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50:23/ 범사에 감사하라/ 조용기 목사 2014-09-25 11:16:35 read : 918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저는 오늘‘범사에 감사하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시50:23에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감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감사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영화로움을 느끼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영화로움을 느끼면 하나님의 돕는 손길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감사를 드리면 부모가 영화로움을 느낍니다. 그러면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이든지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왜 미국이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되었습니까?
미국을 세운 청교도들이 감사의 제단을 쌓고 감사를 드리므로 미국을 세웠기 때문에 하나님이 미국의 감사를 통해서 영화로움을 느끼고 하나님의 손길을 베풀어 주었으므로 건국 300년이 조금 넘는 미국이 역사상 최대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이 감사절을 지키게 된 이유는 1620년 9월에 영국의 청교도들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해 영국의 청교도인 102명은 영국 왕의 박해를 피해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작은 범선인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들은 두 달이 넘는 항해를 했습니다. 대서양의 거친 바다 물결에 조그마한 100톤 가까운 범선을 타고 구사일생으로 그들은 11월에 북미의 동부 연안에 도착했습니다. 12월에는 메사추세스 주의 한 곳에 정착한 후 그곳을 플리머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겨울의 혹심한 추위와 식량부족, 풍토병으로 처음 온 102명중에 절반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윌리암 브레드포드를 새 지사로 선출한 후 먼저 교회당을 짓고 집을 지으며 필사적인 개척정신으로 농토를 개간했습니다.
그들은 우호적인 인디언으로부터 그 지역 품종의 옥수수 경작법을 배워서 열심히 농사한 결과,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그들은 추수를 마치고 자신들에게 농사를 가르쳐준 인디언 부족을 초청해서 3일 동안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추수한 곡식과 과일, 야생 칠면조와 사슴을 잡아서 기쁨으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구원을 보이리라"
고 말씀하신 대로 미국을 개국 300여년 만에 세계 역사상 최대 부유하고 강대한 국가로 성장시켜 주신 것입니다. 미국에 감사절은 1863년 링컨 대통령이 연례행사로 선포한 이후, 1941년 11월 미국 의회는 11월 셋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하고 이 날을 휴일로 공포했습니다.
우리나라도 1904년 선교사들을 통해 추수감사절을 받아들였고, 그 절기를 지금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미국 해안에 도착한 후 항해 중의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 일곱 가지 감사를 드렸습니다.
첫째, 180톤밖에 안 되는 작은 배이지만 그 배라도 주신 것에 하나님께 감사했고, 둘째, 아주 느린 속도였으나 도착할 때까지 계속해서 전진할 수 있도록 바람이 불어준 것을 감사했고 셋째, 항해 중 두 사람이 죽었으나 한 아이가 태어났음을 감사했고, 넷째, 폭풍으로 큰 돛이 부러졌으나 배가 파선되지 않음에 감사했고,
다섯째, 여자 몇 명이 파도 속에 밀려들어갔으나 모두 구출되었음을 감사했고, 여섯째, 인디안의 방해로 상륙 못하고 방황했으나 결국 호의적인 원주민이 살고 있는 지점으로 상륙하게 된 것에 감사하고,
일곱째, 고통스러운 기간이었음에도 단 한 명도 되돌아가자는 사람이 없었음을 감사했습니다. 오늘날 미국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은 그들 믿음의 선조들이 감사하는 신앙 위에 나라를 세웠기 때문인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했더라면 그 나라는 파멸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감사가 국가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화로움을 느끼고 하나님이 능력의 손을 베푼 것입니다.
<본론>
1. 불평은 마귀의 최고 무기이다.
지옥의 본질은 바로 불평입니다. 나중에 지옥 가는 사람, 지옥에 가보면 그곳엔 원망과 불평과 탄식만 꽉 들어찬 곳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옥의 본질이 불평이기 때문에 마귀는 항상 우리에게 와서 불평할 것을 요청합니다. 마귀는 없는 것을 지적해서 늘 불평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귀 자신은 하나님이 지은 최대의 영광을 누리는 천사였습니다.
루시퍼로써 하나님 다음으로 영광스러운 천사장이었는데 자기가 천사장인데 하나님이 못되었다는 것을 불평하고 반역을 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나서 마귀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14:13~14에 보면 마귀가 하는 말이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자기 분수도 알지 못하고 지음을 받은 천사장이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탐욕을 가지고 원망, 불평하다가 쫓겨나서 마귀가 된 것입니다. 우리 인류의 두 조상을 바라보면 모두다 마귀의 시험을 받았는데 그 시험이 바로 불평과 원망을 가지고 시험한 것입니다.
아담이 왜 시험을 받았나요? 아름다운 에덴동산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살까하는 걱정, 근심이 전혀 없는 낙원에 있었는데 낙원에도 불평이 있어요.
마귀가 하와에게 와서 ‘하나님이 왜 너희들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느냐. 너희들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샘을 내어서 하나님처럼 되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지 않느냐.’ 불평을 넣어 주었습니다.
이 불평에 귀를 기울인 하와가 ‘우리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게 하였구나.’ 불평과 원망이 들어오면 반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곧 반역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한 것입니다.
남편이란 허수아비에요. 아내 시키는 대로 따라했으니까. 옛날부터 아내가 힘이 셌다고. 아내가 강하면, 남편은 별도리 없이 아내에게 끌려가는데 요사이 젊은이들이 어찌나 영악한지 우리 시대에는 그래도 장가들어도 아내가 우리말을 잘 들었지만 요사이는 남편 말을 아내가 잘 듣지 않아요. 그것다 하와 조상 때문에 그런 줄 알고 있습니다. 남의 탓을 하지만
창3: 4~ 5에 보면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샘이나서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게 했다 하니까 원망과 불평이 들어오자 곧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나서 오늘날 저주받은 땅에서 후손들이 살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인류조상인 예수님도 똑같은 시험을 받았어요. 사십 주, 사십 야 금식을 하셨으니 얼마나 주렸습니까? 그때 마귀가 찾아와서 뭐라고 했습니까? ‘배고프지? 이렇게 배고픈데 하나님이 너를 위해서 음식을 준비해주지 않지 않느냐. 하나님 너무나, 너무나 야속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 말씀 들을 필요 없이 돌을 변하여 떡으로 만들어 먹어라. 하나님보다 먹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 불평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단호하게 마귀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마귀가 예수께 또 찾아와서 ‘유명해지고 싶지? 하나님이 너를 유명하게 만들지 않지 않느냐.
네가 하나님 뜻을 따라 사람의 몸을 쓰고 인생으로 왔지만 유명하게 만들어주지 않지 않느냐. 스스로 네가 하나님 뜻대로 살지 말고 유명해져라. 높은 뾰충탑에서 뛰어 내려서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고 성큼 내려오면 사람들마다 박수갈채를 치고 너를 따라올 것이 아니냐. 유명해져라.’ 불평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유명하게 안 만들어 주니까 하나님 따를 필요 없다. 너 스스로 유명해져라.’ 그때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고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마귀는 예수님은 큰 산위에 데려가서 천하만국이 영광을 보이면서 ‘천하영광을 다 가지고 싶지? 봐, 저 아름다운 도시, 저 환락, 저 권세, 저 능력 가지고 싶지? 하나님은 안주지 않느냐. 하나님은 너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내보내 놓고 안주지 않느냐. 내가 줄 수 있다. 내게 절하면 내가 이 모든 것을 주겠다.’ 불평을 심어 놓아서 자기에게 절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마귀가 심으려고 하는 불평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먼저 우리에게 원망과 불평을 심어서 마음을 열어놓고 들어와서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마귀의 전형물인 것입니다.
멕시코에 가면 온천과 냉천이 함께 솟아나는 신기한 마을이 있습니다. 한쪽에는 부글부글 뜨거운 온천이 올라오고 그 옆에는 아주 얼음 같은 냉천이 올라와 있습니다. 그래서 아낙네들이 빨래하러 오면 뜨거운 물에 빨래를 적셔 가지고서 잘해서 찬물에 헹구어서 갑니다. 관광객들이 구경하러 많이 오지요. 그래서 관광객 안내원이 말했습니다.
“야!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굉장히 축복을 받았네요. 한쪽에는 온천이 있고 한쪽에는 냉천이 있으니 뜨거운 물에 빨래해서 찬 곳에 헹구어 가니 하나님께 감사하지요.” 그러니까 그 곳 주민이 “아니오. 감사 안합니다.”
“왜 감사 안합니까?”라고 묻자. 이 사람들의 말이 하나님이 왜 뜨거운 온천을 주고 냉천을 주었으면 그 가운데 비눗물이 나오는 비누 층을 안주고서 이렇게 만들어 놓았냐고 오는 사람마다 불평을 말합니다. 세상에 있는 것은 감사하지 아니하고 없는 것 더불어서 하나님께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못되게 만들어졌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지요. 마귀는 항상 없는 것을 지적해서 불평을 말하게 합니다. 불평은 마귀의 최고의 무기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시험하는 원수, 마귀도 언제나 오면 큰 것으로 낭패를 만들지 않습니다. 사소한 것으로 불평해야 됩니다. 사소한 것으로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불평을 말합니다. 완전한 남편이 어디 있나요. 남편에게 불평을 말하려면 흠투성이 남편이니까 남편에 대한 불평을 말합니다.
남편은 또 완전한 아내가 있나요? 자기 아내를 자기 친구들의 아내하고 비교해보니 형편없다고 생각하거든. ‘야! 나 좀 더 기다리다가 내 친구의 아내 같은 여자하고 결혼했으면 좋을 뻔 했다.’고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내 제자 중 한사람이 내게 와서 “목사님 내가 너무 일찍이 결혼했나 봅니다. 요사이 가만히 보니까 우리 여자들보다 훨쓴 좋은 여자가 많아요.” ‘예끼 이 사람아!’ 언제나 남의 밥에 콩이 굵어 보인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감사히 않는 사람은 어떤 것에도 감사할 수 없다고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군대 갔을 때 논산 훈련소에서 언제나 우리 서서 배급받는데 그때는 항상 배가 고팠어요. 지금도 기억나는데 언제나 내 곁에 동기의 밥이 항상 많아요. 그래서 동기에게 물어 봤어요. “어떻게 식사당번에 너에게만 나보다 밥을 더 주느냐?”고 그러니까 그 동기는 나 보고서 “네 밥이 나보다 많지 않느냐.”언제나 남의 밥이 많아 보였습니다.
우리를 시험하는 마귀는 언제나 와서 우리에게 불평할 거리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430년 동안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해방과 자유를 주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냈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망,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불순종해서 나중에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멸망당하고 말았는데요. 그들이 홍해에 왔을 때 애굽 군대들이 오니까 우리를 ‘장지가 없어서 이곳에 장례 지내려고 데리고 왔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홍해를 갈라서 육지같이 건너게 해서 구출해 주셨습니다. 수르광야에 들어가서 사흘 걸었는데 물이 없으니까 또 목말라 죽이려고 데리고 나왔냐고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쓴물을 나뭇가지를 꺾어서 건져 달게 만들어서 마시게 해주셨습니다. 신 광야에서는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했는데 하나님은 만나를 보내어서 배불리 먹게 해준 것입니다. 르비딤에서는 또 물이 없다고 불평할 때 하나님은 바위를 처서 물이 나오게 해주신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오랫동안 지체하니까 우리를 지도하는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황금 송아지를 모아서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디베라에서는 악한말로 불평하고 고기가 없어 영양실조가 되어 못살겠다고 원통하고 불평을 말했습니다만 주님이 메추라기를 보내어서 다 고기를 배불리 먹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가데스바네아에 왔을 때도 12정탐꾼을 보냈는데 사십 주, 사십 야 정탐하고 와서 10명이 무시무시하게 그 땅을 악평해서 하나님 앞에 불평하고 반역하게 만들었습니다. 처처에 원망 불평입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은 예비 하셔서 도와 주셨는데도 하나님의 돌보심은 감사하지 아니하고 없는 것만 일일이 찾아가고 원망, 불평, 탄식하다가 하나님이 참지 못할 정도로 괴롭혀서 버림을 당하고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출애굽 한 1세대는 다 죽고만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민14:27~30에 “나를 원망하는 이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야훼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오늘 우리들을 시험하는 마귀도 똑같이 그렇게 합니다. 항상 불평을 유도합니다. 불평을 하므로 하나님의 노하심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평과 원망을 굉장히 미워하시거든요. 우리가 옛날에 시골에서 너구리나 여우를 잡으려면 너구리나 여우 굴에 소나무 생나무를 꺾어다가 불을 붙이면 연기가 납니다.
연기를 굴속에 집어넣으면 너구리나 여우가 뛰어 나오면 몽둥이로 때려잡았어요. 우리도 연기가 나면 눈이 따갑고 코가 숨이 막혀서 살수 없습니다.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에게 연기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눈물이 나게 하고 하나님이 숨 못 쉬게 만드는 연기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원망과 불평을 참고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어찌하든지 하나님 노를 사서 멸망을 당하게 하려고 우리에게 원망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고전10: 9~ 10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2. 감사와 찬양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은 마귀를 기쁘게 만들고 원망과 불평은 마귀의 무장이지만 감사와 찬양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래도 칭찬하면 춤을 춘다고 말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칭찬하면 아내가 마음속으로 춤을 추어요. 영화로움을 느끼기 때문에. 그리고 아내가 남편을 보고 “여보, 당신 참 잘났어. 아주 내 남편 1등이야.” “뭘 그런 소리 하나?” 그러나 마음속으로 춤을 춥니다. 영화로움을 느끼기 때문에 자식들 교육에 자꾸 “이놈아, 병신아, 너 어머니 닮았어. 너 아버지 닮았어. 이렇게 되었구나.” 그렇게 하면 어린 아이를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자꾸 칭찬을 해주면 영화로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용기와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고대로 훌륭한 어머니는 훌륭한 자식들을 길러냈습니다. 그 자식들이 원래부터 훌륭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는데 어머니의 칭찬으로 말미암아 훌륭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발명왕 에디슨 같은 사람 보십시오. 학교에서 선생님이 수학을 가르칠 수 없어요. 하나 보태기 하나는 둘이라고 하니까 학생들이 다 “예!” 하는데 에디슨만 손들어서 “아닙니다. 하나 보태기 하나는 둘이 아닙니다. 하나 보태기 하나는 하나도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어떻게 하나 더하기 하나가 ‘하나’가 될 수 있느냐? 둘이지.” 에디슨이 말하기를 “고양이 보태기 쥐는 한 마리밖에 안 남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맞았어요. 고양이 보태기 쥐는 잡아먹어 버리니까 한 마리밖에 안 남는데 어떻게 둘이 됩니까?
그래서 선생님은 에디슨을 저능아라고 생각하고 엄마를 불러서 얘는 저능아니까 도저히 학교에서 교육 못 시겠다고 쫓아냈어요. 그런데 엄마가 에디슨을 “너는 천재다. 보통 애들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천재다.
내 아들은 천재니까 보통 애들하고는 공부할 수 없으니 내가 가르치겠다.”고 칭찬을 받으니까 영화로움을 느끼고 에디슨이 분발해서 공부를 해서 발명왕이 되고 말았지 않습니까? 언제나 위대한 사람은 그를 돌보아 주는 사람이 칭찬을 해서 마음에 영화로움을 느끼고 용기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한말의 쓸개보다도 한 방울의 꿀이 더 많은 파리를 잡습니다. 쓸개 한말 갖다 놓아도 한 마리의 파리도 안와요. 그러나 꿀 한 방울 갖다 놓으면 파리가 수없이 몰려드는 것입니다.
쓸개와 같은 원망, 불평, 탄식, 꾸짖음 아무리 말해봤자 소용이 없어요. 그러나 격려하고 칭찬해주고 용기를 주면 영화로움을 느껴서 큰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감사와 찬양을 하면 하나님조차도 영화로움을 느낍니다. 사람도 영화로움을 느끼는데 하나님조차도 감사와 찬양을 하면 하나님이 마음이 뜨거워지고 영화로워져서 ‘그래, 참 좋은 자식을 내가 주었구나. 오냐. 나에게 구하라. 내가 응답하여 주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안 드리고 만나기만 하면 강아지 새끼를 엄마 젖만 자꾸 빨듯이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라고만 하면 자꾸 달라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못 견뎌요. 내가 가만히 보니까 강아지 새끼들이 엄마에게 젖을 자꾸 매달리니까 나중에 자식들 털어 버리고 튀어 도망 가더라구요.
자꾸 달라고만 하면 결국 하나님도 도망쳐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영광을 돌리면 하나님이 영화로움을 느끼면 구하기 전에 이미 있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천국은 감사와 찬양의 처소인 것입니다.
여러분들 하늘나라 가보세요. 하늘나라는 예수님 십자가를 중심으로 해서 끝없는 감사와 찬송입니다.
우리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서 얻었기 때문에 우리 가슴속에 십자가가 중심이 되어야 되고 하늘나라 올라가도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중심으로 영원한 감사와 찬양의 처소가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감사와 찬양은 젖과 꿀이 흐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이 있는 곳에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 있는 곳에 기쁨이 있고 행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행복이 넘치므로 어느 곳에 가나 감사와 찬양이 넘쳐흐르는 곳입니다.
시150: 1~ 6에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야훼를 찬양하라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야훼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하늘나라는 찬양의 곳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우리가 찬양을 하면 하늘나라가 우리에게 임하셔요. 우리 성도의 참된 제사는 십자가를 통해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속제제사를 드리고 속건제, 번제, 화목제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렸지만은 예수님이 우리의 제물이 되어서 십자가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고 말았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 앞에 짐승을 잡아서 제사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보혈 공로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고 세속을 이기고 거룩함을 얻었으며 보혈의 공로로 치료를 받았고 저주에서 해방이 되었고 부활, 영생 천국을 얻었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 되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고 거룩한 나라가 되고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으니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가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제사는 우리 입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입술을 통해서 하루종일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감사와 찬양 중에 와계신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이 하나님의 보좌를 만드는 것입니다.
시22: 3에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 하시니이다”
이것을 원어 그대로 보면 이스라엘의 찬송을 보좌로 삼고 계시는 하나님이여 주는 거룩 하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찬송을 하나님 보좌로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찬양하면 마음속에 하나님이 보좌가 이루어지고 가정에서 찬양하면 가정에 하나님의 보좌가 만들어지고 교회에서 찬양하면 교회에 하나님 보좌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좌를 만들어 놓았는데 하나님이 와서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감사와 찬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많은 감사와 찬양을 하게 되면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이 임재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 이름으로 쫓아내면 물러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보혈과 말씀에 의해서 이길 수 있지만 아예 마귀가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찬양을 부르면 마귀가 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반역하여 귀신이 들렸지 않습니까? 사울에게 악신이 겹치면 사울이 막 고통스러워서 발버둥을 치고 야유하고 고함을 치고 했습니다.
고칠 수 없어요. 백약이 무효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불러다가 수금을 타고 노래를 부르게 하니까 다윗이 수금을 타고 노래를 부르니 악령이 떠나가고 사울이 편안해지고 상쾌하고 낫더라고 말한 것입니다.
원수 마귀는 찬양 앞에 견디지 못합니다. 찬양과 감사를 드리면 마귀는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을 치고 마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서 많이 얻어맞고 깊은 감옥 속에 들어갔습니다.
쇠고랑에 차여 있는데 맞은 데는 쓰리고 아프고 밥도 못 먹어 배는 고프고 밤중에 괴로운데도 그들은 기도를 하고 난 다음 쇠고랑을 철렁철렁 하면서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 찬양이 얼마나 은혜로웠던지 그 죄수들이 다 밤중에 잠에서 깨어나서 귀를 기울여 듣더라는 것입니다.
보통 노래했으면 죄수들이 “이 사람들아! 밤중에 무슨 노래냐? 잠을 못 자게 한다.”고 고함을 치고 “조용히 해!”라고 할 것인데 찬양을 부르니까 하나님이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면 평강이 넘치고 기쁨이 넘칩니다.
죄수들이 다 듣는데 하나님이 찬송에 너무나 감동해서 빌립보 옥토를 뒤흔들어 버리니 지진이 일어나고 모든 죄수들이 차고가 다 풀려 버리고만 것입니다. 자유와 해방이 된 것입니다. 찬송과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주의 천사들이 와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이 쇠고랑을 끊어버리고 원망, 불평, 탄식, 미움, 저주를 다 끊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해방을 시키는 것은 찬양이고 우리를 속박시키고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은 원망과 불평과 탄식입니다.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하면 개인도 속박되고 가정도 속박되고 국가도 속박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찬양은 해방시키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해방시키고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우리에게 평안과 자유를 주는 것이 예배와 감사와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인도에 선교사로 간 스코트 목사는 인도 내부에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야만족이 있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바이올린을 들고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수일 후 목적지에 도착하자 갑자기 원주민들이 활과 창을 가지고 달라 들어서 당장 창으로 목을 찌를 듯이 가까이 왔습니다. 번쩍 거리는 창이 목에 닿았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바이올린을 켜면서 하늘을 향해 눈을 감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송가 36장 ‘주 예수 이름 높이어 다 찬양 하여라’ 창에 찔릴 것을 각오하고 1절을 부르고 2절을 불렀는데도 아직 창이 안 찔립니다.
그래서 3절을 부르면서 눈을 떠보니까 자기를 향했던 창이 전부다 땅을 향해 있고 살기등등하던 인도 원주민들이 얼굴이 화평해지고 그중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찬양을 하자 하나님이 임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면 평안을 가져오고 기쁨을 가져오고 사랑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마귀는 오면 미움, 분노, 시기, 질투, 원한, 살상을 가져오지만 하나님이 오시면 평안을 가져오고 기쁨을 가져오고 위로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 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찬양이 있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시간 있을 때마다 찬양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감사는 지상에 천국이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하지 마십시오. 천국은 우리 가슴속에 임하는 것입니다. 천국이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 넘치는 평강으로 가슴에 임하면 천국이 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추운 겨울날 우리가 계명 아파트에 살 때 서대문교회 새벽 기도하러 새벽 4시에 나갔다가 새벽기도를 하고는 밥 먹으러 최자실 목사님하고 집에 돌아갔는데 거기에 들어가면 양지 바른 곳에 난점포를 가지고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날 내가 가니까 추운데 한사람이 점포를 가지고 있는데 따뜻한 곳에 있는 사람이 “야! 이리와. 이리와. 여기는 천당이다 천당!” 내가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어요. 추운 곳에 웅크리고 있는 것보다 따뜻한 볕을 쪼이는 양지바른 곳이 천당이라고 말합니다.
천당이란 뭐냐. 편안하고 기쁘고 좋은 데가 천당인 것입니다. 천국을 어디에서 체험하느냐. 마음속에 기쁘고 좋고 평안하고 즐겁고 행복하면 천국이 임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분노, 시기, 질투, 절망, 좌절, 우울증, 고통이 있으면 지옥이지요.
지옥과 천당이 장차 체험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 우리 마음속에 체험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감사하고 찬양하여 마음에 평안과 희락과 화평과 즐거움이 있으면 천당이지요. 그
런 마음, 그런 가정, 그런 생활이 이미 천당을 체험하고 있지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 그런 천당에 가지요. 마음에 독한 시기와 분노와 원망, 좌절, 절망만 꽉 들어찼다면 이미 지옥 속에 살고 있어요.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나면 그 지옥 본부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100: 4처럼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 할지어다”라고 말했는데 감사하면 천국 문에 들어가고 찬송하면 하나님 궁전에 들어간다고 말했었습니다.
우리 눈에는 안보이지요. 영적세계니까. 그러나 감사하면 천국 문으로 들어가고 찬양하면 하나님의 궁전에 들어가서 하나님 계신 곳에 계시니 생명이 넘치는 은총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가다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때 마음에 참 놀라운 평화가 오는 것을 체험합니다. 형언할 수 없는 마음에 기쁨, 평안, 만족, 즐거움 이런 천국이 임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감사와 찬양을 통해서 여러분 속에 임하신 것입니다.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평안과 기쁨과 행복과 영광이 충만할 때 천국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돈 고셋 목사님은 전 세계를 다니며 찬양 사역을 하는 분으로 「찬양의 폭발적 능력」이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돈 고셋 목사님이 이처럼 찬양 사역에 헌신하게 된 데에는 부인의 영향이 컸습니다. 부인인 조이 사모님은 목회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음악을 했습니다. 교회에서 반주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지만 항상 사탄의 시달림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마음속에 우울증을 가지고 태어났었습니다. 언제나 마음속에 “너는 죽는다. 21살이 지나 기전에 죽을 것이다. 너는 쓸데없는 인간이다. 너는 살 필요가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파도처럼 마음에 주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써 자기를 컨트롤할 수 없어요. 정신병원에 입원도 하고 그는 안정제를 먹어야 매일매일 생활을 하는 눈물과 두려움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던 하루 조이가 하나님께 자기의 슬픔을 다 내어 놓고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왜 이렇습니까? 왜 내 생각이 아닌 다른 생각이 내 마음을 짓눌러서 우울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자꾸 죽을 생각이 나고 왜 이렇습니까? 나를 좀 살려 주십시오.’ 그러자 성령께서 그에게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한 번만이라도 찬양에 너의 삶을 다 쏟아보라.” 그녀는 어려서부터 교회 반주를 하며 찬양했지만 그때까지의 찬양은 그저 형식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습관적인 찬양이 아닌 삶을 통해 전심전력으로 드리는 찬양을 원했던 것입니다. 조이 사모님은 그 음성에 순종해서 하나님께 온 맘과 정성을 다해 찬양과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천국이 그 마음속에 임하여 하나님의 기쁨과 평안과 영광이 충만해지고 마음에 우울증과 고통과 괴로움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건강해져서 그는 결혼하고 남편을 찬양사역에 들어가도록 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그래요. 여러분 교회도 조용하게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다 들리도록 조용하게, 찬양을 해도 고요하게.
♪성령이 오셨네. 할렐루야 함께 계시네.♪
대게 그런 곳에 가면 교인들이 별로 많지 않아요. 듬성듬성 앉아서 그렇게 해요. 그러나 마구 손바닥을 치면서 찬송을 즐겁게 하는 곳은 어떻게 즐겁게 합니까? 그것 처음본 사람 “저것 미쳤다. 저것 미쳤어. 저것 완전히 돌았구나.”
라고 생각하지만, 돌 정도로 찬양에 빠진 것입니다. 정성을 들여서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 성령이 임하시고 기쁨이 충만하고 그런 찬양을 하다 보니 마음에 병도 낫고 육신의 병도 낫고 가정의 병도 낫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위해 칭찬받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찬양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90먹은 아들이 90먹은 어머니 생일날에 때때옷을 입고 어머니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이 어머니가 90먹은 어머니가 “내 아들 잘한다. 올 커니, 올 커니 잘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보고 “둘이가 다 노망했다. 90먹은 할머니 앞에 70먹은 아들이 때때옷을 입고 저렇게 춤을 추니 노망했지 않느냐.” 다른 사람이야 노망했다고 하든 말든 그는 어머니에게 참 으로 효도한 것입니다.
어머니는 90이지만 70이 갓난아기로 보이는 것입니다. 늘 애기로 보여요. 그렇기 때문에 “오냐. 내 아들 잘한다. 얼씨구나 좋다. 얼씨구나 좋다.” 효도했으니까 좋잖아요. 훌륭하게 자랐잖아요. 우리가 찬양을 부르는 것은 사람들 들으라고 찬양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보라고 찬양 부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즐겁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흥겹게 찬송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장엄하시고 엄히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얼마나 장엄하고 엄히 할 수 있겠어요?
어린 아이 같은 우리들이 어린아이 같이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손바닥을 치며 즐겁게 찬송을 부르면, 하나님께서는 “오냐, 내 자식들 잘한다. 얼씨구 좋고. 잘한다. 잘한다.”라고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됐지.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곳에 하늘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3. 무엇을 감사할까?
무엇을 감사하고 찬양할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모시고 자녀된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 세상에 하나님 모르는 사람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잖아요. 캄캄한 밤중에 허덕이고 살다가 취생몽사하잖아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고 용서와 의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을 섬기며 살다가 죽음이 다가오면 육신의 장막 집 벗어 버리고 하나님이 예비한 영원한 집으로 가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시므로 얼마나 마음에 즐거움이 넘칩니까? 인생을 살면서 나이를 먹었으면 가장 두려운 것이 고독인 것입니다.
일본의 여자들은 남편 퇴직하기만을 기다린다는데, 왜냐하면 퇴직하면 퇴직금 반 잘라서 이혼하려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고독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이 혼자 산다는 것 외롭게 산다는 것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감옥이 왜 무섭습니까? 고독하기 때문에. 인생 노후가 왜 외롭습니까? 직장에서 퇴직하고 난 다음에 자녀들 다 커서 나가 버리고 이제 남편과 아내는 서로 별 필요가 없으니 따로따로 방을 쓰고 자기 홀로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온 세상에 나밖에 남아있지 않구나.’ 외로움, 고독 괴롭고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가 항상 같이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주님이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습니다.
못난 자식일수록 주님이 더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서대문에서 목회할 때 잘생긴 할머니 한분이 담요 한 장 들고 추운 겨울에 벌벌 떨면서 철야기도를 합니다. 그러면 아침이 되면 아주 귀부인이 자가용을 타고 와서 커피를 끓여 와서 대접을 해요. 이상하다 그래서 한번 제가 불렀어요. 사무실에 불러서 “도대체 사연이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그 귀부인이 하는 말이 “우리 어머님이 좀 노망을 하셨어요. 도대체 맏아들도 잘살고 우리 둘째 우리도 잘삽니다. 우리 집에 오면 어머니 방이 따로 있고 금침이 다 준비되어 있고 좋은 음식 먹을 수 있는데 셋째 동생, 셋째 아들이 술 먹고 방탕하고 도박해서 집 다 날리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잘 못삽니다. 그런데 꼭 그 셋째 집에 삽니다.
맏이하고 둘째에게 돈 달라고 해서 돈 받아 가면 셋째 집에 가서 같이 죽을 먹고 같이 누더기를 덮어 쓰고 이가 득실거리는 곳에 사는데 그 셋째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이렇게 밤을 세워가며 엎드려 있으니 목사님이 좀 말을 해서 정신이 좀 들게 해주십시오. 우리 집에 와서 좀 살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내가 그때는 제가 총각이었습니다. 29살 때 였는 데 “할머니, 노망했어. 노망했어. 첫째아들도 잘살고
둘째아들도 잘살고 좋은 집에 좋은 잠자리에 좋은 음식이 있는데 왜 이렇게 주접을 떱니까?” 그러니까 나를 처다 보더니만 “쯧쯧쯧, 목사님은 아직 총각이지. 결혼해서 자식 안 길러봤지? 옛 말에 썩은 새끼 목맨다는 말이 있어. 썩은 새끼는 목을 매어도 언제나 끊을 수 있는데도 못 끊는 것이 부모 심정이야. 맏아들 잘사니 좋아. 둘째 아들 잘사니 좋아.
셋째 놈이 못살아서 저렇게 거지가 되어 있으니 어미 마음에 못을 박았어. 내가 맏아들 집에 가도 편하지 않고 둘째 아들 집에 가도 편하지 않아. 막내 집에 가서 같이 누더기를 덮어 쓰고 있으면 맘이 편해. 내가 돈 좀 얻어가지고서 그들을 안 먹여 살리면 누가 살리겠냐.”
날보고 “젊은이 꾸짖지 말게. 젊은 목사님도 결혼해서 자식 낳아 보면 내 심정 알꺼야.” 그래도 나는 그 심정을 몰랐어요. “아무래도 노적 들렸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제가 이제 돌아보니 그 할머니 말이 얼마나 맞는지 몰라요. 자식이 다 있으면 다 잘되는 집안이 어디 있어요. 몇 놈은 잘되어도 꼭 못되는 자식 하나 있다구요.
내내 못사는 자식에 마음이 아프고, 자나 깨나 늘 마음에 고통이 오고 지금 어떻게 밥이나 먹느냐. 지금 마음이 편안하느냐. 지금 병들지 않느냐. 지금 건강하게 사느냐. 한시도 마음이 떠나지 않아요. 잘난 자식은 너무나 잘나서 고맙고 감사하고 잘나가는 자식은 잘나가니 너무나 행복하고 좋지만 그러나 부모마음은 늘 못된 자식 때문에 마음이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잘나간 자식은 감사하고 즐겁고 하나님도 기뻐하지만 못나가는 자식 하나님이 너무나 괴로워하고 불쌍히 여기고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고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를 버린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우리가 왜 감사해야 돼요? 나는 못나고 죄 많고 버림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고 나와 같이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므로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갈 3:26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시100: 2~ 3에 “기쁨으로 야훼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야훼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버지 된 것을 인해서 우리는 감사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받은 복을 헤아려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 볼 때 받은 복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식을 길러 보면 자식들은 부모에게 받은 복을 헤아리지 않고 자꾸 안 받은 복만 헤아리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나에게는 이것도 못해지고, 저것도 못해주고, 이것도 못해지고 저것도 못해주고” 전부 못 해준 것만 자꾸 헤아리고 난 다음 그 다음에는 원망,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부모가 낳아주고 길러 준것 만해도 얼마나 좋습니까? 받은 복을 헤아려서 감사를 하기 시작해야 되는 것입니다. 복을 받은 것을 감사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세요. 성경에는 있는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조차 빼앗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말하기를 ‘촛불을 보고 감사하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면 태양을 주시고 태양을 보고 감사하면 천국을 주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죽 먹을 때 감사하면 보리밥 먹고 보리밥 먹고 감사하면 입쌀밥 먹고 입쌀밥 먹고 감사하면 고기밥 먹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가지고 감사해야지 있는 것을 가지고 불평을 하면 하나님이 “그것도 내놓아라.”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못사는 이유는 있는 것을 찾아가면서 받은 복을 헤아려 보고 감사하지 않기 때문에 자꾸 생활이 줄어지는 것입니다.
주어진 복을 헤아려 보고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 동안에 좋은 일 많잖아요. 잊어버리지 마세요. 손으로 꼽아가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 있는 자에게는 더 줍니다. 감사가 10개 있느냐. 하나 더 받으라. 11개를 받으라. 그러나 원망, 불평 자주하면 ‘어! 있는 것도 내놓아라. 그것도 많다!’라고 하시면서 빼앗아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시30: 4~ 5에 “주의 성도들아 야훼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라”고 말합니다.
시 68:19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주시는 하나님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있는 것을 가지고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찾지 마세요. 우리가 없는 것 찾으면 얼마든지 이 세상에 그늘진 곳을 찾으려면 나무 밑에도 그늘이 있고 다리 밑에도 그늘이 있고 지붕 밑에도 그늘이 있고 사람 옆에도 있습니다.
그림자를 찾으려면 어느 곳에나 있어요. 그러나 햇빛을 찾으려면 광장에서도 햇빛이 비취고 길거리에도 햇빛이 비취고 집밖에도 햇빛이 비취고 산비탈에도 햇빛이 비취고 햇빛은 어딜 가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생각의 방향이 여러분 이것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먹고, 입고, 마실 것이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하고 찬양하면 가진 것을 위에 하나님이 더 보태어 주는 것입니다.
딤전 6: 7~ 8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있을 곳만 있으면 우리가 족한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면 하나님이 더 주시는 것입니다.
한 농부가 타작을 하면서 “금년 채소 농사는 완전히 망했다. 하나님이 왜 채소 농사를 망하게 하셨느냐!” 불평을 하니까 친구가 있다가 “자네 감자 농사도 망했나?”라고 묻자. 그 농부는 “아니야. 잘됐지.”
그럼 “벼농사는?” “풍년이지.” “옥수수 농사는?” “잘 되었지.” 그러자 친구가 “그런데 왜 자네는 잘된 감자농사, 벼농사, 옥수수 농사는 감사하지 아니하고 꼭 안 된 채소농사만 가지고 원망, 불평 하느냐?
자네 그러다가는 다른 것도 다 뺏길 걸세.” 그 말을 듣자 농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해야 되겠다.’고 표정을 바꾸고 감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없는 것을 먼저 생각하지 말고 있는 것을 가지고 먼저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뛰고 구르며 감사해야 될 것은 장차올 천국을 인하여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강남에 집만 있어도 감사해야 됩니다. 요즘 강남집값 몇 억 씩 올라갔잖아요. 우리 성도 중에 한사람이 와서 정부에서 강남 집을 가지면 망한다고 해서 두 채 있는 것 한 채 팔았더니만 팔아서 망했다고 그래서 정부가 하는 반대로 하면 꼭 되지. 정부 시키는 데로 하면 망한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요사이 집값 때문에 희비상곡입니다. 그러나 30대, 40대에 집을 하나 장만할 수 있으면 얼마나 감사하며, 5,60대에 제법 근사한 4,50평짜리 강남에 아파트를 하나 가지면 어깨가 으쓱하고 좋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집 얼마나 갑니까? 사람이 살면 70이요, 강건하면 80이요, 그 후에는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최자실금식기도원에만 가보면 그곳에 묘지가 있고 그곳에 또한 납골당이 있습니다. 내가보면 다 내 밑에서 설교 듣던 장로님, 권사님, 안수집사님, 평신도, 구역장, 지역장, 주의 종들 얼굴이 전부 훤한데 지금은 다 고요하게 누워 계십니다.
사람이 한 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고 난 다음에는 심판이 있으니 사람이 죽고 없어지면 괜찮겠는데 사람은 죽고 난 다음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영이 육체를 옷 입고 살고 있기 때문에 육신의 장막 집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않은 곳에 가야되는 것입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가야 되겠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죄 덩어리인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형벌 받으므로 우리 죄를 청산해 주셨기 때문에 예수 믿음으로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식으로 거듭나서 천국백성이 된 것을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천당에 집이 있어요.
요14: 1~ 3에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이별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앓는 것이 없는 영원한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이 넘치는 천국 집을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강남집, 강북집이 아닙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집이 아닙니다. 영원 무궁히 우리가 들어가서 살집을 주님이 예비해 놓았으니 이것을 생각할 때 기뻐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제가 젊을 때 목사님께서 천당이야기하면 ‘아직 새까맣다. 나에게는. 먼 훗날에 일어날 일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이 70이 넘으니까 굉장히 가까워요. 저 건너편에 있는 집 내 눈에 희미한 것이 아니라 확실해요. 여러분 우리는 누구를 불구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천당집이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나라에 집이 있으면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몰라요. 저는 가끔가다가 몸이 아플 때가 있어요. 또 몸이 피곤할 때가 있어요. 젊을 때는 자고나면 건강하고 자고나면 깨끗했는데 피곤이 쌓이면 자고나도 잘 일어날 수도 없고 몸이 말을 안 들어요. 그럴 때 늘 천당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죽음을 생각하는데 천국에 집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내가 이 육신의 장막 집을 떠날 때면 주님이 와서 내손잡고 영원히 살 천국으로 데려간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고 소망 찬지 몰라요. 만일 천국이 없다면 죽음이 가까울 때 얼마나 당황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겠습니까? 갈 곳이 없으니까. 오늘 예수를 믿지 않고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내일이 캄캄합니다. 갈 곳이 없습니다.
육신의 집을 떠나가면 이제는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집 없는 방랑자가 갈 곳은 지옥밖에 더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영원한 집을 예비해 놓으셨으니 천국으로 인하여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결론>
감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을 긍정적으로 만들고 밝고, 맑고, 환하며 희망적이게 하며 모든 주위를 기쁘게 합니다. 감사하는 남편은 아내와 자식들에게 기쁨이 되고 감사하는 아내는 남편하고 자녀들에게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친구들도 만나서 감사를 하면은 아주 그 친구가 만나면 기분이 좋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고 짜증내고 늘 흠집 내는 그러한 남편과 아내와 자식들과 같이 살면 생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예 초가집에 산나물을 먹고 살더라도 불평하지 않는 아내와 살면 행복하고 고기를 가득하게 쌓아놓고 잘 먹고, 잘 입어도 불평하는 아내와 살면 지옥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천당과 지옥이 감사와 불평에 달려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육체적으로 많이 감사하면 엔돌핀이 생산하여 건강해진다고 말합니다. 감사할 때마다 웃을 때마다 몸속에 엔돌핀이 나와서 여러분을 건강하게 만들고 몸에 저항력을 강화시켜서 감기도 안 들리고 암도 안 걸리게 한답니다.
감사가 그렇게 만들어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마음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감사하는 가정과 사회는 건강하고 발전하는 가정과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돈 들지 않잖아요. 특별히 학교에 가서 공부해서 졸업장을 타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단순한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은 하나님의 축복의 길이요, 원망과 불평과 탄식은 마귀의 패망의 길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항상 입술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불평하다가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감사하므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께 들어가는 문이요, 찬양은 하나님의 궁전에 들어가는 축복인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모두다 하나님 궁전에 들어가서 살게 도와 주시옵시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마음에 천국을 가지고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의지하여 늘 감사하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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