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당신을 가장 사랑합니까? 2002-10-15 14:25:37 read : 4000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롬8:32 // 2002년 9월 29일
우리는 방금 스킷 드라마를 통하여 어느 버스 기사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이 드라마는 스위스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인데 오늘 우리의 상황에 맞게 각색한 내용입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버스가 비탈 아래로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른 쪽은 뾰족한 바위산이고 왼쪽은 시퍼런 강물이 흐르는 낭떠러지 절벽입니다. 그런데 모통이를 돌자 한 아이가 막 길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길 한복판에 떨어진 신발 한 짝을 주우러 다시 돌아왔다가 그만 그 차에 치어 숨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차는 잠시 후 오르막길에 멈추어섰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바로 그 버스 기사의 아들이었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그 기사는 차 안에 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아들을 희생시켰습니다. 만일 자기 아들을 살리기 위해 뾰족한 바위산이나 벼랑쪽으로 핸들을 꺾었다면 자기 아들은 살 수 있었겠지만 그 버스에 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죽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아들의 희생을 통해서 버스 안의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린 이 버스기사의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멕켄지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것은 사랑이 없는 마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에서 사랑받지 못하며 사는 사람이 가장 고독한 사람이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먹고 마시며 살아갑니다. 돈은 있는데 사랑이 없다면 그 돈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가정은 있는데 그 가정에 사랑이 없다면 그 가정이 행복하겠습니까? 결혼을 했는데 부부간에 사랑이 없다면 행복한 부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몇 일 전 월요일 아침 어느 방송의 한 토크쇼에 한 아주머니가 나와 애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은 보지 못하고 중간만 보았는데 그 토크쇼의 주제가 '재벌의 부인에서 전과 11범의 아내가 되기까지'였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너무나 가난하고 어렵게 자란 이 아주머니가 어느 재벌의 집에 아마 식모로 들어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재벌 회장의 부인이 돌아가시니까 36세의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회장님의 간청에 의해 그 분과 결혼을 해서 아버지와 같은 할아버지를 남편으로 지극 정성 모시며 살았는데 그만 그 재벌 회장님도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졸지에 가난 가운데 살던 그 여인이 수십억의 유산을 상속받아 어엿한 재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언제 그렇게 많은 돈을 만져 봅니까? 그런데 아주머니가 하는 말이 뭔지 아세요? 나는 그동안 가지고 싶었던 것 다 가져봤어요.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여행까지 안 가본 곳 없이 다 가보았어요? 그런데 나는 너무나 외로웠어요. 돈은 있는데 너무나 허전하고 공허했어요. 그 아무도 없는 그 큰 아파트에 들어가기 싫어서 밤마다 술을 마시며 1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어요.
그러던 어느날 나는 결심했어요. '이렇게 외롭게 살다가 죽지 말고 더 젊었을 때에 나도 한번 진한 사랑을 해보자.' '사랑하다 죽어도 여한이 없는 그런 사랑을 해보자' 그래서 자기가 다니는 카톨릭 교회에 결혼상담소에 좋은 사람을 소개 시켜 달라고 신청을 했더니 몇일 후에 연락이와서 그 사람을 만났는데 바로 그 사람이 지금 살고 있는 전과 11범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해서 전과 11범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느냐고 물으니까 11년동안 수도원에서 생활하다 내려 왔다고 하니까 그런줄 알고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날 그 남자도 함께 출연을 했는데 자기는 감옥에 있는 생활을 수도원에 수양하러 들어가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사랑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돈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아파트의 평수가 넓어도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난해도 사랑이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단칸방에서 새우잠을 자도 서로 사랑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아줌마의 말처럼 가보고 싶은 곳을 다녀 보고,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져 보아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사랑 받지 못하면 살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넓은 평수의 아파트가 있어도 사랑하지 못하면, 사랑 받지 못하면 외로워서 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 삽니다. 그래서 인간은 날마다 사랑을 확인받으며 살고 싶어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여보 내가 당신을 사랑해 나 때문에 힘들지" 그 말 한마디면 다시 힘을 얻고 생활의 전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남편들이며 아내들입니다.
□ 누가 당신을 제일 사랑합니까?
그러면 당신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누가 당신을 제일 사랑합니까?
아주 유치한 질문 같지만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을 던지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립니다. 왜 그렇지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를 제일 사랑할까? 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2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32절)
He who did not spare his own Son, but gave him up for us all--how will he not also, along with him, graciously give us all things?
많은 사람들이 다양하게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립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다'고 말하고 또 어떤 만화가는 '사랑은 함께 있는 것이다' '사랑은 손을 잡는 것이다.' '사랑은 마주 보는 것이다' '사랑은 우산을 같이 쓰는 것이다' 고 말합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아낌없이 내어 주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아무런 댓가를 요구하지 않고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계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죄 많은 한 여인이 나옵니다.
죄 많은 여인이라고 성경에 표현된 것을 보면 아마 몸을 파는 창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그곳에서 식사를 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이 여인은 자신의 전 재산이라고 볼 수 있는 향유가 담겨 있는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옥합을 깨뜨려 그 향유를 주님의 몸에 부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발아래 엎드려 울면서 자기의 머릿결을 풀어 주님의 발을 씻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다른 사람들은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것을 왜 낭비하느냐?고 분노하고 비아냥 거렸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자기의 전 재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향유를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드린 것입니다. 사랑은 계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32절을 다시 볼까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32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기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여기서 내어 주셨다는 말은 십자가의 희생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도록 하기 위해 보내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이 세상을 정탐거나, 여행을 하거나 색다른 경험을 하도록 하기 위해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내어 주신 것은 우리 인류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여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온갖 수치와 조롱과 멸시를 다 받으시도록 하기 위해서 보내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침 뱉음을 당하며 가시 면류관을 쓰고 채찍에 맞드록 하기 위해 보내신 것입니다. 고난의 잔을 마시도록 하기 위해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말은 사랑이 곧 하나님이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주는 것입니다. 내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이신 인간을 지으시기 전에 하늘과 땅의 아름다운 것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토록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것들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우리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정복하게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 이후 우리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하게 되자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내어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 가운데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독생자를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그 사랑 때문에 구원을 받았고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아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독생자를 아낌없이 이 땅에 내어주신 그 사랑 때문입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자식은 몰라도 부모는 압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너무나 희생적입니다. 눈물 겹습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자식이 잘 될 수만 있다면 자식이 성공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이 부모입니다. 자식이 병들어 누워 있을 때에는 대신 아파서라도 자식의 병이 낳기만을 바라는 것이 무모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렇게 기도하는 부모들이 많이 있어요. 왜 그럴까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 자식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 줄 수 있겠어요?
6.25 전쟁중 우리 나라에 있었던 한 실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 만삭이 된 어머니가 아기를 낳기 위해 어떤 집을 찾아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그만 그 집을 다가지 못하고 길에서 진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어머니는 어느 다리 밑에 겨우 자리를 잡아 아기를 분만하게 되었습니다. 추운 겨울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는 가운데 그 어머니는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하고는 아기가 춥지 않도록 자기 옷을 모두 벗어서 아기를 감싸주었습니다. 해산 직후 추위에 어머니는 그만 얼어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어느 미군 장교 한 사람이 차를 타고 그 근처를 지나가다가 휘발유가 떨어졌습니다. 그는 부대로 연락을 취해 놓고 차에서 내려 그 부근을 거닐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상한 아기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깜짝 놀란 그 군인은 그 소리를 따라 다리 밑까지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 군인은 기가 막힌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어머니는 벌거벗은 채 얼어 죽어 있었고 어머니의 옷에 둘러싸인 갓난 아기가 몹시 울고 있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기름이 떨어진 것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살리시기 위함인지도 모르겠군." 이렇게 생각한 군인은 그 아기를 데려다가 양자를 삼아 잘 키웠습니다. 그 아들은 미국에서 훌륭하게 자라 성인이 되었습니다. 늘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알고 싶어하던 그 아들은 어느 날 자기를 키워 준 아버지로부터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은 무덤을 찾아 한국에까지 나왔습니다. 그 아들은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자기 옷을 벗어서 무덤 위를 덮으면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어머니 얼마나 추우셨어요! 나를 살리기 위해 어머니는 그런 희생을 치르셨군요! 저는 이제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벌거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어요!"
이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 자식을 내어 줄 수 있겠습니까? 죽일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는 볼모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요셉이 자기 형들에게 가나안 땅에 있는 동생 베냐민을 데려오라 하면서 데려 올때까지 시므온을 볼모로 잡아 두지 않았습니까?
볼모라는 것은 힘이 약한 나라가 힘이 강한 나라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다시는 배신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왕의 아들을 보내는 것입니다. 고려왕조시대에는 원나라에 볼모를 보내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시대에는 청나라에 볼모를 보내는 일이 있었고,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패망한 뒤, 고종 황제는 그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아들을 다른 나라에 볼모로 보낸 것입니다. 다시는 그 아들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 아들이 죽는 것도 아니고, 못 먹고 못 입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내 나라, 내 왕궁에서 화려하게 삶을 살던 그 아들을 남의 나라에 볼모로 보내는 것은 부모로서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할 수 없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볼모로 보내는 것입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내신 분들은 그 심정이 어떤 것인지 아실 것입니다.
요즘 같이 군대가 좋아졌지만 그래도 자식이 군대에 가면 부모는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립니다. 잠시 몇 년 있다가 돌아올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또 딸을 시집 보낼 때에도 부모는 말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못볼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겠다는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눈물을 흘리는 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는 것은 군대에 보내는 정도가 아닙니다. 시집 보내는 정도가 아닙니다. 볼모로 보내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십자가에 달려 온갖 저주를 담당하사 죽임을 당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죄없는 당신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만이, 십자가에서 온갖 수치와 조롱과 멸시와 목름의 고통을 당하셔야만 인류의 죄값이 지불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뇨
오늘 우리에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확신에 찬 기도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32절)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모든 것은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말씀합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구원이 세 가지 시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믿은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다. 또 이미 영생을 얻었다. 미래와 과거로 설명하고 있다.
반면에 빌2:12절에 보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Therefore, my dear friends, as you have always obeyed--not only in my presence,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그러니까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에 이를때까지 이 세상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주님을 닮아 가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그 그 하나님이 오늘 구원을 이루어감에 있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구할 때 왜 선물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구원받은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지금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합니다. 그런데 그 구원을 이루어 감에 있어서 필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경건의 능력도 필요합니다. 성령의 능력도 필요합니다. 성령의 은사도 필요합니다. 때로는 선한 일을 위하여 물질도 필요합니다.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은사로, 선물로 주시지 않겠느냐? 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너무나 분명하게 주신 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 아들과 함께 주십니다. 그 아들과 함께 주신다는 말은 그 아들을 통하여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염려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확신을가지고 기도의 무릎을 꿇으십시오 . 나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십시오. 오늘 당신의 구원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십시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실 것입니다. 이제 당신의 구원을 이루어 감에 있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당당하게 구하십시오. 믿음으로 구하십시오.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기에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누가 우리처럼 죄와 허물이 많고 연약한 자를 사랑하겠습니까? 누가 나를 대신하여 죽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당신을 제일로 사랑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의 부모입니까? 당신의 아내입니까? 당신의 남편입니까? 당신의 자녀입니까? 아닙니다. 당신의 남편이 아무리 당신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당신의 아내가 아무리 당신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당신의 부모가 당신을 아무리 사랑한다할지라도 그 사랑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변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서로의 뇌리에서 잊혀질 날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향한 주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당신의 부모가 당신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을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Can a mother forget the baby at her breast and have no compassion on the child she has borne? Though she may forget, I will not forget you!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구원하신 당신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당신의 구원에 필요한 이 모든 것들을 구할 때 그것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주의 사랑을 주의 선하심을 주의 은혜를 생각해 보라...................10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