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작성 전에 논지부터 쓰는 것이 익숙치 않은 분들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입장을 가진 분들도 있을 것이다. 복음을 확실하게 전하는 방법이라면 무엇이든 좋다고 본다. 어떻든 간에 논지를 명확하게 만드는 훈련은 설교자뿐 아니라 공부하거나 글 쓰는 모든 이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여기서는 논지작성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몇 가지 요소들을 더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덧붙여 논지작성에 대해 일어날 수 있는 오해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설교와 논지는 성령의 도움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사역을 밝히 들어내 청중의 마음에 심어야 한다.
1. 성령과 설교
예배의 모든 순서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도록 짜여져야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분명하게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는 부분은 물론 설교이다. 스스로를 말씀으로 표현하심에서 보듯 하나님은 인간과 의사소통을 하고 싶어하신다. 그러기에 말씀이 바로 선포되기만 한다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개신교의 설교처럼 내용이 명확한 게 없다. 불교의 설법은 언어에 있지 않다. 진리는 언어 이상의 것이다. 그래서 진리를 설명하고자 말을 하고나면 진리의 대한 설명일 뿐 진리는 아닌 것이 된다. 그림자로 변한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주로 비유법으로 말을 던져서 어떤 통찰력으로 깨달음이 오게 한다.
“산은 물이요 물은 산이다.” 분명히 이 말은 개신교에서 알고 사용하는 의사소통법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경지나 상황을 경험한 사람들끼리는 통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이 방법을 기독교에서 사용했다면 아예 애초부터 성경의 내용도 달랐을 것이다. 또한 성경의 중요성도 지금 같지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에서 설교는 내용 그대로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하지만 설교의 단어들은 모두 세상 것들이지 어느 하나 하늘 것은 없다. 영적 세계의 말도 영원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설교는 땅의 것 한계 속에 빠진 것들을 말하고 그치는가? 세상 이야기나 하고 마는 게 기독교의 설교인가?
기독교에서 산이라고 하면 산이고 물이라고 하면 물인 것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 말들은 땅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영원한 것들을 그리는 그림자이다. 그림자는 본체의 모습을 가지고 투사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것은 땅의 말뿐이다. 땅의 말로 하나님과 그의 구원을 말해야 한다.
여기서 설교의 주체가 성령임을 알게 된다. 비록 땅의 말로 세상 것을 가지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감동시키고 마음눈을 열어 하늘 것을 보게 만드신다. 만약 여기서 하나님의 영이 가만히 계시면 설교는 단지 인간의 말로 그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럴 때 설교자의 일은 비참해진다.
이런 말 들어보았을 것이다. “당신이 믿는 기독교가 과연 예수가 전했던 그대로의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사실 한 사람이 한 말을 몇 사람이 같이 들어도 각각 다르게 듣는다. 또한 이렇게 몇 사람을 거쳐서 듣고 나면 전혀 다른 말이 되는 수가 얼마나 많은가? 늘 보고 느끼는 사실이다.
수천의 언어로 수 천 년을 통해 수십억 인간을 거쳐 온 내용이 곧 복음이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얼마나 의미가 왜곡되고 달라졌을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가 예수께서 전해주신 복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가? 이런 식으로 의심을 하다보면 아무 것도 믿을게 없어진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시지만 시작과 중간과 끝을 직접 간섭하신다면 절대로 다른 의미로 전달 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는 성령의 일을 하는 것이 분명해 진다. 설교에서 성령은 함께 일하셔 그 의미가 바로 전달되게 하신다.
여기서 설교자의 긍지가 나온다. 성령의 도구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것이다. 칼빈은 성령의 가장 중요한 일이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라 단언한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 “오직 믿음에 의해서 우리를 복음의 광명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유익을 누리게”하신다.
그러면 아무 설교나 아무렇게나 말해도 무조건 성령은 역사하시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잘 아는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그리스도의 말씀에서만 믿음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성령도 믿음을 일으키신다면 믿음을 얻는 방법은 같다. 곧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사람들은 성령 혼자 무슨 일을 할 것처럼 생각한다. 무조건 강권적으로 역사해 달라 기도한다. 그러나 믿음을 일으킬 그리스도의 말씀은 주지 않는다. 금식하고 철야하고 매달리면 성령이 역사하리라 믿는다. 하지만 천하 모든 것을 다 동원해도 그리스도의 말씀이 없다면 성령은 역사하지 않는다.
성령의 하는 가장 핵심적 일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 듣는 자가 회개하고 중생하고 성화해서 그리스도처럼 되어간다. 성령은 신자와 그리스도를 연합시키는 줄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복이 신자의 것이 되게 한다. 이렇게 성령은 구원이 우리 속에서 효과를 내게 하신다.
기적도 권능도 은사도 모두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서부터 나온다. 그가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모르는데 성령이 역사하시는가? 사도들도 모든 위대한 신앙인들도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었다. 그 지식과 그에 대한 믿음에서 기적도 권능도 은사도 모두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이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설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전해야 한다. 성경은 전체가 그리스도를 설명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설교자도 이 일에 전념해야 한다. 그러면 성령께서도 놀랍게 역사하실 것이다. 성령과 설교자의 일이 겹쳐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의 논지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해야 한다. 그 이유로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성령은 역사하신다. 그래야 심령의 변화가 일어난다. 역으로 성령은 복음의 내용과 함께 일하신다. 인간적인 감동은 근본적인 변화를 줄 수 없다. 달콤한 설교일 뿐 복음이 없다면 성령도 없다.
그 복음은 논지가 선명해 마음에 지워지지 않게 남아 있어야 한다. 복음이 명확한 논지로 나타나야 성령은 강하게 역사하신다. 항상 위대한 변화는 그렇게 일어났다. 역으로 잊혀지지 않고 변화의 능력을 주는 설교를 위해서는 복음을 말하되 논지가 명확해야 한다. 그래야 잊혀지지 않는 설교를 준다.
지금까지 복음과 논지와 성령의 역사와의 관계를 말했다. 이들 중 하나라도 결여되면 설교가 아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할 일은 복음을 선명한 논지로 말하는 것이다. 복음적 논지를 작성하는 법은 계속해서 설명과 훈련이 진행될 것이다. 그것만 확실하면 무엇이 두려울가! 무엇보다 중요한 훈련이다.
아무리 복음을 잘 알아도 그것을 선명한 논지로 쓰고 말할 수 없다면 청중에게 전달할 수 없다. 성령의 역사도 일어나기 어렵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우선 논지 작성에 더 집중해서 연구해 보자. 그러니까 설교를 얼마나 명확하게 그리고 기억되게 하느냐에 우선 관심을 가지자는 것이다.
2. 주제와 논지
설교를 끝낸 뒤에 들은 내용을 반복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라. 대부분 너무 많아서 말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런 경우에는 내용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서로 따로 놀아 연관을 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집중해서 듣자니 서로 연관이 안된다. “늘 듣는 말 같은데” 하면서 청중은 그냥 참고 앉아있다.
그저 막연히 신앙생활 잘하라고 하는 식의 설교를 계속할 수는 없다. 설교는 명중탄이 되어야 한다. 듣는 사람의 심장을 겨냥해 직격탄을 쏟아야 한다. 설교의 내용들은 모두가 한 가지의 논지를 떠받들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복음적인 내용이 전체를 통해서 강하게 그리고 선명하게 부각되는 것이다.
“본문을 강해할 때 단 하나의 지배적 주제를 발전시켜야 한다.” 앨란 스팁스(Alan Stibbs)의 말이다. “주제가 수정처럼 명확하게 포괄적이고 단순한 한 문장으로 표현되기까지 설교준비가 안 된 것이다.” 예일대 설교교수 호웨트(J.H. Jowett)의 말이다. 논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논지는 제목과 그에 대한 보충설명으로 구성된다. 제목은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가?”를 암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하나님의 의, 제자의 길, 산 예배등의 제목이 있다고 치자. 이 제목들만 가지고는 논지가 될 수 없다. 계속해서 말을 해야 한다. 그것도 복음적이고 선명한 보충설명이 첨가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의”를 제목으로 잡는다면 몇 가지의 질문이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가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다음에 “하나님의 의의 유익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의는 어떻게 얻을 것인가?”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삶에 적용할가?” “하나님의 의가 왜 능력이 있는가?” 등등 얼마든지 나온다.
이미 논지와 제목과의 관계는 언급한 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제목과 논지의 관계였다. 이제는 제목에 대한 보충설명을 확대하고 발전해 가면서 더욱 깊고 다양한 논지를 만들어가야 한다. 제목에 대한 질문을 점점 세밀하게 만들어감으로 논지는 다양해진다. 동시에 설교 방향도 그렇게 된다.
“하나님의 의”와 관련된 질문에 대답을 만들어보자. 가장 초보적인 것은 “하나님의 의란 믿는 자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하나님 자신의 의이다.” 여기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있다. 좀 더 나간다면 “하나님의 의는 성령과 함께 받는다.” “하나님의 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당히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다.”
더 해 보자.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의를 믿어야 양심이 참 평안을 얻는다.” “하나님의 의는 신자를 실제로 의롭게 하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의가 공짜이듯 다른 축복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의는 신자를 당당하고 강하게 한다.” 이처럼 얼마든지 계속해서 논지를 잡을 수 있다.
주제, 제목과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은 목적이다. 목회자라면 목회의 목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10년쯤 목회한 뒤에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해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이 그것이다. 설교의 목적은 설교가 마쳐진 다음에 사람들이 이렇게 변화할 것이라는 기대이다. 논지를 잡을 때 생각해 보자.
몇 가지 예를 나열해 보자. “신자들이 하나님의 의를 받았음을 확신하고 당당해 진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 스스로 확인하고 교회를 위해서 사용한다.” “십일조를 확실하게 드린다.” “다른 불신자 하나를 어떤 방법으로건 교회에 데려온다.” “구원의 확신을 삶에 적용시킨다.”
이러한 목적들이 확실한 논지를 이끌어내는데 도움을 준다. 이미 “하나님의 의”에 대한 예를 앞에서 들었다. 이는 앞서 말한 대로 질문과 연관이 되기도 한다. 또한 설교 목적에서 질문들이 나오기도 한다. 어느 것이 먼저이건 한 가지 질문에 확실한 답이 나와야 한다.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가?”
여기까지 하면 질문할 것이다. “그러면 성경 본문에 상관없이 그저 내 하고 싶은 말만 한단 말인가?” “이렇게 되면 강해설교는 안하고 제목설교만 하란 말인가?” 어떤 형태의 설교이건 반드시 논지가 있어야 한다. 설교의 형태가 강해와 제목만 있는 게 아니다. 그 여러 형태는 후에 자세히 나올 것이다.
성경 본문을 잡아 거기 나온 내용만을 말해야 한다는 분도 있다. 그러나 그 본문이 항상 구원의 도 전체를 말하지는 않는다. 어느 본문이건 성경 전체의 흐름에서 보아야 한다. 안 그러면 구원의 도와는 상관이 없이 단편적인 구절만으로 설교할 수도 있다. 강해 설교하는 분들이 범할 수 있는 오류다.
성경해석의 가장 기본적 원리는 어느 본문이건 가장 중요한 구절들에 의해서 해석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바울서신을 비롯한 복음을 잘 설명해주는 구절들이다. 이렇게 말하면 성경학자 중에서 반대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해석 전통에서 나온 원리대로 해야 한다.
전체에 대한 조명이 없이 어떤 구절만을 잡고 그 내용만을 보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해석을 준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에 대한 기초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덧붙여서 개혁자들의 글을 읽어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복음적인 이해를 반드시 가지고 설교 작성에 임해야 한다.
3. 논지에서부터 설교까지
이제 논지를 잡기 전에 인간이 당하는 문제와 그로부터 일어나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성령에게 부탁하면서 명상한다. 답이 나오면 종이 위에 써서 발전시켜본다. 그리고 제목과 논지를 써본다. 거기다가 자꾸 살을 붙여 설교를 만들어간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1단계:
일어나는 질문들: 신자의 삶도 고통을 경험한다. 여기서 신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그냥 참고 말 것인가? 여기서 신자의 삶이 불신자와 무엇이 다른가? 그 유익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여기서 어떤 역할을 하시는가?
가능한 대답들의 발전: 1. 선하고 능하신 하나님이 주도하시니 모든 고통을 감사하면서 참는다. 2.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한다. 3. 하나님이 무엇인가 하시도록 해야 한다. 4.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신자의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게 하신다.
2단계:
본문: 로마서 6:12-13
제목: 하나님의 고향곡
논지: 새피조물로 변화되었음을 믿을 때 삶은 하나님의 음악을 연주한다
1. 중생한 자신을 알 때 아름다운 삶은 시작된다.
2. 신자에게 주어진 권리를 알 때 그 능력은 나온다.
3. 어떤 고통도 극복할 수 있음을 알 때 능력은 계속된다.
3단계:
본문: 로마서 6:12-13
제목: 하나님의 고향곡
논지: 새피조물로 변화되었음을 믿을 때 삶은 하나님의 음악을 연주한다
도입부분: 삶을 통해서 나타나는 반응의 소리들.
1. 중생한 자신을 알 때 아름다운 삶은 시작된다.
옛사람과 새사람의 설명,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
2. 신자로서 주어진 권리를 알 때 이 삶의 능력은 나온다.
오디오시스템과 사용법, 볼쇼이 교향악단, 바울의 삶
3. 고통도 극복할 수 있음을 알 때 이 삶의 능력은 계속된다.
이용사의 예화
4단계:
하나님의 교향곡
(롬 6:12-13)
기도원에서 바람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폭풍의 시절이었던 것이다. 밤마다 바람 소리를 들으며 태고의 숨결을 느꼈다. 외롭지 않았다. 하나님이 연주하는 고향곡이었기 때문이다. 그후 바람소리는 내 마음에 남았다. 마음은 우주처럼 넓게 느껴졌다. 나도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싶었다.
사람은 삶을 통해서 소리를 낸다. 어떤 이들은 늘 신음 소리를 낸다. 어떤 이들은 불평과 탄식을 낸다. 남의 욕만 하는 소리도 있다. 조용한 한숨소리 눈물짓는 소리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하는 소리들. 나쁜 음악이다. 듣는 이들, 그리고 소리 내는 자신을 망하게 한다. 이런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음악을 들었다. 바다와 산과 들을 보면서 나는 음악을 들었다. 동해 바다를 보면서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작은 벌레를 보면서 꽃 한 송이를 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교우들이 연주하고 발표하는 것을 보면서 감격했다. 모두 고향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사랑한다. 자랑스럽다.
나도 아름다운 연주를 하려 노력하였다. 여러 번 실수 했어도 그 소망은 더욱 커지기만 한다. 우리는 삶의 상황을 만날 때마다 말로 행동으로 반응한다. 때때로 몹시 아파도 아름다운 반응을 하고 싶었다. 음악이 마쳐질 때 감동의 박수를 받고 싶었다. 하나님과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내 자신으로부터.
너무도 쉽게 사람들은 연주를 포기한다. 삶이 너무 힘들다 외친다. 외롭다고. 그래서 대충 하려고 한다. 무성의하게 한다. 음악이 만들어지는 마음은 어둡고 슬프기만 하다. 물론 여러가지 상황이 있다. 그렇게 비참하게 살 수 밖에 없는 많은 이유들이 있다. 그래서 그렇게 자기 삶을 무가치하게 한다.
고향곡은 주제가 있다. 그 주제는 끝까지 이어져 나간다. 모든 부분들은 그 주제를 위해서 있다. 때로는 조용하게 때로는 크고 웅장하게 때로는 혼자 때로는 모든 악기가 동원된다. 우리의 삶과 같다. 그래도 주제는 변치 않고 흘러간다. 우리의 주제는 무엇인가? 하나님이요 그의 사랑이요 능력이다.
이제 우리는 새롭게 마음을 가다듬자. 더 웅장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1) 우선 자신이 어떤 존재로 바뀌었는지 이해를 확실히 하자. 하나님은 우리 속에 새로운 악기를 넣어주셨다. 우리를 새롭게 만드신 것이다. 새 악기로 음악을 연주해야 하는데 아직 옛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속에는 두 사람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있다. 옛사람은 옛 악기요 지난 사람이다. 과거 경험이요 약함이다.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중단시키셨다. 전에는 옛사람 곧 죄의 사람뿐이었다. 늘 우울하고 음란하고 좌절했다. 그 사람이 내 삶을 지배할 것이었다. 다른 길은 없었다. 슬픈 노래만 나올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그걸 중단시켰다. 자기 몸으로 내 옛사람의 길을 담당했다. 그 암담한 삶을 대신 살아주셨다. 그 몸에 무서운 형벌을 짊어짐으로 옛사람의 요구를 그쳐 주셨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믿으라. 이 사실을 주장하라. 옛사람은 내게 아무 것도 요구할 것이 없다. 어두운 세계는 내게서 그쳤다.
우리 속에 새사람이 탄생했음을 알라. 하나님의 영으로 새로 만들어진 사람, 내가 참으로 원하면 이 새로운 사람의 삶이 시작된다. 과거의 기억을 버리라. 병과 가난과 실패의 무서운 기억이다. 슬프고 우울했던 시간들이다. 우리는 옛사람이 왕노릇하지 못하게 거부해야 한다. 새 삶을 살아야 한다.
2) 새사람에게 주어진 권리가 무엇인지 알아보라. 새로운 노래를 만들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이다. 그는 우리의 가장 위대한 오디오 시스템이요 위대한 교향악단이다. 그러한 위대한 선물이 우리 속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위대한 능력을 받았다.
친구는 음악광이었다. 그는 어마어마한 오디오 시스템을 구입했다. 그 기계들은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사용법을 몰랐다. 너무 복잡한 영어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번역하는 사람을 불렀다. 그대로 음악을 틀었다. 지금도 기억한다. 그 위대한 음악을 감동어린 선율들을. 사용법을 모르면 짐만된다.
소련 볼쇼이 오페라와 교향악단이 왔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음악은 세종문화회관을 찬란하게 만들었다. 연주 장소가 비싸고 아름다워서 그랬던가? 위대한 연주가 그렇게 했던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이든 간에 속에서 연주하시는 그리스도는 가장 위대한 연주자가 아니던가?
그는 죽음을 깨뜨렸다. 그는 무덤을 향해 소리 질렀다. 그는 폭풍우를 잠잠케 했다. 그는 모든 귀신들을 몰아내고 생명을 구원하였다. 자기를 배반하고 달아난 이들을 끝까지 사랑했다. 버려진 사람들 병들과 가난하고 더러운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장엄한 음악이 울려 나왔다.
그의 종 바울은 파선을 당하고 폭풍우 속에 많은 날을 보냈다. 매도 수없이 맞고 억울함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당했다. 그러나 그 무엇도 그를 감당해 낼 수 없었다. 매맞고 감옥에 갇혀도 노래했다. 옥터는 움직이며 사슬은 끊어졌다. 독사가 물어도 죽지 않았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다.
우리 속에도 같은 권능이 주어졌다. 귀신을 쫒는다. 안보이는 세력을 향해 명령할 수 있다. 병이, 가난이, 슬픔이, 예수 이름으로 명하면 물러갈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큰 것은 언제든지 찬양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 그리스도처럼 사랑할 수 있는 권세도 주어졌다.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도록.
3) 이제 모든 상황에서 연주를 계속하라. 아프건 슬프건 억울하건 무조건 아름답게 만들라. 행복하려면 생각을 행복하게 하라. “화 나면 술을 먹는다. 정신 집중하려고 담배를 핀다. 상황이 나빠 사업이 망했다.” 전혀 맞지 않는 논리이다. 세상에서는 당연한 공식일지 모르지만 자신을 망치는 길이다.
유능한 미용사를 만났다. 무슨 머리든 아름답게 한다. 곱술이건, 강한 머리이건, 약한 머리이건, 숱이 많건 적건, 그 손에서는 아름다움만이 나온다. 어떠한 머리건 거절하지 않는다. 그 손은 교향악을 연주하는 지휘자였다. 불평하지 않았다. 변명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아름다움만 만들었다.
삶을 이렇게 반응하라. 아프더라도, 고통이 오고 손해가 오더라도 그것들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절대로 불평하지 말라. 바이올린의 모든 줄이 다 끊어졌어도 한 줄이라도 있으면 연주를 계속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내게 주어진 일들을 사랑하자. 내게 주어진 사람들을 사랑하자.
하나님은 지혜를 주셨다. 꺼내라.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주셨다. 주장하라. 하나님은 자신의 권능을 주셨다. 사용하라.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주셨다. 사랑하라. 크게 웅장하게 생각하라. 인내하고 끊임없이 성실하게 움직이라. 하나님이 내 몸을 통해 살게 하라. 위대한 음악이 흘러나오게 하라.
반응하라. 아름답게. 우리 속에 모든 악기가 다 들어있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관대함을 보여준다. 미소를 끊임없이 보여준다. 우리는 노래한다. 죄인은 노래하지 않는다. 오로지 악을 쓸 뿐이다. 병자는 찬양하지 않는다. 신음만 한다. 실패자는 남의 욕만 한다. 우리는 노래한다. 찬양한다.
몸을 하나님께 드려 의의 열매를 맺으라. 절대로 한숨 쉬지 말자. 절대로 화내지 말자. 그런다고 스트레스가 없어지지 않는다. 안된다고 생각하지 말자. 언제나 신자에게는 나갈 길이 있다. 살 길이 있다. 하나님을 믿으라. 좋은 음악 연주되기 전에 고요한 기다림도 가지자. 그리고 뜨겁게 연주하자.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들아. 유감없이 연주하라. 절대로 잊지 말라. 나의 삶은 하나님과 함께 연주하는 교향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