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위에 은혜! 2002-08-27 17:29:06 read : 3932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복음 1장 16절 // 2002년 8월 18일
어떤 사람이 바닷가를 거니는 꿈을 꾸었습니다. 두 개의 발자국이 나란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시밭과 아픔의 자갈길에는 발자국이 한 줄만 있었습니다. '주님 왜 이렇게 힘들고 괴로울 때에는 나 혼자 걷게 하셨습니까?'라고 울며 호소하는 성도에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너 혼자의 발자국이 아니라 너를 업고 걸은 내 발자국이라'고 하셨다는 이야기처럼 우리의 삶에는 순간 순간이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평안한 때에도 함께 하셨고 또 고난의 때에는 더욱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후서 12장 7절 이하를 보면 사도 바울도 몸에 찔리는 가시와 같은 고약한 병이 있어서 하나님께 세 번이나 고쳐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거절하시면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 하였습니다. 깨닫게 된 사도 바울은 "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몸이 아프고 괴로웠으나 그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니 너무 감격하였다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깨닫고 보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은혜에다 은혜를 더 쌓아 올린 것과 같이 온통 은혜라는 말입니다. 앞에도 은혜요 뒤에도 은혜요 오른 쪽을 봐도 은혜요 왼쪽을 봐도 은혜라는 말입니다. 즐거울 때에도 은혜요 고난의 때에도 은혜요, 성공할 때에도 은혜요 실패할 때도 은혜라는 고백입니다. 깨닫고 보면 모든 것이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신앙의 세계입니다. 말씀을 들으시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도 이런 은혜를 체험하고 깨닫고 감격하는 아름다운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래 은혜란 단어는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분에 넘치는 선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 위에 은혜라고 하여 더욱 그 뜻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또 어떻게 설명하여도 받을만한 자격이 전무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에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크고 엄청난 은혜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이런 은혜 위에 은혜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좀더 설명을 드린다면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에는 먼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은혜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최고의 은혜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어야 합당합니다. 어떤 인간의 노력이나 수단도 자신을 구원하는데 전혀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완전히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잃은 비참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 버려도 아까울 것이 없는 인간들, 하나님께 불순종만 하고 주시는 은혜를 깨닫지도 못하는 우매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들 가운데 보내셔서 인간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생명을 대신 할 것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은혜는 정말 은혜 중에 은혜가 아닐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은혜 위에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약에 보면 본래 인간이 하나님을 뵙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가 하나님을 그토록 보고자 사모하였으나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이 지나신 후 등뒤만 보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3장 21절 이하를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뵙는 영광과 기쁨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을 직접 뵐 수 있었던 감격을 고백하기를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그 안에서 참된 구원을 얻게 된 것은 정말 은혜 중에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어떤 은혜도 예수 그리스도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은혜의 총체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사용된 충만이란 단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수나 양에 있어서 전혀 부족함이 없는 완성된 상태로 있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빈곳이 없는 충만이요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차고 넘치는 충만이십니다. 범죄한 인간이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고 충분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는 인류 전체가 아무리 많이 마실지라도 고갈되는 법이 없는 샘물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목마른 자들을 향하여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고 초청하십니다. 예수님께로 오는 자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되는 것은 그분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가 풍성하여 항상 넘치기 때문입니다. 실로 모든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있는데, 이것은 오직 예수님 안에 있는 충만한 것들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다 빈자리가 있으며, 그 어떤 빈자리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한 것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과 독일군이 서로 싸우다가 길을 잃고 사막을 헤매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헤매다가 너무 목이 말라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들 앞에 신기루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의 눈에 신기루는 넘실대는 오아시스로 보였습니다. 그러자 연합군이나 독일군이나 할 것 없이 오아시스 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아시스가 아니라 뜨거운 모래 속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모래를 물로 착각하고 벌컥벌컥 들이마셨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모두 기도에 모래가 꽉 차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떠난 영혼은 갈증을 가지고 사막에서 헤매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참으로 갈증을 해소하려면 어떤 수단이나 방법으로도 해결의 길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바로 생수의 근원입니다. 요한복음 7장 37-38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였습니다. 충만하고 영원히 갈하지 않는 이 생수로 인생의 갈증을 풀어야 할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의 또 다른 뜻으로는 끊임없이 은혜가 지속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일회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순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삶의 시작 전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영원한 삶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은혜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속되는 은혜요, 주일부터 토요일까지 지속되는 은혜요 한 달만이 아니라 년 초부터 년 말까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풍성한 은혜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상황이나 분위기와 관계없이 언제나 우리를 향하여 풍성하게 역사하시는 은혜입니다. 좋은 때는 주시고 나쁠 때는 외면하시는 은혜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은혜입니다. 우리의 그릇이 너무 작아 주시는 은혜를 다 감당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치지 않고 계속하여 은혜를 더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런 은혜를 체험하면서 고백하기를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시편 23편에서 고백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바로 우리가 그 은혜를 받아 누리는 사람들이라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의 은혜러라"고 한 것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우리는 이미 그의 충만한데서 넘치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깨닫고 보면 부족함이 없는 넘치는 은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위에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이렇게 끝이 없는 은혜라는 말이요 아울러 무진장한 은혜(inexhaustible grace)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처럼 은혜에 대하여 가장 잘 나타낸 표현은 없다고 할 만큼 충만한 은혜를 나타낸 것으로 이 표현은 '가장 큰 은혜', 혹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은혜'라는 최상급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주신 은혜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줄 수가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모두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 사용된 "충만"(플레로마)이란 말은 '가득 차 있는 것', '전체' 또는 '합'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온갖 보화가 충만하며, 그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과 영광이 충만했습니다. 골로새서 2장 9절에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온갖 지혜와 의, 그리고 거룩과 자비가 충만하다고 고린도 전서 1장 1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충만한 중에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리스도는 충만한 분이므로 온 인류에게 무한한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요한은 가리켜 "은혜 위에 은혜"라고 한 것은 우리에게 닥친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기에 충분한 은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짐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이라도 충만한 은혜를 베풀어줄 수 있습니다. 광야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만나와 생수와 구름기둥과 불기둥입니다.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과 장래에 대한 보장이 여기에 모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충만한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기에 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예수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될 생수입니다. 이 생수는 유대교라는 종교나 어떤 다른 종교의 우물에서 나오는 물과는 다릅니다. 또 인간들이 추구하는 재물이나 명예, 또는 권력이라는 우물에서 얻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신 바로 그 생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믿음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족함이 없이 주시는 생수입니다.
발전소에서 보내오는 고압 전류를 변전소를 통하여 고합 전류의 전력을 내려주므로 접근하면 감전 될 수밖에 없었던 전기를 허물없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변전소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철을 움직이게 하는 전압은 보통 2,2000볼트인데, 연을 날리다가 그 실이 전선에 닿으면 그 연을 날리는 사람은 감전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태백 쪽으로 여행하는 하는 사람들에게 고압선이 있는 쪽으로 어떤 물건도 던지지 못하도록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전기가 우리 가정에 들어와 우리들에게 어두움을 밝히는 빛으로, 추위를 녹이는 따뜻함으로, 더위를 식히는 시원함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중간에 변전소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막강한 에너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우리의 생활 전반에 아니 우리의 미래와 영원에까지 끌어들여 생명의 빛과 온기와 바람이 불어오게 하셨습니다. 정말 죄 때문에 결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자가 되어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는 복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기쁨을 깨닫고 감사할 뿐 아니라 아직 이 진리를 모르는 이웃에게 전하여 함께 이 은혜를 누리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