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는 어떻게 가능한가? 2002-11-22 09:59:01 read : 5775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히브리서 10:19-25 // 2002년 11월 10일
《내적 치유와 영적 성숙》이라는 책에 보면, "육신적·정신적 치유의 목적은 단지 우리가 건강을 되찾고 기분이 나이지게 하려는 것 뿐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변화시키실 수 있는 그 능력의 <예수님과 평생토록 친밀한 관계>를 맺게 하려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요즘 <치유, healing>에 대한 관심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특히 육체뿐 아니라 내면(內面)의 상처를 치유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래서 치유 목회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습니다. 앞에서 인용한대로, 치유 목회의 목적은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도록 돕는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몸과 마음과 영혼이 병드는 이유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 존재―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인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대화와 만남이 없이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야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지나친 욕심과 욕망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 다닐 때, 병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병든 상태에서 치유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중요하다는 걸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분석심리학(分析心理學) 정신과도 통하는 것입니다. 칼 융은 노이로제(neurosis)라는 병은 자기 자신의 삶을 살지 않을 때, 다시 말해 자기 본성(本性)에 맞지 않는 삶을 살 때 생긴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병을 치유 받으려면 조용히 마음을 들여다보고, 진지하게 무의식(無意識)의 메시지를 듣고, 그 메시지를 따름으로써, 자기 자신과 일치하게 되어, 결국 건강하고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고, 나아가 자기 실현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우리 안에 2백만 년 된 '위대한 존재'(Great Man)가 있는데, 그의 메시지를 듣는 게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 즉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우리 각자는 "내가 왜 지금 이렇게 불안하고, 살기가 힘들고, 피곤하고, 아픈지" 조용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무언가 생활습관이 잘못되어 있든지, 아니면 마음 자세가 잘못되어 있어서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때 치유가 가능한지 본문에서 그 답을 찾아봅시다.
1. 예수의 보혈로 죄 씻음 받았음을 믿을 때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19절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했습니다. 또 22절 앞부분에 보면,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표준 새번역으로보면, "우리는 마음에다가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히 씻었습니다"고 했습니다.
최근 한국 기독교계에 충격을 주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과 교리를 왜곡시킨 책이 동아일보사에서 출판되어 팔리고 있습니다.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몸으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신화(神話)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2,000년 간 기독교는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해 온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과 보혈의 공로를 믿는 신앙이 아니라면, 기독교 신앙은 그 근본이 흔들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십자가의 도(道)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씻음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됨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8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道)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1:22-24에서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이며, 예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요한일서 1:7에 보면,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고상한 인격과 깊은 학식을 가졌다해도,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십자가 아래 무릎꿇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회개하고,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믿을 때 죄를 용서받고, 새로워질 수 있고, 새 생명(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믿는 게 기독교 신앙의 근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를 믿지 않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본문 20절에서도 예수께서 휘장을 뚫고 새로운 살길(the new living way)을 우리에게 열어주셨는데 그 휘장은 곧 그분의 육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 수 있는 새로운 길, 곧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얻는 은총인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을 믿을 때에 죄책감에서 자유함을 얻고, 무거운 죄 짐에서 해방되고, 모든 죄악과 질병에서 고침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옴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던 위대한 복음 전도자 시무언 이용도 목사는 "피를 주소서"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는 눈물도 말랐거니와 피는 더욱 말랐습니다. 그래서 무기력한 빈혈 병자가 되었습니다. 피가 없을 때는 기운이 없고, 맥없고, 힘없고, 담력 없고, 의분 없고, 화기 없고, 생기가 없습니다. 그 대신 노랗고, 겁 많고, 쓸쓸하고,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피를 주사해 주소서. 그래서 우리는 새 기운을 얻고 화기와 생기 있고 기쁨이 있게 하옵소서. 우리는 죄에게 잡히어 죽어가되, 그 죄와 더불어 싸울만한 피가 없습니다. ... 주여, 우리에게 당신의 피를 주사해 주옵소서. 그래서 죄악과 더불어 싸우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영혼이 원수 마귀를 격파하게 하여 주옵소서. 피가 있게 하소서. 피가 없으면 죽은 사람―우리에게는 피가 없어요 주여 우리는 거의 죽게 되었나이다. 당신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서 우리에게 주사해 주옵소서.
2. 확고한 믿음과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치유 받습니다.
22절 뒷부분에 보면,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이것을 표준새번역에 보면,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라고 했습니다. 23절에 보면,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시니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잡자는 뜻입니다.
복음서에서 우리 주님은 믿음으로 고침(=구원)을 받은 예를 말씀하셨습니다.
- 열두 해를 혈루증에 시달리던 여인에게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니, "그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마태 9:22).
-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에 있던 가나안 여인이 간절한 믿음으로 구할 때, 주님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셨고,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8)고 했습니다.
- 소경 바디메오에게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실 때,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았다"(마가 10:52)고 했습니다.
- 한번은 예수께서 어떤 바리새인 집에 들어갔을 때에 어떤 여인이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을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을 때 그 여인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눅 7:48)고 하시고, 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 7:50)고 선포하셨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아무리 심한 고통과 시련으로 힘들고 지친 사람이라도, 만왕(萬王)의 왕이 되시고, 치유자가 되시며, 구원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나아와 무릎 꿇고 간구 하면, 거절치 아니하시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깨끗이 씻어 주심으로 모든 약한 것을 고쳐주시고,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온전케 해 주심을 믿읍시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는 나머지, 이런 확고한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옛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히 11:1-2)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내 눈에 아무증거가 없어도, 내 귀에 아무증거가 없어도 믿음의 증거를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의심을 버리고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으로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확고한 믿음과 참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삶을 긍정(yes to life)하고,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프랑스 남부 보르도 지방의 한적한 시골에서 플롬 빌리지(자두 마을)라는 명상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틱낫한은 사람들에게 걷는 명상(walking meditation)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간단한 말을 외워보라고 제안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삶과 사회, 그리고 대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숨을 들이쉴 때는 "예스, 예스, 예스"라고 말하고, 숨을 내 쉴 때에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고 하는데, 다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고 합니다.
믿음의 세계, 영적인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 눈에 안 보여도 지금도 인류 역사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인생 길을 걸어갑시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예배를 받으시며, 언제 어디서나 주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는 확실한 믿음과 참된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이들을 붙들어 주심을 또한 믿읍시다. 그래서 이런 확고한 믿음을 가진 성도는 이런 찬송(344장)을 부릅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 버리고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당신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한 주 하나님 아버지는 참 미쁘다 그 귀한 모든 약속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무슨 일이 있을까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 버리고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3. 서로 돌아봄으로써(격려함으로써) 치유 받게 되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서로 돌아보아"는 말은 "서로 격려하여"라는 뜻입니다만, 저에게는 오늘 본문으로 읽은 개역성경의 "서로 돌아보아"라는 표현이 더 정겹고 좋게 느껴집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서로 돌아보는 것"이 너무 부족합니다. 빌립보서 2:4에서 바울은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음 두 가지를 위해서 서로 돌아보는 일을 해야 합니다.
①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24절)라고 했습니다. 서로 돌아봄으로써, 서로 사랑하고 착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간 저는 신문을 읽다가 아주 감동적인 기사를 보았습니다. 30대 시각장애인 육상선수가 정상인 선수들이 출전한 뉴욕 마라톤 대회에서 5위를 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는데 이 사람은 33살 된 미국의 말러 러년이라는 여성입니다. 그녀는 9살 때 망막 퇴행성 질환을 앓아 콘택트 렌즈로 교정한 시력이 4.5m전방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지만, 마라톤 풀 코스(42km가 넘는) 경주를 훌륭하게 해 냈습니다. 그런데 대회 측에서는 그녀의 레이스를 돕기 위해 자전거를 탄 도우미로 하여금 그녀를 따라가며 "곧 코너가 나옵니다. 왼쪽에 물통이 있습니다" 등을 일일이 알려 주도록 했고, 여자 부를 남자 부보다 30분 먼저 출발하도록 배려(配慮)해 러년이 뒤로 처지는 다른 선수들과 부딪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healing society입니다. 지구 한 구석에서는 피의자를 조사하면서 검찰에서 사람을 때려죽이는 일이 벌어지는데, 다른 쪽에서는 이렇게 세심하게 장애인을 배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게 선진국이고, 또 어떻게 사는 게 진정 아름다운 것인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서로 돌아볼 때, 살맛 나는 세상이 되고 또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② 열심히 모이기를 힘쓰도록
25절에는, 서로 돌아보는(격려하는) 일을 왜 해야 하느냐 하는 게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모이는 일을 폐지하지 말고, 자주 모이고, 더욱 열심히 모이게 하기 위해 서로 돌아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 날(the Day, 종말)이 가까워 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늘 종말론적(終末論的)인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시간은 우리에게 무한정(無限定) 주어져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서로 격려하며, 북돋워 주며, 하나님의 전에 모여 예배 드리고 말씀 듣고 찬양하는 생활에 힘씁시다. 이렇게 할 때, 놀라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주일은 <추수 감사주일>입니다. 밖에 있던 식구들을 다 불러 모아 같이 예배드리고, 또 전도 대상자들을 다 인도해와서 같이 믿음의 생활을 하도록 등록시키고, 열심히 모여, 뜨겁게 말씀을 사모함으로써,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치유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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