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전 1992년 6월 28일 주일 새벽 저는 미국 L.A에서 캘리포니아 대지진을 경험했습니다. 침대가 약 1분간 흔들렸는데 느낌은 꼭 10분 쯤 흔들리는듯 했습니다. 땅이 우리 삶의 터인데 그 터가 흔들리니 만사가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날부터 당장 미국이 싫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느낌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새벽 5시만 되면 지진을 느끼고는 아침에 일어나면 옆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새벽 지진을 못느꼈소?" California는 지진대가 있는 곳으로 하루에도 여러 번씩 지진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인생이란 얼마나 부질없는가? 흔들리는 터 위에 잠시 기숙하는 객에 불과하구나!" 그렇게 되새기곤 했습니다. 본문 3절에 다윗의 친구들이 다윗에게 말합니다. "땅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판국에 바르게 산다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더냐? 법과 질서,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면 선한 사람도 별수 없다고!"
가만히 살펴보면 오늘 우리 국가나 사회가 바로 이런 상황을 만난 것 같습니다. 신문마다 말합니다. "나라에 중심이 없다. 나라 기강이 이래도 되는가?" 내용을 이야기하면 골치가 아프니까 그냥 지나가렵니다. 다만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기본이 약하고 똑 부러지게 성실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날 그날 적당히 넘어가는 "대강대강, 빨리빨리" 이것이 병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부정선거 시비가 일고, 다리가 무너지고, 조령모개가 반복되는 것이 아닙니까? 정치가 표류하니 경제도 표류합니다. 성실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가 되고 정직한 사람이 인정받는 사회가 되도록 우리 자신이 먼저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공중도덕도 내가 먼저 지킵시다. 쓰레기도 내가 먼저 줄입시다. 하나님이 주신 하나뿐인 이 자연을 우리가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아끼고 절약하여 선한 일과 선교에 힘쓰도록 합시다.
여기에서 말하는 터는 터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공의와 진실이요 세상이 의지할 바 생활의 근거입니다. 터는 사회의 기초가 되는 원리원칙입니다. 국가의 규범으로써 질서와 공정, 공의가 무너지면 어떻게 됩니까? 삶을 정상적으로 만드는 기본규칙이 지켜지지 않고, 사회 속에서 더 이상 인간의 양심이 통하지 않을 때 그 사회는 기초가 무너진 것입니다. 터가 무너진 사회에서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시인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묻고 있습니다. 세상의 빛인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역사적으로 언제나 신 신학사조와 자유신학으로 말미암아 그 규범과 기본의 장이 공격을 받아 왔습니다. 예컨대 종교다원주의나 후기 현대주의 신학이 정통교회를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세계는 진화한다. 세계는 상대적이다. 세계는 인격적이다" 얼마나 매력적인 말입니까? 이성의 신을 신봉하는 그들은 예수의 신성, 삼위일체, 성경무오, 처녀탄생, 대속의 교리, 부활, 기적 등 절대적인 기독교 교리를 모두 상대화시켜 버립니다. 따라서 기독교도 많은 종교 중의 하나로 치부해 버리고는 힌두교 속에도 예수가 있다고 망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이 하나님의 계시에 종속적이 되고 수용적이 되어야지 이성이 계시를 비판대상으로 삼아버리면 기독교의 진리들은 빛을 잃어버립니다.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고 말한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처럼 주장한다면 "계시도 내 이성의 판단 속에 들어올 때만 받아들이고 내 생각의 범위를 넘어서면 인정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성의 신봉자 Cartesian이 아닙니다.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표준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내 교회를 이 반석 위에 세운다"(마 16:18)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딤전 3:15)고 기록했습니다. 우리와 조금 입장이 다른 감리교회도 성경 다음에 전통을 강조합니다. 신학의 전통, 오랜 역사와 시험을 거쳐 확정된 그 전통위에 복음적 진리를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영감설과 그리스도 양성론에 대해서, 성수주일과 십일조에 대해서 다시 터를 닦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전통 다음에 이성을 강조하는데 이성은 대계명 가운데 "뜻을 다하여"라는 표현속에 들어 있습니다. 지성을 다해서 성경과 전통을 궁구하고 현실에 적응시켜 나간다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신앙의 여정에 따라 수반되는 체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오는 체험을 중심으로 성경을 이해하려면 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주관과 체험은 아무도 객관적으로 검정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존중은 할지언정 그것이 내 신앙을 지배하도록 버려두면 체험주의, 신비주의, 영웅주의의 병폐가 발생합니다.
성경과 전통의 장과 터 위에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고 체험을 존중하고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교회가 성경과 전통이란 든든한 기초를 벗어나고 이성과 체험이 교회를 지배해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터가 무너지고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옵니다.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 오늘날 우리 가정의 잘못된 부분을 한 가지만 찾아봅시다. 성경은 분명히 가정의 머리는 아버지요 남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머리로부터 몸으로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한다(엡 4:16)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예수 잘 믿고 자녀들이 예수 잘 믿는 것,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 가정이 진짜 큰 복을 받으려면 가장이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가정심방을 가서 축복기도를 해달라고 하면 그 아버지보고 기도하라고 한답니다. 또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할 때도 먼저 그 가장이 기도하는 것을 보고 난 다음 그 기초위에 도와주는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것이 참 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적 축복권이 담임목사에게 있다면 그 가정의 축복권은 가장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언약궤를 위하여 기도한 다음 자기 집을 위하여 축복하려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던(대상 16:43) 것입니다.
작은 복은 작은 한 식구를 통하여 임하지만 큰 복은 반드시 머리로부터 옵니다. 우리 집은 왜이리 복이 없는가 싶거든 가장이 축복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가장이 하나님께 복을 받으면 그 온 집이 복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국가적으로는 대통령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고 교회적으로는 교역자와 당회원을 위하여 기도해야 복이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제가 "심방을 자주 안할랍니다"라고 하니까 한 권사님이 "목사님이 오셔서 복을 빌어 주셔야 우리가 일년을 살지요" 그럽디다. 이분은 복의 원리를 아는 분입니다. 복은 위에서부터 위임받은 권위자를 통하여 머리로부터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상을 잘 만나면 수천 대까지 복을 받고 조상 잘못 만나면 삼사 대까지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조금은 억울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요 법칙인 것을 우리는 역사 체험적으로 배워왔습니다. 한국과 미국을 비교해 보십시오. 이러한 머리로서의 책임을 남자가 감당하지 못하는데 어찌 그 가정이 큰 복을 받겠습니까? 가정마다 터가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모름지기 가정의 가장이 되신 분은 나 때문에 우리 집이 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열심을 내십시오. 다른 식구가 복받기 위해서만 아니라 그들 때문에 나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복의 근원이 되고 복의 머리가 되십시오. 또 아직도 믿지 않는 아버지나 남편을 모시고 있는 성도님들 또는 신앙이 약한 가장을 모시고 있는 분들은 여러분 자신과 자녀를 위해서 그분들의 회심과 신앙의 성장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전도, 가장전도가 제일 어려운 전도이지만 그것이 전도의 최종 목표인줄 알고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는 가장이, 교회에서는 각 부서장들이 힘을 얻는 것이 교회부흥의 비결입니다. 소속국 팀장과 부속회장, 구역장과 전도사랑방 순장들이 열심을 내고 복을 받으면 부원들과 회원들이 힘을 얻고 복을 받습니다. 머리가 병들었는데 몸이 튼튼한 사람 보았습니까? 머리가 뇌성마비에 걸렸는데 몸이 튼튼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구역장이 살아야 구역전체가 삽니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직분자와 사역자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기가 맡은 부서와 식구들을 위하여 복을 빌어야 합니다. 구역원들은 구역장을 찾아와야 합니다. "내 남편을 구역장 만들어 주세요" "미래 집사가 감사드립니다" 얼마나 건강한 기도제목입니까? 부속회원은 회장을 찾아와야 합니다. "우리 회장님은 어디 있습니까?" 어린 신자의 속성은 두리번거리며 찾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찾아주고 세워줌으로써 우리 모두는 함께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된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할 때 막연히 기도하지 마시고 우리 목사님과 장로님, 우리 아버지와 선생님, 구역장과 회장의 이름을 불러서 기도하세요. 그것이 내가 복을 받는 통로가 되고 줄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믿는 다음의 큰 복은 사람 잘 만나는 복입니다. 우리는 정치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하고 형제자매와 친구를 잘 만나야 합니다. 좋은 교회에서 좋은 성도를 만나야 합니다. 부모를 잘 만나야 하고 배우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그런데 내 남편은 바람을 피우고 내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입니다. 정치 지도자는 자기만 생각하고 교회 지도자는 게으릅니다. 복의 터가 무너진 것입니다. 이 시대의 의인이 누굽니까? 터가 무너진 사실을 발견한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피하고 책임전가하고 분노하고 한탄하고 원망하고 이유를 찾았다고 똑똑한 척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다윗은 이 시편에서 스스로에게 가르칩니다. 신앙의 눈으로 자기를 깨우칩니다. 본문 4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위대한 학자는 어렵고 복잡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쉽고 간단하게 말합니다. 다윗은 스스로의 탄식이든 친구들의 한탄이든 "터가 무너졌으니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에 신앙으로 답합니다. 그것이 세상이다만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죄로 인한 혼란한 세계에 새로운 규범과 질서를 가지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지금 무너진 질서를 세우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화목의 제물이 되신 다음 성령이 임하셔서 정직하고 공의롭고 그 무엇보다도 은혜로운 정권을 이미 세우시고 집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권능으로, 당신의 나라를 일정한 규칙을 따라 법도있게 세우고 계십니다.
믿음으로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이미 보좌 위에 계셔서 명령을 발하고 계시며 우리 곁에서 역사하시며 우리 안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그분을 만나뵈옵습니다. "네가 불의를 버리고 정직하게 살겠느냐? 너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고 복의 통로로 삼으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아라. 이미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이 아니냐? 네가 진심으로 나를 위하여 기도하느냐? 그렇다면 네 아버지요 네 남편인 내가 말하노라 내가 너를 너희 가정과 너희 교회의 복의 머리로 삼고 복의 통로로 삼으마! 나는 악인과 강포한 자를 심판하기를 좋아하노라. 동시에 나는 의인의 의로운 일을 좋아하며 그 얼굴을 찾고 그 기도를 듣고 그 삶을 보노라. 조금도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이미 네 곁에 있지 않느냐?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의 분노와 다툼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나는 너희 가정에서 너희 교회에서 터를 다시 세우는 자니라. 나의 뜻에 순종하면 네 가정과 네 교회의 터가 다시 견고해지리라. 내가 통촉하고 감찰하리라. 복을 주어 융성케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지도자의 책임과 아울러 지도자에 대한 우리들의 책임을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