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마음 쓰기
자신의 건강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느냐”보다도 “어떻게 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건강 비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제대로 마음 쓰기”이다.
첫째로, 심신을 조화시키는 훈련이 필요하다. 식사할 때 밥을 먹는 게 아니라 ‘마음을 먹는 기분’으로 “밥 먹는 행위에 마음이 따라 다니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옛 어른들이 “밥 먹을 때 떠들지 말라”고 꾸중하는 것은 밥알이 튈까봐 그러는 것이 아니다. 정신을 집중하고 밥을 먹는 것이 몸에 더 좋다는 가르침이었다. 운동도 몸과 마음을 조화시켜 해야 한다.
운동하는 동안에 딴 생각을 하거나 옆에 있는 사람과 낄낄대면서 하는 것보다는, 모든 동작에 마음이 따라 다니는 것처럼 운동을 한다면 더욱 효율적인 운동이 될 수 있다. 호흡하는 것도 정신을 집중하여 “공기를 들이마시는 게 아니라 마음을 마시는 기분”으로 숨과 마음을 일치시키면 가장 유익한 호흡이 될 수 있다.
잠자는 것도 잡념을 없애고 마음을 가라앉힌 상태로 잠을 청해야만 숙면을 취할 수 있다. “그런 것은 도 닦는 도인들이나 할 일이 아니냐”고 항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냥 기쁜 마음으로 밥 먹고, 기분 좋게 운동하고, 마음 가다듬어 숨쉬고, 쾌적하게 잠자면 점차 그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항시 긍정적인 사고를 유지해야 한다. 안경을 왜 쓰느냐 하는 질문에 “잘 안 보여서”라고 하는 것은 부정적인 사고이며, “더 잘 보려고”는 긍정적인 사고이다. 약의 성분이 하나도 안 섞인 가짜 약을 먹고도 진짜 낫는 효과를 위약효과(placebo)라고 하는데, 이러한 효과는 “이 약을 먹으면 반드시 나을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나타난다.
우리의 몸은 마음먹기에 따라 이리로도 변하고 저리로도 변한다. 긍정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체내에 긍정적인 호르몬이 분비되고 부정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는 부정적인 호르몬이 분비된다. 긍정적인 호르몬은 우리의 기분을 상쾌하고 만들고, 통증도 완화시켜 주며, 스트레스의 수준도 줄여 주고, 건강 상태를 호전시키며, 사무의 수행 능력도 활발하게 해 준다.
반대로 부정적인 호르몬은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며, 통증도 더 악화시키고, 스트레스도 더 악화시키며, 건강 상태도 나빠지고, 사무의 수행 능력도 떨어지게 한다. 위약효과는 평범함 속에 숨어 있는 기적이다. 우리 몸속에 내재한 자연 치유력의 표현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현상이요 신이 인간에게 내린 위대한 선물이다.
셋째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 마음에 들어있는 것이 없어서 텅텅 비어 있어야 마음이 제자리를 찾게 된다. 텅 빈 마음 자체가 마음의 제자리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딴 것이 들어 있으면 마음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게 된다. 욕심과 원한이 들어 있으면 마음이 옆으로 밀려 삐뚤어지게 된다. “…을 해 주십시오” “…을 주십시요” 하는 기도는 마음을 비우지 못한 기도이다. 비우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더 집어넣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마음을 비우는 기도는 “…을 맡깁니다” “…을 감사합니다” 하는 것으로 족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을 주십시요” 하는 기도로는 건강을 얻을 수 없으나, 진실로 감사하며 모든 것을 완전히 맡기는 참된 기도는 건강과 직결된다는 사실이다.
넷째로, 스트레스 관리를 잘 하여야 한다. 스트레스에는 약이 되는 스트레스와 독이 되는 스트레스가 있다. 약간의 스트레스는 오히려 정신을 차리게 해주고 생기마저 더 불어 넣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스트레스의 정도가 너무 지나치면 병이 된다. 스트레스는 피할 수도 없거니와 피해서도 안 된다.
스트레스가 지나치게 쌓이지 않도록 미리 예방 하거나, 일단 생긴 스트레스를 잘 관리함으로써 몸에 해롭지 않은 수준으로 해소해야 할 것이다. 해야 할 일을 미리 해 놓는다거나, 약속 장소에 미리 가 있거나 하는 행위가 스트레스 예방의 한 예이다.
스트레스는 처리하고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다. 스트레스를 먹고 소화시키는 훈련을 해야 한다. 스트레스에는 일차적 스트레스와 이차적 스트레스가 있다. 예를 들면 갑자기 뱀이 나타났을 때 "뱀이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는 누구에게나 똑 같은 일차적 스트레스인 셈이다. 그러나 그 뱀이 나타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게 마련이고, 바로 이 받아들이는 정도가 각자의 이차적 스트레스인 셈이다.
뱀을 평소에 무서워하던 사람은 "뭐, 뱀,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도망갈 것이고, 뱀이 몸에 좋다고 잡아먹기를 즐기는 사람은 "뭐, 뱀이 어디 있어"하고 희색이 만연해 달려 들 것이다. 어떠한 스트레스이건 나에게는 도움이 되는 것이라는 긍정적인 사고(Positive thinking)는 엄청 큰 스트레스도 눈 녹듯 스르르 녹여 버릴 수가 있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 나에게 생겨난 자체가 나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일 때문에 내가 얼마나 불쾌해 하고, 화가 나고, 분하고, 우울해지고, 슬퍼지고, 놀라고, 두렵고 하는 기분에 따라 나의 몸을 해치는 정도가 정해지는 것이다. 비록 어떠한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그것 때문에 “속상해” 하지 않는다면 내 건강이 해를 받지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하면 “속상하면” 속(내장)이 상한다. 따라서 속상하지 않으면 속이 상하지 않는다.
전세일(포천중문의대 대체의학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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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공금횡령혐의 전면 부인
돈을 강탈하려는 고소인들의 수작이었다?!
서울 동부지원 1심에서 징역 3년, 벌금 750만원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 받은 김홍도 목사(금란교회 시무)는 이에 상소. 6일 오전 10시 서울고등법원 302호실에서 1차 재판을 가졌다.
이날 재판장에 나타난 김홍도 목사는 검은 양복 차림이었으며 의연한 자세로 담당 변호인과 검사측의 심문에 응했다.
먼저 변호인은 금번 사건의 전체적인 경위를 설명하며 지난 번 동부지원에서 내린 1심 판결의 오점을 지적하고, 약 20항에 걸친 조항을 바탕으로 피고인 상소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특히 변호인은 "동부지원서 내린 판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건을 부분적이고, 편파적인 시각으로만 판단했다는 데에 기인한다"며 "금란교회의 실정과 현 교단법에 기록된 교리와 장정을 비춰볼 때 횡령 등의 혐의는 사건을 개괄적으로 통찰하지 못한 채 내린 판결이었다"고 반박했다.
한편 그는 김홍도 목사는 공금의 입·출금과 관련, "금란교회 교인들의 뜻을 거스리는 행동을 한 적이 없다"며 "기획위원회와 실행위원회를 거쳐 공정하게 공금을 운영했다"고 재차 강조했다.
또한 "현재 고소인측은 김홍도 목사로부터 돈을 강탈해 내기 위해 고소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라며 고소인측을 비난하기도 했다.
한편, 김홍도 목사는 1심 판결 이후 자신의 명의로 되어있는 모든 재산을 교회의 명의로 이전하고, 명의와 관련돼 문제 삼았던(공금횡령,세습논란) 지난 번 판결에 응수할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이에 담당 판사는 "피고 김홍도 목사의 명의로 되어있는 재산이 없는가? 판결 이후에 이와 같은 결정(교회로 명의 이전)을 내리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를 묻기도 했다.
김홍도 목사는 "교회를 건축하거나 공금을 지출하는 것에 대한 교회의 관례(토지소유 명의-담임목사 명의)가 있는데 금번 지방 법원의 판결은 이를 무시한 처사였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편, 검사는 "김홍도 목사는 개인의 비리에 대해 초점을 맞춘 수사를 빈번히 교회를 초점으로 수사의 방향성을 흐트러 놓고 있다"며 "교회와 당신이 하나인 줄 생각하느냐"고 지적하기도 했다.
향후 피고인 김홍도 목사는 특별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횡령) 혐의로 실형 선고를 받은 것에 대해 상소 재판을 지속 벌일 것이며 특히 내달 5일 오후 4시 2차 재판의 증인들을 체택. 본격적인 대응에 나설 방침이다.
김진한 기자 jhkim@ch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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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설교'하지말아야
주명수 변호사, 목회자가 변해야…'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하나님의 법'
▲ 주명수 변호사는 교회법이 평신도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면 객관성과 공정성이 담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민주적 정관에 재산 부분 명시하자"
주명수 변호사(법무법인 CHL)는 교회 분쟁의 원인을 '목회자와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간의 다툼'으로 정리했다. 주 변호사는 목회자들의 영성이 떨어질 때 교인들이 목회자를 불신하게된다고 설명한다.
교인들이 목회자를 재정이나 기타 문제로 불신하게 되고 문제제기를 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평신도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것은 한국교회 현실에서 보면 당연한 일. 오히려 주의 종에게 대적하면 후손까지 저주받게 된다는 무시무시한 설교를 하게 된다.
소위 말하는 이 '표적설교'는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그 설교를 듣는 당사자는 느낀다는 것이 주 변호사의 생각. 이런 '표적설교'의 당사자는 이 후부터 목회자와 갈등이 생기게 되고 연판장을 돌리는 순간부터 교회에는 갭이 생기게 된다.
이 순간부터 교회 분쟁이 시작된다. 목회자가 평신도 지도자들을 고소하기도 하고 치리라는 명분으로 반대파를 제명하는 등 극한 상황에 도달하게 된다. 이에 서로 예배방해금지가처분 소송 등을 진행하며 한 지붕 안에서 두 개의 교회가 존재하는 상황까지 오게된다. 여기까지가 주 변호사가 말하는 일반적인 교회 분쟁의 양상이다.
교회 재산에 관한 우리나라의 판례는 "교회 분열 당시의 총유로 한다"는 것이 주 변호사의 설명. 주 변호사는 재산 분쟁의 경우 최선책은 '양 측이 화해해서 합치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고 있다. 양 측 다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사회법에서도 양 측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차선책은 교회의 재산 분쟁이 생길 경우 인원이 많은 쪽이 인원이 적은 쪽을 개척시켜 주는 것. 단, 인원이 적은 쪽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 같은 제안을 따르지 않아 결국 분쟁의 길을 걷는다.
사회법은 하나님 법 아닌가?
흔히 교회의 분쟁이 생길 경우 대다수 목회자들은 교회법과 사회법은 다르다는 이유를 내세운다. 그러나 주 변호사는 이런 이유에 대해 "사회법은 하나님의 법이 아닌가?"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주 변호사는 "교회 안에서 주장하는 규칙과 법 중에도 하나님의 법이 아닌 것이 있듯이 사회법이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한다면 하나님의 법이다"고 잘라 말한다. 주 변호사는 이어 "교회 안의 법 기관이 사회법을 능가한다면 굳이 교인들이 사회법으로 갈 필요가 없지 않느냐"며 "되도록 사회법으로 안 가는 것이 좋지만 현재 교회법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공정한 재판국 구성으로 교인들 불만 잠재워야
주 변호사는 현재 각 교단이 시행하고 있는 법 중 징계를 처리하는 절차가 가장 미숙하다고 말한다. 그는 징계 당사자를 출석시키지 않고 재판을 진행한다든지 재판국의 공정한 구성이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교인들의 교단의 재판을 불신하는 결과가 가져온다고 보고 있다.
주 변호사는 이의 대안으로 범 교단 차원에서 분쟁 조정기구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최대한 객관적인 인물들로 구성, 이 조정기구를 통한 결정에는 당사자들이 승복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물론 객관성과 공정성이 담보되는 것은 당연하다.
민주적 정관에 교회 재산 부분 명시하자
그는 각 교회의 정관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최근 많은 교회에서 채택하고 있는 민주적 정관에 교회 재산 부분을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 변호사는 "많은 교인들이 은혜가 안된다는 이유로 재산 부분을 말하기를 꺼려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재산 관계 부분을 정관안에 포함시킬 것을 주문한다.
주 변호사는 앞으로 교회 분쟁은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목회자들이 지금과 같이 독단적인 방식으로 목회 한다면 교회 분쟁은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승규 hanseij@newsnjoy.co.kr (c)2003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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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설교의 본문 선택 원리(2)
[한제호 목사 칼럼2]
이 시론(試論)을 필자가 교회 앞에 제시하게 된 동기는 지금까지 필자가 우리 설교자들에게 설교 작성에 앞서서 두 가지를 반드시 기억하자고 호소해 왔던 사실과 연관된다. 그첫째는 우리 설교자들은 모두 내가 기독교, 더 구체적으로는 개신교의 설교자임을 기억하자는 것이고, 둘째는 내 설교의 본문부터가 복음을 드러내는데 적절한가를 반드시 묻자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 주제에 관해 필자의 '성경의 해석과 설교', 상권(진리의 깃발, 1999, 제3판)(p.52, 97, 98, 124, 266, 388, 401)과 중권(진리의 깃발, 2001), p.40 등에서 수차례 언급했으며, 작년에는 '히브리서에 제시된 우리의 설교 본문 선택 지침들과, 그 이론에 근거한 설교 예문 3편'('교회와 문화', 한국성경신학회, 2002, 2, 18, p.108)을 발표했었다. 그러나 이 주제가 워낙 중요하다고 필자는 보기 때문에, 히브리서만을 대상으로 삼았던 전번의 연구에서 일보 나가서 이번에는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구약 인용의 사례들과, 그 인용들이 그의 교훈들에서 가지는 효과를 살펴보기로 하였다. 물론 히브리서 기자의 구약 인용과 예수님의 구약 인용 사이의 본질적 차이점도 고려되어야 했다. (지면 관게로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의 구약 인용 사례의 교훈을 부득불 제외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며, 기회가 허락되면 이 부분도 고찰하고자 한다).
기독교 설교자가 설교 작성에 앞서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구약 인용의 시범을 따라서 먼저 적절한 설교 본문을 선택하면 이는 그 설교 작성의 일단계의 성공이며, 다음으로 그 본문과 적절하게 연관된 구약과 신약의 상관 구절들을 발견하면 이는 그 설교 작성의 이단계의 성공이요, 끝으로 구약과 신약의 관계 본문들의 구속사적이면서도 '합당하고 현실미 있는 종합'(appropriate and relevant synthesis)의 단계에까지 도달하면 이는 그 설교 작성의 최종적인 성공일 것이다.) A.Schlatter교수의 성경 이해와 주석 방법의 특색의 하나로서 그는 성경 내용들에 대한 '종합의 능력' 또는 그 종합의 '보기 드문 재능'(ability of, knack for synthesis)을 발휘했음이 회자되었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 조사된 예수의 구약 성귀들에 기초한 교훈들은 비록 그 분량(44 항목)이 예수의 전체 교훈들의 약 이십분의 일 정도의 제한적 분량이나, 첫째, 그것들은 구약을 인용하신 예수의 높으심 때문에, 둘째, 예수가 택한 그 귀절들의 높은 적절성 때문에 그대로 기독교 설교 본문들의 최상의 기준과 표본들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거기에 필자가 첨가한 간략한 해석들은 설교자가 실제로 설교를 구상할 때 설교의 골격 구성과 대, 소지 배치에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필자는 바라며, 앞으로 독자들의 다른 모든 설교들도 이 원리를 중심 축으로 삼아서 본문 선택과 내용 구성이 이뤄지게 되기를 필자는 충심으로 바란다.
근년 세계의 개신교의 주경학계와 설교학계에서 성경적 기독교 본연(本然)의 설교를 회복하려는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현상은 매우 고무적이기는 하나, 그러나 여전히 국 내외의 많은 설교들, 특히 우리 나라 개신교의 많은 설교들이 아직도 그 복음의 적시력(摘示力)과 하나님의 은혜를 성경의 기록 그대로 깊고 넓게 개진(開陳)하는 힘이 매우 미약하다고 보여지는데, 그런 설교들은 우선 본문 선택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확고한 견해이다. 그러한 잘못된 설교 본문들은 성경적 기독교의 복음의 제시와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개진(開陳)에 목표를 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두가 철학적 이론이나 도덕적 교훈이나 인간관계와 사회문제 해결 등 기독교 설교와는 무관한 주제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나마 그 본문들의 해석과 적용은 이른바 ‘뜀틀판’으로만 사용되는 경우가 허다하고, 정작 설교의 내용은 본문과는 상관이 거의 없는, 수필집 같은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이 현실을 우려하는 많은 소리들을 필자는 오래 전부터 유념해 왔었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기독교 설교가 성경에 계시된 복음을 가능한 한 선명하게 전할 수 있게 되기 위하여 우선 설교자의 설교 본문의 선택부터 문자 그대로 성경적으로, 기독교적으로, 개신교적으로 변화됨으로서 먼저 우리 나라 개시교 강단과 더 나가서는 세계의 기독교 강단이 기독교 본연의 설교를 회복하도록 돕고자 함에 있다. 이 글의 제목에서부터 설교를 굳이 ‘기독교 설교’라고 밝힌 이유도 오늘의 많은 설교들이 비기독교화 하였다는 반성의 뜻을 담고 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교를 어떻게 하면 복음 전파가 가장 잘 되고, 교회는 부흥할까? 예수가 그의 교육의 대상을 먼저 당시의 유대 사회의 지도층으로 삼았던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그가 당시의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22:29)라고 말씀하신 정황을 보면 기독교회는 그 초창기부터 성경 해석의 문제를 가지고 싸워 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이 옛날부터 기독교계에 많지만, 본 논문은 예수의 구약성경 사용에서 그 일차적 해답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즉 예수가 구약에서 자신의 메시아 신분과 사명을 정확하게 예언했던 귀절들을 최우선적으로 적절하게 골라서 인용하시고, 그 인용하신 구약 본문을 근거 삼아 자신의 새 교훈을 베프셨던 그의 설교의 방법이 복음을 가장 잘 전하였다고 보고, 기독교의 설교자들도 어느 시대에나 예수의 이 방법을 따라서 설교 본문의 선택부터 바르게 함으로서 기독교 설교의 진수를 터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