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난한 회복의 역사 2002-08-27 17:57:44 read : 3937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느 13 : 4 - 9) 2002. 8. 25.
교회 정원에 있는 국기계양대 뒤에 무궁화가 피었습니다. 이를 바라보며 이번 주간에는 점점 잊혀져가는 1910년 경술년의 국치일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았습니다. 일부 대신들이 가짜 옥쇄로 의정서에 찍고는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넘겨준 날입니다. 참으로 수치스러운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수치일을 잊고 오늘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으니 이 나라와 백성의 진정한 회복은 상당히 험난한 것 같습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미래를 산다’라는 책에서 인류 역사 이래 죄가 없었던 때, 죄가 없는 나라, 죄가 없는 민족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나라는 건재하는데 어떤 나라는 망했다고 말하면서, 나라가 망하게 되는 세 가지 큰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역사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는 나라. 자기 분야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데,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는 나라.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나라. 바로 책임소재가 분명치 아니하므로 그 나라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부정적인 면에서 집단행동이 강한 나라. 집단행동은 정당화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집단적인 행동을 ‘의(義)’로 착각하는 나라. 많은 사람이 주장한다고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악이 집단화될 때 그 힘을 정의의 기초로 생각하는 것은 바로 멸망의 징조라는 것입니다. 셋째, 자기 중심주의가 강한 나라. 내 생각, 내 주의, 내 철학, 내 명예 등이 강하고 공동의 유익을 위한 생각이 적을 때 그 나라는 망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역사학자 토인비가 내린 결론이 오늘의 말씀을 잘 설명해 주는 듯합니다.
오늘 말씀은 옛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나라를 다시 찾고 세워가던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험난한 과정이었겠습니까? 풀어야 할 문제가 산더미처럼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도비야라는 사람으로 인한 복합적인 문제였습니다. 이는 나라에 관한 문제뿐만 아니라 신앙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느헤미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도 가지고 있는 산더미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향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먼저, 도비야는 정치적으로도 수단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외국인이면서도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납니다. 느헤미야 4:3에 의하면, 그는 당시 이스라엘에 파견된 장군 산발랏의 그늘 아래서 영향력을 발휘하던 암몬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을 쌓을 때, 그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질 것이라고 비방하며 방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방해를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비야는 어떤 혜택도 유대인들로부터 받아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느헤미야가 나라를 비우고 왕을 알현하러 간 사이에 이러한 혜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암몬 사람은 이스라엘의 회중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새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 가운데 큰 방 하나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방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정치적인 수단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느헤미야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당시 정치, 사회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 도비야를 몰아낸다는 것은 매우 부담이 큰 일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외국인이었지만, 도비야는 자기보다 먼저 정착해 상당한 기반을 마련한 사람이요 이미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뚜렷한 명분이 없이 몰아낸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이를 강력하게 밀어부쳤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나라를 회복시키는 일이요 다시 세우는 일이요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다하는 책임감을 발휘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결과가 있었습니까? 도비야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를 쫒아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도비야가 산발랏이라는 장군을 등에 없고 오만방자하게 행동을 했다면, 느헤미야 총독은 왕 아닥사스다에게서 직접 유대통치를 위임받았기 때문에 더 든든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배경을 사용하여 유대인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중심인 하나님의 성전을 올바로 회복시키는 것은 나라를 바로 세우는 것이요, 역사적 책임을 지는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은 은연중에 이러한 역사를 하나님의 역사로 오늘 말씀은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는 바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도 깊은 의미를 줍니다.
오늘날도 나라의 역사에 대한 책임이라는 점에서 비슷하거나 똑같은 사건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를 제대로 못한 것 같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친일파를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하질 못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때도 일본의 배상금을 바탕으로 경제계획을 세우려 하다보니 정리를 깨끗이 하지 못하고 수교를 맺었습니다. 오늘날도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에 무슨 빚을 졌는지 동해의 영해권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독도지역을 중간수역으로 내주고 말았습니다. 이래저래 우리나라는 굴절된 역사의식 속에서 제대로 서보질 못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면에서도 나라에 대한 혜택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 주간 신문을 보니 어느 50대 주부는 26채의 아파트 거느리고 있으면서 소득세는 하나도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느 의사-변호사 부부는 16채의 아파트 및 상가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년 소득 800만원을 신고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많은 소득이 있을 것인데, 그 소득은 혼자의 힘으로 벌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바로 이 사회 속에서 벌어들인 것인데, 이에 대한 책임을 지지는 않으려 하는 자세입니다. 이 역시 나라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지지 않는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라는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때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이 나라의 역사를 바로 세우려 힘있게 돌진하는 지도자가 필요한 때입니다. 남이 아니라 바로 나 모두가 책임을 질 줄 아는 지도자와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정 이 나라가 회복되려 한다면, 하나님의 종으로서 나라에 대한 사명을 가지고 책임지는 사람들이 많을 때 이 나라는 역사를 다시 일으키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길 줄 알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이 나라의 역사 앞에 책임을 다 하는 지도자와 국민들이 될 때 진정 그 나라는 올바로 회복된다는 진리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또한 신앙적인 면에서도 큰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들과 이를 위한 도구들이 놓인 방을 비워서 그것도 이방인에게 방을 내어주었습니다. 암몬사람 도비야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방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세속적인 힘이 거룩한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 사건입니다. 이러한 일이 왜 일어났습니까? 도비야 혼자의 힘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역을 위임받은 엘리아십 제사장 같은 사람이 세상의 힘과 타협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가서는 세상에 물들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외부 세력의 도전에 의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기도 하지만, 특별히 내부적인 모순과 타협에 의해 더욱 쉽게 가려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안에서 하나님의 영역을 지키는 것이 무척 힘들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과 현상을 물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총독 느헤미야는 도비야를 성전에서 쫓아내고 그곳에 있어야 할 하나님의 물건들을 다시 회복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집을 지켰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義)가 바로 서게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당시 이루어 나가게 한 일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힘을 가진 사람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의를 바탕으로 해서 세상적인 힘을 물리치며 하나님의 성전을 올바로 세워 나갔습니다. 아주 험난하지만 하나님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모습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자주 일어나고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일어납니다. 이는 목회자들에게 나타날 수도 있고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가 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은 지도자의 욕심에 의해 교회가 움직이고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에 참여하기는 하나 비기독교인적인 지도자에 의해 움직일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군을 정치장교가 움직였듯이, 교회도 비기독인 지도자에 의해 움직인다면, 그 사명을 다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가 오늘날 하나님의 성전을 도비야같은 이방인에게 내어주는 것이겠습니까? 이는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존경하는 한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는 굉장히 큰 영향력을 끼치는 분이기에 그 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정도입니다. 그분은 항상 웃으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설교를 하시는 분이요 또한 대형교회를 이루신 분입니다. 그는 언젠가 목회자들에게 교회성장에 대해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교회성장을 원하십니까? 절대로 죄에 대하여 말하지 마십시오. 부정적인 것에 대하여 언급도 하지 마십시오. 오로지 긍정적인 것만 말하고 자극적이지 않은 것을 말하십시오. 그러면 구름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가르침이 그의 말대로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몰려들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가르침이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래서 지난 80년대 한국교회는 많이 성장한 듯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복음에 반하는 가르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죄에 대하여 가능하면 설교에서 언급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죄를 애써 외면하려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결과가 왔습니까? 이 사회에 죄와 악이 여전히 독버섯처럼 번져나가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는 많은 양떼들이 병들어 죽어갔으며 또한 세상의 빛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지탄을 받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고 해서 그 교회가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공식화하는 데에 우리는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영역을 인정할 줄 알고 그 분께 순종하는 교회 그리고 그 앞에서 항상 죄인된 모습을 갖추는 교회가 진정 아름다운 교회인줄 압니다. 사람이 보기에 훌륭한 지도자 같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느냐 하는 점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거하는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가지고 있으면서 각 개인의 욕심과 명예를 위하여 하나님의 것을 타협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역을 스스로 유보하고 침해당하도록 내어놓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바로 성전의 방에 있어야 할 물건들을 내어버리고 그 방을 차지하는 자세를 취하며 살아갈 때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방에 있어야 할 물건들이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사용되는 기명과, 소제물과 유향 등입니다. 모두 하나님께 헌물로 받쳐진 것이요,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들로 받쳐진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성전의 방에서 내어다 놓았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감사의 마음을 회복시켰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방에는 레위인에게 줄 십일조와 제사장들에게 줄 거제물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일하는 자들에게 지불되어야 할 사례비입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하면, 이는 이웃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맡아 감당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야 할 헌물이요 세금입니다. 바로 그것을 느헤미야는 제자리에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웃과 교우들에 대한 사랑과 봉사 그리고 섬김 등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헌신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섬김 없이 교회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그것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행했다고 한다면 이는 도비야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때 해결방법은 무엇입니까? 느헤미야가 과감하게 도비야를 내어 쫒은 것처럼 우리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욕심을 스스로가 잘라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서 5:12에서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버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잘못된 모습을 헤아릴 줄 알고 이를 스스로 베어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단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 나라와 하나님의 성전을 세상적인 힘으로 채우려 합니다.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이를 이루려 합니다. 아주 그럴듯한 방법으로 우리의 마음을 유혹합니다. 그리고 죄와 악의 종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 나라와 하나님의 교회가 올바로 회복되고자 한다면, 바로 올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느헤미야처럼 오늘의 문제를 분명히 볼 줄 알고 과감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행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가득차야 합니다. 예수님도 무엇이라 외치셨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