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15:1-11절
우리 나라의 유명한 기독교 시인 황금찬의 1963년 발표 작인“부활의 노래”라는 시(詩)을 소개합니다.
당신은 오셨습니다./그날 밤의 하늘은 한 송이 꽃으로 피고
동,서,남,북/당신이 오시는 길엔 비둘기떼가 구름같이 날고 있었습니 다.
바위는 굴러 제자리에 없고/석관의 뚜껑은 열려져 비었는데
누가 뿌리는 가루가루 꽃가루/무덤 속에 가득한 광명과 향기
그것은 오늘 내 마음에 차는 승리의 기쁨./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고/여인은 머리를 풀어 발 밑에 깔고
슬펐던 사람들은 웃음으로/이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처음 있는 일.
주여 당신은 다시 한 번 오십시오/일구 육삼 년의 이 땅에
당신이 오시면 사람이 살고./당신이 오시면 공폰ㄴ 가고.
당신이 오시면 하늘이 오고./당신이 오시면 미움은 가고.
마음은 가난하여 비로서 형제를 알고./대한민국은 통일이 되고.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호산나를 부르고./주여 다시 한 번 오십시오.
일구 육삼년의 이 땅에-------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고 새벽이 지나면 아침이 오듯이 춥고 괴롭던 겨울의 계절이 지나고 새싹이 움트는 봄의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어느 화창한 봄날의 사건입니다.
인류 역사의 위대한 변화를 가져온 최대의 극적 사건이 전개되는 역사의 막이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 다음 날 곧 이례 중 첫날이었습니다.
그 날은 역사상 최대의 기념일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차라리 새 시대, 새 기원,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날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그토록 오랜 역사의 어두운 긴 밤이 사라지고 인류의 새 아침이 밝아오기 시작하는 새 날의 여명이 동터오는 순간입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신 부활의 아침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고향 사람들에게는 목수의 아들이라고 배척을 받고, 집권자들에게는 반역자라고, 미움을 받고, 종교가들에게는 이단자라고 시기를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두운 무덤을 헤치고 이른 새벽 다시 살아나셨으니 그리스도는 정족당하는 자가 아니라 승리자이시며, 죽음에 의해 패배한 자가 아니라 그의 말씀과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첫 열매요 승리자 이십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아침은 승리의 아침이요. 소망의 아침이며, 영광의 아침임과 동시에 성도에게는 기쁨의 새 역사의 아침입니다.
마지막 웃는 사람이 진정 웃는 사람이요 마지막 이긴 사람이 참으로 승리한 사람입니다.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야말로 모든 것의 끝장이요 완전한 패배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토록 열렬히 믿고 따랐던 제자들도 모두 실망하고 흩어져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장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단과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최대 최후의 승리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소망과 큰 희망과 참 용기와 기쁨 그리고 새 생명을 주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으며 그 죄값으로 사망이 모든 사람 위에 왕노릇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범죄한 인간에게 죽음을 최대의 무기로 삼고 인간을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인간 세계에 죽음이 가장 큰 위협의 존재로서 자리 잡음으로 그 죽음이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과 공포. 절망과 슬퍼함과 공허를 낳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사망권세를 깨뜨리심으로 마귀의 권위가 무너졌으며, 사망의 이기는 것과 쏘는 것이 무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거짓과 미움, 시기와 분쟁, 그리고 어두움은 부활의 새 아침을 통하여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 승리가 자져다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아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승리의 아침이 왔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이요, 고통의 표시이며 어두움의 표상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 하고 고통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고통의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던 예수님. 죽음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이하셨던 주님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고통의 십자가 뒤에는 기쁨이 있고, 죽음 뒤에 영광된 부활이 있고, 어두운 밤을 지나야만 밝은 아침이 있기에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묵묵히 골고다로 나가셨던 것입니다.
봄이 우리 앞에 다가왔습니다.
지난 겨울 추위로 나무의 잎들이 떨어져 뼈대만 남아 앙상한 모습을 드러냈던 자리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던 자리에 봄기운 서리자 다시 새싹이 움트기 시작하면서 새 생명의 기운을 얻게 합니다. 분명 이는 생명의 신비입니다.
승리는 부활의 중심 사상입니다.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입니다.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입니다
증오와 악독에 대한 사랑의 승리가 부활을 믿는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엄동설한의 춥던 겨울을 겪어본 사람만이 봄의 따사로움과 활기찬 새 생명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차디찬 대지에도 봄이 돌아와 생기가 감돌고, 새싹이 움트기 시작하면 그 기쁨은 비길 때가 없습니다.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고난을 지나고난 후의 감격과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2002년의 부활의 새 아침이 밝아왔습니다.
죽음이 삶으로 바뀌고 패배가 승리로 변하는 새 아침이 되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불법과 불의의 세력은 물러가고 생명의 예수는 그의 무덤을 짓눌렀던 돌들을 무너뜨리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으니 그를 믿는 우리에게도 승리의 아침은 있습니다. 고통의 터널이 지루하다고 원망하지 마십시요, 겨울이 춥다고 한탄하지 마십시요. 만사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낙심도 하지 마십시요.
어두운 터널을 지나서 밝은 빛,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승리의 날은 분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통과 슬픔이 변하여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영광스런 승리의 날은 분명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소망의 아침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달리실 때 해가 빛을 잃어 하늘과 땅이 캄캄하게 되었지만, 부활의 아침이 되자죽음은 생명으로, 암흑은 광명으로, 슬픔은 기쁨의 춤으로, 한숨은 환희의 소리로, 절망은 소망으로, 변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기 전에 죽음에 대하여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죽음이 생명의 장벽은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음 앞에 장사도 꺼꾸러지고 영웅도 항복합니다.
한 시대 천하를 호령했던 나폴레옹은 죽는 순간에“프랑스--군대---조세핀”이라고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조세핀은 이혼한 나폴레옹의 아내 이름입니다. 그는 그가 평소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세 낱말을 열거한 것입니다.
시인 괴테는 죽을 대“창문을 열어다오, 빛을---”하고 말했습니다. 신인 다운 최후의 말입니다. ‘베토벤’은“친구여 박수를 -- 희극은 끝났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득세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죽은 후 다시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까지는 처량한 나그네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희생의 제물로 마칠 때까지 33녅간의 짧은 생애를 하나님께 유감없이 드렸다는 최후의 고백이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의 장엄한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음은 잔인하기 때문에 신부의 신방에서 신랑도 빼앗아 가고, 과부의 외아들도 때가 되면 예외없이 데려갑니다.
우리는 지금 초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학의 힘으로 불가능한 것이 거의 없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죽음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죽음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었으니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으로 입을 때가 옵니다. 불의가 정의에게 정복당할 날이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고 하였으니 부활은 절망에서 소망을 일으켜 주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미움보다 사랑이 강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는 아리마데 요셉의 무덤에 장사된 것이 아니라 빌라도의 불법의 무덤과 교권주의자들의 시기의 무덤에 인봉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러워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산 자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으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맙시다. 불법으러 가두어둔 그 돌 무덤은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강한 것 같지만 사랑은 그보다 더 강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맙시다. 불법의 무덤들은 반드시 무너질 날이 올것입니다. 예수를 무덤에 인봉했다고, 그리고는 병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했으니 이제는 걱정할 필요도 없다고 안심했을지는 모르나 역사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싹트기 시작하여 사흘만에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빌라도의 교권으로도 정의를 막을 수 없었고, 제사장들의 모함과 거짓으로도 정의의 예수, 사랑의 예수를 꺽을 수는 없었습니다. 부패한 사회 속에도 정의는 움트고 있습니다.
미움과 다툼이 춤추는 교회 속에도 사랑의 햇빛은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거짓으로 남을 괴롭히는 그 속에도 정의는 강같이 흐르고 있습니다.
고난을 아는 자만이 부활의 소망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좀 힘들고 어렵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요. 소망의 아침 햇살이 우리를 비추어 주실 것입니다. 부활절 아침에 소망의 문이 활짝 열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사랑이 이기는 아침이 왔습니다.
세상은 미움과 갈등의 대결장과도 같습니다.
형인 가인이 동생인 아벨을 죽이고, 요셉의 형들이 동생을 미워해서 애굽으로 팔기도 하며, 아들 압살롬이 자기의 친 아버지인 다윗을 공격하는 그런 세상입니다.
이 세상이 점점 살기가 어려워지는 까닭은 생활이 가난하거나 몸이 약해서도 압니다. 모르기 때문만도 아니며 못배웠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점점 시기와 미움의 세상으로 바뀌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서로의 미움과 시기로 인하여 상처받고 무거운 짐을 진 채 고통당하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기와 미움 속에서 인간은 떠 하나의 죽음을 맛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부활의 승리로 결론지어진 사건 속에서 우리는 사랑의 위대한 승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화신이었습니다. 스승을 잡으러 온 자를 향해 베드로는 말고의 귀를 칼로 짜라 버렸지만 사랑의 예수님은 떨어진 원수의 귀를 다시 붙여주셨습니다. 증오에 가득찬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그의 사랑은 못박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국 부활하시고야 말았습니다.
사랑이 미움과 시기와 질투를 이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부활하시어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면 우리도 승리로 부활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정의가 이기는 아침이 왔습니다.
불의한 빌라도의 범정은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저들은 에수의 육신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수는 있어으나, 인간 예수는 죽일 수 있었으나, 정의는 결코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와 빌라도의 대결이라기 보다는 정의와 불의의 대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사장들과 예수의 대결이 아니라 선과 악의 대결이었기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떠합니까?
불공정한 사회에 뇌물이 성행하고, 뇌물만 주면 되지 않을 일이 되기도 하고, 이 때문에 마땅이 되어야 할 일이 범대로 되지 않는 불의한 세상이 아닙니까?
불의한 세상은 의롭게 진실되게 사는 자들을 시시때때로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불의한 세상에서는 의를 행하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부활 사건은 불의를 정의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는 있으나 죽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불법하게 이루어진 빌라도의 법정 판결이 3일을 가지 못하고 예수님의 부활로 깨어지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정의의 승리만을 가르쳐 주는 데서 끝나지 않고 정의를 위한 투쟁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십자가를 진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정의를 행하며 사는 일입니다.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신앙은 부활 신앙입니다.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은 인간의 노력과 염원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신앙을 갖지 못하여 잠시 불의한 세상을 좇아 불의를 행하며 사는 자들은 잠시 동안은 세상의 유익과 자랑을 얻을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영원한 패배를 당하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잠언21:21절에 보면“의와 자비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의와 영광을 얻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통해 정의의 승리를 확신하고 불의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정의의 생활을 하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5. 새 역사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부활의 아침은 새 역사 창조의 새 아침을 여는 여명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흩어졌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로 용기를 얻어 강력한 영적 군대가 되어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비겁한 베드로는 용감해졌고, 잔인하던 요한은 사랑의 사도가 되었으며, 의심 많던 도마는 확신의 사람이 되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 그는 다시 살아나셨다고 증거할 때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감동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에 사랑의 싹이 트기 시작하여 큰 열매를 거두게 되니 강력한 단체를 이루어 로마 나라를 예수의 이름으로 정복하였으니 부활은 새 역사의 기원이요, 새 세계의 시작입니다. 부활을 믿는 교회와 성도는 오늘의 새 역사를 창조하는 새로운 주인공들이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필라델피아에 있는 전쟁기념관에 가면 네 사람의 군목의 장엄한 삶을 기념하는“불멸의 군목들”이란 문구를 새겨놓았다고 합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네 사람의 군목과 그들의 함정이 적의 어뢰에 맞아서 침몰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네 사람의 군목들은 자기들의 몫으로 주어진 구명대를 부하들에게 주고는 그들은 침몰하는 갑판 위에서 찬송을 부르면서 바다 속으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부활은 세계 방방곡곡에서 새 역사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밤이 지나면 밝은 태양이 떠오르듯이 죽음의 그늘이 지나면 생명의 아침은 반드시 찾아 옵니다. 우리 모두 새 역사 창조의 일꾼들이 됩시다.
곳곳에서 죽음의 냄새를 풍겨내는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생명의 냄새를 풍겨내며 사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품고 살기를 원합니다.
미움과 시기와 원수 갚음이 편만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사랑의 열매를 맺고 사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부정과 불의가 판치는 세상. 힘 있는 자가 약한자를 억눌리는 일들이 상식화되고 생활화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정의의 십자가를 지고 의롭게 살아가시기를 얼마나 소원하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생명의 승리, 사랑의 승리, 정의의 승리로 새 아침을 허락하시려고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2002년 부활의 아침에 성도 여러분들은 자신의 삶이 진정 승리의 삶으로 살고 있는지를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예수의 부활은 방방곡곡에서 새 역사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밤이 지나면 밝은 태양이 떠오르듯이 죽음의 그늘이 지나면 생명의 아침은 반드시 옵니다.
부활의 이 아침에 부활의 신앙을 통하여 우리 모두의 삶이 새 역사의 아침으로 다가오기를 바라며 새 역사의 기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