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상 소망 가운데 살겠습니다” 2002-09-04 16:26:19 read : 3501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6.23
시편71편14-24절
“너희들 이곳에 들어가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이것은 단테의‘신곡’에 나오는 지옥문의 입구에 씌여진 말입니다. 단테는 지옥은 아무 희망도 없는 세계이고, 희망이 있는 한 지옥이 아니며 지옥에 가지도 않을 것임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세익스피어는“불쌍한 사람은 아무 약도 가진 것이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희망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들도 역시 아무것도 갖지 못한 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에 우리의 전생을 건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성도의 희망에 대해‘허버걸’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그렇다! 그 땅은 비록 저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한 발자국만 떼면, 한 순간만 지나면 고통은 지나가고, 그 땅은 그대를 위하여 있게 되리니, 그때 슬픔은 기쁨이, 밤은 낮이 됨을 그대는 보게 되리라”
본문은 다윗이 쓴 시로서 그 앞에 있는 시편70편과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는 그의 노년에 쓴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이 많은 한 노인의 간증이요 또한 그의 다짐이기도 합니다. 파란만장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살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살겠다’는 이 말은 자신의 생애를 마감하는 그날까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왜 이런말을 했을까? 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 파란만장한 삶을 산후 아름답게 그의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1. 주님은 한평생동안 우리의 피난처였기 때문입니다.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다”라고 하였습니다. 피난처란 말은 우리가 당하는 재난과 어떤 위험에서 벗어나는 곳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어려움과 시련을 당할 때마다 안전한 그런 곳으로 피합니다. 본문1절에도“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라고 말하였습니다. 3절에는“주는 나의 무시로 피하여 거할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산성이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시편91편1절 이하에 보면“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시편144편2절에도“여호와는 나의 인자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는 자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 자시로다”고 하였습니다.
시편18편1절 이하에도“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고 하였습니다.
한때 다윗은 사울왕의 추격을 피하여 도망다닌 적이 있습니다. 시편57편은 다윗이 사울의 난을 피하여 굴속에 숨어 있던 때에 지은 시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57편 1절에“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다윗이 위험을 당할 때 마다 하나님이 그의 피난처가 되어주셔서 그를 지키시고 보호해주셨던 일들이 있기 때문에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앞으로도“항상 소망을 품고 살겠다”는 고백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도 아합의 무리들을 피하여 한때 그릿 시냇가로 피신하였던 때도 있었습니다.(왕상17:3).
오바댜는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살육하는 위험의 때에 선지자100명을 동굴속에 나누어 숨긴 후 떡과 물을 먹였던 일이 있습니다(왕상18:13). 롯도 소돔과 고모라 성이 불탈 때 소알로 피난하여 간신히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창19:12).
이곳들은 모두가 좋은 피난처 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위하여 이미 마련해 주신 곳들이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있는 성들은 결코 안전한 피난처가 되지못합니다. 다니엘서5장에 벨사살 왕이 바벨론의 견고함을 믿고 메대파사군이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일천귀인을 모아놓고 큰 잔치를 베풀며 술잔을 나누면서 메대파사군과 하나님을 비웃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날밤에 저들이 그토록 자신하며 견고하리라던 바벨론성을 함락케하시고 그토록 오만방자하던 벨사살 왕의 시체를 토막내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는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성은 없습니다.
우리가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곳도 없습니다.
아무리 높고 견고하게 철벽같이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언젠가는 허물어지기 마련입니다. 지금 38선 비무장지대는 동에서부터 서쪽에 이르기까지 철조망으로 가로막아 놓아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철조망을 뚫고 넘어오는 것입니다.
* 신학교때 음악과 합창지도를 하셨던 조의수 교수 이야기. 대한민국이 위험하다하여 미국 이민을 가셨지만 강도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세계 정보망의 일인자라고 자부하는 미국도 작년 9.11 테러에 의하여 미국의 심장부가 폭파되기도 하였습니다. 미국인들 안전한 곳입니까?.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하다 보면 반드시 가는 곳이 있습니다. ‘마사다’라는 곳입니다. 마사다는 사해 변방에 있는 지역으로 위가 쟁반같이 평평한 돌로된 배모양의 성입니다.
마사다는 주변과 거의 수직으로 성주위는 깍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둘러쌓여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려면 지금은 케이블카가 있어서 금방갈 수 있습니다. 혹시 걸어서 갈수는 있지만 몇시간을 가야하며 매우 힘이듭니다.
성안의 면적은 24.55평이고 성둘레는 1.600미터나 됩니다. 이 마사다 요새는 BC35년경에 헤롯대왕에 의해 튼튼한 요새로 만들어졌습니다.
지금도 헤롯의 성이 그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헤롯대왕이 이 성을 요새화 한 이유는 두가지가 있다고 전해집니다. 하나는 만일 유대인들이 헤롯왕의 통치에 반란을 일으킨다면 피난처로 삼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클레오파트라 여왕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헤롯은 이 마사다를 요새화 하기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그 성 안에 두개의 장엄한 궁전과 창고를 짓고 욕실과 편의시설을 만들었습니다. 또 700만 갤런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급수저장고도 만들었습니다.
성 주위를 둘러쌓은 성벽은 6미터, 폭은 4미터나 되었으며, 그 성벽위에는 높은 37개의 탑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AD.70년9월8일 로마의‘디도’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불탔으며, 이 때에 100만의 유대인들이 칼에 찔리고 불에 타 죽고 십자가의 형틀에서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망하는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불타는 도시 예루살렘을 도망쳐 나와 마사다로 들어가 숨었는데 어린아이까지 포함하여 967명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막대한 식료품과 무기가 있었고 물도 있었습니다.
후에 로마 군인들은 유대인들이 마사다로 도망친 것을 알고 진격하여 갔으나 쉽게 점령할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는 72년 봄에 실바장군으로 하여금 15.000명의 병사로 마사다 요새를 포위하였으나 2년동안을 버텼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바장군은 군인들로 하여금 성벽을 기어오르게 하며 불을 지르게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돌변하는 바람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지도자“엘르아살 벤 야일”은 로마군이 다음날 성벽을 돌파하리라 짐작했습니다, 마사다가 점령 당하면 저들은 어떻게 될것인가를 그는 알았습니다.
아내들은 강간당하고, 아이들은 저들의 노리개가 될 것이며, 자신들은 살해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야일은 최후의 밤에 모두 자살하자고 강요했습니다. 그날 밤 야일의 연설은 너무나 감동적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저들은 눈물어린 작별을 나눈 다음, 모든 남자는 먼저 자기 가족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재산은 모아서 불태웠습니다. 남자들은 그들중 10명을 뽑았습니다. 그들은 남아 있던 210명을 다 죽이고, 그중 한명을 제비뽑아 나머지 9명을 죽인 후 혼자남은 그는 스스로 자살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마사다 요새의 비극은 끝이났습니다.
그렇게도 든든하리라 믿었던 그 마사다도 결국은 저들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스라엘 장교들이 훈련을 받고 장교의 계급장을 받는 날은 반드시 마사다에 가서 의식을 올리고 계급장을 받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그렇게 견고하다던 여리고성도 무너졌습니다. 2년동안 버티였던 마사다도 결국은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그러기에이 세상의 요새나 성은 안전한 피난처가 되지 못합니다. 그 성들은 언젠가는 무너지고 맙니다. 언제가는 파괴되고 맙니다. 언젠가는 비극의 종말을 맞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안전합니다. 그분만이 진정한 우리의 피난처요. 견고한 성입니다. 나의 반석이요, 산성이며, 피할 바위가 되십니다. 다윗은 말합니다“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라. 믿습니까?
2. 주님은 평생동안 다윗의 의지였기 때문입니다.
“나의 어릴때부터 의지시라,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 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다윗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여호와를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를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가 어릴때부터 의지하며 살았던 그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였기에 지금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중의 은혜, 은사중의 은사. 기적중에 기적은, 내가 예수 믿게 된 일이 아닙니까? 그 모든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죽음의 순간 십자가 위에서 구원받은 강도도 참으로 귀한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나이들어 예수 믿고 복되게 사는 것도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한평생을 살아왔다면 그것은 정말 축복이요 은혜중의 은혜일 것입니다.
다윗이 어린 목동으로 지낼때, 위로 일곱형들은 제쳐 놓고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불레셋과 싸웠고, 골리앗을 쳐서 이기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를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지금 다윗은 이런 일들을 회상하면서 주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우리 모두에게 이런 감사의 고백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 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믿는자들을 능력의 팔로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안으셔서 품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맡기며 그의 도움의 손 안에서 무한한 기쁨과 행복을 느끼며,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녀를 안으심과 같이 포근함을 느끼는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맡기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평생동안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남은 자신의 여생도 지난날 같이 주님께 맡기며 의지하면서 살겠다는 것입니다.“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라는 말은 앞으로도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남은 생애를 다윗과 같은 이런 소망을 품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3. 주님은 다윗과 함께 평생동안 동행해 주셨기 때문입니 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오늘의 친구가 내일에는 적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이해타산에 따라 배반하기도 하며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한번도 버린적이 없습니다.
다윗과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도 한번도 그를 버린적이 없었습니다. 한번도 그를 버리고 멀리 떠난일도 없없습니다. 무관심하거나 모른척 하신적도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주님께 소망을 두고 산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까지는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왔는데 앞으로의 삶에는 의문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끝까지 나를 버리시지 않고 도와줄 것인가? 무관심하거나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가면 모른척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지난날은 그가 젊었을 때의 일이고 이제 그는 늙었기 때문입니다.
옛날보다 무척 쇠약해해졌습니다. 지난날에는 혈기왕성했고. 혹 실수하더라도 만회할 기회가 있는 시간적 여유와 젊음이 있었지만, 이제는 기력도 떨어지고 남은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나를 늙을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
“나의 원수들이 내게 대하여 말하며 나의 영혼을 엿보는 자가 서로 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저를 버리셨은 즉 따라잡을 건질 자가 없다하오니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10-12)라고외쳤습니다. 그로서는 당연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와같은 절망의 때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
그렇습니다. 소망은 젊을 때에도 필요하지만 노년의 때에는 더욱 필요합니다.
6. 25전쟁때 34도의 영하의 추운 어느날 밤 18.000명의 미 해병대가 100.000여명의 공산군과 전선에서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언제 다시 전쟁의 소용돌리 속에 들어갈지 알수 없는 그 시간에 미군해병대 병사 한 명이 탱크옆에 서서 통조림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 무서운 혹한 속에서도 식사하고 있는 군인에게 신문기자가 다가가 물었습니다“내가 만일 당신에게 무엇이든지 해드릴 수만 있다면 무얼 원하시겠습니까?.
그는 빨리 이 몹쓸 전쟁이 끝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휴가가서 편히 쉬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내일이 필요하군요”
지금 그의 처지는 참으로 말할 수 없는 암담한 지경이었습니다. 피할수만 있다면 이 위기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숨을 곳만 있다면, 그 시간에, 금방 자신의 신변에 어떤 위협이 닥칠지 모르는 그 시간에 그는 내일이 필요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말하기를“나를 늙을 때 버리지 마시며, 내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 여기‘늙을 때’와‘힘이 쇠약한 때’는 절망의 시간. 위험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이 절망의 위기 앞에선 그에게 필요한 것은 소망뿐입니다. 이 소망은 오늘이 아니라 바로 내일입니다. 사람은 이런 소망이 없이는 결코 오늘을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대개 소망이라는 것은 인생의 생명줄로 생각합니다. 사람은 소망에 따라서 산다고 말할지라도 잘못된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백열전구의 필라멘트가 끊어지면 불이 들어오지 않듯이 성도의 삶 속에 소망이 없으면 암담합니다. 답답합니다. 만사가 괴롭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빈부귀천을 물론하고 소망 중에서 그날 그날 지나가되 소망의 줄이 끊어지면 낙오자가 되고 패배자가 됩니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다보면 좋은 날도 있고 궂은 날도 있습니다. 다만 그에게 소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의 삶의 결과는 엄청나게 다를수 있습니다.
다소 실패한 일이 있습니까?
괴롭고 답답한 일이 있습니까? 무엇인가 될 것 같으면서도 안되는 일이있습니까? 낙망하지 마십시요. 소망을가지고, 몸과 시간과 물질을 드려 희생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여러분의 소망이 헛되지 않을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의 소망은 헛된 것이 많아서 실패하기 쉽지만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참된 소망이므로 그 소망이 언젠가는 큰나큰 보물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소망은?
1). 신앙의 원동력이 됩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 믿었을 때 나름대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슨 소망이든지 소망중에 믿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병을 고치기 위하여. 물질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가정이 행복하며 자녀들이 잘 되기를 소망하며 믿었을 것입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더 간절하게 믿게 되고 점점 진리를 깨닫게게 되는 동시에 소망의 영성의 기쁨을 맛보는 즐거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소망은 신앙의 원동력입니다. 힘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의 줄을 끝까지 놓치지 마시기 랍니다.
2) 성도의 소망은 고난을 이기는 원동력입니다.
세상의 소망도 그 소망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참고 이기게 한다는데, 하물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소망은 더 위대하고 더 큰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로마서5:3-4“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이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앎이로다”고 하여, 고난 중에서도, 환난 중에서도 즐겁게 살 수 있는 비결은 소망 즉, 희망을 가지라고 권고하며 격려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영원한 천국을 건설하실 소망을 가지시고 핍박을 참고 이기셨으며, 인생의 속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견디며 감당하셨습니다.
바울도“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딤후4:8)고 하였으며, 네로 황제 시대에 신도들이 핍박을 당하여 사자굴에 던짐을 받고, 화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고난을 받으면서도 참고 이긴 것은 소망을 가진 까닭이라고 믿습니다.
3) 성도의 소망은 승리하게 원동력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험산준령도 있고 노도와 같은 풍파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시험이 닥쳐올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여러분은 무엇으로 극복하고 이겨갑니까?.
돈으로 근심과 시험이 해결됩니까? 어느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식이나 권력으로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내일 이라는 소망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내일에 대한 소망만 있다면 인내하고 참고 견디어 갈 수 있으며, 언제가는 승리의 월계관을 쓰는 때가 올것입니다.
4) 소망은 영원한 기업입니다.
소망이란 기차가 선로 위를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선로가 있어야 기관차가 달리듯이 소망이 있어야 사업도 잘되고 만사가 형통합니다.
소망이 없는 믿음은 타락하기 쉽고, 불평하기 쉬우며, 원망하기 쉽습니다. 인생의 삶의 모든 일들은 다 소망 중에서 전진해 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의 소망은 썩지도 않고 더럽혀지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는 영원한 하늘에 속한 기업입니다(벧전1:3-4). 믿습니까?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소망이 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이“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라고 말한 것은 그에게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주간도 다윗이 지녔던 소망을 품고 살기를 바랍니다.
다윗의 위대한 신앙을 소유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나는 항상 소망 가운데 살겠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진실된 고백이 되시기를 바라며 이 고백으로 한 평생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