일비재한 것입니다. 특별한 예수님 시대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오늘날에도 명예를 얻기 위해서 허위 조작하여 다른 사람을 기만할지라도 그 자리에 올라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몽테뉴는 말하기를 “거짓된 인간이라고 판명되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수치스러운 일은 없다.”고 했습니다. 황교수 사건은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그분은 훌륭한 과학자입니다. 많은 성과를 내신 어른인 것입니다. 나는 그분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분수에 넘치는 명예를 원했다가 허위 논문을 작성할 수밖에 없게 된 그를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그런 시험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명예 때문에 눈이 어두워지면 그런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속 깊이 애도하고 동정해 맞이하지 않습니다. 왜, 마귀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시험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에 예수님은 단호하게 저항한 것입니다.
마귀는 마지막 예수님을 이 세상 자랑을 가지고 시험했습니다. 권력과 부귀를 위하여 마귀와도 손을 잡으라는 것입니다. “권력을 얻고 돈을 얻기 위해서는 가릴 것 무엇이냐. 마귀하고도 손을 잡으라.” 그것이 바로 마귀가 예수님께 꼬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4: 9 ~10에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권력과 돈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오늘날 현실 아닙니까? 마귀하고도 손을 잡습니다.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해서는 북한하고도 손을 잡고 함께 뛰려고 하는 사람들 허다하게 많습니다. 권력이 뭔지, 부귀가 뭔지 거기에 한번 눈이 어두워지면 사탄하고도 동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했습니다. “네 인생이 무엇이냐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니라 내일 일을 자랑치 마라 오늘 네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니라 모든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화는 풀의 꽃과 같아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진다.”고 말한 것입니다.
‘화무십일용이요 근무십년이라’고 열흘 가는 꽃이 없고 십년 가는 권력이 없는데도 사탄은 현재 입에 다니까 현재 입이 단 권력과 부를 위해서 마귀하고도 동침하고 마귀하고도 손을 잡고 나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오늘날 세계에 위대한 정치가들이 권력을 얻기 위해서 마귀와 동침해서 얼마나 많은 비극을 가져온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독일 나치가 히틀러가 마귀와 손을 잡고 온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서 구라파를 초토화하고 6백만 유태인들을 비참하게 참살한 사건은 역사가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하고 동침을 하면 권력과 부는 얻을지 몰라도 그 결과는 비참한 삶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러 오지 행복과 기쁨과 소망을 주기 위해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희랍 신화에 보면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마이다스 왕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들어줄 테니 한 가지만 요구하라고 했습니다. 평소에 욕심이 많았던 마이다스 왕은 얼른 자기가 만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황금으로 변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디오니소스 신은 흔쾌히 소원을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집으로 돌아온 마이다스 왕은 시험 삼아 우선 정원의 바위에 손을 대보았습니다.
그러자 바위가 곧 황금덩어리로 변했습니다. 그는 신이 나서 자기가 기르던 강아지도 만지니까 황금이 되고, 공작새도 만지니까 황금이 되고 만지는 것마다 금덩어리가 되니까 신바람이 나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마이다스는 흥분해서 집으로 뛰어 들어오는데 그 집에서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외딸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외딸, 그 외딸이 오자 외딸을 끌어안고 “얘야, 우리는 이제 부자가 되었다. 내가 만지는 것마다 황금이 된다.” 그러니까 외딸이 황금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지만 그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자기 사랑하는 외딸이 황금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탐욕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딸을 한낱 광물덩어리로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은 황금이란 탐욕이 자기 삶의 가장 귀한 생명같이 아끼던 딸을 광물 덩어리로 만들고 그 삶을 비극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탐욕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모든 것을 파멸시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시고 마귀가 주는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셨습니다.
린드버그라고 하면은 여러분 다 아시지요? 1930년 단발기 프로펠러 비행기를 북대서양을 건너서 처음으로 파리에 안착시킨 위대한 비행사인 것입니다. 세계가 그를 영웅으로 받들었습니다. 얼마 후 그가 프랑스 파리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의 방문소식을 들은 한 담배회사 사장이 이 기회를 이용해 자기 회사의 담배를 선전하고자 해서 린드버그에게 다가가서 담배 한 개비를 주면서 “선생님, 이 담배를 손에 끼어도 좋고 입에 물어도 좋습니다.
한 번만 포즈를 취해 주시면 그 값으로 사진 한 장에 5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그때 5만 달러는 엄청난 대금입니다. 그러나 린드버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선생님, 나는 침례 받은 기독교 신자입니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 담배 광고도 원치 않습니다.”라며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이 기사가 전 신문에 다 났어요. 불란서에 있는 성도들이 얼마나 감격을 하고 놀라웠든지 린드버그를 위해서 서로 성금을 해서 5만 달러가 아닌 10만 달러 성금을 붙여준 것입니다. 마귀는 아주 달콤하게 이 세상의 자랑으로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유혹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주님을 따라가려면 탐욕을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수를 넘은 욕심이 탐욕인 것입니다. 나는 유동치마를 입어야 적당한데 다른 사람이 최신 유행 실크치마를 입었다고 해서 빚내서 치마를 입으면 그것은 탐욕 아닙니까?
내가 실크 치마를 입을 수 있을만한 능력이 있으면 탐욕이 아닙니다. 내 능력이 없는데 분수에 넘는 옷을 입으려고 해도 탐욕이고, 분수에 넘는 집을 사려고 해도 탐욕이고, 분수에 넘는 차를 사려고 해도 탐욕이고, 분수에 넘는 삶을 살려고 하면 탐욕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분수를 지킨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려면 내 분수를 알고 탐욕을 버리고 겸허하게 따라가야지 예수님과 하나님 조차 이용해서 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달성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절망입니다.
자기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자기의 신이 되고 자기 우상이 되어서 그 신과 우상에 절하면서 하나님도 예수님도 자기 개인의 연달을 위해서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결과는 비극을 초래하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의 멍에 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주님의 겸손함과 함께 탐욕을 저버리는 것을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분수에 넘치는 욕심은 단호하게 우리가 거부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3. 순종을 배우라
셋째로, 우리는 그의 순종을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가 자기 아닌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하는 말은 내말이 아니요. 아버지가 하는 말이요. 내가 하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내 안에서 하신 일이라. 주님은 언어 심사 행동을 모두다 하나님 중심으로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은 내가 내 왕이지요.
그래서 인본주의적으로 서서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크리스챤이 되는 것입니까? 크리스챤은 내 마음에 보좌에서 나를 끌어 내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우리 크리스챤인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보좌를 점령해서 내가 먹고 마시고 일어나고 누우며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이 순종하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신앙생활에 우리에게 많은 시련과 환난이 다가오는 것을 압니다. 왜, 나를 깨뜨리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나라는 자가 보좌에 당당히 앉아서 큰소리 할 때 하나님께서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 주 예수 대문밖에 기다렸으나 단단히 잠궈 두니 못 들어가시네. 우리의 마음 문을 내가 채워 놓고 있는데 주님이 어떻게 내 마음에 들어오십니까? 나를 깨뜨리기 위해서 많은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무능력하고 무식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내가 스스로 보좌에서 물러 나와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보좌에 앉히실 때 그때부터 순종의 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는 삶만 그런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순종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죽음도 호화스러운 죽음이 있습니다. 비단요 이브자리에 금침의 베개를 베고 많은 가족들이 우는 가운데서 죽는 사람들도 있고 병원의 좋은 시설 속에서 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것은 온 세상 앞에서 벌거벗기고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서 험한 십자가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로마 당시에 십자가는 가장 극악한 죄수를 처형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죽음인 것입니다.
생사람을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아 매달아 놓고 서서히 피를 흘리고 탈수가 되고 빈혈이 되고 호흡곤란을 일으켜 죽게 만드는 것이니 이 얼마나 비참한 죽음인 것입니까? 사람이 정말 흉악해도 이렇게 흉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면 인류를 위해서 그 흉악한 십자가의 고난도 대신 짊어지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 이외에는 우리를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죄가 뭐 그렇게 무서운 죄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러분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서워서 이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벌거벗고 처참한 고통을 겪어야 청산할 수 있는 죄니 죄가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 죄를 짊어지고 인간이 그 죄를 스스로 선한 행위로 청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인간의 선한 행위나 고행이나 수양과 도덕이 그 무지무지한 죄악을 청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 짐에 눌려서 모두 지옥으로,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죄악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극한 적인 고통을 당하면서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청산하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 6 ~ 8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십자가의 죽음이란 가장 흉악하고도 고통스러운 죽음까지도 주님이 복종하셨습니다. 여러분 왜 아브라함이 우리 믿음의 조상입니까?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믿고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데 우리하고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할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우리보다 특이하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100살이 되어 낳은 이삭을 하나님께서 모리아 산에 데려와서 각을 떠서 장작불에 태워 재물로 드리라고 할 때 두말하지 안고 순종해서 그 아들을 데리고 사흘 길을 가서 모리아 산에 올라가서 그 아들을 묶어서 장작불 위에 얹어 놓고 그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엄청난 순종입니다.
아마 이 자리에서 여러분의 외독자를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고 할 때 순종해서 나갈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나는 항상 이 성경구절을 읽을 때마다 나를 비춰보고 몸서리를 칩니다. “하나님 내게는 그런 말 하지 말아 주십시오. 왜, 저는 그럴 정도의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이 아직 되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하고 나하고는 저만큼 거리가 멉니다.
너무나 위대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외아들을 주기까지 순종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내놓은 것을 모형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극한적인 순종은 못할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순종의 삶을 살아야 주님 십자가 밑에서 함께 동행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대 순종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최선을 다해서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에게 보조를 맞춰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4. 의지함을 배우라
넷째, 예수님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했으니 우리가 의지함을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시도 자기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지혜나 총명이나 모략이나 재능이나 지식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완전히 아버지께 의지했습니다.
시편 22: 4 ~11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해서, 의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앞두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쇄하든지 저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그런 태도를 가졌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뭡니까? 주님께 의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스스로 구원할 것 같으면 왜 주님을 의지합니까? 내가 내 인생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이 있으면 왜 주님께 의지합니까? 주님께 의지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삶과 죽음을 가리지 않고 주님께 내어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마지막 고통을 당하시고 숨이 넘어갈 때도 그는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긴다고 말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3:46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J. 오스왈드 샌더슨이 쓴 「평신도 사역자의 성장을 위한 20가지 영적 원리」라는 책에서 스튜어트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인간의 능력과 자신감이 아닌 약함과 겸손을 선택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범하고, 무력하고, 결점이 많기 때문에 사용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들 때문에 우리를 사용하신다.”
뭐 내가 능력이 많고 지식이 많고 유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택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이 없고, 무지하고, 연약하여 보잘 것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런 빈 그릇을 택하여서 그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도 고린도후서 12: 9에서 “나의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한없이 약해졌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그 영혼을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를 맡으신 하나님은 사흘 만에 무덤에서 일어나게 하시고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 의탁하면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영국의 여객선 스텔라호가 암초에 부딪쳐 난파되었습니다. 거친 파도는 승객들이 탄 구명보트마저 삼켜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명보트를 탔으나 서로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바람에 보트가 기울어져서 모두다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런데 12명의 여성이 탄 구명보트는 노가 없어도 계속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 보트에는 유명한 가수인 마가렛 윌리엄스가 타고 있었는데, 그녀는 배가 난파되어 죽음 앞에 떨고 있는 승객들을 향해
“여러분, 이제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믿음의 징표로 하나님께 찬송을 부릅시다.”라며 먼저 찬송을 인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찬송을 함께 부르니까 마음이 조용해지니까 살겠다고 버둥대지 않습니다. 고무보트에 모두다 조용히 앉아서 찬송을 부르니까 마음이 차분해서 고무보트가 일렁이지 않고 뒤집히지 않았습니다.
밤새도록 이 가수를 따라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아침에 순양함이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와서 찾아도 거의 다 빠져 죽고 구출하지 못했는데 안개 속에서 찬송소리가 들리기에 찬송소리를 따라서 와보니까 12명의 여성들이 탄 구명보트는 물에서 떠있고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다 구출함을 받은 기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출함을 받은 것은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구출을 받은 것입니다. 스스로 살겠다고 발버둥을 쳤으면 고무보트가 중심을 잃어버리고 물에 빠져 버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조용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을 불렀기 때문에 밤새도록 그 고무보트는 기울어지지 않고 균형을 유지했고 결국은 순양함에 발견되어서 구출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고난이 오든지 눈에는 보이는 것 없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는 망망한 바다 속에서도 우리가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할 때 주님은 구원의 손길을 펼쳐 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애창하는 찬송 가운데 하나가 363장입니다. 이 찬송가는 엘리사 호프먼 목사가 성도와 상담한 후 작사한 곡입니다. 하루는 아주 큰 시련을 당한 성도가 호프먼 목사를 찾아와서 “목사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근심에 싸인 저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라며 울부짖었습니다. 호프먼 목사는 한참 동안 그 성도의 사연을 듣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맡기라고 간절히 격려를 해주고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 성도는 밝은 얼굴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래요 목사님, 이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질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맡겨야겠어요.” 이 말을 들은 호프먼 목사는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성도가 돌아간 후 곧바로 펜을 들어 찬송시를 짓기 시작한 것이 바로 찬송가 363장입니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 근심에 싸인 날 돌아 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예수님은 그의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멍에 밑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동거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우리 일생을 맡기고 의지하는 마음의 태도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아버지와 주님의 성실하심을 바라보고 그를 의지하고 따라갈 때 주님과 함께 멍에 밑에서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주님은 십자가의 멍에를 목에 메시고 우리의 짐을 짊어 지셨습니다. 죄 짐, 불결한 삶의 짐, 병의 짐, 저주의 삶, 고생의 짐, 죽음의 절망의 짐을 다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멍에 밑에 그냥 들어와 쉽고 가볍게 인생을 살아가며 마음에 평안을 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멍에 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정말로 주님과 코드가 맞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와 같이 일하고 싶은 주의 종들은 저와 목회코드가 맞아야지 저하고 목회코드가 다르면 저와 함께 일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멍에 밑에 주님과 함께 걸어가기 위해서는 그 멍에 밑에 들어가기 위해서 겸손을 배워야 됩니다. 탐심, 욕심을 버리는 것을 배워야 됩니다. 순종을 배워야 되고 전적으로 의지함을 배울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동행 할 수 있고 주님 십자가 밑에 들어가서 쉽고 평안하게 우리의 삶을 금새와 영원한 내세까지 살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내게로 와서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배우지 않고는 함께 멍에 밑에 걸어 갈 수 없습니다. 주님과 보조를 맞추는 것을 배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겸손을 배우고 욕심을 버리는 것을 배우고 순종을 배우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배워서 나가게 도와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