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福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우는 자의 福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21절 하반절의 말씀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21절)
예수님은 분명히 "우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는 이 세상의 보편적인 사고로는 이해될 수 없는 역설적인 내용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도다," "주린 자는 복이 있도다."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 "또 너희 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리라." "대접을 받고자 하느냐 네가 먼저 남을 대접하라."
얼마나 역설적인 내용들입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기는 자가 복이 있다' 라고 말하는데 예수님은 "우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슬픔을 비극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나약함이나 수치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감동적인 영화를 보다가도 눈물이 나오면 옆에 있는 사람 볼까봐 흘러 내리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못하며 눈물을 삼켜야 할 때도 있습니다. 남자 아이들이 울면 "사내 녀석이 울긴 왜 울어 사내답지 못하게" 하면서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우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복이 있는 자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자가 복이 있는 자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지만 예수님이 우셨다는 기록은 세 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눈물을 흘리며 살아야 합니다. 아니 울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3가지의 고귀한 액체가 있습니다. 그것은 땀과 눈물과 피입니다. 땀은 수고와 노동의 결정체를 의미하며, 눈물은 사랑과 감정의 표현을 의미하며, 피는 생명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땀과 눈물과 피를 모두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흘리는 땀 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멸망당할 예루살렘성을 바라보시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한 방울의 피도 남김없이 다 쏟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많은 눈물을 흘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인 저와 여러분이 흘려야 할 눈물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는 많은 눈물이 있습니다. 억울하여 흘리는 눈물이 있고 자기 욕망이 좌절되어 흐르는 눈물이 있고, 좋아는 것을 도적 맞거나 잃어버림으로 흘리는 안타까움의 눈물이 있습니다, 또 소유하기를 원하였는데 소유하지 못하게 됨으로 인하여 흘리는 안타까움의 눈물도 있고 바리새인과 같이 다른 사람을 의식하여 흘리는 위선과 가식의 눈물도 있습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여 흘리는 분노의 눈물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흘려야 하는 이별의 눈물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눈물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눈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이런 것들 때문에 우는 자를 복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우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실 때의 눈물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회개의 눈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 왕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는 죄를 하나님 앞에서 지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사 그를 책망하셨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였는데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요를 적시며 회개했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
아무리 시적인 표현이지만 다윗은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얼마나 울었으면 눈물로 침상을 띄웠다고 말합니까? 얼마나 울었으면 그 눈물로 요를 적셨겠습니까?
우리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입니다. 죄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인하여 통회하며 가슴을 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보았습니다. 시51:3절에 보면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보면서 마음 아파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도 자신의 죄악 때문에 닭의 울음 소리를 들으며 심히 울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닭 울기 전에 네가 3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죽어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큰 소리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하찮은 계집 종 앞에서 한번도 아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죄입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닭의 울음 소리가 들려 올 때에 닭 울기 전에 네가 3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의 성전에서 영광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자신의 추함과 더러움을 발견하고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한 사람은 애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펄전목사는 "마른 눈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고 했습니다.
눈에 불순물이 들어갔을 때 눈은 눈물을 통하여 그 불순물을 씻어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람은 더럽혀진 심령을 흘리는 참회의 눈물을 통하여 씻어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죄를 씻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눈물이 있는 회개는 그 회개가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회개인 것을 증명합니다. 그래서인지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천국문은 기도에 대해선 닫혀있더라도 눈물에 대해선 열려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멸시치 않으십니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습니까? 억울함의 눈물, 속상함의 눈물이 아니라 자신의 교만과 게으름과 불신앙과 음란함과 탐욕과 시기와 용서하지 못한 죄를 인하여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한 적이 있습니까? 자신의 죄를 인하여 눈물을 흘린 자가 용서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둘째로, 기도의 눈물입니다.
열왕기하 20장에 보면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가 나옵니다. 히스기야는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고쳐질 수 없는 병인 것을 안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기도하였습니까? 먼저 그는 자기의 낯을 벽으로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그가 낯을 벽으로 향하여 기도했다는 말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기도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심히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왕하20:3) 그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임하였습니다.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왕아20:5)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여 심히 통곡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눈물로 기도할 때 우리의 눈물을 보십니다. 우리가 자녀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때, 교회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때,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때 그 주님은 여러분의 눈물을 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앗수르 왕의 손에서 그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10도나 물러가게 해 주셨습니다. 왕위를 이어 갈 수 있는 아들을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 앞에 통회하며 기도했던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하갈도 눈물로 통곡하며 기도했고 한나도 아이를 갖지 못했을 때 통곡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서 응답을 받았습니다. 느헤미야는 민족을 위해서 슬퍼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응답을 받았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이 땅에서 기도하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하나님은 이렇게 눈물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 모으듯이 눈물은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오는 힘이 있습니다. 그 눈물 속에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눈물 속에 겸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눈물 속에 항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눈물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하나님은 오늘도 눈물로 기도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도하는 사람입니까?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의 건축을 앞두고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새생명의 축제를 앞두고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연약하고 병든 자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는 자입니다. 자녀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는 자입니다. 훌륭한 자녀의 배후에는 언제나 어머니의 간절한 눈물의 기도가 있었음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처럼 되지 말고 눈물로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시다. 눈물로 내게 맡겨준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교사가 됩시다. 눈물로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장로님이 됩시다. 눈물로 연약한 지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권사님이 됩시다.
눈물의 기도는 반드시 우리의 눈물을 멈추게 합니다.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입니다. 눈물의 기도는 응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 앞에 눈물로 간구하며 기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영혼 사랑의 눈물입니다.
참 이상하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눈물이 없던 사람도 눈물이 많아지게 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이상하게 눈물과 콧물이 함께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기도만 해도 눈물이 나오고 성경을 읽다가도 눈물을 흘립니다. 길 거리를 지나가도 눈물을 흘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 프랜시스는 길을 가면서 자주 울곤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왜 우느냐고 물으면 "주님이 나를 구원 하시려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한 것과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 난다고 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 예수여, 내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내려 주옵소서!
첫째, 내 영혼과 육체가 괴로움을 겪어서 당신의 십자가의 고난을 맛보게 하옵소서
둘째, 당신이 우리죄인들을 위하여 그처럼 참으실 수 있었던 그 타는 듯한 사랑을 가질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며 방황하는 자들을 바라보시며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영혼 사랑의 눈물이 있어야합니다. 지옥으로 달려가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하려는 열망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불타는 지옥을 향하여 달려가는 저 영혼들의 탄식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합니다. 바울은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눈은 늘 눈물로 젖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