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교했다 2015-12-16 13:38:20 read : 2900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바울은 예수께서 성경의 예언대로 부활하신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전개한다. ‘예수의 부활된 몸을 본 목격자들이 많다.
바로 그들이 증인들이다(행13:30-31)’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으며 다시 사신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모습을 허다한 사람들에게 보이셨다고 말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정사실화 한다.
또한 바울은 예수의 부활에 관한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를 논증하려고 구약 세 곳을 인용한다.
첫째,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시 2:7)” 라는 구절을 행 13:33에 인용하고 있다. 바울은 이 본문을 하나님이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생명의 탄생과 지속성을 의미하며, 이것은 곧 예수의 부활을 예언한다고 보고 있다.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그의 영원한 생명을 확정한 사건이자 하나님의 아들로서 태어난 것이라고 보았다.
바울은 로마서 1장 4절에서도 선언한다. 이는 예수가 부활 사건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임을 공적으로 증명해 보인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낳는 순간이었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바울은 시편 2편에서는 심판권이 오직 하나님의 아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심판권을 행사하기 위해선 설령 죽어도 다시 살아나야만 한다. 따라서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는 말은 부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둘째, “내가 너희에게, 다윗에게 한 믿을만한 거룩한 약속들을 주리라(사 55:3)” 는 구절을 행 13:34에서 인용하고 있다.
바울은 이것을 예수의 부활을 약속한 내용으로 보았다. 본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차 그들이 회복된다는, 과거에 하나님이 다윗에게 준 축복의 언약을 성취시켜 주겠다는 약속이다.
바울은 어떻게 이 내용에서 예수의 부활의 약속이 있다고 본 것일까. 이 문제를 푸기 위해 먼저 다윗에게 주신 축복의 언약과, 그 언약에 부활이 포함되어 있는지 살펴 보자. 다윗에게 주신 축복의 언약은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는 것이다.
이 언약은 메시야 왕국의 영원성을 약속한 내용이다. 즉 이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점으로 공식적으로 확보된다. 따라서 약속에는 부활을 내포하고 이사야서의 언약에도 당연히 예수의 부활을 약속했다고 본 것이다.
셋째, “너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않게 할 것이다(시 16:10)” 를 바울은 행 13:35에서 예수의 부활을 약속한 것으로 본다.
그는 시편에서 이 말씀이 구문상으로는 다윗에게 적용되지만 결국 썩음을 당했기 때문에, 결국 썩음을 당하지 않은 후손 곧 예수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시편 말씀에 예수의 부활이 약속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약속과 성취의 구도 속에서 논증했다. 이어서 그는 예수를 통한 죄 사함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아십시오. 이 사람을 통해 죄사함이 여러분에게 전파되고 있습니다.(행13:38)” 바울은 청중을 향해 ‘형제들이여’라고 부르며 주의를 환기시킨 후에 ‘이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이 전파된다고 외친다.
사실 이 죄 사함의 복음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다. 바울이 “이 사람”이라고 했던 의도는 죄 사함의 능력이 완전한 인성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는 것임을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모세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이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행 13:38-39)” 이 본문의 강조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또한 바울은 모세와 ‘이 사람’을 대조시킨다. 이 대조는 중요한 신학적 이슈들로서 신약 성경, 특히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 강조된다.
바울의 이 대조에는 긍정적 의도와 부정적 의도가 동시에 내포돼 있다. 바울은 모세와 예수 사이에, 그리고 율법과 믿음 사이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동시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1)이스라엘의 과거사를 언급하다(행 13:17-23)
바울은 먼저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언급한다. 그는 아브라함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더듬는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그는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신 것,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들을 주신 것, 이스라엘이 왕을 구해 사울 왕(베냐민 지파 사람)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 왕을 세우신 것(이 때 약속을 주심),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씨에서 구주 곧 예수를 세우신 것을 언급한다.
이것은 유대인 청중들이 다수였던 점을 감안할 때,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들은 특히 다윗의 혈통에서 메시야가 날 것을 대망하였기 때문에 바울의 이야기는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 역사 언급을 통해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관해 오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둘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결정적으로 중요한 구속의 약속은 한 인물에게서 성취됐는데 그가 바로 예수이시다(22-23). 바울의 논지를 따라 이것을 좀 더 신학적 관점에서 정리하면 -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이스라엘의 역사는 구속의 역사며, 약속과 성취의 구도 속에서 전개 된다.
약속의 핵심 내용은 ‘이스라엘의 구속’, ‘이스라엘의 구속은 하나님의 뜻의 성취’, ‘구속자는 다윗의 혈통에서 난 예수(왕이며 완전한 인간)’, 그리고 ‘예수는 구주’라는 사실이다.
(2)세례자 요한의 예비 사역을 언급하다(행 13:24-26 : 눅 3:15-17과 비교)
바울은 세례자 요한의 예비사역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메시아 약속’이 성취된 사실을 논증한다. 바울은 구주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세례자 요한이 먼저 와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고 진술한다
. 그는 세례자 요한이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며, 자기 뒤에 오시는 이가 있는데 자기는 그의 신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고 진술한다. 바울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메시지를 “구원의 말씀”이라고 정의한다.(행 13:26)
바울은 예비자로서의 세례자 요한의 사역은 ‘회개를 촉구하는 사역’이였다고 강조한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는 자가, 오실 구주이신 예수의 제자가 될 것을 외쳤다. 또한 오실 예수의 사역은 회개하는 자에 대한 용서가 될 것임을 외쳤다.
세례자 요한에 대한 바울의 언급 속에 보이는 그의 신학의 핵심은 예수는 그리스도요, 구원자며 세례자 요한이 신을 풀기도 감당키 어려운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는 것이다.
(3)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언급하다(행 13:26-37)
a.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사실을 지적하며 이것이 구약 예언의 성취임을 언급함. (행 13:26-29)
새로운 호칭 (행 13:26a)
바울은 유대인들에 대해 새로운 명칭을 끌어들이며 그의 설교를 계속 한다: “형제 여러분, 곧 아브라함 족속의 자손들과 여러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여.” 여기서 ‘형제’라는 호칭은 듣는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준다.
이 개념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적용된다. ‘아브라함 족속의 자손’은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후예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을 염두한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여전히 유대교의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들에게 친근감을 주는 호칭으로 적절히 사용한다.
예수의 죽음 언급(행 13:26b-29)
바울은 세례자 요한을 통해 “구원의 말씀”을 보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의 관원들이 이 사람과 안식일 마다 읽는 선지자들의 소리를 알지 못하여 그를 정죄하므로 선지자들의 말을 이루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예수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묘사하는 내용이다.
‘선지자들의 말’이란 메시야가 대적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한 말을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바울의 뜻은 예수를 죽인 자들이 그가 메시야인 사실을 알지 못하므로 그를 죽였다는 것이다. 또 메시야가 죽은 것은 사실은 구약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는 메시야(구원자)라는 사상을 일관되게 견지하며, 예수의 죽음을 예언과 성취의 구도 속에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안식일마다 읽는 선지자들의 소리를 알지 못하여”라는 말은 청중들에게 도전을 주는 말이다. 즉 형식적이며 반복적인 성구 낭독이 그 내용에 대한 정확한 인식임을 항상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 낭독과 무지는 얼마든지 같이 갈 수 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낭독하는 언어의 뜻을 이해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참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은 참된 인식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요한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진술한다 : “믿음은 고차원적 인식이다. 그런데 이 인식은 확신에 속한 것이다.”
[행 13:28-29]에서도 바울은 26, 27절과 동일한 맥락에서 예수의 죽음을 언급한다. 그는 유대인들이 예수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으면서도, 빌라도에게 그를 죽여달라고 한 것은 성경의 예언을 응하게 함이라고 말한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바울이 예언과 성취의 구도 속에서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바울은 설교를 통해 자신의 복음을 제시했다. 그의 설교는 그가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보여준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그의 첫 설교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한 것이다(행 13:16~51). 하지만 이것은 그가 이곳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전에도 이미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행9:20, 22, 27~29).
바울의 초기 설교들이 사도행전에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암시되는 그의 복음 메시지의 최초 양식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다. 예수께 대한 이러한 고백은 그의 설교의 중심적 특징을 이루며 그의 신학의 토대가 되고 있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한 선교설교 외에도 여러 편의 그의 설교를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루스드라에서의 논쟁설교(행 14:8~18), 아테네에서의 논쟁설교(행17:16~34), 밀레도에서 교회 지도자들에게 행한 설교(행 20:17~38),
예루살렘에서의 변증 설교(행 22: 1~21; 23:1~11), 벨릭스 총독 앞에서의 변증설교(행 26:1~32) 등이 그것이다. 행 23:1~11의 내용은 바울이 공회 앞에서 행한 변론을 기록한 것으로, 예루살렘 설교(행22:1~21)의 연장으로 취급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러한 본문들 외에 행 28:17~20의 내용이 종종 바울의 설교로 간주되기도 하나 내용상 설교라기보다는 그가 왜 심문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한 경위 설명에 불과하고, 또 아그립바 왕 앞에서의 변증과 중복되므로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행 28:23 이하에 보면 바울이 꼬박 2년 동안 로마에 머물며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강론하였다. 이 주제는 사실 그의 복음의 중심 테마였다(행 14:22; 19:8; 20:25; 28:23, 31).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춘 바울의 복음 메시지는 예수가 그의 공생애 사역 기간 내내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설교하였던 것과 일치한다. 바울은 예수의 설교의 핵심이 무엇인지 정확히 통찰하고 있었다.
그럼 사도행전에 나타난 8편의 바울의 설교를 분석하면서 그 내용과 강조점을 살피고 그 안에 내포된 그의 신학적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일견해 보기로 하자.
1.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선교설교(행 13:16~52)
1) 설교의 상황과 대상
(1) 설교의 상황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제1차 선교여행의 장도(長途)에 올랐다. 바보(Paphos), 버가(Perga) 등 여러 지역을 지나며 복음을 전파하는 가운데 바울 일행은 비시디아 안디옥(Pisidian Antioch)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바울은 안식일에 자연스럽게 회당에 들어가 앉게 되었다. 이 때 회당장들이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형제들이여, 만일 여러분 중에 백성을 위한 무슨 권면의 말씀이 있으면 말하시오”라고 하였다. 바울 일행에 대한 회당장들의 이러한 호의적 태도는 아직 유대교와 기독교 간에 심각한 갈등이 빚어지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바울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그의 격변적 회심과 활동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의 개종은 유대인의 유대인 사회에서 너무도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그의 일행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당도하기 전에 이미 여러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개종은 유대인들 사이에 큰 소문거리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참조. 행 9:20-21). 그의 개종은 팔레스타인 뿐 아니라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회에서 큰 이슈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회당장들은 바울이 혹시 새로운 교리를 제시한다 할지라도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는 것이 무방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권면의 말씀”에서 “권면”(παρακαληδιζ)은 격려를 뜻한다. 회당장들은 바울이 청중들에게 신앙적 격려의 말을 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바울은 그들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구약 해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계획을 어떻게 성취해 오셨는지 설명함으로써 그들을 격려하고자 하였다.
(2) 설교의 대상
누가는 바울의 설교의 대상을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보도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이방인들로서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을 다른 모든 신들보다 뛰어난 신으로 인정하고 자기들의 신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다신교나 미신숭배에 비해 유대교가 훨씬 낫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유대교가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성전에 신상(神像)을 세우기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들은 부분적으로는 유대 관습을 준수하였으나 할례와 유대교가 요구하는 엄격한 금기 사항들은 지키지는 않았다. 이들은 구약 성경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구약 내용을 말하여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2) 설교의 시작
바울은 간단한 제스처를 사용하며 짧은 도입어와 함께 설교를 시작하였다.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여, 들으십시오.’”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하는 말은 유대인 청중들에게 아주 듣기 좋은 호칭이다.
이 개념은 선택된 민족이라고 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라고 하는 개념 역시 여호와를 자기들의 신으로 받아들인 이방인들에게 듣기 좋은 호칭이다.
이는 설교자가 그들의 종교심을 잘 이해할 뿐 아니라 그들을 선민과 같이 대우한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아마도 설교를 시작할 수 있는 분위기가 이미 마련된 상황이기 때문에(행 13:14-15), 곧바로 제스처를 사용할 수 있었고 짧은 서론과 함께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