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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해석과 이야기체 설교비밀
    2002-08-30 18:00:02   read : 4920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브라이언 채플/ 커버넌트신학교 학장



    우선, 분명히 해둘 게 있다. 어떤 전문적인 주제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한 경우 내러티브는 통상적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컨대, 이신칭의에 관한 해석학적 논증을 해야할 경우나 우주왕복선의 연료 소모량 계산에 필요한 방정식을 서술할 경우 등이 그렇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명제(proposition: 이 글에서 내러티브의 대립어로 사용됨, 어떤 사실에 대한 논리적 진술 ?역자 주) 진술과 논리적 분석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러티브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선포하는 성경에는 선지자들 및 사도들의 다양한 의도에 따라 문학적 장르가 다양하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즉 복음서의 내러티브, 선지서의 묵시, 잠언의 금언, 사도들의 교훈 서신 등과 같은 장르가 각각 성경에서 어떤 역할들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고려할 것은 각각의 내러티브들의 밀도는 가지각색이라는 점이다.



    또한, 청중 편에서 어떤 명제적 진리를 추론해 낼 필요가 없고 설교자 편에서 이를 명쾌히 진술하기만 하면 될 때에도 내러티브는 별로 유용하지 않다. 건물에 불이 났을 때는 출구를 지적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런 경우 청중으로 하여금 상상 속에서 안전한 길을 체험하고 그 길의 실제를 의식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누군가가 장광설의 이야기를 늘어놓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단지, 이렇게 소리치기만 하면 된다. “오른편에 있는 계단으로 내려가서 밖으로 나가라!" 따라서 예를 들어 지옥을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설교할 때에는 이런 직설적 진술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참조. 눅 12:5).

    물론 우주왕복선 연료 계산 방정식과 화재 건물의 출구에 관한 가르침은 본래 은유적인, 따라서 성격상 내러티브적인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고 논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러티브 형식이 어디에도 널려있는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런 논증을 사용한다면, 내러티브 설교 방법이 전통적인 명제적 설교 방식에서는 맛보기 힘든 어떤 역동성을 가져다 준다고 하는 내러티브 지지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러티브 설교가 독특한 특질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으며, 또한 내러티브가 모든 것에서 명제적 진리에 앞서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내러티브 지지자들이 강조하는 점은 사실 우리의 설교가 한 단계 성숙하는 데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내러티브 설교는 전통적인 명제적 설교와 다른 방식으로 메시지를 만든다. 바로 이런 점이 우리로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왜냐하면 내러티브 이론가들이 새로운 방법으로 현대 설교에 활력을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 방법이 어떤 본문들에서는 그 어조와 구조에 긴밀하게 합치하는 메시지를 만들 수 있도록 적절한 수단들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성경 자체가 내러티브 형식들을 사용해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그와 동일한 형태의 의사소통 방식을 환영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성경 전체가 내러티브 형식만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러티브 설교가 강단 설교에서 유일한 방식이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는 없다.



    내러티브 설교가 나오기까지

    내러티브 설교에 대해 공정하게 평가하고, 더 나아가 그것으로부터 설교사역에 실제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지나간 논의들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계몽주의의 영향

    20세기 말의 설교에 대한 큰 변화는 계몽주의에 근원을 둔 본문의 의미의 권위에 대한 탐색이 절정에 달하면서 나온 것이다. 그 시대에 과학주의와 주관주의가 탄생함에 따라 서양에서는 의미(meaning)를 자기 개인적 경험의 세계 바깥에 둘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로크, 스피노자, 볼테르의 합리주의적 회의주의는 종교를 이성의 권위 및 경험과학의 권위와 대치시켜 놓았다.

    하지만 일단 사유(思惟)가 종교적 형이상학이라는 가상적 수갑에서 해방되자 과학 자체는 데카르트의 주관주의로부터 습격을 받게 되었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는 사유가 존재를 확립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의미는 경험적 실제가 아닌 사유구조로 격하되었다. 그런 영향으로 일어난 낭만파와 인상파는 자체의 시각적 한계를 알지 못하는 과학에 속박당하기를 거부했으며, 그럼에도 또한 양파(兩派)의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과학적 발견이 약속하는 종교적 의무로부터의 해방을 만끽하였다.

    이렇게 제멋대로 이루어진, 과학주의와 주관주의의 밀월 관계가 서양 사상의 발전 속에 계속 등장하자, 종교 철학자들은 이에 순응해 어떤 사적인 신앙을 표명하며 양측 가운데 어느 한쪽과도 소원해지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세계 인식이 자기가 알 수 있는 세계를 형성한다는 칸트의 주장은 비객관적 신앙의 뼈대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한편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을 경험해야만 신앙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인격적 만남에 의해 개인의 신앙이 명료화된다는 이런 관념으로부터 하이데거, 불트만, 바르트의 사상 등 여러 가지 양상으로 20세기의 실존주의적 신앙이 발생했다.



    해석학의 영향

    다수의 유사한 세력들이 이런 철학적, 종교적 흐름에 발맞추면서 결국 20세기 주류 사상에서 개인을 의미(meaning)의 좌소로 만들었다. 그런 세력들은 모종의 해석학적 요소들을 강화함으로써 설교자들을 내러티브 형식으로 몰고 갔다. 결국 개인적 경험은 이해의 토대가 되는 반면, 이로 인해 의미에 관한 보다 객관적 자료의 권위는 허물어져갔다.

    전통적 해석학에 의하면 의미는, 텍스트의 저자, 텍스트 자체, 독자 그리고 이 삼자가 공존하고 있는 세계 등의 상호 작용에 의해 전달된다. 여러 사상학파들은, 해석과정에서 이 요소들 가운데 어느 하나 혹은 그 이상이 (아니면, 이 요소들 간의 어떤 비율, 긴장, 간격이) 본문의 의미를 규정하는 데 권위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나름대로 주장했다. 역사적 정통주의는 의미의 중심을 저자의 의도와 텍스트 주석에 둔다.

    반면 현대사조들은 의미의 좌소를 독자와 세계의 관계 쪽으로 좀더 옮겨 놓고 있다. 필자가 이런 확인 작업을 벌이는 것은, 여러 사상운동을 어떤 틀에 가두어 놓기 위해서가 아니며, 또 어느 학파가 해석학적 패러다임의 어떤 축을 전적으로 무시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필자의 의도는, 설교자들이 미처 고려하지 못했을 수도 있는 모종의 해석학적 가설들을 통해, 내러티브 형식이 20세기에 어떻게 발전했는가를 독자가 파악할 수 있도록 이해의 틀을 제공하는 데 있다.



    객관적 탐구

    문법적, 역사적 해석방법(일반 학문의 배경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혹은 고전적 방법으로 불린다)에 의하면, 의미의 권위는 주로 저자와 텍스트 사이의 관계에 있으며, 독자는 이를 객관적으로 발견해내야 한다. 이 고전적 접근법은 20세기 초엽에 심리학적 해석학파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이 학파가 처음에는 고전적 접근법의 동지로 보였다. 19세기 과학주의 및 주관주의와의 씨름으로부터 발생한 이 심리학적 해석학파도 역시, 의미는 저자와 텍스트 간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학파는 텍스트가 객관적 해석에 의해 알 수 있는, 저자의 의중에서 나온 전적으로 의식적인 산물이라고 보지 않고, 저자가 인식할 수 없었던 잠재의식적 요소들과 의식적 요소들 간의 결합이라고 보았다.

    그들에 의하면, 텍스트는 저자의 의도에서 나온 단순한 산물이 아니라 저자 외적(外的)인 과학적, 객관적 분석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하나의 증후, 즉 저자의 정신과 저자의 상황을 보여주는 증후이다. 따라서 이 학파의 사상에서는 의미의 좌소가 여전히 저자지향적이었지만, 반드시 저자의 의도를 지향하지는 않았다.

    이런 심리학적 분석의 약점은 곧 표면화되었다. 만일 저자가 의미를 좌우하는 잠재의식적 요소들을 식별할 수 없었다면, 해석자는 그런 잠재의식적 요인들이 자신의 ‘객관적’ 해석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주관적 탐구 객관적 탐구의 붕괴에 따라 해석자들은 권위 있는 의미를 찾기 위해 저자 밖의 영역 혹은 저자 분석밖의 영역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가지 비평적 학파들이 이 틈을 비집고 들어와 텍스트의 의미는 그 텍스트가 기원된 사회-정치적 영역에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예들 들어, 마르크스주의적, 자본주의적, 패미니스트적 해석자들). 현대의 가설들이, 독자가 저자를 진정으로 알 수 없으며 해석자가 진정으로 객관적일 수 없다고 주장하자, 기타 일부 해석학파들은 과학적 방법과 문학적 분석을 이용해 본문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들 원형주의(Archetypal)학파, 형식주의학파, 구조주의학파의 희망은 과학적 분석을 아주 좁게 본문 자체에만 집중시킴으로써 탐구의 편견을 (심지어 저자의 편견까지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구조주의자들의 희망은, 저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의미는 문화적 퇴적작용과 개인적 편견에 의해 언제나 흐려진다), 저자의 발언(즉 표현 형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여러가지 텍스트의 표현 양식을 확인함으로써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에 전형적으로 존재하는 ‘인습적인 부호들’(conventional codes) 혹은 ‘규칙적인 과정들’(rule-governed processes)을 과학적으로 식별할 수 있다는 것이 구조주의자들의 확신이었다. 그들에 의하면, 커뮤니케이션 배후의 진리(의미)는 저자에게나 독자에게나 주관적이므로 본문으로부터 발굴할 수 있는 유일한 의미는 본문의 구조 안에 놓여 있다. 이런 시각으로 인해 그들은, 텍스트가 저자에게나 독자에게나 상대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으며, 또한 표현들 자체가, 객관적 분석이 가능한 패러다임적 형(型)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본문이 상대적 의미만을 가지고 있다는 가설에 근거한 본문의 과학적 분석은 기호학(semiotics) 분야를 탄생시켰다. 이 언어학적 과학은 언어를 기호 체계로 연구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개인적 의미는 기호(sign, Sn)의 인식에 의해 처리된다. 그리고 기호 자체는 지시되는 대상(被指示者, signified, Sd)과 그 대상을 의식 속으로 가져오기 위해 사용되는 지시자(signifier, Sr), 이 양자의 조합이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는 이 과정을 수학 공식으로 나타냈다(Sn = Sr/Sd). 그는 그러한 공식이 언어의 처리과정을 객관화해준다고 믿었지만 한편으로, 지시자와 피지시자 간의 관계가 개인과 상황에 따라 상대적인 이상, 의미는 여전히 주관적이라고 보았다. 예를 들어, ‘chicken’이라는 지시자는 혹자들에게 있어서 병아리를 가리킬 수도 있으나 어떤 이들의 경우에는 겁쟁이를 의미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저자가 사용한 특별한 용어를 통해 저자의 마음속에서 지시받는 대상은 차후에 독자의 마음속에서 지시받는 대상과 필연적 동일성을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소쉬르에 의하면 언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용어 속에 싸인 어떤 개념의 공유는 보장될 수 없다.



    공동체적 탐구

    현상학파의 큰 관심사는 의미의 공유였다. 그들은 의미의 상대성을 인정했지만, 공동체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려면 개인들 간에 모종의 상호 공통적 시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소쉬르처럼 현상학파도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객관적 수단들을 찾았으나 초점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통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해 주는, “경험에 대한 맞얽힌 의식적 시각들”(interlocking conscious views of experience)을 기술하는 것이었다.

    에드문트 훗설, 알프레드 슈츠, 모리스 메를로퐁티 같은 저술가들은 인간들이 현상학적 환원(하나의 경험이 공통적 사용을 위해 인식 속에 싸이고, 서술적으로 규정되며 해석됨)에 의해 상호공유하게 되는 이해를 규명하고자 했다. 현상학파에 있어서, 이 공유된 경험들은, 급진적 실존주의(표현이란, 그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만 명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견해)로부터 커뮤니케이션을 구출해 주는 것이었다.

    20세기 해석학적 모험의 바로 이 지점에서 내러티브 이론가들은 팡파르를 울리며 무대에 올라갔다. 결국 내러티브란 시작이 있고 결말이 있는 하나의 인간체험이 아니고 무엇인가? 내러티브란 화자(話者)가 청자(聽者)와 어떤 경험을 (최소한 대리적으로) 공유하기위해, 서술적 인물들과 사건들을 청자의 생각과 감정이 거기에 함께 얽혀들도록 가득 배열해 놓은, 하나의 기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요컨대, 내러티브는 본질상 청자와 화자가 의미를 공유할 수 있도록 양자에게 ‘경험에 대한 맞얽힌 의식적 시각’을 제공해주는 현상학적 환원이다. 이런 정신 역학(力學)은 경험에 대한 자세한 서술이 왜 의사소통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해명해준다.

    그리고 20세기에 커뮤니케이션 이론이 해석학적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 세대의 설교가들이 내러티브의 매력에 끌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런 역학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내러티브 이론에 메시아적 외투를 주기 전, 이 이론을 탄생시킨, 그리고 현재 이 이론의 잠재력을 제한하고 있는 모종의 전제적 가설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러티브 설교의 전제적 가설들

    내러티브 설교에 해석학적 발전을 가져온 전제적 가설은 개인적 경험이 의미의 토대라는 것이다. 이 전제는 개인 간의 의사소통이란 ‘경험의 공유’라는 토대 위에서 가장 잘 이루어진다고 단정한다. 양자간의 체험이 일치하는 범위 안에서 두 개인 사이에는 의미가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의 공유’는 현대 커뮤니케이션에서 핵심적인 개념이 되었다. 이 매개체를 통해 개인들은 상호접속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개개인의 내러티브는 언제나 경험들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경험은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초월적 진리를 확립할 수 있는 메타 내러티브(meta-narrative: 한 사회의 지배적이고 총체적이며 초월적인 이념 ?역자 주)는 없으며, 단지 수다한 이야기들만이 나열될 뿐이다.

    각 개인의 진리는 자기 경험의 세계에 둘러싸여있다. 따라서 개인은 자신의 경험과 타자의 경험이 서로 교차하는 범위 안에서만 타자(곧 성경 본문)의 의미를 나누어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해석학적 특성을 간과한 채 청중의 흥미에 ‘불꽃을 일으키기’ 위해 보다 새로운 내러티브 형식들의 실용적 이점들을 활용한다는 것은 설교자들 스스로가 거부하고자 했던 내러티브의 철학적 전제들에 굴복 당하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진리의 상대성

    결국 과학주의의 맹목성이 폭로되고, 잠재의식의 발견으로 경험적 사고가 훼손당하는 와중에서 현대인들은 객관적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멀어져갔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엘마허의 ‘해석학적 순환’은 의미라는 게 결국은 개인의 성향 속에 존재하며 따라서 대단히 주관적인 것임을 밝賤娩?

    그런데 이런 순환은 진정한 ‘발견 과학’(science of discovery)의 가능성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초월적 진리를 배제한다. 하지만 개인적 이해에만 기초하는 의미는 절대적일 수 없다. 그리고 이 ‘참 진리’(True truth: 프란시스 쉐퍼의 용어)가 없으면 개개인들은 명제적 닻 없이 홀로 경험적 내러티브들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들을 발견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의 주관성

    의미가 개인마다 주관적이라는 현대의 가설에서 우리는 또한 커뮤니케이션도 개인적 인지에 따른 개인적 해석에 제한을 받는다는 추론을 자연히 도출할 수밖에 없다. 이런 주관성의 핵심에는 비단 명제적 진리에 대한 편견이 도사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명제들의 비이전성(非移轉性)이라는 가정도 내포되어 있다. 현대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몇몇 지류들이 한데 모여 이런 가정을 지지하고 있다:

    1) ‘언어학적 미로(迷路)’라는 것이 존재한다. 즉 모든 용어와 문구는 다중의 의미들을 지니고 있으며(이 의미들은 문법적 규칙, 상이한 정의[定義], 구문론적 구조, 개인적 용법의 지배를 받는다), 따라서 명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한히 복잡한, 메시지 판독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 시각적(視覺的) 한계가 존재한다. 즉 서로 다른 두 개인이 여기에 있다면, 양자는 언제나 명제적 용어들을 상이하게 상황화하기 때문에 그 용어들을 동일한 뜻으로 인식할 수 없다.

    3) 명제에서 사용된 표현들은 ‘유명론적 스크린’(terministic screens: 개물[個物]들을 나열하고 있는 스크린 ?역자 주) 역할을 수행하는 가운데, 특정 의미들을 숨기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다른 의미들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몇 사람이 어느 한 외국의 위기를 ‘또 하나의 베트남,’ 혹은 ‘또 하나의 홀로코스트(대학살)’로 묘사한다고 할 때, 각 화자들은 동일한 사실들을 표현하면서도 군사적 개입이 정당한가에 대해 현저히 다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하나의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들은 인식가능한 모든 것을 묘사해 주는 것이 아니라 화자와 청자의 인식 방향을 지휘한다.

    명제적 의미에 대한 신뢰를 손상시킨 언어의 이런 한계 인식은 최근의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 운동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피력되었다. 해체주의자들은 언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려 한 소쉬르의 시도(Sn = Sr/Sd)를 이용해, 언어적 표현들에 급진적인 임의적 의미화의 가능성을 부여했다. 개인들 간의 차이가 명제로부터 보편적 의미를 박탈한다고 믿은 해체주의자들은, 독자(혹은 청자)가 화자의 표현에서 어떤 의미를 취할 것인가에 관한 최종적 결정자라고 보았던 것이다. 게다가 청자 혹은 화자가 선택한 지시자(signifier)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signified; 피지시자)의 의미를 결코 충분하게 내포할 수 없다는 게, (즉, 지시자는 피지시자의 본질 전체가 아닌 피지시자의 특정 요소들만을 마음에 떠올린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해체주의자들에 의하면, 어떠한 커뮤니케이션이든 양측(화자와 청자 혹은 필자와 독자)의 시각적 차이가 존재하며, 지시자가 피지시자의 컨텍스트와 의미 전체를 완벽하게 내포할 수 없으므로 지시자(Sr)와 피지시자(Sd) 간에는 ‘불화’가 발생하고, 따라서 이것은 모든 기호(Sign, Sn)의 의미를 ‘미정’(未定) 상태로 만든다.

    결과적으로 궁극적 의미는 영구히 ‘연기되며,’ 피지시자와의 접속을 찾아가는 지시자의 무한한 후퇴 속으로, 정의(定義)들은 사라진다. 그리고 피지시자 자체는 의식 속에서 또 하나의 지시자에 의해 확인돼야 한다. 결과적으로, 용어의 의미는 개인의 차이(현대주의의 실존적 고립)에 따라 상대적인 것으로 변하며, 또한 의미가 임의화되고 의미의 전달도 불가능해진다(개념들의 난맥상에 의해 벌어지는, 포스트모던 세계의 급진적 유아론[唯我論, solipsism]과 궁극적 절망).



    경험의 지고성(至高性)

    유의미한 명제들의 전달에 관해 이런 비관적인 생각이 대두되자, 20세기 말에는 다시 경험이 개인적 이해의 최고(그리고 아마 유일한) 원천으로 간주되었다. 지배적인 내러티브 설교학파에서는 이런 사상을 근거로 커뮤니케이션의 최고 매체인 대리적 경험을 창조하고자 이야기하기의 역학을 중시하고 활용했다. 하지만 교회에 유행하는 내러티브적 설교를 하기위해 명제적 설교를 멀리하는 것은 지나친 행보는 내딛는 것이다.

    해석학과 설교학의 분야는 둘 다,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의 사상 속에서 피난처를 구하고 지속적 목적을 추구하였다. 가다머는 경험적 특유성을 가지고 해석학적 순환의 속박을 파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가다머의 주장에 의하면, 텍스트의 이해는 개인의 선(先)이해(즉 개인적 배경)에 지배를 받고 이 선이해는 그 개인의 지식에서, 제한하는 지평(horizon: 범위)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해당 개인은, 본문(텍스트)의 지평과 자신의 지평이 상호 ‘융합’하는 한도까지만 본문을 이해할 수 있다

    . 본문의 의미 지평(의미 범위, 즉 정의[定義])은, ‘해당 텍스트가 무엇인가’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해당 텍스트가 무엇이 아닌가’에 의해서도 확립된다. 따라서 개인이 본문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본문이 무엇인가와 본문이 무엇이 아닌가, 이 둘을 다 경험적으로 접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접촉은 결코 완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텍스트가 기원과 전달과 용법에 있어서 자체의 공간적, 시간적 컨텍스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텍스트와 해석자 사이에는 상당한 의미가 깃든 접촉점이 있을 수 있다.

    가다머와 그의 지지자들에 따르면 의미전달을 위해서는 본문의 지평과 독자의 지평, 이 양자의 상호교차가 필요하기 때문에, 의미의 결정은 본문과 독자의 공동작업에 의해 이루어진다. 독자의 경험을 텍스트의 지형선(地形線)에 일치시킴으로써 양자의 지평을 보다 긴밀히 상응하게 한다면, 부분적이지만 실질적인, 의미전달의 희망은 남아 있다. 비록 개인적 선이해의 특이성 때문에 텍스트에 대한 단일한 바른 읽기는 있을 수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내러티브 이론가들은 이런 통찰에 입각해, 설교자들에게 내러티브 구조를 본 따서 설교를 만들라고 충고하고 있다.

    즉 최대한의 의미전달을 위해 본문의 지평과 청중의 지평이 가능한 한 가깝게 융합하도록 만들라는 것이다. 목표는 독자의 경험과 본문의 표현을 융합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이다. 내러티브는 청자에게서 적절한 반응을 족히 일으킬 수 있으므로 제한적인 이해가 가능해진다. 따라서 대리적 경험을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제공하는 내러티브들은 포스트모던의 까다로운 미각(명제들을 싫어함)을 충분히 만족시키지만, 이 이야기 형식은 여전히 우주적, 절대적, 혹은 권위적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 한계를 지니고 있다.



    내러티브 설교의 문제점들

    이제 문제는 내러티브 설교의 전제가 되는 해석학적 이론들이 성경이 말하는 바의 메시지를 설교하기에 얼마나 적합한가 하는 것이다. 성경은 많은 양의 내러티브를 담고 있지만 또한 명제적 내용도 분명히 말한다. 사실, 성경이 내러티브 형식과 명제적 형식을 단단히 결부시켜 시간을 초월하고 개인적 차이와 문화적 차이를 초월한 의미들을 담아 놓았다는 데서 우리는 의미전달에 관한 성경의 천재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성경에서 내러티브는 명제의 의미에 관한 경험적 참고서 역할을 하며, 마찬가지로 명제들은 내러티브에 대해 개념적, 언어적 배경 역할을 함으로써 내러티브의 모양에 의미를 제공한다. 명제가 없다면 내러티브는 개인적인 초월적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며, 성경진리와의 대리적 상호 작용을 제공하는 경험적 기사가 없다면, 명제는 개인적인, 전달 가능한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명제들과 아울러 내러티브들을 제공함으로써 성경은, 양자 모두의 가치를 확인하며, 어느 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 다른 하나의 가치관을 부인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 눈길을 보낸다.

    성경의 구조와 내용은 이야기의 가치를 충분히 확증하고 있으며, 내러티브 이론가들이 옹호하는 체험적 의미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내러티브 이론의 가설인 의미 전달의 한계성을 성경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현대의 내러티브 가설은 명제 혹은 내러티브에 의한 명확한 진리 소통 가능성을 훼손하고 있다. 예컨대, 개개인의 서로 다른 개인적 컨텍스트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선이해를 낳기 때문에 텍스트 의미의 일관된 전달이 불가능해지거나 혹은 그 의미가 개인화하여 각 개인의 독특한 산물이 되고 만다는 그런 가정을 성경을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명제적 진리의 전달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상식을 모욕하는 것이며(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은 누군가가 ‘불이야!’라고 외칠 때 건물 밖으로 뛰어 나간다), 또한 성경의 기본 원칙에도 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과소 평가한다

    성경은 개개인들의 기본적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지만, 또한 인간성의 어떤 연속성을 주장하며 현대사상의 유아주의적(唯我主義的) 결론을 거부한다. 우리가 각각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창 1:26∼27) 사실은 개인적, 공동체적 차이를 초월하는 개인적 ‘지평들’이 서로 겹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주요한 현대 철학맥락들의 비합리적인 필연적 끝, 즉 해체주의자들의 논리적 결론은, 개

    개인들이 왜 공동체 내에서, 이해력을 가지고, 계속 자기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의 주장처럼 개개인의 선(先)숙고적인(pre?eflective: 숙고 이전의) 차이가 유의미한 인간 커뮤니케이션을 배제할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그런 지속적 기능수행이 가능하겠는가? 세속주의자들이 무시하는 사실, 그리고 신앙인들이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성경적 원리가, 모든 존재와 사유(思惟)에 공통적 토대를 제공함으로써 유의미한 인간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을 제한한다

    신앙인들조차도 여전히, 인간의 타락상태가 우리 안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심하게 훼손했으므로 영적 진리의 공통적 이해가 인간능력을 벗어나게 되었다는 근거 하에, 초월적 의미전달의 불합리성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은 옳다. 성경은 초월적 진리가 인간의 독자적(獨自的)인 도달 능력을 벗어난다고 굳게 확언한다. 성경은 말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우리 안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인간의 타락 상태에 의해 아주 심하게 훼손되었으므로 우리의 독자적(獨自的)인 이해력은 하나님의 흠없는 형상을 지극히 완벽하게 표출하고 계시는 그분과 접속할 수 없다. 성경은 가르친다.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이런 상태에서는, 현대사상이 올바르게 진단했듯이, 인간 각자가 나름대로 자기 진리를 발견하고 개발할 수밖에 없다(유 19).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이해력을 이러한 인간적 수단들에 가두어 놓지 않는다.

    성경에 의하면,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훼손된 우리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고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사적인 판단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내밀히 파악할 수 있게 만든다(고전 2:15∼16). 현대적 용어를 빌자면 이는, 우리가 성경(그 안에 하나님이 전하고자 하시는 진리가 담겨있다) 안의 지시자들(signifiers)을 인지할 때,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선(先)숙고적이고 숙고적인 이해력을 가동시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게 하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의 이해가 성경의 의도에 충실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우리 자신의 인간능력에 의해 제한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말씀에 영감을 주신 성령께서 우리의 의식 속에서도 그 말씀을 조명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충실한 이해를 보장한다(참조. 고전 2:10∼14; 벧후 1:20∼21; 롬 5:5). 성령의 존재를 배제한다면, 초월적 이해가 인간경험에 제한을 받는다는 현대 철학자들의 결론은 옳다. 그러나 성령의 임재는 지성과 가슴에서 인간 주관주의의 족쇄를 벗겨버린다.

    옛 본성의 잔존세력은 중생한 마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혹은 충분하게 처리하지 못하도록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령으로 계시된 진리가 주관화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이해가 제한적이라고 하여, 우리의 개념들이 그릇되거나 미정적이거나 개인적으로 굴절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사실,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이해의 한계를 고백하라고 요구함과 동시, 하나님의 말씀이 신적인 권위로 선포될 수 있다고 확언한다

    (참조. 롬 11:13; 살전 4:2과 딛 2:15). 성경의 시각으로 볼 때, 성경의 지평내에 있는 의미의 분야와 중생한 마음의 지평내에 있는 이해의 분야는 상호 융합하고 겹친다. 인간 지평내에 있는 분야는 우리의 타락성 때문에 불명료한 부분들을 담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텍스트 전체가 불투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향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지 살펴보라고 우리에게 촉구한다. 성령은 일반적으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비상하게 명료하고 정확한 통찰을 제공한다(시 119: 130).



    내러티브 설교의 사용 비율

    내러티브는 이해의 수준에서 의사를 소통시킨다. 이것이 내러티브의 장점이자 힘이다. 그러나 명제로는 의사를 소통할 수 없다는 가정하에 내러티브를 표현의 중심수단으로 삼는다면 개인적 경험이 주된 해석자가 되며 궁극적으로 이해의 지배자가 되고 만다. 그런 내러티브 용법은, 성경의 의미를 독자의 지평에 가두고 따라서 어떤 초월적 성격의 객관적 진리를 전달하기에 부족하다. 우리의 특정한 개인적 체험이 하나님 말씀의 교리와 어떻게 상호교차하는지를 발견하는 것은 설교자들의 필수적인 과업이다. 그러나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의하면, 그들의 말이 하나님 백성의 경험을 다루는 것이지, 하나님 백성의 경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축조하는 것은 아니다(신 28:45).

    개인적 경험이 해석을 좌우할 때 초월적 의미는 사라진다. 최근 어느 신학잡지에, 함께 자라고 함께 늙은, 한 소년과 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실렸다. 잡지사측이 나중에 독자들에게 이 이야기의 의미를 묻자 독자들은 그 소년과 나무를 여러가지로 해석하였다. 명제적 해석 없는 하나의 내러티브가 독자들의 마음에 혼란스런 상충적 의미들을 낳을 수 있다. 이 사례는 첫째로 상식을, 다음으로 성경적 결론을 뒷받침해 준다. 즉 개인적 체험에만 의존하는 의미는 신뢰할 만한 의미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의미를 개인적 체험에 종속시키는 철학들의 주장과 달리,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성경은 우리를 개인적 변덕에서 해방시키고, 권위있는 소통가능한 진리를 우리에게 제공한다(시 19; 골 2:2∼4). 성경의 진리는 명제와 내러티브라는 두 가지 꾸러미에 싸여 다가온다. 따라서 둘 중 어느 하나의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이론은 성경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불충분하다. 성경적 관점에서 보자면, 내러티브와 명제간의 양자 택일의 문제가 아니며,

    각자의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각자로 하여금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서로 다른 목적에 이바지하게 할 수 있다. 명제는 원리들을 명시하고 조직화하고 보편화(혹은 특수화)하는 반면, 내러티브는 내용을 명료화하고 반응을 유도하며 의미들을 개인화(혹은 보편화)한다. 이 두 표현형식은 각각, 상대(둘 중 하나)가 자기와 동등하게 소유하지 못한 커뮤니케이션 동력을 제공함으로써 상대를 돕는다. 요컨대, 설교자들이 내러티브 설교를 유일한 커뮤니케이션 장비로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브라이언 채플(Bryan Chapell)

    미국 커버넌트신학교(Covenant Theological Seminary)의 학장이며 실천신학 교수이다. 서던 일리노이대학(Southern Illinois University)에서 Ph.D.학위를 받았으며 설교학과 내러티브 이론에 관해 광범위한 저술들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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