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언어정책 2002-10-16 11:54:03 read : 4460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창세기 11:1-9 // 2002. 10. 6.
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알퐁스 도데가 지은 '마지막 수업'이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이 단편소설은 더 이상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가르치지 못하게 된 안타까움을 그리고 있습니다. 교단에 선 선생님은 부드럽지만 엄숙하게 이렇게 말을 꺼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저의 마지막 수업입니다 ... 오늘로써 여러분과 함께 하는 우리 말 수업은 마지막입니다. 아무쪼록 주의해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다음에 저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쓰고 있습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노예가 되었더라도 자기 나라 말만 잘 간직하고 있으면, 그것은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은 그 나라의 정신과 삶의 양식을 담고 있습니다. 말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 민족의 정신과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나라와 민족이 쓰는 말을 잘 사용하고 아름답게 발전시키는 것은 민족의 생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자기 민족의 말과 글을 아름답게 사용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민족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민족은 서로 다른 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의 다양한 발전과 연관해 구약성경은 바벨탑 사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의 대략은 이러합니다. 옛날에 사람들이 시날 평지라는 드넓은 들판에 이주해 살게 되었습니다. 잘 가꾸면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고 큰 기쁨에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무슨 두려움입니까? 이는 드넓은 들판에서 서로 그 활동영역을 점점 더 넓히다 보면 서로 흩어져 살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이 때 그들이 생각해 낸 것은 높은 탑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드넓은 시날 평지에서 어디를 가든지 볼 수 있는 지표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중심이 어디인지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언제든지 다시 모일 수 있는 중심점을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행위는 세 가지 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있었습니다.
우선, 그들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려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 하나님의 영역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를 하나님은 가만히 두려 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도 그러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바로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지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눈이 밝아져 보게된 것은 그들이 벌거벗었다는 것과 에덴동산에서 쫒겨나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역에 대한 침범은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바벨탑 사건에서도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려 했기에 그곳에서 쫓겨 날 것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자신들의 이름을 내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건만,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름을 내자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법칙에 거스려 자신들의 노력으로 자신들의 공과를 자랑하려는 모습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장에 서야 하겠는데, 오히려 자신이 찬양을 받으려는 오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역시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지막 문제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라고 그들이 말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획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는 온 지면에 퍼져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는 창세기 1:28에 기록된 바와 같이 첫 사람 아담을 만드시고 말씀하신 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명령은 또한 창세기 9:1에 기록된 바와 같이 노아 때에 새로운 인류를 시작하면서 다시 전해진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들이 탑을 쌓으면서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생각했던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사람들의 말을 혼란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으니 서로 힘을 합칠 수가 없게 된 것이지요. 탑을 쌓는 일을 도저히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대응하셨습니다.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별로 힘들이지 않는 방법인 말의 혼잡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를 바벨이라 합니다. 이는 히브리어 balal 과 연관된 단어인데, 바로 혼잡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서로 말이 다르고 따라서 글이 다르고 해서 혼란을 겪게 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결과 서로 말이 통하는 일부 사람들이 서로 모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흩어지고 서로 일정한 구역에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흩어짐을 면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오히려 그들을 흩어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결국 자신이 뜻하신 바대로 세상을 이끌어 가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오늘 날 교회를 이끌어 가실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세력이 교회를 좌지우지 하려 하여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으면 하나님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다스려 나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근본적인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위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날 우리가 흩어져 각 민족을 이루고 각 민족이 서로 다른 말을 사용하고 이에 따라 글을 만들어 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비록 인간의 죄로 인해 시작된 것이지만,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된 우리들이 이 세상 마지막에 다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이 세상에서 서로 다른 말과 글을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래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이러한 법칙은 신약성경에서도 발견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생각해 봅시다. 성령이 임한 후에 사도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아마도 아람어로 설교를 했는데 듣는 사람들은 각자 자기들이 살던 지역의 말로 알아듣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통역되어 전달되는 설교를 들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언어로 통일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각 나라와 민족의 말로 듣게 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의 말을 존경하였다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바벨탑 사건 이후 하나님은 각 민족으로 하여금 자기들의 말을 유지하게 하려는 계획을 변경시키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 끝날까지 각 민족과 나라가 사용하는 말과 글을 유지해 나가도록 원하고 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약성경의 관점을 통해 볼 때 우리도 역시 같은 법칙 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 말과 우리 글 역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말과 글을 끝까지 사랑하고 유지해 나가며 발전시켜 나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언어가 있지만, 이를 모두 지켜 나간다는 것은 처절한 전쟁과도 같습니다. 여러분 현재 이 세상에 몇 개의 언어가 남아있는 줄 아십니까? 지난 2월 21일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유네스코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6528개의 언어가 현재 이 세상에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약 6500개의 언어 가운데, 약 3-4000개의 언어가 타민족에 의한 억압적인 언어정책과 유력 언어의 문화적 경제적 흡인력으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하나의 언어가 사라지면 인간의 사고와 세계관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도구를 영원히 잃어버리게 됩니다.
언어와 연관되어 사무엘 헌팅톤은 그의 책 '문명의 충돌'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언어는 항상 문명의 지형도에 발맞추어 재배치, 재구축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80쪽) 어떻게 보면, 이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들의 언어를 지키지 못하는 민족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얼마나 엄청난 지적 손해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남의 말과 글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에 의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언어를 통일시켜 세상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던 옛날 사람들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시 바벨탑을 쌓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시도는 하나님의 계획을 인간의 힘이 무력화시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한민족이 아주 뛰어난 언어와 글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잘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남의 언어와 글을 사용하는 것을 더욱 유식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요사히 영어를 잘하기 위해 혀를 수술하는 경우까지 있다고 합니다. 참 이해가 안가는 행동인데, 어떤 부모들은 이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이는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이 없는 모습입니다. 공용어로 영어를 사용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영어를 공용어해도 우리식 영어 콩글리쉬를 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싱가포르 사람들이 그들 식의 영어를 하듯이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외국어를 쓰면 유식하게 보이는 듯한 착각에 빠져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틀리기 사용하면서도 잘난 척 하는 모습은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개업을 하면서 '그랜드 오픈 페스티발' 이라고 쓴 사업체가 있다고 합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잘못된 점이 있습니다. 개업은 오픈이 아니라 오프닝입니다. 이는 남의 단어를 문맥에 맞지 않게 사용하는 문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페스티발이 아니라 훼스티발 비슷하게 써야합니다. 우리 말은 영어의 f 발음을 정확히 표기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틀린 발음이라 할찌라도 사용하곤 합니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영어 단어를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세대 사이의 소통을 제한합니다. 이는 세대간의 단절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랑스럽게 사용합니다. 위에서 제시한 모든 행동들은 하나님의 뜻에 전혀 대치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과 글을 아끼고 사랑하여야 합니다. 저도 우리 말과 글을 잘 사용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저의 말하는 습관을 잘보면 알겠지만, 가능하면 외래어를 사용하지 않고 우리 말로 혹은 우리 말을 만들어서라도 사용하려고 노력하곤 합니다. 저는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각이 아니라 바로 성경에서 가르쳐준 것이기에 더욱 사명감을 가지고 이행합니다.
사실 우리 교회 안에도 보면, 성경에서 온 것이지만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곤 합니다. 또 그러한 단어를 매우 좋아하는 듯합니다. 심지어는 사람의 이름까지도 그러한 경향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제가 볼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제대로 지켜나가지 못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이와는 대조되게, 우리의 믿음의 표현을 좋은 우리 말과 글로 표현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이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예를 들면, 새문안 교회의 찬양대 이름을 보았는데, 하나찬양대, 새로핌 찬양대, 한기림 찬양대, 새나리 찬양대 등 참 아름답게 지은 것을 보았습니다. 역시 한국의 어머니 교회는 이름을 짓는 데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교회, 진정 올바르고 앞서가는 교회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