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설교의 형태가 있다. 자꾸 하다보면 그것만 계속하게 된다. 그럴경우 청중이 고정적이라면 다음에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자기가 할 말을 다 알고 있는 청중을 대하는 것처럼 설교자로서 곤혹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여러 형태를 연구해야 한다.
원리, 증명, 적용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어떤 신앙적 원리를 소개하면서 설명해준다. 원리는 처음부터 적용시킬 것을 계획하면서 소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전능의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다”는 원리를 말한다. 그러면 신자가 고통하는 현장이 어느 곳이건 어떤 상황이건 너무도 실존적으로 함께 하시다는 적용을 전재로 한다.
원리를 말했으면 그것의 올바름 또는 유익함을 증명해준다. 증명의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예를 들거나 알기 쉬운 논리도 곁들여 복음적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증명이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게 된다.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으니 무조건 하라”보다는 이해를 시키는 것이 좋다.
마지막으로 그 원리를 삶에 적용시킨다. 제일 쉬운 방법은 적합한 예화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을 응용시켜 여러 면에서 듣는 사람들이 실생활에 적용시킬 수 있도록 말해준다. 앞의 “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다”는 원리가 확신의 근거가 되도록 적용시켜주면 설교는 아름답게 마쳐진다.
이 방법은 내용을 잘 이해시키고 삶에 적용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이점이 있다. 몇 번 해보면 아주 잘 이용할 수 있게 훈련이 된다. 그러나 잘못하면 논리적으로 딱딱하게 설교를 몰고 갈 위험도 있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쉽게 그리고 재미있게 원리를 증명해 가야할 것이다. 특히 원리를 말하는 앞부분이 그래야 할 것이다.
여기 요지만 몇 예를 보여준다. 그리고 실제로 설교 하나를 작성해 보겠다. 여기 것을 보고 더 쉽게 하도록 노력하자.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원리는 성경에서 찾은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증명은 그것의 내용이 이해되도록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적용을 통해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어야 한다.
<요지 예 1>
제목: “분복” (전 5:18)
원리: 수고 안하고 사는 게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수고함이 행복이다
증명: 하나님 없이 하는 수고는 생명 없는 것이다. 굉장한 돈을 벌고 권력을 얻게 해도 그 속에는 생명이 없다. 그러니 무슨 행복이 있겠는가. 사람이 불행한 것은 물질이나 애인이 없어서가 아니다. 행복 되신 하나님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
적용: 신자도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경우가 많다. 그 순간들은 거의 불신자와 같은 삶이다. 하나님을 모신 사람들은 매사에 그분과 함께 함을 인식해야 한다. 무슨 일을 하던 행복 자체이신 하나님을 느끼라. 그러면 빈부, 강약, 노소를 초월해서 주어진 환경 아래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삶의 힘과 의미가 영적으로 주어진다.
<요지 예 2>
제목: “참된 나” (고후 5:17)
원리: 참된 나는 내가 경험하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보시는 나다. 그러므로 복음의 말씀으로 자신을 보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증명: 내가 보는 나는 언제나 나를 기준으로 삼는다. 그것은 정확한 내 모습을 볼 수 없게 한다. 죄에 물든 내 경험은 왜곡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변함없이 정확하다. 그것은 그의 말씀으로 표현된다. 거기에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
적용: 경험이 부정적인 것을 말하더라도 복음의 말씀이 말하는 자신을 주장해야 한다. 죄의식에 대해서는 의인됨을, 약함은 강함으로, 미움은 사랑으로, 불안은 평안으로, 가난은 그리스도의 부요함으로 대치되었음을 주장하라.
<설교작성>
제목: “성령을 소멸치 말며...” (데전 5:19-24)
성령의 임재를 거의 경험 못하는 신자들이 많다. 성령이 소멸된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러한 신자들이 어떻게 성령의 뜨거움을 경험할 것인가? 기도원에 가고 이상한 집회에 열심히 가야 하는가? 보통 사람들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 못하는가?
1단계
1. 원리: 성령의 도움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함께 한다.
2. 증명: 성령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효과를 발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3. 적용: 성령을 체험하려면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행동하라.
2단계
1. 원리: 성령은 절대로 자의로 말하지 않으신다. 반드시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일하신다. 실생활에서 성령을 무시하면 성령이 소멸된 것처럼 느껴진다. 성령을 소멸하지 않으려면 성령이 나를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 그를 인식하고 복종하라.
2. 증명: 성령에게 복종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도록 하는 분이다. 그러려면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주어진 은혜가 내게 효과를 발하게 된다.
3. 적용: 말씀대로 행동하라. 베드로는 말씀을 의지하고 그물을 내렸다. 중풍병자는 상들고 가라는 말씀대로 일어났다.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성령의 도움을 얻는다. 머리로만 믿거나 행동을 안 한다면 성령은 할 일이 없어진다.
<실제설교>
성령을 소멸치 말며
데전 5:19-24
“성령을 소멸치 말라!” 대단한 도전의 말씀이다. 얼마나 신자들이 성령과 관계가 없이 살면 그러겠는가? 오늘 본문은 사도가 데살로니가 지역의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끝부분이다. 거기 한 마디 결론적으로 덧붙인 것이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 도대체 무슨 말인가? 또한 성령을 소멸치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성령이 곧 구원의 증거이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성령이 안에 안 계신다면 신자가 아니다. 신자라면 반드시 성령이 있다. 그런데 그 성령이 소멸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한 번 받은 성령이 사라진다는 것인가? 그러면 구원의 증거도 없어지고 마는가?
I. 원리
신자는 성령의 힘으로 살아야 한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안 그러면 그냥 육신만 움직인다. 성령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으면 소멸된다는 것이다. 몰라서 무시하고 무관심하니 성령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일상생활은 아니 삶 전체는 성령의 인도와는 전혀 상관 이 되고 만다.
성령이 누구신가? 성령은 신자의 속에서 구원을 이루도록 파견되신 하나님의 영이다. 보혜사라고 불린다. 그 뜻은 위로자, 보호자, 협조자, 상담자, 변호자등 다양하다. 성령이 그런 일들을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성령의 위로를 받아 보았는가? 상담을 받아 보았는가? 그의 능력이 밀어주는 경험을 해 보았는가?
없다면 분명히 문제이다. 예수 믿어도 성령의 도움이 없다. 세상에 신자들이 많지만 성령을 느끼고 의지하며 그 힘으로 사는 신자가 얼마나 되는가? 또한 그러고 싶어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른다. 성령은 구원의 보증으로 보내졌다. 하나님의 생명과 풍성한 삶을 신자에게 주도록 보내진 분이다. 그 넘치는 힘을 공급받아 사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상황은 뻔하다. 성령이 소멸되고 만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상황인가? 성령은의 도움 없이 순전히 자기 힘으로 살아간다. 자신은 매우 열심을 내지만 열매는 별로 아름답지 않다. 열정적으로 하면 할수록 말도 많고 성질도 나타난다. 성령 충만이 아니라 자기 인성이 충만해진다. 이게 성령 소멸의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 자주 경험되는가? 성령의 인도함 받는 방법을 배우라. 대체로 신앙의 문제는 무지에서 나온다. 모르니까 남의 이야기 듣고 배운다. 그러나 그런 통속적인 소리들은 오히려 신앙에 해가 되는 게 더 많다. 오래 믿은 사람들이 더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구원의 도를 잘 익혀야 한다.
본문을 보라.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당연히 할 일이다. 그러면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신다고 한다. 얼핏 보면 순전히 율법이다. 선행을 하고 악행은 모양부터 버리란다. 누구 힘으로? 물론 성령의 힘으로다. 그러나 그 비결은 바로 앞의 문장에서 나온다.
“예언을 멸시치 말라”는 것이다. 이 말씀이나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말씀은 거의 같다. 왜 그런가? 성령의 하는 일을 알면 간단히 이해가 된다. 성령의 하는 일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 게 아니다. 무언가 눈빛이나 태도가 다른 게 아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을 자꾸만 보통 사람이 아닌 어떤 모습에서 찾으려 하면 안된다.
성령충만한 사람의 특징은 내면적인 것이다. 이상한 말을 하고 죄를 다 들여다보고 장래 일에 대해서 점을 쳐주는 사람이 성령충만한 건 아니다. 기도원에 자주 간다던지 일도 않고 기도만 하는 것이 성령충만의 증거가 아니다. 예수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지극히 겸손하고 온유한 보통 사람의 모습을 가졌다. 성령충만은 성령에게 순종하는 상태이다.
II. 증명
성령은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 신자 속에서 실제적인 것이 되게 한다. 성령은 이상한 일을 하시는 게 아니다. 그의 가르침과 그의 의사소통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것을 그대로 한다. 그리스도는 성령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신다고 분명히 못 박았다.(요 16:13)
한걸음 더 나아가 성령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일하신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고 하시지 않는가. 그러므로 성령충만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하는 사람이요 성령은 그 일을 강하게 도우시는 분이다.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23)고 하신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일어나게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려고 나서면 성령은 도우신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위로하시고 상담하신다. 말씀을 행할 힘을 더하고 말씀에 대한 책임을 지시고 그대로 행하는 이들을 보호하신다. 그래서 성령의 하는 일을 하시게 하라. 그러면 성령은 소멸되지 않는다. 오히려 내 속에서 충만해 지실 것이다.
영적인 사람이 되고 싶은가? 신비한 인도를 받고 하늘의 지혜를 가지고 싶은가? 성령의 보호를 받고 그의 위로와 도움을 받고 싶은가?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 곧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늘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묵상하라. 그가 복된 사람이다. 그가 바로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이 번영할 것이다.
말씀도 모르고 복음의 기초도 모르는데 성령이 역사할 것 같은가? 율법적인 사고로 채워지고 미신적인 생각으로 충만한데 어떤 영이 역사하겠는가? 성령이 아니라 악령이 역사할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열심은 내는데 점점 더 얼굴은 굳어지고 사람이 사나워지고 초조해 하는가? 성령역사가 아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했다.(고후 3:17)
말씀을 듣고 마음에 품고 있으면 깨달음과 행할 능력이 나온다. 평안의 말씀은 성령의 평안을, 사랑의 말씀은 성령의 사랑을 일으킨다. 성령에게 나를 위해 나와 함께 일할 기회를 드리려면 들은 대로 행동하라. 그래야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은 내 속에서 자기 위치를 찾으신다. 성령은 이 말씀이 감동되고 능력을 발하게 도우신다.
“누구든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여기서 지혜로운 사람,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말씀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말씀을 알지만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그 말씀이 하나님의 것인 줄 안다. 그리고 그대로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몸소 행하지는 않는다. 그 말씀보다는 상황을 경험을 더 의지한다. 그러기에 행할 마음도 능력도 없다.
III. 적용
오래전 들은 예화이다. 어느 시골 교회에 한 노인 목사님이 부임하셨다. 목사님은 부임한 날 사랑에 관한 설교를 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자기 아들을 보내서 죄를 담당하셨다. 그리고 아들의 영을 통해 그 사랑을 믿는 사람들에게 넣어주셨다.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 사랑을 가졌다. 그러니 믿고 사랑하라.” 이런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사랑에 관한 이 설교를 좋아했다.
다음 주에 무슨 설교를 할까 사람들은 기다렸다. 목사님은 설교를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한참 듣다보니 지난 주의 것하고 똑같지 않은가! 뭐가 잘못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참았다. 그리고 예배가 마쳐진 뒤에 한 성도가 말했다. “목사님 이번 주 설교는 지난 주 것하고 똑 같네요. 은혜 받았습니다.”
“다음 주에는 다른 걸 하시겠지.” 다음 주가 되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또 사랑하라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서로들 얼굴을 보면서 웃었다. 또 그런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 년이 계속 되었다. 사람들은 화가 났다. 같은 소리만 하니 이렇게 우롱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교인들 모두가 불평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목사님에게 다른 곳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목사는 아무 말도 없이 짐을 쌌다. 그래서 고별 예배를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솔직히 목사가 그렇게 금세 떠날 줄 몰랐다. 약간은 양심에 가책을 느끼며 마지막 설교를 경청해 주었다. 목사는 강대에 올라갔다. 무엇이 마지막 설교일까? “사랑하라”였다. 저 노인이 왜 저래야 하는가?
이상한 일이었다. 눈물이 자꾸 나는 것이다. 오죽하면 가는 날까지 저러랴. 얼마나 우리가 사랑을 안 하면 저러랴. 이러다보니 교회당이 울음 바다가 되었다. 예배가 끝나자 사람들을 달려들었다. “목사님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이제 알았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데 안 했습니다. 용서하시고 가지 마십시오. 계속 사랑하라는 설교만 해주십시오. 그것만 듣겠습니다.”
그리하여 목사는 남게 되었다. 다음 주일이 되었다. 사람들은 사랑하라는 설교를 들으러 모였다. 설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십일조 하라”는 주제였다. 사랑하라는 설교는 더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깨달았고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믿으면 드리라는 한 것이다. 바로 다음 주일 전교인이 십일조를 드렸다.
만약 안하면 일년내내 십일조하라는 설교만 나올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주에는 어떤 설교가 나왔을까? 교회봉사하라는 설교가 주어졌다. 그러자 모두들 봉사를 자원했다. 주일학교, 성가대에서 시작해서 청소하는 데까지 모두가 나섰다. 이렇게 해서 이 교회는 말씀대로 행동하는 교회가 되었다. 성령의 역사는 나타나기 시작했다. 말씀대로 삶의 질서가 잡히고 성장되었다.
신자들은 이제 성경말씀대로 행동하는 훈련을 하였다. 병든 자가 있으면 장로들을 모셔다가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였다.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고 병자를 고쳤다. 쑥tm러워도 전도했고 병자를 보면 서로 손 얹고 기도했다. 이러다가 망신당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주의 명령에 순종했다. 주는 말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말을 지킬 것이다.”
베드로는 말씀을 의지하고 그물을 던졌다. 밤새도록 한 마리도 얻지 못했었다. 그러나 두 배에 가득 채워지게 잡는다. 그뿐 아니다. 그는 주의 발 앞에 엎드려 그의 제자가 된다. 중풍병자도 앉은뱅이도 소경도 다 주의 말씀을 의지하고 굳은 몸을 폈다. 주의 말씀을 받고 움직이는 자는 성령의 도움을 받는다. 성령은 일할 곳이 많을수록 더욱 풍성히 역사하신다. 성령은 할 일이 없을 때 소멸되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신자와 함께 하신다. 성령을 경험하고 싶으면 말씀대로 행동하라. 그것이 온전한 믿음이다. 행동하기 이전에는 그냥 나 자신이었다. 그러나 행동한 다음에는 성령의 사람으로 바뀐다. 모든 신앙의 선배들이 그랬다. 신비한 체험을 원하는가? 기가 막힌 간증을 원하는가? 말씀대로 행동해 보라. 비판과 부정적인 말을 그치고 몸을 일으키라.
이 말씀에 힘을 다해 반응해 보라. 성령이 도우신다. 모이기를 힘쓰라. 모여서 기도하라. 찬송하라. 무엇보다도 설교 들을 때 집중하기 바란다. 맘에 안 들어도 현재 그것 밖에 말씀으로는 들을게 없기 때문이다. 집중하면 은혜 받는다. 집중하고 들으라. 그 말씀이 마음에 있을 때 성령도 함께 일하신다. 감동에 따라 행동하라.
예언을 멸시치 말라. 다른 말로 하자면 말씀을 멸시치 말라. 무시하지 말라. 무관심하지도 말라. 나는 아직 믿음이 없어서 해당 안 된다고 하지도 말라. 그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일이다. 말씀을 마음에 품고 민감하게 반응하라. 매사에 말씀을 적용하라. 말씀을 따라서 움직이라. 그렇게 함으로 성령이 내 속에서 충만하시게 하라. 그러면 삶 전체가 영적으로 변한다. 모든 것이 풍성하고 기쁨과 감격이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