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교육 2002-11-22 10:16:22 read : 5052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잠언 15:31-33 // 2002. 11. 3.
31)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 있느니라. 32) 훈계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 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이번 주간에는 대입을 위한 수능시험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가운데 고등학교 3학년을 자녀로 둔 부모님들이 그 시험으로 인해 불안한 마음 금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들에게는 평안함이 있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어떤 교육을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지식과 지혜에 넘치게 하사 참 생명을 얻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지식과 지혜와 연관하여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똑똑이와 똘똘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예일대학의 심리학과 Robert J. Steinberg교수의 Successful Intelligence 참조). 똑똑이는 이름 그대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입니다. 뛰어난 머리 즉 지능을 가진 아이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똘똘이는 동네에서 소문난 장난꾸러기이지만 밉지 않게 자기 처신을 잘 하는 아이입니다. 한 번은 이 두 아이가 친구가 되어 함께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큰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똑똑이가 호랑이를 딱 보는 순간, 비상한 머리로 계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호랑이가 250m 밖에 있는데, 시속 50km로 달려온다면, 17.9초만에 나에게 도달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죽게 되는데, 그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한담?”얼마나 빨리 그리고 정확히 계산해 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있던 똘똘이는 운동화 끈을 다시 질끈 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보고 이상히 여긴 똑똑이가 물어보았습니다. "야, 이 녀석아! 이제 곧 호랑이한테 잡혀먹어 죽을 텐데 운동화 끈은 다시 매서 무엇하겠느냐?”그러자 똘똘이는 씨익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왜줄 알아? 나는 너보다 빨리 뛰기만 하면 되거든!" …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과 똘똘한 사람이 있습니다. 위의 이야기에 나타난 똑똑이는 죽을 때까지의 시간을 생각했고 똘똘이는 위기상황 속에서도 살아날 방법을 생각한 것입니다. 똑똑한 사람은 사실 자체를 잘 파악할 줄 안다면, 똘똘한 사람은 상황 자체를 잘 파악하는 사람입니다. 똑똑이는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한다면, 똘똘이는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이 이야기는 정말 살 길이 무엇인가를 추구할 줄 아는 자세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친구가 모두 살 수 있는 길을 찾았다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또한 여러분들의 자녀를 어떻게 키우시기를 원하십니까? 아마도 우리 사회는 똑똑이 쪽으로 더 많이 기울어져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너무 똑똑이 쪽을 선호하는 경향이 너무 강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똘똘한 사람이 더 많이 생겨났으면 하는 바램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실제로 위의 두 종류의 사람 모두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사회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 두 가지 모두를 가지게 될 것을 약속합니다. 잠언 1:7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라고 가르칩니다. 지식은 히브리어로 daah로서 알고 있는 내용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자신에 대하여 계시하시는 내용으로서의 지식이 매우 중요합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하겠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에서 인식할 수 있는 지식 그 이상의 하늘의 지식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나님은 약속하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의 말씀 잠언 15:33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잠언 9:10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라고 가르치십니다. 지혜는 히브리어로 hochmah로서 살아가는데 있어 선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방법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지혜는 단지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내용만은 아닙니다. 잠언 8:22-31을 보면 이는 의인화 되어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요한복음 1:1-18에서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지혜가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아입니다.
지식과 지혜는 모두 하나님을 경외할 때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가르칩니다. 경외란 히브리어로 irah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떠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두려워서 떠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일반적인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윤리학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본성적으로 경외보다는 두려움에 의해 움직여지고 말 자체의 그릇됨보다는 악이 초래하는 벌 때문에 악을 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Ethica Nicomachea).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진 사람은 두려움에 의한 소극적인 선의 행동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은 그 앞에 순종하여야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경외할 때 지식과 지혜가 주어질까요? 이는 하나님이 모든 것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시면서 모든 법칙을 그 가운데 심어놓으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칙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지식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전도서 3:14을 보면,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우리는 바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며 지식을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지식과 지혜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까? 이는 오늘 말씀을 살펴볼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바로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를 가진 자로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경외할 때 우리에게는 생명이 주어진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잠언 19:23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9:11도 "나 지혜로 말미암아 네 날이 많아질 것이요, 네 생명의 해가 더 하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지식과 지혜를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고 경외하는 자세를 가집시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지혜와 지식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을 동일하게 믿는 기독교와 유대교는 나름대로 그 방법을 많이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교리를 통해 지식적인 면을 많이 발전시켜 왔다면, 유대교는 신앙생활에 대한 글을 통해 지혜적인 면을 많이 발전시켜 왔습니다. 유대인들이 적은 책 가운데 탈무드가 있는데, 이는 지금도 계속 첨가되면서 생활 가운데 얻게 되는 하나님의 지혜를 기록해 나가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사이 한국에서도 아이들을 천재로 키우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탈무드에서 지혜를 배우고자 하는 부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중에도 보면, 탈무드가 가르치는 자녀교육법에 대해 서술하는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중요한 점이 빠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내용 그 자체를 지식으로 가르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탈무드에 나오는 지혜를 우리도 배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 탈무드 안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경외심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이는 지혜만 가르치는 것이요 깊숙이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가르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의 교육은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지식을 올바로 전달하고 지혜를 추구하게 하며 생명을 구하는 교육을 하고 있는지요? 아마도 지식만을 추구하고 있기에 매우 답답하게 여겨지곤 합니다. 지식을 취하여도 이를 잘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볼 때 매우 안타깝습니다. 아마도 오늘 학교 교육이 무너지고 있는 이유도 바로 지식만을 추구하는 기능으로 전락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잘 적용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더욱이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참 생명으로 인도하는 인성교육은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만약 지난 수 백년 동안의 세계적인 천재들이 오늘 우리나라에 살았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했을까요? 몇 가지 예를 소개해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모두 갈릴레오를 잘 아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해는 아침에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을 보고 해가 지구를 돈다고 주장할 때 그는 오히려 지구가 해를 중심으로 해서 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거짓말 유포죄 혹은 민심교란죄로 서대문 교도소에 갇혔을 것입니다. 더욱이 20세기의 인물로 타임지가 선정한 아인슈타인은 고등학교에서 수학, 물리학, 화학 등은 100점을 받았으나 국민윤리, 역사, 국어 등에서는 거의 최저점수 20점을 받아 수능시험은 평균 250점을 넘지 못하고 번번이 일류대학에 낙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서울 종로의 입시학원에서 삼수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한국의 교육은 오늘날 천재를 죽이는 교육을 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동일한 지식을 강요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독특하고 창의적인 것을 거부하는 지식만을 쌓은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여기에 지혜를 추구할 수 있는 여지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로써 교육의 최종 목표인 인성교육은 찾아보기 매우 힘이 듭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인성교육은 생명을 이루어 나가게 하는 교육인데, 이는 정말 더욱 힘이 듭니다.
왜 이러한 교육이 진행되고 있습니까? 이는 바로 종교적이고도 철학적인 영향으로 인해서 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특히 유교의 장유유서(長幼有序) 등의 서열화 가르침이 교육에도 적용되어 모든 것을 성적순으로 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계산된 점수를 기준으로 해서 서열화 하는 것도 종교적 영향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기준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주된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지혜나 인성에 관한 교육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종교적인 면에서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칙으로 고쳐나가야 교육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 똑같이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성경에 자주 쓰이는 비유와도 같이 부자집에는 질항아리도 있고 나무통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금잔도 있는 법입니다. 포도주는 나무통에 넣어야 제 맛을 내고 금잔에 따라 마시면 더 더욱 기분을 좋게 합니다. 금항아리에 포도를 넣으면 포도주가 될 이유가 없고 나무잔에 마시면 별로 기분이 좋질 않습니다. 사람은 나무통 같은 역할의 사람도 있고 금잔과도 같은 역할의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종류의 사람을 다양한 능력을 주어 참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하셨는데, 이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참 교육의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삶의 기쁨을 누리고 생명의 경외를 느끼도록 하는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금세기의 위인 중의 한 사람인 슈바이쩌 박사가 추구했던 실천적 사상은 생명에 대한 경외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는 신학자요 철학자요 의사요 오르간 연주자였습니다. 그는 많은 분야에서 공부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지식적으로 성경을 연구해 보니 예수는 실패한 종교적 개혁자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지식적으로만 성경을 보고 예수님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면 그는 결국 예수님을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아프리카 콩고에 가서 의술로 사랑을 베풀며 희생하는 삶을 산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그는 생명의 고귀함을 실천하게 된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경외를 몸소 실천하면 평생을 살아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분명히 압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결국은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기에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생명의 귀중함을 잘 알고 또한 누리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함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를 받아 생명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육의 목표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지식과 지혜를 얻고 생명을 가져다 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방법이요 목표입니다. 세상적 기준에 의해 정해진 일류가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얻어질 수도 있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생명이 생명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국민 가운데 약 25-30%가 교인이라 하는데,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녀들을 교육하고 제도를 바꾸어 나가는 데 힘을 쓴다면, 우리는 바꿀 수 있습니다.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바꾸어 나가는 데 하나님도 앞장서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요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는 나를 살리는 길이요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