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태생인 재임스 스튜아트 (James Stuart Stewart, 1986~?)는 1960년 공식적으로 은퇴하기까지 목회자와 교수와 강사로 봉사했다. 그의 설교는 복음적인 강조점과 윤리적인 강조점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의 설교집이 여러권으로 출간되었으나. 설교에 가장 의미있는 공헌을 한 설교집은 [하나님의 전령들 (Heralds of God)] 이다. 그 책에 에딘버러대학에서 그가 행한 와락강좌 (Warrack Lectures)가 수록되었다. 여기에 소개되는 내용은 “설교자의 세계 (The preachers World)"라는 제목이 붙은 첫번째 강좌에서 뽑은 것이다.
거기에서 스튜아트의 설교 철학이 다루어졌다. 다른 강좌의 제목들은 “설교자의 주제”. “설교자의 연구”. “설교자의 기술”. “설교자의 내면생활”등이다. 앞으로 이 난에서 “설교자의 기술(테크닉)”에 대한 강좌 일부를 소개할 예정이며 이 강좌에서는 명료한 언어사용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람의 본래 마음을 쏘아 반대와 모반감정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많은 말을 하지 않고서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전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자기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주제넘고 기만적이라고 선언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는 말이지요.
아니면 하나님의 부성애 교리를 생각해 봅시다. 아직도. 그 교리를 받아들여 그 따스하고 위안어린 빛 가운데서 자신을 쏘이면서도 실제 형제애와 사회 윤리의 영역에서 그 교리를 적용해야 하는 당혹하고 냉혹한 현실은 거부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단순한 복음을 달라”고 울부짖습니다. 그러한 도피주의가 다시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는 셉입니다.
선교의 도전과. 보편 교회 개념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초국가적(超國家的)인 시야를 자기의 생각에까지 진전시키지 않은 사람치고 진정으로 깨어있는 사람이 없듯이. 근본적으로 항상 세계선교를 지향하는 교회가 아니면 그 어느 교회도 애처로운 경건주의의 침체에 빠진 교회에 불과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진리가 침투해 들어가야 하는 완고한 요새가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선교사업을 몇몇 열광주의자들의 몫이나. 지엽적이거나 여분으로 해야할 일로 계속 생각하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크리스챤마다 마음과 정성을 기울여 전념해야 하는 것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니면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행진하기 위하여 자기의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설교자는 사람들에게 호소하여 갈보리 언덕과 오순절에 시작된 위대한 십자군전쟁에 예수님과 합세하라고 촉구해야 합니다. 온 땅에 주님의 영광이 가득할 때까지는 십자군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좁은 소견이 판을 치는 곳에서 설교자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라도 그런 소견을 가지고 만족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해 주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면서 마지막 날 그리스도 앞에 서서 “주님의 세계선교에 저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지 반성해 보도록 촉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희석시키려는 모든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설교자의 임무는. 예배를 드리고 나서 사람들이 “참 멋진 설교야”. “참 놀라운 웅변적 호소야.”라고 말하면서 나가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이 오늘 하나님을 만났느냐 그렇지 못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전혀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나기보다는 체스터튼 (G. K. Chesterton)이 묘사한대로 “언제나 건전하고 세련된 수많은 단순함”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듯이 사도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첫번째 설교를 마쳤을 때. “저희가 듣고 그 웅변에 사로잡혔다”라든지 “그의 논리와 그의 억양을 비평하였다”든지. “지루해 하고 무감동적이고 경멸조의 마음을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실상에 너무 가까이 있을 때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도피주의자의 간계의 전신갑주를 입습니다. 그러나 그 날 베드로의 설교주제―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가 여전히 설교자 여러분의 기본 메시지임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오래 전 예루살렘에서 그 메시지가 선포될 때와 똑같이 지금도 그 메시지는 역동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여전히 그때와 같이 지금도 “강력을 파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감동을 주고 마음을 찌르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현대인의 마음이 좌절과 희망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감에 얼마나 깊이 지배당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제 우리는 도피주의적인 자세를 극복하고 대처하여 그보다 더 큰 긴장을 구축하기 위하여 실상 (사실상)을 향한 이상한 열정이 존재함을 관찰해야 합니다.
비논리적이라고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에 기독교 대다수 사람들의 관계를 지배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강압적인 힘을 가지고 끌며. 마음을 흔들어 놓고 당혹하게 하며.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무엇인가를 확신케 하는 것이 있습니다. 실상에서 도망쳐 나오는 바로 그 순간에 실상을 향하여 나아가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서이다”라고 말한 것이 “나의 하나님. 주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가 된 것과 같습니다.
실상에 대한 굶주린 갈망이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무언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은근히 돌출되고 있음을 의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사역에서 가장 힘있는 방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한 부르짖음은 모조품과 같은 것이나 사람이 손을 탄 인위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무색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반드시 웅변적이거나 영리하거나 변증법적 논리에 능란할 필요는 없습니다. “반드시 진실하기는”해야 합니다. 거기서 실패하면 비극적인 심연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말할 수 없이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진실이 아닌 냄새를 풍기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중으로 손해를 끼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두가지 사항을 생각해 보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할 때. 한 주간 내내 엄격한 실상과 씨름을 하던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회중은 무거운 근심과 극심한 유혹과 고독감과 영웅주의. 일을 너무 많이 하여 문제된 것과 일을 너무 많이 하지 않아서 문제된 것. 육신적인 긴장과 정신적인 고갈 등.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만일 설교자가 회중이 체험한 엄격한 사실들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복음을 설교한다면 그들에게 잘못을 행하거나 그들의 갈등을 조롱하는 셈입니다. 그러한 식으로 일하는 것의 허망성을 그들은 대번에 알아 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론적으로 아는 체하면서 어둠 가운데 씨름하는 영혼들에게 별 의미가 없는 학문적인 것을 제공한다는 것은. 그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그들이 구속받기를 간절히 열망하고 계신 주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를 할 때 실상을 외면한 또 다른 잘못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겪는 어려운 문제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기 보다는―휘티어 (Whittier)는 그것을 “일을 미치도록 미궁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불렀다―오히려 단순히 크리스챤 신앙의 본질 자체에만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복음은 사실주의적인 복음의성질상 사실에 단호하게 맞서서 부수어 냅니다. 복음은 그 어느 것도 회피하지 않습니다. 결코 운명이나 좌절이나 죄나 사망같은 어둡고 복잡한 문제들을 대강 넘겨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는 입에 맞지 않는 사실들을 경건한 체하는 투나 용이한 위안으로 얼버무리거나 감싸려 들지도 않습니다. 불쾌한 질문을 받고서. 섭리나 진행에 대한 고지식하거나 상투적인 표현으로 힘을 북돋아주는 척하면서 결코 회피하지도 않습니다.
복음은 인생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위협적이고 잔혹한 처지를. 눈을 부릅뜨고 바라봅니다. 복음은 전적으로 용감한 힘을 가지고 일을 대처합니다. 복음의 힘은 유토피아적인 망상이 전혀 없다는데 있습니다. 사람의 비전 속에 골고다 언덕을 강력하게 투영시키고 그것을 바로 보도록 강권합니다. 복음에 맞서는 마지막 도전은 감상과 사실을 무시해 버리는 자세입니다. 복음은 진실성에 있어서 광대합니다. 복음의 사실주의는 소멸하는 불입니다.
우리가 담당해야 하는 메시지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손에서 복음이 사실 아닌 것으로 채색되는 것은 얼마나 심각한 실수입니까! 물론. 이는 온 교회와 관련된 이슈입니다. 개인 사역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직적인 종교가 스스로 전하는 메시지를 실천하지 못한다고 의심받는 것같이 기독교의 증거를 심각하게 저해하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사실성을 향한 갈망을 대면하여 답변하여야 하는데 최소한 세 방향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예배에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 형식들이 모든 점에서 온전한 진지함과 진리가 울려 퍼지는 소리를 여지 없이 전하는 것입니까.
두번째는 복음의 사회적 적용에 관련된 것입니다. 너그럽고 고상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의 그릇된 모습과 인간의 고통들을 보고는 “고통과 족쇄 속에서 신음하는” 형제들을 돕고자 하는 불타는 열망을 가집니다. 그런데 그들은 교회가 섬뜩할 정도로 무력에 빠져 행동하지 못하며. 움직이기 힘든 조직에 느긋한 마음으로 질질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고 역겨운 나머지 참지 못하고 결국 교회에서 뛰쳐 나가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한 일이 정말 너무 자주 일어나지 않던가요.
세번째는 크리스챤의 연합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형제애를 가지고 결속해야 한다고 호소하면서도 교회 자체 속에 모든 사람이 알아 볼 만큼 망하게 하는 분쟁이 있다면. 그것이 합당하고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킬 만한 일인가요.
반(反)기독교세력들의 압박과 공격 때문에 모든 신자들이 서로 전열을 가다듬어 함께 진군해 나가지 않으면 안될 때가 오늘입니다. 더구나 과거의극단적인 개인주의에 대한 반감 때문에 은 세대들은 공동체의 영역에서 새로운 체험을 추구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 속에서 참된 교제를 어지럽히고 크리스챤들을 산산이 흩어지게 하는 파당적인 충성심을 고수하거나 영구화하는 것이 진실한 것입니까 “의사여 네 자신을 치료하라.” 이러한 방식들로 사실성에 대한 요구가 교회의 증거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에게 주로 관련된 것은 보다 개인적인 이슈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지혜롭다면 사역을 시작하면서 아예 사실성을 자기의 부단한 요건으로 삼겠다는 공언을 할 것입니다. 성경의 정련된 언어로 말하자만. “이는 지혜를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희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삼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확실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리챠드 박스터 (Richard Baxter)는 이 문제에 대해 평이한 몇마디 말을 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사람들의 영혼에 영구한 효력을 가진 메시지를 가진 우리가. 그렇게 연약하고 못나게 행하고 그다지 신중하게 행동하지 못하고 경박하게 처신함으로 말미암아 전체 일이 우리의 손에서 와전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고 망가뜨려지고 죄인들이 회개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굳어지게 된다니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조적인 방식으로 가장 예리하고 분별력있는 당대의 두 사람에게 19세기의 한 설교자를 통하여 나타난 효력에 대한 의미있는 기록을 살펴 봅시다. 탈로취 (Tulloch) 학장은 자신과 훼리어 (Ferrier) 교수가 1858년 어느 주일 아침에 써레이 가든 음악당에 갔던 일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두 사람 모두 너무나 깊은 인상을 받은 나머지 생생하게 살아있을 동안에는 그 인상을 전하고 싶었다. 우리는 거기를 나오면서 이렇게 고백하였다. 그것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지 그리고 나는 그 교수가 표현하는 주목할만한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러한 것을 듣는 것이 내게 유익할 것이라고 느꼈지. 그것은 사실에 너무나 가까이 접근해 있었어 그 설교는 내가 오랫동안 접촉해 왔던 것 중에서 가장 사실적인 것에 관한 것이었다.” 이 기록은 참된 설교자의 능력에 있어서 기본적인 요소를 요점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에 너무나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이를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다음의 몇가지 교훈적인 사항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예배에서 실제적이 되라' 예배에서 다른 사람을 인도하려면. 여러분 스스로 예배 행위에 진실되게 참여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증적인 사항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강조할 필요가 있는 사항입니다. 예를 들어. 찬송을 부르는 시간인데 성경의 교훈을 슬쩍슬쩍 곁눈질 한다든지. 광고할 사항을 가지고 안절부절하지 못한다든지. 강단 주위를 쉬임없이 움직인다든지. 누가 나오지 않았나를 알아볼 양으로 회중석을 두리번 거리는 등의 불필요한 행동으로 채우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주께 향하라고 해놓고 다 함께 찬미하는 일에 자기 목소리를 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더구나. 여러분 자신의 심령 속에서 예배의 자세를 실현함으로써만 섣부른 매너리즘과 자의식의 광채 속에서와 더 나아가 사람을 죽일 정도로 역겨운 “강단에서 내는 상투적인 목소리”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가장 잘 발견할 것입니다. 바로 강단에서 내기 쉬운 상투적인 목소리야말로 진실한 분위기를 깨는데 있어서 그 어떤 것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설교 자체가 예배의 한 행위임을 기억하고. 그리스도를 선양하는 성례가 그러하다면. 그러한 것이 여러분을 그 허다한 함정에서 건져내지 않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진실로 예수님을 향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 예수님을 알게 하고 있다면. 거드름을 피우거나 위선적인 자세를 취하거나 독단적인 교만의태도를 취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입술을 통하여 나올 때 호통을 치거나 욕설을 퍼붓거나 잔소리를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콜릿지 (Coleridge)는 어느날 찰스 램 (Charles Lamb)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설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램은 “나는 당신이 다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중심에 계실 때를 일러주는 침묵을 창출하는 설교는 다른 설교입니다. 예배가 진실할 때. 사람이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어떤 조짐이나 부수러기를 부수는 데는 이와같이 좋은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중요성을 의식하면서 강단에 올라가는 하나님의 사역자는 정말 보기에도 애처롭고 두려운 정경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용모가 괴어 있는 연못같이 짐짓 고요한 체하여 지혜있고 비중있고 심오한 착상의 견해를 취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보이는 유의 사람들이 있다. 이런 이들은 “나는 신탁 (神託)경이니 내가 입을 열면 아무 개도 짖지 못하게 하라.”는 식이다.
경직되고 가식적인 형식을 교정하는 것은 단정치 못하고 임시적인 방식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캠브리지의 버나드 매닝 (Bernard Manning)은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강단에서 형식 없이 제멋대로 구는 것이 진지함과 순전함에 대한 믿음을 유발시킨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그것은 설교자들에게 나쁜 취향을 유발시킬 뿐 아니라 청중들에게 의자 밑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일으킨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같이. 또는 젊잖은 사람들이 거기에 하나도 없는 것같이 하찮게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행동하지 말라.”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쉽게 만나는 많은 위험에서 설교자를 건져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심령으로 하여금 예배 분위기에 젖어들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아주 가까이 계시다는 외경심으로 압도당하고 감격적이 되는 것입니다.
비평적인 데이비드 흄 (David Hume)이 하딩톤의 브라운 (John Brown)에게 한 대단한 찬사의 말이 생각납니다. “나는 바로 이런 사람을 원한다. 어떤 사람이냐 하면 자기가 말하는 바로 그대로를 믿는 사람이다. 그는 마치 예수님이 바로 옆에 계신 것같이 말한다.”
'어투에 있어서 진실하라'
과장된 것이나 허풍어린 것. 싱거운 것이나 아는 체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피해야 합니다. 어느 시골 교회에서 설교를 하면서 학식있다는 설교자가 한 말이 기억나는데 그런 식으로 하지 마십시오. “아마 지금 여러분 중에 어떤 이들은 날 보고 유드고주의자 (Eutychianism, 설교를 길게 하여 졸리게 하는 사람이라는 뜻―역자 주) 는 아닌가 하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기독교를 20세기 회중들의 필요와 여려운 문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하려고 할 때. 니케아의 언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던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하면 도움을 주기는 커녕 방해거리를 제공하는 셈이겠지요. 여러분이 회중을 향하여 과거의 유산인 부드럽지 못한 종교 술어를 마구 쏘아대고는 그 술어를 그들의 체험 용어로 다시 번역하는 일을 그들에게 맡겨버리는 것은 순전히 태만 때문입니다. 그러한 일은 그들의 일이 아니라 여러분 설교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평이한 단조로움과 지루하고 하잘것없는 것으로 조잡하게 만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참된 것이 진실되게 들리지 아니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제거하여 버리십시오.
웅변술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십시오. 스펄전은 말했습니다. “학식있는 형제가 장엄한 웅변술로 회중들의 머리 위에 불을 퍼붓고 있다면. 그는 자기의 웅변을 키케로와 데모스데네스의 덕택으로 돌릴 수도 있습니다. 그가 좋아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웅변술을 성령에 기인한 것으로 말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저속한 표현에 마음이 가거든 그것을 단호하게 억누르십시오. 의회나 신문에서나 공중 연단에서 쓰이는 높은 소리를 내는 웅변어투를 신뢰하지 않고 참아내지 못하는 세대가 강단에서 그러한 어투를 들으면 깊은 감동을 받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의식적인 인위적인 투에 젖어 있다는 느낌을 일단 사람들에게 주면. 그들이 여러분이 말하는 것들이 사실적인 것들을 장악하고 있다고 믿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넘치는 은혜 (Grace abounding)] 라는 책을 쓴 존 번연(John Bunyan)은 첫머리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이 책에 나타난 것보다는 훨씬 더 고상한 데까지 올라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세련되게 꾸며보려는 술책을 거부한데 대한 솔직한 이유를 이렇게 제시합니다. “나는 감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나를 시험하여 가지고 노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리고 지옥의 번민이 나를 사로잡고 있을 때 나는 재미있게 장난을 치지도 않았다. 이러므로 나는 그러한 것들을 다루면서 '말 놀이'를 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평이하고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를 표현할 뿐이다.” 여러분은 설교를 통해서 사실적인 것들을 다루어야 합니다.
시험과 짓누르는 슬픔. 죽음의 두려움. 그리스도의 은혜 등을 다루어야 합니다. 그 주제들을 다룰 때 사실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화려한 문체나 조숙한 체하는 자세에 빠질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조셉 파커 (Joseph Parker)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련되고 완전하고 우아하고 예술적인 작은 손질을 많이 가한 완성된 설교를 하고 있다. 주님은 그러한 잡동사니들을 그것들의 하얀 재가 더 이상 발견되지 않을 때까지 불태워 버린다.” 그렇다고 설교에서 정서를 없애버리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충고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는 것이 무엇인지―인간 곤경의 깊이와 하나님 처방의 기이함―아는 사람치고 진정한 느낌을 가지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라코데어 (Lacordaire)는 설교자는 호렙산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치기 전에 그는 메마른 반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만지자 마자. 사막을 흠뻑 적시는 물줄기가 쏟아져 나온다.” 내가 여러분에게 경계시키고 싶은 것은 날개를 단 것같이 설교자의 말을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날라다 주는 순전한 감정의 조짐이 아닙니다. 소피스트(Sophist)들의 학교에서 합법적인 효과를 내려고 자의적으로 애쓰는 것은 하나님의 시은좌(施恩座)와는 전적으로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헨리 와드 비쳐(Henry Ward Beecher)는 “위대한 설교는 사람들에게 불쾌한 것이고. 과시적인 설교는 마귀의 시험이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할 때는 여러분의 입에 생명과 죽음의 이슈가 달려 있습니다. 설교를 웅변투의 불을 질러대는 과시로 만들거나 수사술의 흐름을 과시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정말 비극적이며 경박한 소치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언어를 경제적으로 쓰는 모습에 놀란 적이 있습니까. 룻과 나오미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문학적인 효과를 내려고 애쓴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짧고 조용하고 거의 짤막하게 끊어진 문장들로 전체 이야기가 묘사됩니다. 한마디도 쓸데없이 낭비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얼마나 놀라운 정서를 담고 있으며. 얼마나 진정하고 심오한 감동을 줍니까!
다윗이 방심했을 때 자신의 영혼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어떻게 깨뜨렸는지 묘사하는 장(章)을생각해 보십시오. 표현이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라는 그 장 마지막. 아주 조용한 말이 주는 압도적인 효과에 필적할만한 다른 웅변적인 현란한 표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고사하고 복음서에 나오는 주님의 고난에 대한 기사들을 보십시오. 그 기사들의 신중한 표현이 우리의 허망한 수식을 얼마나 책망합니까. 하나님 말씀의 빛에 비추어보기 시작하면. 흩날리는 듯이 조야한 선정적 표현이 얼마나 버릇없고 조잡한 것인지요.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리고 치료하기에 능한 말씀으로 무장하여 파견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리차드 백스터가 그 시대의 설교자들에게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번드르한 웅변적인 수사로 임시 땜질하는 것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릴 수 없다.” 여러분의 언어에 있어서 진실하십시오.
끝으로 나는 이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메시지에 대한 여러분의 전체 태도에 진실하라' 만일 세상에서 가장 큰 소식을 전해야 할 사람이 냉담하고 냉정하고 무책임하고 둔할 수 있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설교자가 전하는 소식이 아무런 기백이나 열정이나 강함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 세상의 다른 어느 것보다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믿을 사람이 누구겠으며. 설교자 자신이 무감동하며 아무런 마음의 느낌을 가지지 않고. 영적인 눈이 멀게 되어 고통을 당하며. 자기 말을 자신의 태도로 묵살시켜. 버린다면. 그가 전하는 소식을 누가 믿겠습니까? 챨스 웨슬레의 찬송시만큼 여러분의 입술에서 부단히 나와야 하는 기도는 없습니다. 이는 분명히 그가 쓴 찬송시 가운데 가장 특징있는 것입니다.
순전한 하늘의 부를 나누어 주어 거룩한 사랑의 화염을 내 작은 마음의 제단 위에 일으키기 위하여 위로부터 오신 주여.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 불길이 타오르게 하소서
여러분이 세움받아 선포하게 될 소식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능력과 위대한 영광으로 역사 속에 침투하신 소식. 사람이 지독한 곤경에 빠져 있는데 두번째 아담이 싸우러 오셔서 구출하셨다는 소식. 노골적인 악이 최대로 승리를 거두는가 했더니 십자가로 말미암아 단번에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패배를 하였다는 소식.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살아계시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임재하신다는 소식.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세력이 세상에 들어 왔다는 소식.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입술로 말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획기적인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진리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돌려 버리고 맙니다. 그것은 힘에 있어서 전율적이며. 기이함에 있어서 현란할 정도입니다. 분명하게 말하여 판에 박힌 목소리로 이러한 주제들을 말한다는 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너무 익숙하여 준비없이 무감정한 자세로 말한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교회 예배를 인도하면서 아무런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으며 어떤 중요한 일도 하고 있지 않다는 식으로 예배를 인도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어야 합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Robert Louis Stevenson)은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교회에 갔었다. 크게 침체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고작 이것 뿐이라면. 과연 이것이 가치있는 것이겠습니까? 필립 시드니 (Philips Sidney)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나는 퍼시 (Percy)와 더글러스 (Douglas)의 옛 노래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트럼펫으로 감동받는 것 이상으로 감동받은 적이 없다.” 체스터튼(G.K. Ghesterton) 멎설교자 여러분에게 맡겨진 것으로서 더욱 무한히 마음을 감동시키는. 말씀이 육신이 된 이야기를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역사의 척추에 가해진 강한 타격과 같은 믿기지 아니하는 간섭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그렇게 혼란스런 주장이 오가는 범신론적인 그럴듯한 분위기에서 어리석게 논란하고 서 있느니. 차라리 법정에서의 가야바와 같이. 하나님 모독에 대항해 고함을 지르며 우리의 옷을 찢는 편이 훨씬 낫다.” 신약의 설교자들에 관하여 강하게 부딪혀 오는 요점은 그들이 위대한 계시의 영광에 강한 충동을 느끼고 사로잡혀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정말 죄지은 사람들에게 무섭게 외쳤습니다. “들으라. 우리는 너희에게 화해와 새로운 시작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또한 종교를 위한 가장 희미한 운명주의 밖에 가지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뛰어나게 선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황폐하고 약하고 고독한 영혼들에게 가서 확신넘치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너희의 머리를 들라. 너희는 너희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죽음이 무정하게 어김없이 다가온다는 생각으로 무서워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는 “기뻐하라. 그리스도께서 이기셨도다. 사망이 죽어 일어나지 못한다.”라고 외쳤습니다.
세상이 아직도 굶주릴 정도로 갈망하고 있는 엄청난 소식은 바로 그것입니다. 백번 지고 나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출발이 아직도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 기도하지 않은 채 일생의 절반을 살며 하나님을 불신하다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과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길이 아직도 열려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인생의 여러 요구들 때문에 전혀 부당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염려와 곤고함과 눈물의 세월을 보낸 다음 아직도 활용하기 위하여 비축된 능력이 헤아릴 수 없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가장 문제되는 결박을 물어 뜯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었다가 승리와 불멸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에 죽음은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음을 발견하는 것. 바로 그것이 영광스런 소식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 영광스런 소식이 너무나 섣부른 우리의 방식으로. 둔하고 평범한 것이 되어버리는 일이 잦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둔함과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러운 소식이 초자연성을 잃게 되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설교하는 사실들의 기이함을 언제나 의식하고 있고 여러분이 다루는 이슈의 긴박성을 언제나 생각하고 있다면. 여러분 사역의 정도대로 눈에 보이는 열매를 얻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주일 아침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통하여 이 사람들을 위하여 역사하고 계신다. 예수님이 보실 때 이 날은 어떤 사람들의 영혼을 추수하는데 있어서 중차대하고 예배는 결정적일지 모른다”는 외경심에 젖어 있고 늘 감격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모든 영혼마다 나름대로의 절박한 필요를 가지고 있음과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러한 필요를 만족시키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전혀 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열매를 목표하십시오. 능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하십시오. 비록 여러분의 회중이 적다 할지라도 영혼마다 굉장히 고귀하다는 것을 인식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친히 당신의 약속대로 거기 회중 가운데 계시며 가장 평범하고 가장 보통의 교회를 하나님의 집으로. 하늘 문으로 세우고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이 날은 너희의 귀를 통하여 성경이 응하는 날이다. 이 날은 구원이 이 집에 이른 날이다”라고 하시는 주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럴 때에. 죽은 형식과 판에 박힌 상투적인 설교. 그 자체의 높은 요구를 은근히 부인하는 것이 되었을 설교가 능력과 열정을 가진 설교로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강하고 결정적인 사실의 요점이 나팔처럼 사람들의 영혼들을 깨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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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부로우더스(John A. Boradus, 1872-7895)가 본 설교의 본질]
가장 오래되고 가장 영향력있는 설교에 관한 책 가운데 하나는. 1870년 존 부로우더스가 쓴 [설교 준비와 전달에 대한 고찰 (A treatize on the preparation and Delivery of Sermons)] 이라는 책이다. 그 책은 편집자가 세번 바뀔 때마다 다시 편집되어 출간되곤 했다. 다른 많은 설교학 책의 저자들도 부로우더스의 이 책을 참고하였다.
'미국 주석 시리즈 (American Commentary Series)' 중 부로우더스의 마태복음 주석은 많은 신약학자들에게 고전(古典)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버지니아와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여러 교회의 목회자로 사역하다가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그린 빌레에 있는 (Baptist Seminary)의 학장이 되었고. 1889년에는 켄터키 주의 루이스 빌레의 (Southern Baptist Seminary)의 학장이 되었고. 같은 해에 예일대학에서 라이만 비쳐 설교학 강좌 (Lyman Lectures on Preaching)를 담당하였다.
여기에 소개되는 내용은 “설교 준비와 전달에 대한 고찰”이라는 책의 서론에서 뽑은 것이다. 이 발췌문은 부로우더스가 설교의 본질에 대해서 가지는 관점들을 보여 줄 것이다.
설교는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거짓 종교치고 종교적인 강화와 권면을 듣게끔 정규적으로 대중이 함께 모이는 기회를 제공하는 적이 없습니다. 유대교가 선지자들의 사역을 통하여 그런 모습을 취합니다. 그 후에는 유대교가 회당에서 율법을 낭독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통하여 그러한 양상을 띄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유대교는 나중에 기독교로 발전되어 나갈 종교였습니다.
어떤 이방 종교의 교사들이 설교의 힘을 알아차리고 때로는 이러한 방면에서 기독교를 모방하려고 애를 쓰기도 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보통 배도자(背道者)로 일컬어지는 로마 황제 쥴리안 (Julian)은 이교 철학자들에게 크리스챤들이 행하는 것과 같이 매주 설교하라고 지시를 하였다고 합니다. 중국이나 일본. 인도 등지에서는 설교와 같은 것을 받아들인 경우가 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려지기는 설교의 기원과 역사는 독특하게 기독교의 제도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서 지정된 위대한 방식은 설교입니다. 개인이든 모인 회중에게든지 말로 전해진 말씀이 설교입니다. 그 어느 방식도 이것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가르치는 재능이 있고 진리로 불타는 영혼을 소유한 한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그 사람은 그 진리가 자기를 구원하였다고 믿고 있으며. 그 진리가 다른 사람도 구원할 것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동료에게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면서 말하되. 그 말을 하는 사람과 말을 듣는 사람 사이에 전율어린 마음의 공명(共鳴)이 오고 갈수록 그 두 사람은 서로를 더높게 고양시켜 더 심오한 생각을 가지게 하고. 정말 감동이 넘치는 정서의 자리로 올라가게 하고. 결국 세상을 초월하는 불병거를 타고 가는 것같이 됩니다. 거기에 사람을 감동시키는 능력과 성품에 영향을 끼치고 생명과 운명에 영향을 끼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그 어떤 인쇄술에도 결코 담을 수 없습니다.
“목회의 일”은 정말 중요합니다. 모든 설교자들은 그 일을 수행하는 데 부지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이 설교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강단의 힘이 부족한 것을 완전히 보충할 수도 없습니다. 둘 다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합니다. 각각 서로 보완을 해주지 않으면. 그 어느 한쪽만 가지고는 가장 복있는 결과들을 이룩할 수 없습니다. 설교를 하는 사람이 인애어린 목회자요 믿을만한 상담자요 젊은이나 노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의 친절하고 고상한 친구이고. “그 사람의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가 나올 때” 사람들의 마음 문은 신비의 힘에 의해 스스로 열릴 것입니다.
그러나 심방을 하는 사람이 설교자일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그가 철저한 성경지식을 가지고 있고 고상한 인생관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유능하고 열정어린 강론이 확신과 놀라운 감동을 불러 일으킬 만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으로 녹아드는 경우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신으로 늘 사람들 앞에 서있고.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 말씀의 권위와 신성에 늘 젖어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고통을 받는 사람. 슬픔에 처한 사람. 시험을 받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을 때. 그의 심방은 의미도 없는 사람들에게 의미와 힘을 갖게하는 것일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역자가 이런 여러 분야의 노력 가운데 어느 한가지에 특별히 매력을 느낀다는 생각이 들면 그 사람은 역시 그렇지 못한 다른 분야의 노력에도 부지런하도록 자신을 부추겨야 할 것입니다.
종교의 “의식(儀式)"들이 교훈적이고 인상을 끼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들을 교육할 때 하는 것같이 구약시대에는 그런 의식들이 사용되었습니다. 심지어 최소한의 의식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마저 근본적인 사실들을 예증합니다. 또는 단순하지만 인상깊은 두 성례들을 통하여 자주 깊은 종교적인 인상을 끼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규례들은 단지 예증만을 위한 것이며. 가르치고 죄를 깨닫게 하고 사람들을 얻고 붙잡아 주는데 도움을 주는 것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능력있는 설교가 수행해야 하는 그러한 일들을 보조하기 위한 것이란 말입니다.
설교는 언제나 필연성을 띄어야 하며. 좋은 설교는 강력한 능력을 가진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논리입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로 사람들을 몰아가던 때부터 모든 기독교 시대마다 원인이나 결과에 있어서 설교의 새로운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도 위대한 신앙운동이나 성경진리의 회복운동이나 순전한 경건의 속성이 있었던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설교를 “잘” 하는 것을 발견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매주마다 모든 세계에서 행해지는 설교 가운데 참으로 훌륭한 것은 비율적으로 얼마나 적습니까. 언제나 설교에 대한 조롱으로 채워 넣는 어설픈 글꾼들은 의심할 것도 없이 정말 불친절하고 부당하게 판단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도적으로 평범한 설교와 가장 세련된 문학 작품들을 비교해 보고는. 마음 속으로 공명하는 이해심이 자기들에게는 전혀 부족하다는 것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이해심이 없으면 문학적이고 예술가적인 모든 판단은 오류를 범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설교하는 것을 사랑하고 설교를 하려고 애를 쓰는 우리는 그들보다 우리의 노력을 저해하는 부족과 우리의 일 가운데서 만나는 난관들을 더욱 잘 압니다.
고상하고 탁월하게 쓰임을 받는 어느 사역자가 한번은 기대어 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이렇게 논평하던 것이 생각납니다. “자. 난 오늘 저녁에 설교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설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결코 설교한 적이 없는 셈이지요. 나는 정말 어느 누가 설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우리의 이 일은 정말 외경스럽고 매력적이고 정말 엄숙한 책임성이 부여된 일이요. 그러면서도 복된 일이지요. 우리는 이 일을 하면서 최고의 탁월성을 지향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만일 다른 형태의 대중의 언어 가운데 가장 좋은 예를 찾는다면 키케로가 젊은 웅변가에게 들려 주고 싶은 말이라고 하면서 했던 말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라고 권면할 뿐 아니라 간절히 부탁하네.” 좋은 설교란 무엇입니까. 보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웅변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단순한 사변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설교 문제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관점은 우리가 눈치채는 것보다 우리의 실제 노력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를 많이 논의하지 않고도 다음의 진술을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웅변이란 단순히 판단을 확실하게 내리도록 하고 상상력에 불을 붙이거나 감정을 움직이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의지에 강력한 충격을 주기 위하여 하는 말”이라고 말입니다. 웅변이 아니고도 가르침이나 확신을 주는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시(詩) 소설을 통해서도 공상이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를 보고 웅변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감상적인 동화나 마음을 쓰리게 하는 묘사를 통해서도 감정이 깊게 소용돌이 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 거기에 부응하는 행동을 제안하지 않으면 그것을 웅변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웅변은 자기가 말하려는 요지를 전달하도록 하는 말이다”라고 한다면 엄격하게 바른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설교자가 자기의 설교를 듣는 회중들이 회개하게끔 유도하지는 못하면서 진정으로 웅변적일 수 있을 때와 같이 피할 수 없는 선입견이나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지에 “강력한 충격”을 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얻어 맞았다는 느낌을 가지고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면서. 최소한 어떤 행동을 하겠다는 결심으로 나아갈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각성을 주고 상상력에 불을 붙이므로 말미암아 의지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그러한 효과를 주는 말. 그것을 웅변적인 말이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니 웅변은 실천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실천적인 결과를 목표하지 않으면 가짜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일랜드의 유명한 애국자요 법률가인 다니엘 오코넬 (Daniel O Connel)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웅변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요점은 판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주일의 웅변은 그러한 말을 들을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단순히 유쾌한 마음을 일으킬 맘으로 공상의 세계에 불을 붙이는 설교자. 단순히 정서적인 유쾌함을 주기 위하여 감정만을 북돋아 주는 설교자는 웅변적인 설교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부류의 설교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단순히 즐거움 만을 주는데 관심을 가지는 허망한 위선자들 외에도. 그들이 매우 그럴듯한 것을 말할 수 있고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느끼게” 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어째서” 그렇게 느끼는지. 그러한 감정이 진정으로 어떠한 종교적 의도로 진전되는 지를 탐구해 보지 않고 스스로 설교를 잘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속이 텅비고 가치없는 부스러기 같은 것을 가지고 신문에서 웅변이라고 부추겨 세워 주는 일이 얼마나 잦은지요. 교회에서 돌아오는 아직 덜 배운 신출내기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런 것들이 웅변으로 추대되는 일이 잦은데 그런 것을 보면 부끄럽습니다.
웅변은 진지한 것입니다. 한 강론에서 한 문단이 매우 진한 흥미를 자아낸다고 해서 “매우 웅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높은 명성을 얻을 만한 연사는 도덕적인 진지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때에 맞게 우아한 유머의 빛 속으로 빠져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부수적인 것이고. 보다 철저한 진지함과 열심이 잇따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데어민 (Theremin)은 유익한 소논문. '웅변은 하나의 덕'에서 웅변은 윤리학에 속한 것이고 말하는 사람의 정신이 주요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이론은 물론 지나치게 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론은 퀸틸리안 (Q.uintilian)이 이미 부분적으로 관찰한 바와 같이 진리의 중요한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비네트 (Vinet)는 이렇게 말합니다. “웅변의 진정한 터는 무엇인가. 만일 웅변이 평범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현대의 많은 경우에서처럼 웅변이 차원 높은 철학적 사고들과 결합될 때. 우리는 대번에 웅변에서 받은 인상을 철학의 소산으로 여기려는 시험을 받게 된다. 그러나 웅변은 보다 대중적이다. 웅변은 영혼의 '원시적'인 선율을 우리 속에서 떨리게 하는 힘이다 (순전히 인간적인 요소들을 말이다) 다른 경우는 말고 이러한 경우에만 우리는 그러한 힘을 발휘하는 사람을 웅변가라고 하는 것이다”
어머니. 자녀. 친구. 가정. 나라. 하늘. 호수같은 평범하고 친숙한 개념들과 연관시키지 않고는 그 어느 주제라 할지라도 웅변적일 수는 없습니다. 연사의 임무란 자료를 모으고 예증하는 방식을 통하여 자신이 감동한 정서로 말미암아 이런 친밀한 개념들이 신선한 흥미를 불러 일으켜 듣는 이들의 마음에 그런 친밀한 개념들이 강하게 부딪히게 하는 것입니다. 강론을 위해 완전히 새로운 자료들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자료의 원천성에 대하여 신용을 얻을 수는 있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감탄을 불러 일으키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웅변에 속한 살아있는 능력을 발휘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설교자”가 필연적으로 친숙하게 된 사활을 좌우하는 복음 진리들을 말할 때만이 진정한 웅변가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보다 차원 높은 사고(思考)가 없더라도 올바른 웅변술은 설교자가 복음을 설교할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옛 진리들을 붙잡고. 그 진리들을 새로운 관심과 능력으로 옷 입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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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목사, 가짜 박사
임택진
교회와 목사의 관계를 부부 사이로 생각하면 교회와 목사는 모든 면에서 서로 잘 어울려야 한다.
교회는 성장하는데 목사가 자라지 못해도 목회 할 수 없고 목사는 이상과 꿈이 높고 넓은데 교회가 목사를 따르지 못해도 문제는 심각해진다.
70~80년대가 되면서 한국교회가 급 성장하는데 여기에 발맞춰 목사도 성장해야겠다는 자극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한국교회 목사는 서재 하나 변변히 가진 사람이 없다. 신자들에게 창조적 신앙을 키워주기 위해 명상과 독서와 연구할 시간을 가질 환경이 전혀 되어 있지 않다. 그래도 목사들이 자기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중에 그동안 나타난 두드러진 현상은 박사 학위 취득이 목사 성장의 제일인 양 그 집념과 호기심이 강하게 작용했다.
박사학위 취득이 올바른 목회를 위한 진정한 학문의 추구라고 보기에는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어서 목사냐 박사냐 라는 논평기사를 쓰게 된 것이다.
삶 속의 목사, 학문 속의 박사
목사를 minister라고 하는데 그것은 섬기는 사람이란 뜻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기고 교회와 성도들을 봉사하는 사람이 목사이다. 그러니까 목사에게는 권위주의나 관료제도나 군대식 명령이나 복종같은 것이 끼어 들 수는 없다.
목사는 모든 시간과 정력을 교회와 그 관련된 일에 바친 사람이다. 따라서 목사는 교회와 신앙에 관한한 신도들의 지도자이며 교회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목사나 전문가로서 부족을 느끼면서도 성직자로서의 어떤 특정한 권위를 인정받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경향도 있다. 기톨릭신부는 교황에게서 나누어 가진 권위로 교인들을 대하고 그 교인들은 그 권위에 순종하도록 훈련되었으므로 목회하기가 목사보다 무척 편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목사는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지식면에서나 신비경험에서나 교인들 보다 앞서고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잠재의식이 있어 결국 자기 갈등과 가식 그리고 위선 등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교회가 성장하면서 목사도 성장하는 교회에 어울리는 목사가 되겠다는 욕망도 있고 교회도 목사를 청빙할 때 박사학위 가진 분을 요구하는 풍토가 되어 가짜 박사 소동이 일기도 했다.
박사란 독창적인 연구로 학문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그 학문적 분야의 수준을 높이며 문화발전에 기여함과 동시에 전공한 학문분야에 관하여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에게 수여하는 학위이다.
박사학위 제도는 나라마다 다르지만 대개는 대학원에서 3년이상의 박사학위 과정을 수학하여 소정의 학점을 취득하고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 심사와 소정의 시험에 합격하면 문교부장관의 승인을 얻어 대학총장이 수여한다.
명예박사란 학술과 문화에 특수한 공헌을 하였거나 인류문화 향상에 특수한 공적을 나타낸 자에게 대학원장의 추천으로 대학원 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수여하는 학위이다.
일본서 발행한 기독교 대사전에 의하면 박사학위는 본시 쉽게 수여하는 것이 아니었으나 오늘날은 미국의 시설이 불완전한 학교에서도 여러 종류의 학위를 남발하는 풍조가 있어서 현저하게 그 가치가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늙어도 학생
날로 새로운 지식이 쏟아져 나오는 오늘날, 전에 배웠던 학문이 가치가 없게 되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므로 목사는 계속 배워야 한다.
목사는 어떤 장소에서나 어떤 방식으로든지 새로운 신학을 배우는 것이 중요한 과제 이다. 참다운 신학이란 그 시대의 인간들에게 알맞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 것이 아니고서는 신학적 의미가 없다. 오늘의 목사는 신학의 한계를 넘어서 습득해야 할 학문이 많다.
변천하는 시대에 신학적인 표현이나 강조점도 변하는 것이 당연하고 목사도 이런 것을 알아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목사는 자기 목회분야에 요청되는 학문적 지식을 배우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목사는 새로운 목회 능력을 개발하여야 한다. 오늘의 급변하는 상황에서 지난 날의 배웠던 목회 기술만 가지고서는 자기에게 맡겨진 목회적 사명을 다 감당할 수 없다.
유능한 목회자란 타고난 재능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유능한 목회자로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사람이다. 목사로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많이 배우고 계속 연구하여야 한다.
이렇게 노력하여 쌓은 실력이 인정되면 더욱 좋고 제도상으로도 되어 학위를 받는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목사가 박사학위를 취득한다면 그것은 목사가 목사 일을 보는데 도움이 되기 위한 것이요 결코 겉치례가 되었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진짜 목사, 가짜 박사
사람은 누구나 식욕, 성욕, 물욕의 3대 본능 이외에 명예욕이 있다. 명예욕은 자신의 좋은 명성이 많은 사람에게 오랫동안 알려지는 데서 생기는 만족감을 구하는 심리상태이다.
문명인 일수록 명예를 존중히 여기며 국법으로 명예를 보호한다. 명예는 어느 개인이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무엇을 잘했다는 것이 인정되거나 승인을 받는 사회적 평가요 객관적 가치이다.
그러나 명예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 방법을 그르치거나 또는 바른 길을 벗어 나가서 명예를 도적질하려는 폐단이 있어서 뜻있는 이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사회 정의나 세태 인심이 극도로 타락하여 학문적 명예가 상품화되어 매매 된다는 것은 한심한 노릇이다. 세상의 빛이며 소금이어야 할 목사가 학문적 명예를 탐하여 비정 상적인 방법으로 명예를 얻으려는 일이 있어서 한 때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외국 여행 길에 명예 박사 학위를 하나가 아니라 둘씩 취득한 성직자가 있다고 한다.
어떻게 박사학위를 얻었느냐고 하니 달라 얼마를 주고 샀다고도 한다. 명예를 돈받고 파는 사람이나 명예를 돈주고 사는 사람이나 다같이 정신상태가 변질된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이 빌립에게 세례를 받고 베드로에게 돈을 주고 성령을 사려고 하다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바르지 못하다고 책망을 들었다.
사도의 성령 권능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요 시몬의 성령 요구는 제 명예를 얻고자 함에 있으니 이것이 바르지 못한 마음이요 악독이 가득하여 불의에 매인 마음이요 망할 마음이다.
돈으로 명예를 사려는 자는 사마리아의 시몬이다.
명예를 돈으로 살 수는 없다. 돈으로 사는 것은 그 이름뿐이지 명예를 사지는 못한다. 이름과 명예는 다르기 때문이다.
명예 박사학위를 취득한 어느 목사가 제직회를 부추겨 학위 취득 에배를 드리고 축하 연회를 교회에서 성대히 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참석한 어느 제직이 우리 목사는 가짜 박사란다. 그러면 예배도 가짜 예배이고 연회도 가짜이고 목사도 가짜 목사가 되었군 하더란다. 참으로 남 부끄러운 일이다.
김태복 목사 목회 칼럼에 이런 글이 실려있다.
연초, 당회실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침내 가짜박사로 화제가 돌려졌다.
어느 젊은 장로님이 말하기를
"요즘 직장에서 불신자들에게 가짜박사 때문에 큰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가장 진실해야 할 목사들이 이 모양이니 이제는 누구를 믿는가하는 공박에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고 했다.
이 말에 나이 많은 장로님이
"옳습니다. 목사님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좀 안됐으나 한국교회 목사들 회개해야 합니다."고 흥분하신다.
가만 있자니 똑같은 사람으로 취급받는 느낌이 있어 한 마디 해본다.
"너무 부끄러운 얘기지요. 그러나 이 책임은 목사들에게만 있다고 할 수 없지요. 교계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날 큰 교회들이 목사 청빙할 때 박사학위를 가진 분만 요구하기 시작하는 풍토가 되어 가고 있고 또한 교계의 모든 행사나 교회 무슨 식전까지도 박사 후드를 훈장처럼 장식한 가운을 입는 풍토가 발병의 원인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러한 변명은 허공을 때릴 뿐 전혀 설득력이 없다. 입맛만 쓰다.
목사가 사회의 빛이 되어도 부족한 판에 가짜 박사 후드라도 달고 번쩍이고 싶어 하는 명예욕의 포로가 된 이들 때문에 교회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다.
박사는 축도 못합니다
교회 목회는 목사가 하는 것이지 박사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근 20년 전에 미국 어느 도시에서 여름철 신학 세미나에 참가했다가 주일날 어느 침례교회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 교회 당회장은 박사학위가 없는 목사이고 부목사는 박사학위가 있는 목사이다. 한국교회 풍토로 생각할 때 박사학위 없는 당회장과 박사학위 있는 부목사의 관계가 어색할 듯하여 그 관계를 물었더니 교회 일은 목사가 하는 것이지 박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스스럼없이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목회를 위한 목사이며 박사이어야지 박사를 위한 목사이거나 목회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1930년대라고 기억한다. 전국 장로교 목사 수양회가 피어선 성경학교 강당에서 열렸는데 예배시간에 사회자가 어느 목사인 박사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무 박사 축도 하겠습니다 했다. 이 때 회원석에서 박사는 축도 못합니다. 박사 축도 한다는 말 취소하시오 했다는 일화가 전해 오고 있다.
목사는 성직이요 박사는 성직이 아니다. 목사의 하는 일과 박사의 하는 일이 각각 다르다. 목사가 하는 일은 박사가 못할 일이 많다.
목사가 학문 연구를 함으로 박사학위를 얻거나 학술과 문화에 현저한 공헌을 나타낸 바가 있어 명예 박사학위를 받는다면 목회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명예는 구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위나 업적이 인정을 받으면 따라오기 마련이 다. 실제가 있는 곳에 그림자가 따라오는 것과 같다.
목사는 명예를 탐내는 욕망은 떨쳐 버리고 목사라는 이름과 명예를 아끼고 존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목사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에 부끄러운 오점이나 추잡한 낙인이 찍혀서는 아니 된다.
목사는 목사다운 자랑과 체면과 품격을 지켜야 한다. 목사에게 하나님의 일군이라는 명예보다 더 귀한 명예가 어디 또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