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선택 2002-08-20 11:48:35 read : 4201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창 13:1-13 // 2002년 7월 25일
‘순간의 선택이 십 년을 좌우합니다.’라는 선전문구가 많은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던 적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한번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두가 체험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간의 선택 하나로 일평생 무거운 짐을 지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대로 지혜로운 결정, 지혜로운 선택이 우리의 삶을 즐겁고 기쁘게 살아가도록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앞에 다가오는 수많은 선택 앞에서 고민하고 갈등합니다. 배우자를 선택하는 문제로부터 직업선택,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 내가 하는 선택에 따라 인생 행로가 결정됨을 알 때 ‘선택’이라는 것,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혜롭게 결정해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떤 것이 지혜로운 결정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지혜로운 선택과 미련한 선택, 그리고 지혜로운 선택에 따르는 하나님의 축복이 어떤 것인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약 3주 동안 같은 본문을 가지고 지혜로운 선택과 미련한 선택, 그리고 지혜로운 선택의 축복에 대해서 여러분과 더불어 생각하며 인생의 수많은 선택 앞에서 어떤 원리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셔서 떠나 약속된 가나안 땅에 도착하는 것이 오늘 본문 전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도착한 가나안 땅에는 기근이 심하여 사람이 더 이상 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하신 땅, 하나님께서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곳에 비전과 꿈을 가지고 갔으나 기근과 가뭄으로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됩니다. 성경에 표현은 되어있지 않지만 아마 아브라함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풍요롭게 보이는 애굽으로 삶의 거주지를 옮기게 됩니다. 그곳은 문화가 발달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마치 하나님이 약속한 땅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아내 사라를 탐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라가 자신의 아내라고 한다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을 것이 뻔하였기 때문에 아내에게 이렇게 제의를 합니다. ‘이제 당신은 나의 아내가 아니고 나의 누이라’ 애굽왕 바로가 사라를 아내로 삼고자 아브라함에게는 많은 은금을 주고 데려갑니다. 가정에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아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은금이 있고 사라는 다른 사람의 아내로 있게 될 것을 생각할 때 남자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후회되는 마음에 복잡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를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바로와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립니다. 급기야 바로는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의 성실하지 못했던 대답을 책망하며 아내를 돌려주고 애굽 땅을 떠나도록 하는 것이 오늘 본문 전까지의 사건입니다.
애굽을 떠난 아브라함은 그가 결국 가야 할 곳, 기근이 있으나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가나안 땅에 머물렀고 하나님께 처음으로 재단을 쌓았던 장소에 다시 재단을 쌓으면서 가나안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함께 동고동락했던 조카 롯의 가정과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소유가 많아져서 그렇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분열과 다툼 속에서 아브라함은 중대한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거기서 헤어지게 되고, 아브라함은 롯이 가고자 하던 땅을 그에게 양보하고 황무지 기근의 땅 가나안에 머물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오늘의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으로서 참 복을 받기까지 어떤 결정을 내렸기에 지혜로운 결정이라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었던 선택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선택이었습니다. 실패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원하지 않게 실패를 반복하는 일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 자체가 실패의 연속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실패 후에 우리가 또 다시 실패하지 않는가 하면, 실패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늘 본문 창13장 1절에서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올 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 가니라.’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실패자의 모습으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머물라고 하신 그 자리에 머물지 아니하고 임의대로 삶의 자리를 옮겼던 아브라함은 애굽 땅에서 편안하게 살려고 했지만 오히려 말할 수 없는 수치와 신앙적 상처를 가지고 애굽 땅을 빠져나왔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아마 상처 때문에 방황했을지 모릅니다. 아내 사라가 남편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가정의 분란과 어려움을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아브라함이 택한 결정은 하나님께서 머물라고 명령하신 아이와 벧엘 사이에 있는 가나안 땅, 처음 도착했던 그 장소에 와서 다시금 제사를 드린 일이었습니다.
이 제사는 아브라함에게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아브라함의 제사는 애굽에서 지었던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와 고백의 제사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바로 왕의 무서운 손길 가운데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행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예배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나님 제가 진정 의지할 분이 주님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 고백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실패를 경험 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적인 실패가 되면서 반복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좌절합니다. 절망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실패 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실패 다음에 속히 실패의 원인을 찾았습니다. 실패할 방법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갔으며 하나님께서 머물라고 하신 장소에 거하는 아브라함을 보게 됩니다. 그 장소는 어떤 곳입니까? 기근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 위한 계획을 세워 놓으신 장소였습니다. 단순히 육적인 축복만이 아니라 영적인 축복 그리고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과 뜻이 있는 장소였습니다. 인간 아브라함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을 신뢰하며 가라 하신 그 자리에 자신의 삶의 자리를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심리학 박사이자 뉴욕 타임지에 선정된 베스트셀러 작가 로라 슐레징어는 인생을 잘못 사는 사람들의 실패 후에 하는 전형적인 변명에 대한 연구를 했습니다. 실패를 거울 삼아서 성공하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또 다시 실패를 반복하는 인생이 있는데, 그들이 늘어놓는 변명 7가지가 다음과 같습니다.
1. 나도 알아요. 하지만 나도 사람입니다.
2. 그게 잘못이라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3. 그게 옳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4. 나야말로 진짜 불쌍한 사람이라구요.
5. 나도 한 때는 내 주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잘나가는 사람이었다구요.
6. 그런 건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구요.
7.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이런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들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패를 빨리 받아들이고 그 원인을 분석하며 새롭게 출발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실패의 경험이 영화롭고 아름다운 인생의 교훈으로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1988년도 서울 올림픽 때 미국 국민들의 관심은 특별히 수영 종목에 있었습니다. 미국의 ‘비언디’라는 선수가 획득할 수 있는 메달수가 총 7개인데 7관왕을 차지하리라고 미국 국민들은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과연 어떻게 7관왕을 차지할 수 있을까 관심을 가지고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2종목 예선에 통과하지 못하고 탈락하는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매스컴들은 실망스러워 하며 앞으로 남은 종목에서 메달을 한 개도 차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유명한 심리학자인 ‘마티 셀리그만’ 교수는 정반대의 예언을 했습니다. ‘비언디는 앞으로 남은 5개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할 것’이라고 장담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셀리그만 교수를 비난하며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셀리그만 교수가 그렇게 주장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비언디’라는 선수가 첫 두 종목에서 실패한 후에 보여 주었던 모습에 근거한 주장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예언대로 ‘비언디’는 나머지 종목에서 금메달을 휩쓸었습니다. 비언디는 예선 탈락의 실패를 경험한 후, 자신이 왜 실패했는지를 분석했고, 코치가 하는 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과거를 거울삼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패를 통해서 훈련시킵니다. 하나님은 평범했던 한 사람 그리고 불신자였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실패라는 훈련 계획을 통해 한걸음 한걸음씩 믿음의 거장으로 만들어 가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 생활을 할 때 실패자의 모습으로 살 때가 많습니다. 오늘 어쩌면 이 자리에 있는 분 중에 결혼에 실패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자녀 교육에 실패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직장 생활에 실패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실패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모양의 실패 경험을 갖고 서 있을 줄 압니다. 우리는 더 이상 실패를 위한 선택을 해서는 안됩니다. 나의 실패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아브라함처럼 빨리 파악하고 하나님이 말씀한 그 자리로 돌아가 머물기로 결단하는 결단이 실패를 긍정적으로 활용하도록 만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아름답게 쓰임 받고 복을 받았던 이유는 신앙의 실패를 또 다시 반복하지 않는 선택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인생이 복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브라함이 인간관계에 비중을 둔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창 13장 8~9절 말씀을 읽어보면 ‘아브라함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 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 하면 내가 좌 하리라.’
아브라함은 관계를 중요시하는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하고 그 다음으로 인간관계를 중요시했습니다.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는 장면들이 여러 곳에 나타나는데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그의 삶 가운데서 분쟁을 해결하는 모습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그는 사람에게 비중을 두고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툼이나 분쟁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안보고 만나지 않아도 되면 몰라도 계속해서 보아야 되고 만나야 할 사람과 다투게 될 경우에는 무척 고통스럽습니다. 때로는 그것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또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조카 롯과 피할 수 없는 문제에 있어서 아브라함은 중요한 결단을 하게 됩니다. 이는 첫째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둘째는 조카 롯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분쟁의 원인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 13장 5,6절에 ‘아브라함의 일행 롯도 양과 소가 장막에 있음으로’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의 재산도 있었지만 롯의 재산도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의 재산이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큰 재산과 롯의 재산과의 차이를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에 비교하는 생각이 들어올 때 분쟁은 시작됩니다. 재산을 분배하는 과정 속에서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형제간에 비교하는 데서 아픔이 생긴다고 합니다. 동생 집은 저렇게 잘사는데 동생만 밀어주고 나는 밀어주지 않는구나 하는 마음들이 가족들을 서로 미워하게 만들고 나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분쟁의 원인을 소유의 넉넉함에 있다고 합니다. 가난할 때 우리는 서로 돕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아낍니다. 그러다가 소유가 많아지면 다투기 시작합니다. TV가 없다가 있으면 채널 싸움이 일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분쟁의 원인을 깨달았습니다. 이 분쟁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유는 분쟁이 유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창13장 7절 마지막 부분에서 보면 ‘아브라함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두 가정만 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함께 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분쟁의 결과를 알았습니다. 가정에 분쟁이 일어나면 누구보다도 주변의 이방인이 아브라함 가정의 결속이 깨어지기를 원하면서 그들의 재산을 노리게 됩니다. 분쟁의 결과는 피차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너희가 피차 물고 먹으면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 15)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가정의 분쟁을 자주 보게 됩니다. 결국 싸우게 됩니다. 이때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변호사들을 삽니다. 결국 돈 버는 사람들은 변호사입니다. 분쟁이 없으면 변호사가 필요가 없습니다. 다투면 마음 상하고 돈 나가고 분쟁 이후에 맺는 관계도 어려워집니다. 다툼을 통해서 빚어지는 수많은 비극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한가지 아브라함이 분쟁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가나안 땅에 한 집안이 이주 해옵니다. 이방인들이 이들을 보니 하나님을 섬긴다고 합니다. 단을 쌓아 예배 드리고 찬양하는데, 재산 문제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 했을까요? 결국 하나님의 이름만 더럽혀진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은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교인인 것을 다 압니다.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도 다 압니다. 그러나 어느 날 재산 문제나 서열 문제나 비교의식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반목하고 질시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다툼이 일어납니다. 제가 어느 교회에 갔을 때 그 지역의 많은 불신자들이 “그 교회 싸움은 유명해요…… 유명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다툼으로 인해 지역 선교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이 분쟁을 해결하기 원했던 이유는 롯은 그의 분쟁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할 때도 롯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동거동락 했습니다. 비록 롯과 분쟁은 있었지만, 롯은 자기가 돌보아야 할 대상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임을 깨달으며 ‘너와 나는 골육이 아니냐’고 호소하기도 합니다.
싸움의 대상은 주로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더 위해주고 사랑해 주어야 할 사람과 오히려 원수가 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혹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과 싸우게 될지라도, 다른 차원으로 대할 수 없다면 즉 그들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선교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결국 분쟁의 대상이요 미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사랑의 대상임을 알았기에 분쟁을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과 교회에 반목과 다툼이 있습니까? 다툼과 분쟁이 있는 가정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왜 분쟁을 빨리 풀어야 하겠습니까? 본문 속 아브라함이 가졌던 동기를 묵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다툼은 피차 서로를 멸망하게 합니다. 그것은 역사가 보여 줍니다. 갈 때까지 가면 모두 망해 버립니다. 혹이라도 여러분의 다툼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게 됨을 안다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진정 다툼으로부터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교의 대상, 사랑의 대상임을 깨닫고 그 관계를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쓰고 있습니까? 창13장 8절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먼저 조카 롯에게 다가갔음을 알게 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가 어른을 찾아와야 합니까? 어른이 아이를 찾아가야 합니까? 조카 롯이 “삼촌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은혜를 받은 사람이 찾아가야 할까요? 은혜를 베푼 사람이 찾아가야 할까요? 조카 롯은 아브라함을 떠나서는 그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롯이 먼저 찾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먼저 찾아갑니다. 그것은 자존심을 내려놓은 것을 의미합니다. 삼촌의 자존심, 은혜를 베푼 자의 자존심, 가지고 있는 자의 자존심, 앞서간 자의 자존심 그리고 사랑한 자의 자존심 등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먼저 찾아갔습니다. 싸움은 자존심을 내려놓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분쟁 해결을 위해 사용했던 방법은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자신의 유익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대안을 제시합니다. 사방을 둘러보아 네가 좋은 땅을 먼저 선택하라고 합니다. 자신에게 유익된 선택을 포기했습니다. 손해를 감수했다는 것입니다. 분쟁은 손해를 감수해야 해결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쟁에 대해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잠언 15장 17절을 보면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찐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관계에서 오는 축복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인 것입니다. 소유에 우리의 축복이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쟁과 다툼이 있을 때에 해결해야 할 동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입니다. 사람을 선교의 대상으로, 사랑의 대상으로 보고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며 분쟁 자체가 가져다 주는 멸망을 생각한다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믿음의 사람들은 이 분쟁을 해결하려 할 것입니다. 관계에 관점을 두는 선택 그 선택이 여러분에게도 적용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아브라함이 복 받을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선택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선택했습니다. 창13장 12절 말씀을 읽어 보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롯이 떠난 아브라함을 상상해 본적이 있습니까?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 아브라함과 롯은 동고동락했습니다. 어떤 이유든 롯이 자기 곁을 떠났을 때, 아브라함의 허전함과 고독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 하나 눈앞에 기름지고 풍요롭게 보이는 소돔과 고모라, 자존심을 버리고 이익을 포기하며 주었던 땅을 바라볼 때마다 아브라함은 속상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아브라함이 그 땅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존심을 언제 꺾게 됩니까? 죽고 사는 문제가 이 일에 달려있다고 생각지 않을 때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