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을 경험하라 2002-09-16 15:04:21 read : 4116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나서 3장 1절∼9절 // 2002-09-01
1999년 4월 20일 콜로라도 덴버의 리틀턴(Littleton)에서는 에릭 해리스(Eric Harris)와 딜런 클리볼드라는 두 학생의 총기 난사로 13명의 학생과 교사가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들은 히틀러의 생일을 맞아, 이런 광기어린 학살을 감행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학생과 교사를 어떻게 죽였는지 아십니까?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학생들을 캠퍼스의 한 군데에 모아놓고, 한 사람씩 총구를 갖다대고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 이 질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살기 위해서 "믿지 않는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음흉한 미소를 띠며 그들을 살려주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포 분위기 가운데서도 확실한 신앙고백을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의 이름은 캐시 버낼(Cassie Bernall)이었습니다.
그녀는 총구 앞에서도 담대하게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 그리고 너희들도 역시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만 한다"(There is a God. You need to follow along God's path.) 이 말을 들은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네가 믿는 하나님의 곁으로 가라."며 총을 쏘았고, 결국 캐시 버낼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은 후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미국의 10대들 사이에서 엄청난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캐시 버낼의 순교 앞에서 자신의 비겁이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의 신앙적 부끄러움은 곧 각성으로 변화되었고 남아 있던 학생들 사이에서 자신들도 캐시 버낼과 같은 담대한 증인으로 서야 되겠다는 신앙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급기야 미국 전역의 각 학교에서는 "우리도 캐시 버낼의 길을 따르자"라는 운동이 벌어지게 되었고, 국기 게양대 앞 기도회는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만날 때마다 "국기 게양대 앞에서 만나요.(See you at the Pole)"라며 인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떠한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 사회에서도 총기사건과 같은 사건은 빼고 신앙각성운동이 있었으면 싶지 않습니까? 부흥을 경험케 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부흥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1. (부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희생의 씨앗이 필요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것을 명받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조국의 원수인 니느웨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풍랑을 불게 하셨으며, 끝내 요나를 물에 던져지게 하여 큰 물고기의 뱃속에 들어가는 신세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때 요나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요나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를 물고기 뱃속에서 구원하시고, 또 다시 니느웨로 갈 것을 명하셨습니다. 요나가 이 두 번째 명령에 어떻게 했습니까? 3절 말씀입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
성도 여러분,
요나가 니느웨로 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기 뜻을 접고 하나님 명령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려고 할 때 무엇이 동반되어야 합니까? 희생입니다. 희생은 하나님의 명령 앞에 자신의 뜻을 접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희생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요나가 자신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는 희생의 모습을 보여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이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눈물 흘리며 자신들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며, 용서해주실 것을 간구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부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희생의 씨앗이 필요합니다. 교회 역사를 보더라도, 부흥이 일어나는 순간에는 한 사람의 희생이 있었지 않습니까? 한 사람의 희생이 개인과 가정, 그리고 사회에 변화를 가져오고자 결단케 하지 않았습니까? 부흥은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한 사람의 희생만으로도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부흥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뭐라 하셨습니까? 요한복음 12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렇다면, 누가 죽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 저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아니지요. 희생의 씻을 뿌리는 주인공은 바로 "내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몫이 아닙니다. 바로, 나의 몫입니다. 내가 뿌려야 합니다.
지난 8월에는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중부지방과 남부지방은 이번 수해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보아야만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무너진 집을 바라보며, 어떻게 다시 세워야 할지 막막해 하는 분들도 있었고, 어떤 분들은 기르던 돼지가 모두 물에 수장되어 둥둥 떠다니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아야만 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참으로 귀한 일을 하신 분이 뉴스를 통해 보도 되었습니다.
바로 팔순의 강태원이라는 분입니다.
강태원 씨는 지난 8월 16일 KBS에 찾아와, 자신이 평생 동안 모은 전 재산, 현금 200억원과 부동산 70억원 도합, 270억원을 사회에 기부하였습니다. 이분은 실향민으로써,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단 한 푼도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부친의 말을 듣고 평생 모은 돈을 기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제가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 줄 아십니까? 요즘 우리 사회는 너무도 희생할 줄 모릅니다. 모두들 자기만을 위해 삽니다. 내 가정만을 살피고, 내 자녀만을 살피고, 내 삶의 터전만을 생각하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희생의 씨앗으로 내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국민 한 명이 일년 동안 기부하는 금액이 평균 얼마인지 아십니까? 약 5800원 정도라고 합니다. 이에 반해, 우리가 욕하는 미국 사람들은 일년 평균 70만원 정도를 기부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국민의 29%만이 기부하는데 참여하는 반면, 미국은 국민의 76%나 됩니다.
성도 여러분,
어느 때까지 다른 사람의 희생만을 부러워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내가 먼저 희생하고, 내가 먼저 내 것을 내놓을 수는 없겠습니까?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는 지금 이 순간 "목사님, 왜 우리 보고만 희생하며 살라고 말씀하십니까?"라고 말씀하고 싶은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가 희생하지 않으면서, 예수 믿는 사람이 희생하지 않으면서, 도대체 누구보고 희생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왕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면, 예수 믿는 내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좋지 않겠습니까?
요즘 우리 사회에는 1% 기부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1% 기부운동이라 함은 단순히 돈을 기부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노동력을 기부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까지 기부한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로써 우리도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면, 나눠야지요. 희생해야지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가 먼저 희생해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희생이 없이는 부흥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해서 희생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부흥은 결단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2. 부흥을 갈망해야 합니다.
20세기 최고의 강해 설교자라 할 수 있는 마틴 로이드 존스(D. Martyn LLoyd Jones) 목사님은 "오늘날 교회에 있는 우리들에게 부딪친 가장 큰 난제는, 신앙을 고백하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부흥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부흥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부흥의 주제가 거의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다른 방면에 너무 바쁜 나머지 부흥에 대해서 생각할 틈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부흥을 위해서 긴급하게 기도한다는 것은 더더욱 드문 일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은 부흥을 옛날이야기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단순히 이야기 속에 나타나는 역사를 알기 위해서만 부흥에 관한 것을 읽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 자신의 삶에서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지적한 현재 교회가 직면한 난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그 해답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교회의 상태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가 진정으로 무엇인지에 대하여 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마음속에 의도하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노력하라. 그리고 그 교회가 이루어지고 세워졌을 때 그 교회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보고,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과 대비하라."
무엇을 뜻합니까? 교회의 본질이 "부흥"에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어떻습니까? 교회가 부흥을 말하면, "교회가 고상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목사가 교회의 부흥을 말하면, 그런 목사 가리켜 세속에 물든 목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예, 그런 교회에는 발을 들여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부흥을 말한다고 해서, 교회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입니까? 부흥을 말한다고 해서, 목사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입니까? 오히려, 부흥을 말하지 않는 교회와 목사에게, 그리고 성도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3대에 걸친 목회자 집안에서 태어나 말씀 사역과 크리스천 리더십 분야에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는 토미 테니(Tommy Tenney)라는 목사는 [갓 캐처스(The God Catchers), 규장출판사]라는 그의 책에서 부흥을 태동시키는 힘을 "배고픔"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솔직히 말해 부흥의 선구자는 훌륭한 설교자도 아니요, 훌륭한 복음성가 가수도 아니다. 진정한 부흥을 태동시키는 선구자는 바로 우리의 '배고픔'이다."
지난 주, 부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드렸죠? 부흥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 부흥입니다.
그렇다면, 부흥을 경험하기 위해서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배고픔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17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18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편 34:17-18절)" 그뿐입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8절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다시 한번 묻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아니,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예배드리러 주님 앞에 나올 때 그냥 나오지 마세요. 갈급한 심령으로 나오세요.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와야지 그저 나와서 목사 얼굴보고, 성도 얼굴 보고 돌아가겠다는 마음으로 와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을 때, 니느웨 성의 왕이 어떻게 합니까?
7절로 8절 말씀입니다. "7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여기서 먹지도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금식하면서,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라는 것 아닙니까?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회개하고 바른 삶을 살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주실 수 있도록 하라는 것 아닙니까?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벌하지 않고 용서하여 주시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고자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더 큰 은혜가 임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만나고자 갈망하는 자를 만나주시고 치유해주십니다. 회복시켜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 자리에 나오시면서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나오셨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마음의 그릇은 텅 빈 상태입니까? 아니면,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는 상태입니까? 만약, 나의 마음에 세상에 대한 염려와 근심, 그리고 세상이 주는 이익으로 가득 차 있다면, 이 시간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두 아이를 종으로 넘겨주어야 할 처지가 된 여인이 엘리사에게 와서 자신의 상황을 말할 때, 엘리사가 뭐라고 그녀에게 명했는지 아십니까? 빈 그릇을 빌려오도록 했습니다. 그것도 조금이 아니라 많이 빌리라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 빈 그릇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아시지요? 기름이 가득 채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텅텅 비어 있을수록 하나님이 채우실 수 있는 자리는 점점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을 비우세요.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자 하는 간절히 열망이 여러분 마음에 넘쳐나길 바랍니다.
3.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부흥을 갈망한다고 해서 부흥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인위적인 노력을 한다고 해서 부흥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존 암스트롱(John H. ArmStrong)이라는 목회자는 "우리는 부흥을 일으키지도 촉진시키지도 못한다. 부흥은 하나님과 성령의 각별하고도 독특하신 행위이다.……우리는 이 축복을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강요할 수 없다. 우리는 감히 이것을 요구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부흥을 주실 때까지 소극적으로 기다리고만 있어야 합니까? 성도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학자인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는 부흥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인간적인 재주에 의존하는 것은 교만한 일이며, 터무니없는 일이고, 또한 성과를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갱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 생활이나 교회 체제 면에서 냉담한 태도를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의 성령의 불을 꺼버리고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막았다면, 그 불을 다시 켜는 것은 그들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소성케 하시는 강림을 통해 갱신시키실 수 있으며, 이 일을 위해 우리는 그분이 역사하시기까지 끈기 있고 지속적인 그리고 회개하는 기도를 드리며 기다려야 한다."
이 마지막 한 마디의 말-"우리는 그분이 역사하시기까지 끈기 있고 지속적인 그리고 회개하는 기도를 드리며 기다려야 한다" - 무슨 뜻입니까? 부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회개한다는 말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말씀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졌던 나의 인생을 다시금 말씀 위에 세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니느웨 백성들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이전까지는 자신들의 삶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회개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이 없었습니다. 왜 말씀이 없었습니까?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접해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순간 니느웨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악했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올 때, 비로써 회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렸을 때에는 무엇이 죄인지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 내 모습을 내놓으면, 내 모습 하나하나가 얼마나 죄악된 것으로 가득 차 있는지 알게 됩니다. 느헤미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성벽 재건을 한 후, 수문 앞 광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말씀을 듣지 못했을 때에는 이방인들과 결혼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말씀을 들은 후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것임을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이방 사람과 절교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부흥은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말씀이 없는 부흥은 광기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은 열정만 있으면 그만이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처음 주님의 일을 시작할 때에는 열정만으로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열정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열정은 식어질 수 있어요. 열정은 누그러질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열정 하나만을 붙잡고는 주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말씀에 기반을 두지 못한 신앙은 모래 위에 쌓은 집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에서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이 시대를 지탱해 나가기 위해서는 열정만 가지고는 안 되고, "불붙는 논리(Logic on fire)"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명확한 신앙의 지식으로 무장한 사람만이 이 시대-특별히 혼돈에 빠진 이 사회를 지탱케 하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J. 도그바인이라는 사람은 "유일하게 참된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했으며, 존 칼빈(John Calvin)은 "진리에 기초하지 않으면 그 어떤 신앙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 한다"고 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습니까?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우리는 진리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의 기분을 어떻게 하는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습니까? 말씀을 들어도 내 생각에 맞으면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말하고, 그렇지 않으면, 목사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교회 밖을 나서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지 말라는 대제사장의 경고를 받았을 때, 담대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외쳤습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은 순종하라고 있는 것이지, 취사선택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순종뿐입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세요. 말씀으로 돌아가셔서 참된 부흥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정리.
부흥을 경험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 한 몸, 하나님을 위해 쓰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희생을 통해서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헌신을 통해서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희생의 씨앗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세요. 주님 앞에 나올 때, 영적 배고픔을 느끼셔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 "주님, 내 영혼이 지쳐 있습니다. 주님께서 만나주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만져주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로해 주옵소서. 나를 소생시켜 주옵소서." 간절한 마음으로 나오세요.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을 만날 수 있고,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을 통해서 살 수 있습니다. 또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내 삶을 평가해보아야 합니다. 말씀에 빗대어 볼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면 즉시 회개하고 말씀으로 돌아오세요.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갈급한 심령을 채워주시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바라기는 춘천중앙교회 온 성도 매순간 하나님을 갈망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 안에 참된 평안과 부흥을 누리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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