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본문이 곧 설교입니다 2002-08-30 17:54:16 read : 5154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시드니 그레이다누스(Sidney Greidanus) 박사
박사님의 이름은 이미 한국의 신학도들과 목회자들에게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만 이번 기회에 좀 자세히 소개해주십시오.
저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으나 저의 부모님은 프리즈란드 분들입니다. 프리즈란드는 네덜란드의 북부지방을 말하는데 이 지방 사람들은 그들 고유의 언어인 프리지안어를 사용합니다. 저의 모국어도 프리지안어였으나 곧 네덜란드어가 집 밖에서 사용하는 제2국어가 됐습니다. 제가 15세가 되던 1950년, 즉 지금으로부터 52년 전에 부모님과 함께 캐나다 서부에 위치한 에드몬튼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팔남매의 맏인 저는 곧 일을 해야 했으므로 통신 교육과정을 받았습니다. 저는 농장 착유장에서 우유통을 씻는 일을 하기도 했고 후에는 안경 수리일, 또한 금전등록기, 저울, 냉장고 등의 판매원도 했습니다.
그 후엔 캐나다 공군에 입대해 333제트기를 비행하는 조종사가 됐어요. 다시 에드몬튼의 수색 비행중대로 돌아와 2차 대전에 쓰였던 폭격기로 에드몬튼의 예비군에 속한 B25 폭격기를 조종했습니다. 공군복무를 끝낸 후에 비행기 조종을 계속하고 싶어 캐나다 항공으로 갔으나 그 당시 회사에 취직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성탄절에 칼빈대학교에 다니던 남동생이 집에 왔는데 공부하는 것이 매우 좋다며 칼빈대학교에 오기를 권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1958년 칼빈대학교에 입학해 4년 과정을 3년 반만에 마치고, 1964년에는 칼빈신학교를 졸업한 뒤 네덜란드에서 장학금을 받아 6년 동안 자유대학교(Free University)에서 공부했습니다. 공부를 마치자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매우 간절해졌습니다. 칼빈신학교 재학중 이미 칼빈대학에서 라틴어를 가르친 경험도 있어 더욱 교수사역을 하고 싶었으나 제가 공부를 마쳤을 때는 학교에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때 기독교선교교회(Christian Missionary Church) 목사가 되어 온타리오교회에 부임했고, 5년 간 목회한 뒤 브리티시 콜롬비아(캐나다 서남부 주)에 있는 교회에 부임해 또 3년을 목회하던 중 캘칼대학교에서 가르치게 됐습니다. 그 후 제 고향인 에드몬튼에 새로운 기독교 대학인 킹즈대학교(King’s University)가 세워졌는데 이곳의 초창기 교수로 부임했습니다. 그리고 1990년 칼빈신학교에서 설교학 교수로 초빙을 받아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최근의 설교학자들은 실제적인 성경해석학보다는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주로 관심을 두고 있는데 교수님께서는 주로 성경해석학에 중점을 둔 책을 집필하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현재 설교학에 있어서 커뮤니케이션 중심의 해석학적 경향을 어떻게 보십니까?
현재 설교학의 경향이 수사학으로 기운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1989년도에 제가 북미 설교학술원에 가입했을 당시 그곳에 계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연구가였고 당시에는 강해설교와 성경적 설교를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5~6년 전부터 그곳에 따로 수사학을 연구하는 모임이 시작됐습니다. 앞으로 어떤 경향으로 흐를지는 저도 장담 못하지만 개인적으로, 제 저서에서 밝혔듯이 성경해석학과 설교학은 손과 장갑처럼 서로에게 속한 것입니다.
만약 올바른 성경해석을 갖추지 못했다면 비성경적 설교를 하게 되는데 이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그래서 저에게는 성경해석학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곳에서 제가 가르치는 설교학 과목에서는 항상 참된 성경의 진리 앞에 우리가 어떻게 최대한으로 진실할 수 있을까를 먼저 고민하게 합니다. 강해설교의 정의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제가 정의하는 강해설교란 성경 ‘본문의 구성을 이용하여 그 특정한 문 안에 나타난 진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올바른 강해설교를 위해서는 설교자가 성경해석학의 기본을 잘 익혀야 하겠군요.
물론입니다. 그 외에도 필요한 사항이 있죠. 제 생각에 설교자는 조직신학에도 훈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조직신학은 우리에게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폭넓은 시각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성경해석이 자칫 이단과 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성경에서 어떤 특정한 본문만이 우리의 호감을 끌기도 하는데 이것은 성경 전체를 보게 하는 조직신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강해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조직신학, 성경언어, 성경해석학 등을 골고루 잘 갖출 필요가 있어요.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구약설교를 어렵게 느끼고 있는데, 교수님께서는 그 주된 요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 주요 요인이 오늘날의 교회와 구약성경이 주어진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역사적 문화적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언어의 장벽이죠. 히브리어로 쓰여진 것을 한국의 설교자들은 한국적인 정황으로 이해해야 하겠죠. 그런데 언어란 한 나라의 백성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의 전반적인 심리와도 관련됩니다.
즉 고대 세계와 현대 세계 사이에는 언어현상 때문에 생기는 장벽이 있습니다. 고대의 농업사회와 오늘날 도시사회라는 차이가 가져오는 거리도 있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거리를 연결하는 다리 놓기가 무척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구약 설교가 어렵다고 여기게 하는 요인이라 생각합니다
. 또 한 가지 당연한 이유로는 구약성경의 범위가 너무 넓어서 그 안에서 설교하는 것을 많은 설교자들이 편하게 여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소 이해하기 쉬운 신약에 비해 구약은 이해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장 어려운 점은 구약을 배경으로 그리스도를 설교하기가 신약보다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죠.
교수님의 지적처럼 구약을 설교하기가 쉽지 않지만,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란 더욱 어려운 것 같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이미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에 대한 책을 저술하셨는데, 구약성서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제가 쓴 「구약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설교할 것인가」(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에서 저는 이미 이에 대한 정의를 소개했습니다. 과거에는 단순히 구약에서 ‘야웨’란 이름이 나올 때마다 그 부분을 그리스도로 대입하여 읽었습니다. 왜냐하면 70인역(LXX) 속에 ‘야웨’가 ‘퀴리오스’로 번역됐으며, 신약에 ‘퀴리오스’는 예수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둘을 동일시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타당한 방법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그리스도를 구약에서 역사하시는 영원한 말씀(로고스)으로, 즉 ‘야웨’의 천사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지하는 바는 ‘왜 우리가 그리스도를 설교하는가’ 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나아오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에 계시된 그리스도입니다.
저는 먼저 이스라엘을 향한 구약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그것이 우리가 신약에서 발견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우리 자신들에게 질문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말씀을 준비할 때는 항상 구약에서 그치지 않고 신약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지의 정의가 될 것입니다. 구약에서 멈추어 서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구약성경의 모든 본문 속에서 항상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합니까? 구약 성경 모두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까?
글쎄요, 참으로 어려운 질문입니다. 저는 구약의 모든 본문 속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하여 「구약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설교할 것인가」를 저술하는 것을 하나의 엄청난 과제로 여겼습니다. 제 책에서 저는 교회 역사 안에서의 그리스도 설교에 관한 연구도 했습니다. 초대 교부들은 그리스도를 설교하기 위해 우화적 방법을 자주 사용했습니다만 저는 이 우화적 방법이 타당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약 내용을 구약으로 거꾸로 읽는 격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차라리 신약의 메시지를 그대로 언급하는 것이 낫죠. 구약을 설교할 때 중요한 사실은 본문의 말씀이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구약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인 후, 그 메시지를 신약의 그리스도와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논점은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항상 그리스도를 설교해야만 하는가’ 입니다. 이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봅니다. 즉 세례의식과 성찬예식이 포함되는 기독교 예배의 상황에서는 그리스도가 설교 속에서 뚜렷이 언급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을 볼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제가 관심을 두는 것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점과 또한 그 연관성을 차마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우리는 모든 설교에서 항상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설교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모든 성경이 나를 가리키고 있다고 말씀하셨기에 마땅히 모든 설교는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은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일 구약성경에서 설교자들이 그리스도를 발견하거나 설교하기에 가장 어려운 책이 있다면 어느 것일까요?
가장 어려운 책이라면 두말할 나위 없이 바로 지혜서입니다. 예를 들면 잠언을 설교할 때 많은 이들이 잠언 8장에 “태초에 지혜가 있었으니”란 말씀을 지적하면서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와는 관련이 없는 그리스도를 설교합니다. 현재 저는 창세기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설교할 것인가에 대해 책을 쓰고 있는데 이 책이 완성되면 지혜서를 통해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책을 쓰려고 생각중입니다.
엄청나게 힘든 작업이 될 것이지만 도전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설교를 정의하면서 이전에 다루지 않았던 부분인데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를 설교할 때, 그의 사역이나 인성과 관련하여 설교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저는 그 정의의 영역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에까지 넓혀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랍비였고, 선생이었으며,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신약에는 예수님의 지혜를 보여주는 수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신약의 예수님의 지혜로운 가르침을 인용함으로써 구약의 지혜서 말씀을 종종 설교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곧 구약을 통해 계속 내려 온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인성과 사역과 가르침 가운데서 우리가 지혜서에서 설교할 수 있는 부분은 특히 예수님의 가르침과 관련되겠군요.
맞습니다. 인성과 사역보다 가르침의 영역에서 지혜서를 보면 더욱 예수님의 말씀이 확연히 드러나죠.
교수님께서는 지혜서를 통하여서도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설교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지속적인 도전으로 남을 것이며 우리는 여전히 어떻게 이 과제가 실제적으로 풀려나가는지는 주시해야 합니다.
월터 카이저 박사님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 특히 한 주제를 가지고 성경신학을 세우고자 하는 학자들이 한결같이 지혜서로 인한 어려움을 고백합니다. 지혜서가 일관된 신학을 형성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말이죠. 설교학에서도 예외가 아니군요.
네, 맞아요. 그러나 참 흥미로운 것이 있는데요. 제가 공군에 있을 때 기독교인이 아닌 동료들에게 자주 잠언을 읽어주곤 했는데, 바로 지혜서는 하나님의 창조와 질서에 근거를 두고 있어 모든 이들에게 와 닿는다는 사실입니다. 즉 누구에게도 설득력이 있다는 거죠. 이러한 점에서 설교자로서 지혜서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는 우리에게 실제적인 도전이요 필요한 과제가 됩니다.
이제 해석학에 관한 구체적인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에 관한 몇 가지 방법론을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저의 책에서 구약을 근거로 한 신약의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몇 가지 방법을 찾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교회사에서도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7가지 방법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이 일곱 가지를 다 응용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몇 가지 살펴보면 그 첫 번째가 바로 구속사적 진행에 관한 것인데, 곧 창세기에 계시된 것처럼 여자의 후손을 살아남게 해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가 오시게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 언약과 성취가 있어요. 이것은 메시아에 관한 구절로 자주 사용되고 있지요. 다른 것으로 구약의 모형론에 나타난 메시아의 약속은 그리스도에 관한 모형으로서 예수님의 인성이나, 어떤 사건, 혹은 제도 등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발견한 주제를 신약 속의 그리스도로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까지 추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명백하면서도 약간 쉬운 또 다른 방법은 신약의 관주를 참조하는 것입니다. 헬라어 신약 성경의 뒷부분을 보시면 신약 내용 중 구약이 인용되는 구절들의 목록이 있는데 매우 유익한 다리 역할을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대조법입니다.
즉, 지금은 그리스도가 계시는 새 시대이므로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명령하신 여러 가지 내용이 새로운 강조를 띠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할례 대신 세례가 강조된 것이죠. 왜 이럴까요? 바로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이죠. 그는 피를 흘리셨습니다. 속죄양이 죽어야 했던 유월절 대신 이제는 성만찬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구약을 설교할 때에 달리 읽어야 할 구약성경 구절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로 인하여 지금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약성경의 사람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이 구약의 지평 내에서도 메시아에 대한 희미하지만 분명한 인식이 있었을까요?
물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의 오실 것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이심을 말씀을 통하여 받았습니다. 사사기서를 예로 들면, 사사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왕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다스렸으며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의 예표들입니다. 그 당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신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는 완전히 밝혀지진 않았죠. 주님의 나라가 어떻게 임하시는가는 마가복음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설교의 방법론을 사용하려면 역시 성경해석학을 잘 준비해야겠군요.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데 가장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는 신학은 어떤 분야입니까? 아마도 성경신학이 이런 해석학의 기본이 돼야 한다고 여겨지는데요.
맞아요. 저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곳 칼빈신학교에서 공부하던 때 보스(Gerhardus Vos)의 책을 교과서로 읽었고, 네덜란드의 자유대학(Free University)에서는 그의 성경신학을 배웠습니다.
그곳의 리더보스(Ridderbos)는 그 책을 다시 읽도록 했습니다. 성경신학에는 비록 여러 가지 다른 정의가 있을 수 있으나 성경신학만이 가장 성경에 대하여 폭넓은 견해를 제시해주며 실제적인 사건들이 한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가장 실질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즉 성경신학은 전체적 정경의 정황을 바탕으로 본문을 이해하기 때문에 구약에서 행하는 그리스도의 설교에 매우 중요합니다.
박사님께서는 설교학에 있어 문학형태 및 설교형태를 강조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 문학형태가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는지요?
어려운 질문인데요. 본문의 문학적 형태는 본문의 의미가 어떻게 의미되는지를 나타내 주기에 중요합니다. 존 스토트는 먼저 우리가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말하기 전에 이 본문이 어떤 의미를 주는가를 파악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에게 먼저 우화적인가, 혹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만약 역사적 내러티브라면 우화와는 달리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설교하기 전에 본문의 의미와 뜻을 파악하는 데에는 문학형태가 중요합니다. 본문의 문학적 형태가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직접 관련성은 없다고 하더라도 의미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조금 구체적인 질문으로서, 구약을 본문으로 그리스도를 설교할 때 본문에서 설교까지의 과정을 좀 제시해주시겠습니까?
제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선 그 본문을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데로 이해한 후 그 속에 주어진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주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선지자들이나 그 부분들을 기록한 저자들이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그 메시지를 전했을까요? 다시 말해, 언급되는 메시지의 필요성이 무엇이었을까요? 성경의 모든 본문이 제게는 곧 설교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을 향하신 구약 설교였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먼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본래의 메시지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설교 본문의 말씀을 성경 전체의 콘텍스트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본문을 신약의 정황에서 생각하고 예수님의 생명, 죽음, 부활 그리고 주님의 가르침 등을 생각하며 읽어야 한다는 것이죠. 저는 신학교에서는 열 가지 단계로 가르치고 있지만 간단하게는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주신 메시지를 알고 이해하는 것과 신약의 정황에 근거하여 오늘날의 교회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찾도록 지도합니다. 말씀 속에는 통상적으로 신약으로 향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과 오늘날에도 적실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습니다.
구약 본문으로부터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설교할 수 있는 한 가지 예를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최근 창세기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설교할 것인가에 관하여 책을 쓰면서 창세기 1장을 막 끝낸 상태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시작을 했는데 창세기 1장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할 때 부딪히는 어려운 점은 1장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그의 온전한 왕국을 창조하셨던 때, 즉 타락이전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를 어떻게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보통 설교자들이 타락 이전은 완전했으며 그 이후 타락이 왔고 지금은 하나님의 최초의 창조를 회복하면서 그의 선하심을 전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주장은 창세기 2~3장의 말씀을 위한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요한복음 1장으로 옮겨가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70인역에서 창세기 1장 1절을 인용하여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고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또 다른 영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영상은 빛, 어둠 그리고 생명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최고의 계시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면서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신 것과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해 창조됐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북미에서는 때때로 예수님을 우리의 수준으로 하락시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태초에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그의 앞에 두려운 마음으로 서게 됩니다. 그리하여, 요한복음 1장에서 시작하여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에 관해 말씀하신 골로새서 1장 15~17절,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로 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신약을 참조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3장의 타락, 죄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가 볼 때, 창세기 3장 15절에는 복음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말씀을 만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요점이 되는 본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의 세력에서 인간을 구원하실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그리고 원수관계는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다음 세대로 발전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또 다른 아들 셋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가 마침내 올 때까지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을 지키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창세기 3장 15절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사탄과 싸우기 위해 오셨을 때, 그리고 드디어 종말의 순간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며 마귀가 불못에 던져 질 때, 성취되어지는 그 약속에 초점을 두면서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성경해석과 성령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해석하는 데 성령님은 어떤 위치에 있나요?
물론 절대적인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조명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명백하게 의미를 드러낸다고 믿지만, 분명한 것은 기본적 메시지가 명확할지라도 성령님에 의한 해명 없이는 우리의 마음은 결국 어둡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공부할 때 기도의 중요성을 또한 학생들에게 가르칩니다. 설교 전에 바른 이해를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메시지를 바로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밝혀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그것에는 성경해석학의 올바른 원리를 사용하면서 이해하는 것을 병행 해야 합니다. 본문의 주제를 찾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지만 때로는 순간적 불꽃처럼 영감이 올 때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것을 통해 성령님께서 본문의 요점을 알려주시고 그리고 오늘날 교회를 위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제가 가르치고 있는 설교를 위해 본분에서 주석으로의 나아가는 10가지 과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등뼈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필요로 하는 것은 성경해석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라고 역설하면서, 주해과정에서 성령의 역할을 제외하는 주장이 있기도 합니다. 주해는 우리의 노력과 사전으로 가능하다는 거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모든 것에 성령님을 필요로 합니다. 성령님 없이 우리는 단 한순간도 호흡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깊은 수면을 다니시다가 하나님의 영의 호흡, 또는 하나님의 영이 말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세계는 존재하게 됐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존 칼빈도, 제 생각도, 성령님께서 지구로 생명을 밀어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어느 곳에나 계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영역은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 성경해석에서 성령님께 기도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에 의존하고 있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박사님은 교회사 또는 현대 설교자들 중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가장 신실하게 설교하신 설교자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에는 각각 다른 정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에 관하여 교회사를 연구해 볼 때, 저는 루터까지의 많은 교부들이 그리스도를 설교하기 위해 우화적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루터는 이 방법이 좋은 것이 아님을 깨닫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 방법을 지향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시기 전에 쓰여진 책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해져 있는 정의에 의존하게 될 수밖에 없겠죠. 설교자들은 때때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설교의 어느 부분에 예수님을 삽입합니다. 저는 이런 방법이 그리스도를 설교하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또한 우화적 방법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처럼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설교하기를 원한다면, 신뢰할 수 있고 책임성 있는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저는 종종 목사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를 통해 우화적 방법은 매우 무책임한 방법임을 확실하게 보여주려고 애씁니다. 많은 목사님들의 저의 강의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을 봅니다.
비록 우화적 방법은 옳지 않은 것이지만 적어도 그리스도께서도 이 방법으로 증거 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 사도도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이기적인 동기로 인해 그리스도를 증거해도 증거되시는 이가 그리스도니 감사하다고 하기까지 했지만 올바른 방법으로 바르게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면 얼마나 더 좋겠습니까?
설교에서 적용에 관한 질문으로 넘어가고자 합니다. 해석학적 탐구를 강조하시는 교수님께서 설교에서의 적용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적용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적용 없이는 설교가 될 수 없습니다. 설교는 현시대의 당면한 문제들과 관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반대하는 것은 잘못된 적용, 즉 인물에 대하여 도덕화시키거나 사람을 닮도록 부추기는 설교입니다. 단지 성경 인물만 보고 우리는 누구누구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 설교도 적용도 못됩니다.
반대로 우리는 누구와 같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설교하기도 하구요. 잘못된 적용에 대한 저의 반대 논의 때문에 저의 책들의 많은 부분이 설교에서의 적용이 진정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저는 설교의 적용에 관해서도 학교에서 한 과정을 가르칩니다만, 만일 주님께서 건강과 시간을 허락하신다면 그것에 관해서도 책을 쓰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적용에 관해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시도하는 방법은 모든 성경의 본문은 본문이 기록된 당시와 관련된 설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날 교회가 고대 이스라엘 당시 때와 얼마나 같거나 비슷한 필요를 가지고 있는지 보게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스라엘을 위해 주어졌던 본래의 의미로부터 오늘날 교회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옮겨갈 수가 있습니다. 제가 네덜란드에서 공부했던 구속사적 설교학 가운데에서도 적용이 매우 중요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적용이 늘 명백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적용이 항상 ‘당신이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필요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일은 하고 이러한 것은 하면 안 된다고 할 때 그것은 오히려 도덕화시켜버리는 것밖에 안됩니다. 말씀이 상처받은 이들에게 위로가 될 때 설교는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을 사람들이 찬양했을 때 설교는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적용은 본문이 직접 우리에게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직접 말해주기보다 우리가 말씀에 대하여 자발적으로 반응하는 데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제가 지금 쓰고있는 다음 책에는 각 부분에 적용을 위한 한 단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목회와신학」 독자들과 한국교회에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면 해주십시오.
한국에 있는 모든 크리스천 지체들이 주님 안에서 형통하기를 기원합니다. 한국교회와 성도들께서 저의 책들을 사랑해 주셔서 제가 받았던 호의에 감사를 드립니다. 물론 중요한 것은 제가 아니라 그 책들 안에 있는 내용들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또한 칼빈신학교에 많은 한인 학생들이 오는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 가운데는 정말 우수한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주님을 신실하게 배우고 한국에서 귀하게 목회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신다면 앞으로도 여러 한인 신학도들과 함께 공부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편집자의 말
개혁주의 설교신학자 가운데 널리 알려진 시드니 그레이다누스(Sidney Greidanus) 박사는 칼빈신학교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네덜란드 자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가 있고 「성경 해석과 성경적 설교」(여수룬) 그리고 최근의 책 「구약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설교할 것인가」는 모두 설교학 분야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지금 미국 칼빈신학교 설교학 교수로 있으며, 이번 대담은 주로 구약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설교할 것인가에 대한 해석학적인 질문으로 이루어졌다. 대담은 지난 7월 23일 미국 칼빈신학대학원 교수연구실에서 이루어졌으며, 류응렬 목사(남침례신학교 설교학 박사과정)가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