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복음이 기준 2024-06-18 07:31:42 read : 846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복음만이 기준이다
“복음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으라.” 말하기는 쉽다. 누구나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실천은 쉽지 않다. 설교자의 사명이 무엇인가? 예배시간에 신자들이 재미있게 듣고 감동을 받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설교자들이 많은 데 그건 아니다. 재미와 감동은 복음을 이해시키는 도구여야지 그게 목적일 수는 없다. 그들이 복음을 깨닫고 권능의 삶을 누리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삶의 모든 분야는 변화를 본다. 처음에는 별 차이가 없을지 모른다. 오히려 약해 보일지 모른다. 율법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게 훨씬 쉽고 강할지 모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복음의 능력은 근본을 변화시킨다.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공급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랑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힘으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계속 그 힘으로 살아야 한다. 인간은 죄 속에 있다. 그러기에 인간은 반드시 한 번 더 태어나야 한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가 사해지고 그로 인한 모든 저주가 그쳤음과,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과 능력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알게 해 주어야 한다. 이 둘은 날마다 시간마다 확인되어야 한다.
그러면 이 복음의 능력이 삶에서 나타나고 경험된다. 그것으로 자신의 의식구조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분명히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하나님 자녀의 생각으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내 몸을 통해서 살아지는 예수의 삶이 된다.
1. 개혁과 변화의 기준
개혁과 회개를 부르짖는 소리에 귀가 아플 정도이다. 신랄하고 적나라해서 얼굴이 뜨거운 경우가 많다. 어떤 때는 교회의 일원이란 사실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목사가 호화생활을 한다. 큰 차를 타고 다닌다. 윤리적 문제가 있다. 월급이 너무 많은데 세금은 안낸다. 권위주의니 교권주의니 명예주의자니 합리주의자니 무섭게 비판된다.
개혁과 회개를 외칠 때마다 나오는 내용이 무엇인가? “교회는 청빈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 독재와 싸워야 한다. 민중을 위해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있어야 한다. 헐벗은 사람을 도와야 한다. 굶주린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다 주고 그들처럼 되어야 한다. 빛이 되어야 한다. 소금이 되어야 한다...” 그 내용도 기준도 끝이 없다.
교회 안에서도 여러 요구사항들이 난무한다. 제직회 시간에 너도나도 일어나서 한 마디씩 한다. 당회를 열면 또 자기 의견을 다 말하고 고집하고 그대로 안 되면 기분이 잡쳐지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 각 부서마다 불평과 불만이 쏟아져 나오고 교회에 문제점이 많다느니 개혁이 되어야 한다느니 목소리를 높인다. 불평불만 많은 사람이 개혁자인가?
이와 함께 나오는 게 성직자 신화이다. 죽을 때까지 단칸방에 온 식구가 살면서 교회에서 마련해준 사택을 거부했다느니, 봉급을 받으면 모두 길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다느니 하는 식의 이야기 말이다. 과연 이것이 훌륭한 목사의 기준인가? 이렇게 가족에게 무책임한 이가 목사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목사는 모두가 부러워하게 모범적 가정을 만들어야 한다.
개혁과 회개의 기준이 무엇인가? 교회는 무조건 가난하면 되는가? 대형교회는 무조건 나쁘고 작은 교회만 좋은가? 목사가 봉고를 타면 훌륭하고 에쿠스를 타면 삯군인가? 아파트가 작고 월급을 조금 받으면 존경받을 목사인가? 재정의 대부분을 구제비로 쓰면 좋은 교회인가? 각자마다 주장하는 게 다르다.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신자와 목회자의 기준을 정할까?
중세 프란시스는 단 한 벌 옷만 입고 있었다. 그의 제자들 곧 프란시스칸도 그랬다. 그래서 그들 있는 곳에는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들은 가난과 결혼한 것이다. 프란시스는 죽는 순간에 자기의 한 벌 옷을 벗겨달라고 부탁했다. 완전히 벌거벗은 거지의 모습으로 주 앞에 서려했던 것이다.
그의 신화는 어디서나 성직자의 모델로 표현한다. 그가 평생 외치고 가르친 교훈은 가난이었다. “가난, 나의 신부.” 그리스도가 신부가 아니었다. 가난이 구원을 주는가? 인간의 덕이 하나님의 복음을 대치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죄사함, 자녀됨보다 앞서는 게 있을 수 있는가!
물론 검소하게 살고 덕을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다. 무조건 가난하고 무조건 남 좋게 하면 되는가? 가난과 선행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중히 여겨 모든 것 앞에 두면 되겠는가! 그러면 인간의 덕이 의가 되어 하나님의 의를 대항한다. 인간적인 덕을 복음 내용보다 열심히 선포할 수 있다.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사실이 복음에서 들어난다.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 이 한 말씀은 다른 종교와 근본적인 차이를 준다. 이처럼 강하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점이 다른 신들과는 다르다. 인간의 의는 아무리 해도 육신이기에 전혀 다른 하늘에서 오는 하나님의 의로서만 구원을 얻는다는 선언이다. 신자로서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훌륭한 목사는 어떤 사람인가? 청렴한 목사, 역사관이 있는 목사, 철학이 있는 목사인가? 아니, 복음을 외치고 복음대로 사는 사람이다. 유능한 목사는 누구인가? 복음을 잘 전하고 복음대로 교회를 이끌어가는 사람이다. 복음을 알고 전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힘으로 살고 있는가? 훌륭한 목사의 기준이다. 복음 전하는 일을 잘 해야 제대로 된 목사이다.
교회가 대형이건 소형이건 그게 가장 중요한 게 아니다. 그 교회가 복음을 잘 증거하고 신자들이 복음대로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목사가 큰 차를 타건 택시를 타건 그것은 건덕의 문제이다. 큰 차를 타건 택시를 타건 영혼구원하는 데 유리하기에 그렇게 해야 한다. 이것이 모든 것의 기준이다.
신자라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얼마나 삶의 기준과 능력으로 삼느냐에 관심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그 뜻을 날마다 연구하여 그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축복을 다 누려야 한다. 그러지 않고 인간적인 그 무엇을 기준으로 설교하고 가르친다면 절대로 영혼의 변화를 볼 수 없을 것이다.
2. 복음의 요소
신자의 삶의 기준이요 원동력인 복음을 살펴보자. 도대체 복음 복음 하는데 그게 뭔가? 여러 번 앞에서 말했다.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이다. 그 지식이 곧 복된 소식이다. 그것이 믿을 내용이다. 그러면 전혀 다른 나 자신의 정체가 나온다.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특별한 존재가 된다.
모세가 왕자요 실력자요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단지 육신적으로 세상적으로 그러했다. 그것으로 성공했다해도 그저 많은 세상의 위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시고 새로운 정체를 주신다. 자기가 누구기에 바로와 싸우겠냐고 하자 그가 얼마나 훌륭한지를 말하지 않으신다. 대신에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다. 이것이 모세의 정체였다. 하나님이 어떤 상황에서나 반드시 함께 하시는 존재였다.
하지만 모세는 그 복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실력 있는 다른 사람을 보내라고 한다. 그러나 차츰 그 복음의 의미를 알고 믿고 적용하면서 위대한 모세의 삶이 나온다. 설교자가 할 일은 하나님이 신자를 어떤 존재로 만들었는지 알고 믿고 적용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설교자 본인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복음을 잘 알고 믿고 적용해야 한다.
신자는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 받는다. 그러면 구원받은 뒤에 성화는 자기 힘으로 하는가? 힘쓰고 애써서 거룩하게 살 때 복을 받는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그리스도의 힘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사랑도 희생도 당당한 삶도 아름다운 삶도 오직 내 안에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을 때 나온다. 자기 힘으로는 구원도 성화도 어떤 영적 삶도 가능하지 않다.
설교자가 알고 적용하고 설교할 복음의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게 해 주신 일이다. 둘째, 그래서 내가 어떤 존재로 바뀌었는지이다. 셋째로 그래서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말해준다. 모두가 하나님의 하신 일을 믿고 의지해야 가능하다. 설교자는 반드시 이러한 내용이 자신의 설교에 포함 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자녀로 삼기 위해 예수의 보혈로 죄를 속해주셨다. 그래서 우리의 수치를 덮고 저주를 제거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우리를 다시 낳아주셔서 본성을 바꾸신다. 옛사람이 죽고 회개한 새사람이 다시 나서 하나님이 주신 새 삶의 능력을 조금씩 맛보며 자라가게 하신다.
복음은 이 일을 하나님이 다 이루시고 우리 속에서 경험되도록 돕고 계심을 알려준다. 신자의 삶은 자기 힘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택함과 속죄함처럼 하나님이 다 행해 주신 것이다. 신자로서의 권능의 삶은 어떤가? 기도 많이 하면 권능을 받는가? 기도 역시 하나님을 의지하고 영의 인도를 받아야 기도이다.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과 자신을 믿어야 가능하다.
설교자는 하나님이 주신 복된 소식의 내용을 전하는 사람이다. 이 소식을 듣고 깨달은 사람은 돌이킬 수밖에 없다. 너무도 비참한 자신에게 너무도 좋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잘 몰라서 듣지 않기 때문에 설교자는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 재미있게 만든다. 하지만 복음의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는 게 임무이다. 설교자라면 확인해 보라. 복음을 말하는지.
3. 복음적 말씀 사역의 중요성
엄청난 구원사업의 핵심을 설교자가 맡았다. 개혁자들은 말씀과 성례의 사역을 바른 교회의 특성으로 설파했다. 그리고 권징 곧 훈련을 통해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도록 만든다. 목사는 이 일의 중심에 서서 이끌어 나가는 직책이다. 그리고 온 교회는 목사의 이 일을 도와야 한다.
교회의 사역을 사람들은 이것저것 많이 말한다. 개혁, 구제, 복지, 연합, 사회정의, 선교 등등 다 중요한 사역임에 틀림없다. 속죄와 자녀됨의 여러 요소들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힘을 주어야 한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 그 사실을 믿고 늘 하나님을 의지해서 무엇이건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인간 냄새만 풍길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이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뵙고 모든 복을 받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교회에는 집회 때마다 참석하며 기도하고 말씀 읽는 일을 게을리 하는 신자가 너무 많다. 그래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서로 권면하며 이 거룩한 일에 열심을 내도록 서로 권면해야 한다.
집회에 빈번히 빠지는 사람, 신앙성장을 위해 교인들에게 주는 과제를 도무지 안하는 사람, 세상적으로 부한데도 헌금에 인색한 사람, 지옥에 떨어지는 인생이 허다한데 전도할 책임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 도덕적으로 거리낌이 되는 일을 행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로 교회가 채워져 있다. 설교자는 이것들을 고치되 억지로가 아니라 믿음에서 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정상적인 교회생활에는 거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이상한 자극을 찾아서 헤매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감정적인 부흥회를 따라다니고 자신은 은혜를 많이 받은 것으로 착각하여 교회의 지도자들을 비판한다. 그러나 칼빈은 분명히 지적한다. 자녀됨의 증거는 순종이요 배우려는 겸손한 자세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 받는다면 당연히 그리하리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치 않은 일을 하나씩 고침으로 자녀로 자라간다. 성령은 그 일을 위서 힘을 공급한다.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한 일들은 즉각적으로 사과하고 돌이키기에 힘씀으로 구원이 이루어져 간다. 서로 죄를 용서함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를 실천한다. 모든 시비와 원망을 없애고 감사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선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가 보여야 한다. 그래서 하늘나라와 신자 본인들의 기쁨이 되는 일로 차고 넘치는 것이다. 외형적인 악을 행하지 않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고 행해야 할 선을 행치 않는 것도 죄를 범하는 것이다. 봉사하고 헌금, 구제, 전도하는 일이 그것이다. 복음은 이러한 일을 하도록 새사람 되었음 말해준다.
이 모든 일들은 억지로 상받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자기 육신의 힘이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자신 속에 계신 성령의 능력을 앎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물론 아직 남은 육의 생각이 자꾸만 그것을 방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선을 행할 권세를 받았기 때문이다.
말씀 사역은 복음의 이 모든 내용을 하나님 힘으로 이행하게 만든다. 그저 예배에서 설교 잘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된다. 말씀 사역은 교회의 전체방향, 신자의 훈련을 포함한다. 교회생활 전체를 복음의 힘으로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복음적인 말씀 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4. 복음적 논지훈련
설교를 작성하다 보면 하나님의 복음보다 다른 것들을 논지로 삼는 경우가 많다.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을 기준으로 삼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것을 근거로 회개, 개혁, 선교, 사회정의의 방법이 나와야 한다. 신자라면 정치, 경제, 사회등 삶의 제 분야가 다 하나님의 복음을 기준으로 삼아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학생들의 논지를 보자.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자.” “어려울 때 일수록 힘을 내자.” “가난한 이웃을 돕자.” “기도해서 능력을 받자.” “삶의 목표를 바로 세우자.” 얼마든지 복음과는 거리가 먼 논지를 볼 수 있다. 아무리 고상한 말을 해도 예수가 해 주신 일을 힘입지 않으면 자기 힘으로 행해야 할 것이다.
다시 여기 몇 개의 학생들의 논지를 살펴보자. “예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자.” “치료자이신 예수믿고 건강하게 살자.”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가자.” “하나님은 우리를 이기게 하신다.” 이 정도라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대단히 훌륭하다. 앞에 것들보다 복음에 많이 접근하였다.
모두가 긍정적이고 신앙적인 논지이다. 예수의 이름도 들어가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내용이 삶에 적용되려면 그 사이에 들어갈 구체적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하신 일 이다. 그것이 없이 그냥 막연히 하나님 또는 예수님이 도와주시니 된다는 식으로 할 수 있을까?
그러면 하나님이나 예수대신 부처님이나 조상신의 이름을 넣어보라. “부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자.” “치료자이신 부처님을 믿고 건강하게 살자.” “부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가자.” “부처님은 우리를 이기게 하신다.” 절에서 이 설교를 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기독교의 설교인가?
절에서 이 설교를 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수양과 덕과 노력에 의해서 얻으라는 말이다. 자신의 힘으로 한다면 부처나 예수나 아무 차이가 없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과 힘으로 복을 누리려면 절대적으로 복음의 내용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이미 완성하신 일들을 선물로 받아야 된다.
예수 안에 있는 안식, 치료, 능력 등은 반드시 예수가 이미 행하셨음을 알고 믿음으로 얻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반드시 복된 소식을 아는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믿음이란 그 내용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것이 삶의 원동력이 된다면 정말로 믿음의 사람이 된다.
그것으로 앞의 논지를 손질해 보자. “평안 자체이신 그리스도가 자기 속에 계심을 아는 자는 항상 안식한다.” “예수께서 채찍을 맞아 병을 담당했으니 병의 억압에서 자유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는 그의 능력도 받은 자다.” “그리스도의 승리를 우리도 누리자.” 여기 그리스도가 하신 일과 우리의 할 일이 나타난다. 믿고 일어나는 것이다.
얼핏 보면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힘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계속 그렇게 듣게 된다면 점점 주의 힘으로 살고 자기 자랑은 줄어들어간다. 앞의 학생들의 논지들이 잘못된 게 아니다. 좀 더 명확하게 하여 그리스도가 해주신 일을 누리게 만들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