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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2002-10-16 11:41:53   read : 5156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09.29 // 로마서 4:13-25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와이에 가면 알로하, 마할로란 인사말을 배웁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정도의 하와이 원주민 인사말인 모양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나의 Ex nihilo를 고백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대표한 Ex nihilo를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의 기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계속 주제어구로 사용했던 라틴말 Ex nihilo는 무로부터(from nothing), 비존재로부터(from not to be)의 뜻입니다. 2001년 9월 11일 뉴욕 세계무역센터 테러의 폭심지 ground zero의 사전적 의미는 "급격한 변화의 중심, 사물의 가장 근본적인 시작점"이라고 합니다(02. 9. 12. 조선일보 만물상). 그런 관점에서 Ex nihilo, from zero의 철학적 의미는 절망과 무가치와 죽음으로부터 소망과 가치와 생명을 창조하는 전환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보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창조신앙을 가지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창조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의 출애굽 사건, 신약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고 난 다음 비로소 이 세계는 하나님의 세계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인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히 11:3).

    성경은 연대기로 보다는 신학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출애굽의 하나님을 경험한 다음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와 억압에서 구원해 내신 바로 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엘로힘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으로 가게 하라(Let my people go)"(출 5:1). 이 말씀은 우리 하나님의 은혜의 실천이요 구원 의지의 실천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하나님이 되게 하십니다. 명령과 응답의 Paradigm이 여러번 반복됩니다. "있게 하라. 그대로 되니라" 마찬가지 Paradigm이 천지창조 사역에도 나타납니다. 창 1장을 보세요. 하나님이 있으라고 명령을 발하시고 그대로 되니라고 8번이나 응답됩니다. 하나님이 Ex nihilo에서 만유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만유의 하나님은 우리의 출발점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유의 하나님을 부르게 되는 것은 우리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이전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먼저 만나 뵙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7절에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보다 먼저 언급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에서는 Exdos(구원)를 통해서 Creatio(창조)로 나아가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요 14:6).

    자, 그러면 Ex nihilo,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이전에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인 의미가 있는 문제, 곧 죄와 사망과 저주 아래의 Ex nihilo에 나타난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살펴봅시다. 범죄한 인간에게는 의도 생명도 권능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잃어버렸고 의를 행할 능력도 상실했습니다. 우리는 단순한 무로부터의 Ex nihilo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Ex nihilo, 죽음으로부터의 Ex nihilo, 저주로부터의 Ex nihilo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 죽은 자를 살리신다고 할 때 우리는 이미 죄로 인하여 죽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죄지은 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대로 우리는 정녕 죄로 인하여 이미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자신을 원자력 발전소의 원자로를 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지금 비록 조금씩 방사선에 노출되고 있으나 나는 영원히 원자병에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또 어마어마한 세균탄을 안고 있는 사람을 연상해 보십시오. 지금 비록 조금씩 세균의 침입을 받고 있으나 그는 무궁토록 세균 아래 병들어 갈 것입니다. 무에서 지음받은 사람은 누구나 존재 무에 대한 불안을 비켜갈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 앞에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는 우리 인생은 누구나 죄책의 불안, 심판의 불안에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생은 살았으나 실제로 죽은 인생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의 윤리적인 Ex nihilo가 아니라, 이렇게 본체론적이고 신학적인 Ex nihilo, 영원히 운명적으로 어긋난 Ex nihilo에 하나님이 개입하실 것인가? 그래서 우리가 짊어지고 눌려 사는 죄와 사망의 원자탄과 세균탄을 근원적으로 옮겨주실 것인가? 이것이 우리 모든 인생이 하나님께 드리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인생을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이 구약성경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 약속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신약성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Ex nihilo에서 구원을 창조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Ex nihilo를 보셨고, 우리의 Ex nihilo를 대신하셨으며, 우리의 Ex nihilo를 대표해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Ex nihilo를 경험하셔야 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성을 짊어지셨지만, 죄성에 떨어지지 아니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종의 직책으로써 우리를 섬겨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참된 사역은 그분의 존재하심과도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구속의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 중재는 그의 종되심 뿐 아니라 그의 존재 전체로부터 흘러나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용서를 위해 지불한 대가였습니다. Scotland의 한 신학자는 십자가란 하나님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창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보고 느끼는 하나님의 고통을 봅니다. 사랑에 빠지면 고통에 빠지는 법입니다. 죄가 하나님께 드린 사랑의 아픔을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구속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가장 깊은 고통에 들어오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 죄를 위해 그리스도는 얼마나 떨어졌던 것입니까? 빌 2:5-8절은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고후 13:4).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는 죽음에 잡히지 아니했습니다. 무덤이 예수를 머물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패배시켰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죄와 사망을 이겼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의 모든 죄와 모든 고통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 우세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 믿는 우리는 죄와 죽음과 실패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었습니다. Ex nihilo가 극복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고 평화로운 교제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승리한 것입니다. 그 사랑은 죽음이 사로잡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씀합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어둠이 빛을 억압할 수 없었느니라"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살기 위해서 먼저 죽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Ex nihilo를 가정하고 나타납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먼저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살았습니다. 지금도 누군가 나를 위해 죽고 있고 죽으려하기 때문에 내가 살고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어리석음에 빠져 아내를 버리겠다고 했을 때 현숙한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뿐이니까요" 이런 가정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 아내가 그 남편을 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의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구속은 십자가뿐만 아니라 예수라고 하는 독특한 인격전체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화해사역은 그의 죽으심부터만 아니라 그의 존재성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바울이 만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분이 바로 요한이 보고 만져보았던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입니다. 바울 이후 모든 신자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때 예수님은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나의 구주가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의로운 존재로 발견되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신비한 연합(Uniomystica)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법정적인 칭의의 역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적인 입양의 역사, 곧 하나님의 양자됨을 결과합니다. 사도 바울이 잘 설명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4-17).

    오순절 성령강림은 하나님의 구속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계약이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확증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완전히 복구되었고 미래의 하나님 나라가 이렇게 성취된다는 신호까지 보여주었습니다. 그때로부터 우리 믿는 사람은 성령의 권능 안에서 부활과 심판의 긴장 속에 살게됩니다. 부활의 권능 안에서, 영화의 소망 안에서, 번개와 천둥 사이에서 복된 삶을 살게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이야기를 가지고 이 신앙행위를 그리고 있습니다. 히 11:19을 읽어봅시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여기 또 하나의 Ex nihilo가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이삭이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을 신뢰하는 것은 자연인에게 있어서 하나의 죽음과 같은 순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힘, 인간의 것들을 다 치워버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만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에 오히려 쉽지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하나님만이 이루신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육신의 자손이지만 이삭은 약속의 자손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서만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권능은 당신의 것입니다. 나는 내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만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도, 오직 그 사실만을 의지하는 신앙도, 모두가 Ex nihilo의 과정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행위만을 믿고 신뢰하는 신앙행위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아브라함의 복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신 그분이 우리도 불러내실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 위해서는 먼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우리들만이 만유를 살리시고 재창조하시는 하나님과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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