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뜬 소경 2002-10-15 14:46:57 read : 5480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년 9월 22일
구약의 말씀: 이사야서 49:1 ~ 6
너희 섬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너희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께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셔서, 나를 주의 손 그늘에 숨기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로 만드셔서, 주의 화살통에 감추셨다. 주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아, 너는 내 종이다. 네가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내가 한 것이 모두 헛수고 같았고, 쓸모 없고 허무한 일에 내 힘을 허비한 것 같았다. 그러나 참으로 주께서 나를 올바로 심판하여 주셨으며, 내 하나님께서 나를 정당하게 보상하여 주셨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주께서는 나를 그의 종으로 삼으셨다. 야곱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불러모으시려고, 나를 택하셨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귀한 종이 되었고, 주님은 내 힘이 되셨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신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내 종이 되어서,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고 이스라엘 가운데 살아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네게 오히려 가벼운 일이다.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미치게 하려고, 내가 너를 '뭇 민족의 빛'으로 삼았다."
서신서의 말씀: 로마서 10:9 ~ 17
입으로 예수는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릅니다. 성경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꼭 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주님, 우리에게서 들은 것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복음서의 말씀: 요한복음서 9:35 ~ 41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사람을 내쫓았다는 말을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만나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대답하였다. "선생님, 그분이 어느 분입니까? 내가 그분을 믿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그는 "주님, 내가 믿습니다" 하고 말하고서, 예수께 엎드려서 경배하였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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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은 추수감사절이었고, 어제는 추석이었기 때문에, 두 개의 축제가 겹쳐서 여러분이 다 즐겁게 지내신 줄 알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추수감사는 우리가 감사의 열매를 바치면서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날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에는 한 눈먼 소경이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해주신 것에 감사를 드리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통 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중에 특별히 아픈 사람들, 병든 사람들을 고쳐준 얘기가 굉장히 많이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봉독해 드린 요한복음 9장은 첫 절 1절부터 마지막 절 41절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소경을 고친 이야기로 짜여 있습니다. 성서에서 유일한 곳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소경을 고친 일만 아니라, 고치는 과정에 예수님과 나음을 받은 소경,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과의 관계 등이 소설의 한 토막처럼,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전개되고 있습니다.
잠깐 정리해보겠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소경은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났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나는 것은 유대교 통념에 따르면, 조상의 죄, 혹은 본인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에 대한 징벌의 표시로 눈을 멀게 했고, 죄악에 대한 노여움의 표시로 장님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님이 된 이 사람은 죄악을 품고 태어났고 죄악 속에 살아갑니다.
죄악을 범한 사람은 유대교 법에 의하면, 다른 사람과 한 상에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회당에도 갈 수 없습니다. 1년에 최소한 한 번씩 가야 하는 성전 예배에도 참석할 수 없습니다. 사회에서 유리되고, 가정에서 배척받고, 성전제의에서 완전히 배제된, 그야말로 파문 당한 삶을 삽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소경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눈을 뜨는 장면은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진흙에 침을 섞어서 소경 된 사람의 눈에 바르고서, 근처에 있는 실로암 연못에 가서 물로 씻으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그대로 했더니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는 것입니다.
이 실로암이라는 못 자체가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그 물에 씻으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당시 실로암이라는 연못은 과거 기원전 8세기에 이스라엘이 앗시리아가 침략할 것을 예상하고서 만든 것으로서, 지하로 통로를 뚫어서 예루살렘 시내에 수돗물을 공급하게 되어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에게는 설명이 필요없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말하자면 생수를 공급하던 실로암이라는 상징적인 연못에 가서 눈에 바른 흙을 씻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말합니다. 왜 하필 안식일 날, 아무것도 하면 안 되는 날, 병을 고치는가? 유대교 율법에 따른 문제가 제기된 것입니다. 예수의 대답은 이미 나와 있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다.” 문제를 삼는 사람들은 이미 이 논쟁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안식일 날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예수의 뜻은 이런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날은 이렇게 새로운 생명을 얻는 날이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 안식일 계명을 위반한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두 가지로 갈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범하면서까지 병을 고치는 것을 보니, 저 예수라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이 아닌 것 같다.”라고 주장하는 보수강경파가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창세 이래로 한번도 나면서 소경인 자를 고친 사람은 율법학자 가운데도 예언자 가운데도 없었는데, 이 사람이 고쳤다. 더군다나 죄 때문에 눈이 멀게 되었을테니, 눈을 뜨게 된 것은 죄를 사함 받았다는 뜻 아니냐? 이 사람은 무언가 특별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의심이 없지는 않지만, 동시에 인정도 하고 궁금증도 가진 쪽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말하자면 병자를 고치는 것을 보면서, 혹시 저분이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가냘픈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대 쪽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어겼으므로 일언지하에 “예수는 아니다”라고 규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사회나 똑같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고침을 받은 사람한테 묻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더냐?” 소경이었던 사람의 첫 번째 대답은 “그 사람은 선지자라고 합디다. 그렇게 믿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굉장히 지혜로운 대답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사람이 구세주요, 메시아라고 고백하면 완전히 파문시키기로 이미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소경이었던 사람은 “그 사람은 선지자 중 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굉장히 교묘하고도 지혜로운, 조금은 교활한 생존의 답변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결국 유대사회에서 파문을 받게 됩니다. 그는 예수라는 사람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파문을 받고서 다시 자신을 찾아온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너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느냐?” 이 사람이 답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이 답변을 듣고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나는 너를 내 제자로 받아들이겠다.” 유대인 가운데 다시 논쟁이 생깁니다. “당신이 예수라는 사람의 제자라면 우리는 모세라는 우리 영적 지도자의 제자들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논쟁이 계속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칠 때 침을 뱉어서 흙을 이겨서 그것을 눈에 발랐다고 했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흙으로 빚고 그 속에 하나님의 입김 곧 “루아하”를 불어넣어서 살아 있는 사람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흙과 하나님의 입김의 합작품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죽으면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의 입김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믿습니다. 흙으로 빚어진 인간 속에 하나님의 입김을 불어넣었다는 말을 가리켜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오늘 소경 된 자에게 예수님께서 똑같은 창조역사를 반복합니다. 흙과 침은 흙과 입김을 상징합니다. 이 상징적 행위 속에 예수님께서는 천지창조의 기적을 오늘 재연하십니다.
눈을 뜨게 된 것은 기적입니다만, 그러나 이것만이 기적은 아닙니다. 눈뜨게 한 것도 기적이지만, 죄악을 속한 것도 기적입니다. 눈 먼 것은 죄 때문이라는 세상사람들의 편견, 유대교 전통의 전승을 부순 것입니다. 당시에 병이 나음을 받은 것은 육신의 아픔이 나은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창조 때에 부여하신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회복되는 것이 바로 병 나은 기적입니다. 중요한 대목입니다.
우리가 아팠다가 회복을 하면, 마음에 근심이 있다가 기쁨을 얻으면,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그래서 신앙 속에 새로운 기쁨과 희망이 넘쳐난다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창조의 신비, 하나님의 형상, 그것이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내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만 기뻐하지 말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것으로도 기뻐하십시다. 그 형상을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에게는 기쁨이 이어집니다. 왜? 우리의 기쁨 속에 하나님의 입김이 같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느끼고 사십니까? 이걸 느낀 오늘 본문의 소경 예수를 향해서 말합니다. “당신이 바로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했으므로 감사합니다. 당신의 입김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 움직입니다. 눈을 뜬 것만이 감사가 아닙니다. 내가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감사의 진수를, 이 깊이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몰랐다고 예수께서는 책망하십니다. 그것이 전통 때문이든, 아니면 유대교 율법의 경직성 때문이든 그들은 그것을 알 수 없는 참 답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난 화요일, 제가 광고해 드린 대로, 우리 교회에서 모은 수해의연금을 가지고 강원도 양양 지역을 방문했고, 거기서 모든 사람들에게 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 헌금 속에 하나님의 도우시는 입김이 담겨 있다고 믿고 감사드립니다. 그곳 목사님 말씀이 그것을 받은 사람들이 눈물로 여러분에게 감사를 표현한다고 합니다. 그 헌금 속에 담긴 하나님의 입김이 오늘 감사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강원도 얘기가 나온 김에 오래 전 민담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한양에 사는 어느 선비 한 사람이 강원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지금과 같은 도로가 없었으니 산길을 걸어갔을 것입니다. 산골짝 어느 집에서 유숙하면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한양으로 돌아오는데, 강원도 사람들의 친절이 너무 고마워서 떠나면서 선물 하나 놓고 갔다고 합니다. 따로 마련한 것이 없어서 선비는 자기가 갖고 있었던 글씨 쓰는 붓을 선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강원도 산골 사람들은 붓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동네에서 제일 유식하다고 알려진 할아버지에게 이게 무어냐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이 할아버지가 곰곰이 살피다가, 그때가 추석이라는 데 착안했습니다. 그래서 한양 사람들은 추석 때 이 물건으로 송편을 찍어서 먹는다고 말하셨습니다. 말하자면 꼬챙이, 한양 판 꼬챙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붓이 말라 있을 때는 제법 단단하여서 송편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붓에 침이 묻자 붓이 부드러워져서 송편을 찍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게 꼬챙이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뒤에서 빈정거렸습니다. “모르면 가만히나 있지.” 좀 아는 척했던 이 할아버지는 아주 망신을 당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눈 먼 소경 한 사람을 고쳐주심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셨더니,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유식하다고 알려진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 서기관들이 모여서, “우리의 전통에서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안식일을 범한 행위일 뿐이다. 우리 믿음의 조상인 모세의 율법을 위반한 범죄 행위다.”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의 무식함은 그들의 “유식함” 속에 이미 전제되어 있었습니다.
인간의 유식함 가운데 하나님의 진실이 임하면, 인간의 유식함은 무식함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유식하다는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유식함은 너무나 작은 그릇이어서 기적 같은 하나님의 역사는 해석할 수도, 담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경은 눈을 뜨게 되었으나, 당신들은 눈을 뜨고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리어 하늘의 뜻을 모르니 답답한 일이다.” 오늘 요한복음서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고 하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눈 먼 것을 죄라고 판단한 그들이, 차라리 눈이 먼 사람들이었다면 죄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눈 먼 것은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눈 먼 것은 그냥 눈 먼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질병은 죄의 결과라는 유대 사람들의 생각을 전적으로 부정하십니다. 눈 먼 것은 결코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눈을 뜨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면서 자기는 죄 없다고, 눈을 뜨고 있다고 하면서 하늘의 기적과 같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그들이 죄인입니다.
아까 선비의 붓 이야기에서처럼, 혹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진리를 담는 우리의 그릇이 너무 작아서 하늘의 진리를 모르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그 역사를 인간 나름의 체제나 이념이나 강박관념으로 판단하여 바리새파 사람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보면, 이런 뜻입니다. 기적이라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 우선 마음의 눈을 뜨고, 마음의 눈이 뜬 사람은 그 다음에 마음으로만 아니라 입으로도 믿고 고백하는 사람에게만 구원이 된다는 말입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믿고, 입으로는 믿는다고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에 등록하고 교회 생활을 하거나 예배 생활을 하는 것이 귀찮아서, 마음으로만 주님의 말씀을 믿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지만, 그러나 교회에 소속하고서 살기는 싫다는 사람, 마음으로만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그렇게 믿는 것도,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른다는 말씀을 생각하면, 분명 안 믿는 것보다는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제는 마음으로 믿는 것만 가지고는 예수 믿는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입으로 믿는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고백한 자들의 공동체에 속해서 함께 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눈을 뜨게 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보게 되었구나 하고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만 가지고는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소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눈 뜨임을 받고서 하나님이 만드신 가정, 교회, 사회, 공동체에 정식으로 소속해야 합니다. 병이 나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신앙 공동체에 소속해서 하나님 공동체의 떳떳한 일원이 되어야 합니다. 밥상에 함께 둘러앉아야 합니다. 떳떳하게 인정도 받아야 합니다. 공개적 구원, 이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상고하면서 이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인생에는 여러 가지 과정이 있는데, 때로는 그 과정을 생략하고 목적한 것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흔치 않습니다만, 과거에 우리가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울 때 어떤 사람들은 독학을 해서 인간들이 꿈꾸는 최고의 목표에 도달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요즈음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학교 공부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학교 공부가 싫어서 독학으로 자기 목표를 이루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독학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면 몰라도, 공공학교가 있고 교육받을 장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개성, 공식성을 무시하고 버리고 혼자만의 세계를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마음으로 믿어서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습니다. 성서 말씀에도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구원을 받으려면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른 것을 입으로 고백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교회에 소속하지 않고서도 나는 신앙인이다 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 소속하지 않고서도, 나는 식구다 할 수 있습니다. 이 나라에 속하지 않고서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 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마음으로 믿는 신앙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입술로 공개적으로 소속을 밝히라는 것입니다. 독학하는 것만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어렵지만 학교를 다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인생도 배우고, 함께하는 기쁨도 배우고, 갈등도 배우라는 것입니다. 입으로 공개적으로 고백하고서 그 의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나라에 속했으면 국민의 의무를 다하고, 교회에 속했으면 교인의 의무를 다하고, 그렇게 해서 명실상부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이름을 내놓은 그리스도인, 실명을 밝힌 그리스도인, 내가 한 일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신앙인!
실명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은 감추어 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남들이 보게끔 회복됩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의 뜻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삶의 영역 속에 우리는 분명히 얼굴을 들고, 이름을 내걸고서 신자가 되고 국민이 되고 구성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오늘 이사야서를 보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날카로운 화살을 만드셔서 당신의 화살통에 넣어두셨습니다. 유대백성에게도, 다른 모든 백성에게도 칼과 날카로운 화살을 만드셔서 감춰 놓으셨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날카로운 칼을 받은 여러분, 그 칼로,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보지 못하는 죄를 잘라 내십시오. 눈을 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지 못하고 눈먼 것처럼 사는 여러분, 화살로 찔러서 그 죄악을 없애십시오. 왜 화살을 화살통에 담고만 있습니다. 왜 날카로운 칼이 주님의 손 그늘에만 있겠습니까?
칼을 들어서 죄악을 없애고 화살을 들어서 죄악을 쏘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 밝음, 빛, 행동, 찬양, 기쁨, 감사, 그걸 드러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살아가십시오. 전쟁의 광풍이 난무하는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평화라고 입으로 말하십시오. 좌절과 슬픔이 넘쳐나는 이곳에서 속으로만이 아니라 겉으로도 분명하게 하나님의 기쁨과 희망을 외치십시오. 그렇게 살아가십시다. 이 세상은 감추고 살아가는 세상이 아닙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 입으로 증언하고 그 역사를 우리 손으로 실천하고, 그 역사의 길을 발로 걸어가야 합니다.
눈을 뜨게 된 소경의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의 회복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회복의 역사가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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