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자유 2002-08-27 17:50:01 read : 4178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갈라디아서 5:1, 13∼15 // 2002-08-21
갈라디아서 4장과 5장에는 '자유'라는 말이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열 번 가까이
나올 것입니다.
국어 사전에서는 자유를 "마음대로인 상태, 장해가 없는 활동, 남에게 구속·강
제·지배를 받지 않는 일"이라고 풀이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그것과 함께 차원이 다른 또 하나의 뜻을 가지고 있습
니다.
저는 오늘 '성숙한 자유'라는 말로 성경이 말하는 자유의 뜻과 교훈을 여러분과
함께 찾으려고 합니다.
첫째, 영적인 자유가 성숙한 자유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통치에서 해방되어 얻은 자유, 바벨론 포로생활
에서 벗어나 얻은 자유, 이 같은 정치적인 자유에 대해 말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또 종살이하던 사람이 희년이 되어 종살이에서 벗어나 얻는 자유, 이와
같은 육신적인 자유에 대해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자유도 소중한 것입니다.
최근에 한 젊은이가 3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
어 석방된 일이 있습니다. 군의 부사관이었는데 총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체
포되어 가혹행위 때문에 억지 자백을 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기자들이 소감을 묻자 이 젊은이는 "마음껏 걷고 싶어요. 자유가 너무 그리웠거
든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유는 그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미국 오클라호마대학의 한 연구팀이 '바슈'라는 이름을 가진 침팬지에게 140 가
지 사인 랭귀지(sign language)를 가르쳤습니다. 단어를 손짓 발짓으로 표현하
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동안 이 침팬지는 최고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연구팀은 단어들을 가르치고 침팬지가 제 생각에 따라 이 단어들을 연결하여
말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침팬지가 제일 먼저 표현한 말이 'Let
me go!'이었다고 합니다. '나를 놓아 달라!' 의역하면 '나에게 자유를 달라!'입니
다. 최고의 대접도 소용없었습니다.
동물들도 자유를 그리워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자유, 특별히 신약에서 말하는 자유는 거기에서 한 단계 더 올라
갑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의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하는 말씀이나 오
늘 본문에 나오는 자유는 먼저 죄에서 자유를 말합니다.
그 다음에 그 당시 사람들은 율법에 꽉 얽매어 있었는데 율법에서의 자유를 말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
야 한다고 하는데, 공로를 쌓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어서 두렵고 절망감이 날로 더해 가는 데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자유를 철저하게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의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는 것은 자유를 얻고 부르는 '만세!'
소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율법에 얽매인 부자유와 복음
이 가져다주는 자유를 철저하게 비교하면서 그 우열을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부자유의 종교이고 기독교는 자유의 종교라고 단호하게 선포할 수 있
었습니다.
이런 자유를 한 마디로 요약해서 영적 자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자유를 사전적 의미의 자유, 일반적 의미의 자유,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할 때 그 자유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멋있어 보입니다. 자유가
없는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나 젊은이들에게는 더욱 매력적으로 보
입니다. 예수님의 첫 설교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하심
이라"(눅4: 18∼19)가 그런 관점에서 많이 해석되었고 지금도 해석되고 있습니
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자유를 영적 자유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일반적 의미의
자유라는 관점에 치중해서 보는 것은 하늘을 나르는 독수리를 끌어내려 땅 위
를 걷는 닭으로 만들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정치적인 자유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영적인 자유를 완전하게, 모두에게, 골고루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영적인 자유, 성숙한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을 신학적으로 '그리스도교 구속론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자유에로의 부르심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의 본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영적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모순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를 모르는 것은 비극입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거듭해서 말하고 있는 자유는 죄수가 교도소 밖으로 벗어날
때 쓰는 자유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그러한 자유보다 훨씬 더 크고 귀한 자유,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곧 양
심의 자유, 율법주의의 횡포로부터의 자유,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지키려고 애쓸
때의 절망감으로부터의 자유,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승인하신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런 자유
를 알고 있으며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 이 가운데 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아직도 죄에 사로잡혀 죄가 시키는 대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분들이 있습
니까?
아직도 '내 힘으로 무엇을 해야지 천국 갈 수 있다' 생각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
니까?
그것은 8·15 해방이 되었는 데도, -이런 사람들이 실제로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 사람들에게 굽실굽실하고, '천황' 소리가 나오면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하고, 일본 사람들이 보이면 얼른 집에 있는 놋대접이나 심지어는 놋숟가락까
지 갖다바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그런 것들까지 다 빼앗아갔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의 종들까지 빼
앗아다가 녹여 대포알을 만들었습니다.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36년 동안의 습관 때문에 이렇게 한 사람
이 있었다면 더 할 수 없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 있는 성도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기셨다는 선언을 들
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마시고 영적인 자유를 마음껏 누리
시기 바랍니다.
1950년대나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저 필리핀이나 오지의 밀림 속에서 일본
패잔병들 가운데 그 때까지 동굴 속에서 몇 년씩, 혹은 십여 년 씩 숨어서 지나
던 사람들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허리까지 내려온 머리에 누더기가 된 옷차
림을 한 사람이 구식 소총을 들고 동굴 앞에 서 있는 사진과 함께 신문에 종종
실렸습니다. 그 사람들은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숨어서 불안한 생활을 하며 마을에 몰래 내려와서 식량
을 훔치거나 도마뱀을 잡아먹고 열매로 배를 채웠습니다. 거의 쓸모 없게 된 녹
슨 소총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불행한 사람들
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는 항복을 했습니다. 그 동굴에서 나오세요. 밝은 곳으로 나오세요" 알려
주어야합니다.
8·15 해방을 통해서 우리는 일본 사람들에게 호통을 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8장 2절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은 영적인 8·15 해방선언입니다.
우리는 지금 죄를 향해서 호통을 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는 영적 자유인이다!' 자신에게 외치면서 5장 1절의 후반절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 교인들 가운데는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
다. 복음이 주는 자유를 반납하고 다시 율법이 노예가 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
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간곡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굳건하게 서서"라는 말은 '계속해서 서 있으라'라는 뜻입니다. 서 있다가 주저
앉았다 하지 말고 꿋꿋하게 서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영적인 자유인으로 꿋꿋하게 서서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주님께 순종하는 자유가 성숙한 자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자유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역사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요 결코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종의 멍에를 메심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자유
를 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8장 31절에서 36절까지에서 이것을 강하게 말하고 있습
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
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
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
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이렇게 해서 참된 자유를 얻은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따라가야 합
니다. 그래야 그 자유를 온전히 누리고, 발전시키고 나가서 행복도 누릴 수 있
습니다.
휴가 때 여러 권의 책을 읽었는데 그 가운데 어느 여류 작가가 쓴「수도원 기
행」이 있었습니다.
이 여류 작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복을 찾습니다. 여러 가지로 행복
을 찾는데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 대목을 그대로 읽어 드립니다.
처음엔 소설가가 된다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소설가가
되었다.
그 다음엔 유명해지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우연히 운이 좋아 나는 유명
해졌다.
그 다음엔 당연히 돈 걱정이 없어지면 행복할 거리고 생각했다. 생활비를 다
쓰고 나서도 통장에 늘 100만 원만 있다면 아무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그
런데 94년 여름 내가 낸 세 권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러니 돈도 생
겼다. 이제 100만 원이 문제가 아니라 하루를 자고 나면 통장으로 수천만 원
의 인세가 도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이 여류 작가는 여러 가지 굴곡을 겪고 신앙을 회복하게 됩니다. 신앙의 회복을
통해 행복을 얻고 이렇게 적습니다.
어쩌면 그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이 18년이었다. 그리고 돌아가 나
는 신에게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항복합니다, 주님, 하고 써 놓고 보니 우리
말이 이상하기도 하다 항복과 행복. 획 하나 차이의 낱말….
이 확 하나가 중요합니다. 주님께 항복하면 자유를 얻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자유가 성숙한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행복으로 연결됩니다.
이것은 덧붙이는 이야기인데 휴가 때 읽은 책 가운데 미국인으로 한국에 와서
승려 생활을 하고 있는 현각(玄覺)이라는 분의「만행」이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의 저자를 매
스컴에서 많이 대했을 것입니다.
미국인이, 더구나 예일대학과 하버드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한 인텔리가 어떻게
해서 한국의 승려가 되었을까, 궁금하게 생각하면서 읽었습니다.
흥미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감동도 별로 없었습니다.
'내가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편견이 굳어져서 감동과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저자의 입장에 서려고 노력하면서 다시 살펴보았습
니다.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종교, 다시 말씀드려 불교가 주는 한계를 깨닫는 것 같았습니다.
출애굽기 21장 2절부터 6절까지에는 자원하는 종에 대한 법이 기록되어 있습니
다. 읽어 드립니다.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
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 만일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
로 나갈 것이요 장가 들었으면 그의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 만일 그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주어 그의 아내가 아들이나 딸을 낳았으면 그의 아내
와 그의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만일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
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
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
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
이 종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주인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평생토록 종노릇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주인을 섬기는 것은 같지만 법에 매여 종으로 섬기는 육 년과 '이 집
에서 나가도 좋소. 당신은 자유인이요'하는 선언을 듣고 그 표시로 송곳으로 귀
를 뚫어 몸에 증표를 지닌 이후에 섬기는 것은 다릅니다.
앞에서는 강제로 매어 섬기는 것이고 뒤에서는 자율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마지못해 섬기는 것이요 뒤에서는 기쁨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자유를 얻은 증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예수의 흔적'이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전도하다가 채찍이나 돌에 맞은 상처를 말하는 것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한 것
을 보아 십자가로 말미암은 구원의 확신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들도 귀에 '당신은 자유인이요' 증거해 주는 보이지 않는 구멍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민등록증보다 더 중요한 신분증명서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기쁨으로 주를 섬기는 종들과 같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성숙
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 됩니다.
우리는 자발적인 종이 되어야합니다. 사랑의 새 노예가 되어 주님을 섬겨야합니
다. 그럼으로 성숙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 절제하면서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자유가 성숙한 자유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믿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자유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가서 어떻게 하면 이 자유를 지킬 수 있나 하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13절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
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자유를 얻었으면 마음대로 행하고 싶은데 종노릇하
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자유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종노릇하기 위해 얻은
자유입니까?
혹시 아까 사랑의 새 노예가 되어 주님을 섬겨야 한다고 했을 때부터 이런 질
문을 하고 싶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에 깊은 교훈이 있습니다. 수사법 가운데 모순어법이라는 것이 있습
니다. 아주 고급 수사법입니다. 모순되는 말을 함께 사용해서 강조효과를 높이
는 것입니다. 어떤 시인의 잘 알려진 시 가운데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
는 말이 그 본보기입니다. 아우성은 소리가 커야지요. 소리 없는 아우성이기 때
문에 그 아우성이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법이
라고 하는데 진리라면 낮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말해도 이깁니다. 아니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이깁니다. 요즘 병풍인지 뭔지를 가지고 끝없이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는 사람들이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설교도 그렇습니다. 설교준비를 제대로 못한 설교자가 공연히 소리를 높입니다.
자유를 얻었는데 종노릇하라는 것도 모순어법이고 모순논리입니다. 그러나 그렇
게 하는 자유가 더욱 성숙한 자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얻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 노릇을 해야합니다. 먼저 그
리스도에게 종 노릇해야 하고 그 다음에 이웃에게 종노릇해야 합니다. 사랑으
로 종 노릇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기적인 자유가 아니라 섬김의 자유입니다. 이타적인 자
유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율법의 압제에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율법
에서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 윤리적, 도덕적 방종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자유를 악용하여 육체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기 쉽습니
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것을 경계하면서 자유는 이웃을 위한 봉사로 연결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자유를 저급한 본성
에의 방종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미숙한 자유로 바꿔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으로 자유롭게 된 사람은 절제, 이웃에의 사랑의 봉사,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핵심에 순종으로 자신의 자유를 누려야합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지요.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면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 본질입니다.
절제가 따르지 않는 자유, 봉사가 따르지 않는 자유, 성숙하지 못한 자유의 부
작용을 8·15 해방 뒤에도 겼었고 4·19 혁명 뒤에도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습
니다.
성숙하지 못한 자유는 탈선과 방종을 가져옵니다.
1950년대에 한 소설가가 한 가정주부가 그 때 불어닥친 춤바람 같은 데 휩쓸리
며 탈선하는 내용의 소설을 신문에 연재했습니다. 대단한 인기를 끓었지요. 그
소설의 제목이 「자유부인」이었습니다.
자유부인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지요. 자유남편은 더 문제입니다. 자유청소년
은 더 문제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얻었는데 성숙함이 없으면 이단들이 난무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죄로부터의 자유를 죄에로의 자유로
다시 바꿀 위험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중심적인 삶에 다시 갇히는 것이 됩니다.
절제와 봉사가 따르는 자유는 소극적인 자유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
로 가장 적극적인 자유입니다. 성령 안에서 행하고 성령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을 수 있느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울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 먹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먹는 자유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
나지 않고 그 자유를 절제할 것을 권합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
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이어서 "그러므
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유의 절제를 권하면서
자기 자신은 자유의 포기를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자유의 모범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도 여러분, 영적인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자유를 빼앗기거나 잃어버리지 말고 믿음 위에 굳건하게 서시기 바
랍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이웃에게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