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의 유언 2002-11-13 14:40:57 read : 5159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년 11월 10일 // 여호수아 23: 1-13
여호수아의 유언(수23:1-16)
옛날 옛날에, 엄마 개구리와 아들 개구리들이 살았다.
아들 개구리들은, 항상 말썽만 피웠다. 엄마 말씀은, 아예 듣지 않았다.
엄마 개구리가 '동쪽으로 가라'고 하시면, 그들은 '우리 서쪽으로 가자'고 하면서, 서쪽으로 갔다.
서쪽으로 가라 하시면, '싫어요, 우린 동쪽으로 갈래요'하고는 동쪽으로 갔다.
엄마가 오늘은 산에 가서 놀아라 하시면 '싫어요, 우린 강가에서 놀 거예요'하고 말했다
아들 개구리들은, 언제나 반대로만 했다. 엄마 말씀은 절대로 안 들었다.
엄마 개구리는 매일같이, 아들 개구리들 걱정만 하다가, 어느 날 그만 병이 나고 말았다.
엄마 개구리는 자신이 얼마 못 살 것을 알고, 아들들을 불러 자신의 마지막 유언을 하였다.
"얘들아 엄마가 죽으면, 언덕에 묻지 말고 강가에 묻어다오." 그렇게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엄마 개구리는 사실은, 언덕에 묻히고 싶었지만, 반대로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강가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아들들은 엄마의 주검 앞에서, 더 이상 말썽을 안 피우기로 작정하였다.
"엄마 잘못했어요" 우리가 엄마 말씀을 들었어야 했는데, 우리들은 못된 아들들이었어요.
이제부터는 좋은 아들들이, 되기로 맹세할게요. 그리고 엄마의 유언대로 강가에 묻었다.
그런데 비가 올 때마다, 강물은 넘쳐흘렀다.
아들 개구리들은, 빗물에 엄마 무덤이 떠내려갈까 걱정되어, 강가에 모여 울어댔다.
"비야 제발 좀 그치렴, 우리 엄마무덤이 떠내려간단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유언'이다. 말썽꾸러기 개구리들도, 마지막 유언은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사람이 개구리만도 못한 사람이 되어서야 하겠는가?
본문은 지금까지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가나안 정복에 같이 참여했던 사랑하고 충성스런 동지들; 격려하며 후원했던 동역자 갈렙, 대제사장 비느하스, 눈물과 피땀을 함께 흘렸던 전우들…,
또한 신세대 젊은이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내용이다.
여호수아의 유언을 통해,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하고 있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는 구절이다.
3절을 보면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자시니라"
5절에서는 "…너희 목전에서 떠나게 하시니리…",
10절에는 "…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1.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는 삶을 살라(3, 5 8. 10, 11).
여호수아는 문자 그대로, 가나안 정복의 주인공이었지만,
자신이 그 일을 이루었다고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말했다.
내가 용맹스럽고, 지혜가 출중하고, 능력이 뛰어나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너희를 위해 싸워주셨고, 현재도 우리를 위해 싸우시고, 미래에도 우리를 위해 승리하게 만들어 주신다고 고백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인공이시고, 나는 다만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이다(3-4).
인간은 언제든지 기회만 주어지면, 자신의 잘남을 드높이고 싶은, 교만한 마음이 있다.
지금 이스라엘은 그 지역에 가장 강대한 민족을 이루었기에, 교만의 위험 가운데 처해 있었다.
사람들은 물질이 많아지거나, 지위가 높아지거나, 많은 것을 누리게 되면,
세상의 탐심이 가득하여, 총기를 잃게 된다. 마음이 교만하여진다.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린다.
여호수아는 이 같은 사실을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간절히 당부했다.
우리가 겸손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우리 미래에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맛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는 사람은, 3가지 특징이 있다.
(1)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돌리는 마음이 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은, 항상 감사와 찬송이 있다. 그래서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
여호수아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렸다. 바울, 다윗도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다.
맛있는 음식을 나눠주면, 받는 사람들의 반응이 똑같지 않다.
한 사람은 주는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입에 집어넣고,
또 다른 사람은 '주는가보다'하며 인사 한번하고는 간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은,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하면서 정말 고마워한다.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도 "그때 그 음식 참 맛있었습니다" 이렇게 인사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이 은혜를 아는 사람인가요? 진정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은혜를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신 축복을, 온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주신 복을 인정할 때, 그 복보다 더 큰복을 주신다. 한 사람이 천 명을 쫓는다(10).
그러므로 날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인정받고, 더 큰복을 받게 된다.
(2) 충성스러운 사람이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면, 섬기는 봉사, 바치는 시간, 드리는 예물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크게 쓰임 받는 일꾼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믿음의 사람은 맡은 일에 충성하기 때문이다. 믿음 = 충성
마리아는 귀신들렸다가 고침을 받았고, 창기의 몸으로 구원받아 예수님의 사랑 받는 사람이 되는 은혜를 체험했다. 그래서 그녀는 300데나리온 되는 향유를 아낌없이 깨뜨렸다.
은혜 받지 않고 일하면, 그것처럼 어색한 일이 없다.
은혜 받지 않고 헌금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한 헌금과 같다. 속일 수밖에 없고, 풍성할 수 없다.
다 드릴 수 없다. 인색할 수밖에 없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수 없다.
C.T 스터드는 캠브리지 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한 수재로, 크리켓 챔피언이었다.
장래가 총망 되는 청년이었다. 그런데 교내 수양회에 참석하고 난 다음에, 선교사로 헌신했다.
그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지나친 헌신이 아닌가?"
그때 스터드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이 사실이라면,
내가 그를 위해서 바치는 그 어떤 희생이라 할지라도, '지나친 희생'일 수 없다"
(3) 용서하는 사람이 된다.
요셉은 자신을 애굽 땅에 노예로 팔았던 형들을 만났을 때, 형들을 위로했다(창45:5).
'근심하지 말고 한탄하지 말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나?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흘러 넘치는 은혜를 받으면, 용서하는 자가 된다.
다윗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자기를 저주하는 자들을 용서했다.
왜 용서하지 못하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거나, 잊었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받고,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
2. 여호와를 사랑하라(11).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11).
어떻게 하는 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가요?
우리는 "주님 사랑해요♬"하고 찬양하고 고백하지만, 이렇게 찬양만 하면 될까요?
여호수아는 구체적으로 여호와를 사랑하는 법을 말하고 있다.
(1) 하나님을 친근히 하라(8)
친근히( )라는 말은, '굳게 결합했다, 힘써 좇아간다'는 말이다.
아담과 하와는 연합하여( ) 한 몸이 되었다. 주님과 하나될 때, 주님을 사랑하게 된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주님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주님과 하나되는 경험을 해야 한다.
그래서 요15:6절에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치처럼 밖에 버리어 말라지나니"고 하셨다.
나무를 떠난 가지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이처럼 성도의 능력은 주님을 친근히 해야 한다.
친근히 하면, 그 사람을 닮게 된다. 따라서 내 친구를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삶에 대해서 부정적 생각에 젖어 있는 친구들, 자포자기하고 있는 사람들, 원망과 불평과 한숨을 토하고 있는 사람들, 비판적이고 중상모략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 하면, 어느새 인격이 그를 닮아서, 혐오할 만한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링컨의 어머니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부정적인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 그들은 병균이다"
부정적인 사람은 병균이다. 그들은 우리의 영혼까지 섞어 들어가게 만든다.
삶을 긍정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경 말씀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 하면, 삶이 아름답게 달라지게 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다(시73:28).
(2) 세상과 타협하거나 사랑하지 말라(7, 12).
세상과 타협하는 인생을 살지 말라고 하였다(7). 왜 세상과 타협하지 말라는 말인가?
세상과 타협하면, 신앙이 타락하여 죽게 되기 때문이다.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12)
하나님의 법도를 버리고 세상에 빠지게 되면, 우리의 영은 죽는다. 사명도 죽고, 능력은 사라진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아주 용맹스러운 전사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아파치족은 가장 용맹스러웠다.
아파치족이 총을 가지게 되자, 그들은 신출귀몰하는 게릴라 전투의 거장으로 자랐다.
그래서 백인들은 아파치족이 나타나면, 꼼짝없이 당해야만 했는데,
미국 정부가 저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2가지 정책을 썼다. 회유책이었다.
① 저들에게 거대한 땅을 주고, 평화롭게 마음껏 살도록 인디언 보호구역을 만들어 주었다.
② 저들에게 매달 먹을 것을 제공하고, 보조금을 지급하였다. 가족당 1,500달러씩 무조건 지급했다.
그 뒤로 아파치 인디언들은 무력해졌다. 저들은 일할 필요가 없었고, 무장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서 마약과 술독에 빠져 버렸다.
강력한 아파치 종족은, 이빨빠진 사자요, 날개를 잃은 독수리가 되어 버렸다. 무력한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나약한 술주정뱅이, 생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사람이 되었다.
옛날에 자연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사람이 사는 동네에 호수가 하나 있었는데, 겨울이면 청둥오리들이 날아와서 그곳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되면 다시 떠나곤 했다.
이 사람이 그 호수로 산책을 자주 나갔는데, 오리들이 불쌍해 보여서,
나갈 때마다 먹을 것을 가지고 가서,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그 중에 어떤 오리는, 귀찮게 사냥을 가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으니까, 귀찮게 돌아다닐 필요가 없고, 그러다 보니까 조금씩 체중이 늘었지요.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다시 북쪽으로 날아가야 할 때가 되었는데, 많은 오리들이 그새 너무 체중이 불어서 날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 호수에 남아 그 사람이 가져다 주는 먹이를 계속 먹고살았는데, 그 사람이 병들어 몇 주 나오지 못하자, 그 사이에 오리가 다 굶어 죽게 되어버렸다.
살진 오리가 되어서, 날지 못해 잡아먹히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과 타협하면, 생명을 잃고, 능력이 사라진다. 머리 깎인 삼손이 되고 만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사악한 욕망에 사로잡혀 패망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성령의 능력을 버리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싶어도, 보호하실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면, 성도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난다.
(3) 그러니 말씀을 떠나지 말라(6).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단순히 성경지식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다.
계1:3을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하였다.
가장 강조된 부분은 지키는 부분이기에, 듣지만 말고 듣고 지키자.
주님을 사랑하면, 그분의 명령을 지킨다고 하였고(시119:127),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다(요14:15).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10). 인생은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게 해 주셔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전성기를 누렸던 나라와 교회를 보면, 그들의 성공 비결은 한 가지다.
철저하게 그리스도께 붙어 있었다. 마르틴 루터 이후에 독일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
자신들을 그리스도와 철저하게 묶었기에, 독일문학이 성경이 되었다. 독일음악이 찬송이 되었다.
독일의 법학과 철학이 하나님의 탐구가 되었다. 모든 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 결과 독일의 문학과 음악과 철학이, 온 유럽과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 이것 때문에 당황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고 하는 '칼 바르트'는 성경을 읽다가, '질투하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내 마음전부를 차지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앞에서 완전히 항복했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관계를 가로막고 있는 다른 대상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그 어떤 것도 들어가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일생을 살았던 여호수아는, 사랑하는 동지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사람은 다 죽게 되어있다. 예수 믿는다는 말은, 죽음을 준비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이 어리석은 이유는, 죽는다는 것은 다 인정하면서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죽음이 준비되었는가? 무엇을 나는 남기겠는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받던 시절, 하루는 로마군인들이 카타콤을 습격했다.
그들은 카타콤에 숨어 있던 기독교인들을 모두 잡아 끌어내어, 광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기 시작했다. 순교자들은 서서히 십자가위에서 숨져갔다.
그런데 날이 어두컴컴해지면서, 로마군인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검은 물체들이 서서히 십자가 주변에 모여들었다.
바로 십자가에 처형된 성도들의 자녀들이, 자기 부모를 찾아 왔다.
그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자기 부모를 향하여 "엄마! 아빠!"부른다. 십자가에 달린 부모들은 "얘야 얼른 도망가거라. 나처럼 예수 믿다가 붙들리면 죽는다. 어서 도망가거라!"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얘야 무슨 있어도, 예수 믿는 것은 포기하지 말아라. 비록 나는 먼저 죽지만 천국 간다. 거기서 다시 만나자…" 부모들은 십자가에 죽으면서도, 아름다운 유언을 남겼기에, 그들의 자녀들도 예수 믿고 영생을 얻었고, 기독교는 전 세계적인 종교가 되어, 그 결과 우리도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자녀들에게, 내 사랑하는 자들에게 무엇을 남기시겠습니까?
(1)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며, 주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라.
(2)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